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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권념하심 (창 8: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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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념하심 (창 8:1-22) 
 
 
오늘은 하나님의 권념하심과 관련해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홍수 기사의 6:10-9:19절은 8장 1-2절을 중심으로 거울을 비추듯이 서로 정교하게 대칭되는 구조를 갖추고 있습니다. 7-8장에 언급된 날수만 살펴봐도 7일, 7일, 40일, 150일(7:4, 10, 17, 24) - 150일, 40일, 7일, 7일(8:3, 6, 10, 12)로 정확히 대칭되고 있지요. 수사학에서 ‘교차대구법’(Chiasmus)이라 부르는 문학적 기법인데 강조하고 싶은 부분을 대칭의 중심점에 놓습니다. 홍수 기사에서는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육축을 권념하사 바람으로 땅 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감하였고 깊음의 샘과 하늘의 창이 막히고 하늘에서 비가 그치매”(1-2)가 중심점에 놓여 있는 핵심 내용입니다.

“권념하사”는 ‘기억했다’는 뜻입니다. 온 세상을 쓸어버린 홍수와 세상을 뒤덮은 물결 속에서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고 5개월이 훌쩍 지났습니다. 방주만 덩그러니 물위에 떠 있는 채 시간이 흐르고 또 흘렀습니다. 독자의 입장에서는 방주 안의 상황이 궁금해집니다. 그들이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지, 얼마나 갑갑해 하고 있을지 인터뷰라도 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방주 안의 상황대신 “하나님이 … 권념”하셨다는 사실만을 조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뿐만 아니라 방주 안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육축을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 답답한 날이 연속될 때가 있습니다. 구원받은 삶이라 할지라도 날마다 비 개인 맑은 날은 아니니까요. 왠지 침침하고 눅눅한 것 같은 상황 속에서 시간만 보내고 있으면 기분조차 우울하고 답답해집니다. 속 시원하게 사정을 털어 놓으면 한결 나을 텐데, 들어 줄 사람조차 없다면 참 힘들겠지요. 하지만 각자의 힘겨운 상황을 들어 줄 사람이 없을지라도, 그런 때에 가장 힘이 되는 것은 나를 기억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 49:15). 

하나님의 ‘권념하심’은 잊어버렸다가 다시 기억한다는 뜻이 될 수 없습니다. 계속해서 기억하고 계셨다는 뜻이면서, 드디어 무언가 일하기 시작하신다는 의미가 함의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잘 잊어버렸습니다. 그분의 전능하심과 구원하심을 경험하고서도 잊어버리고 불평하곤 했습니다. 우리 또한 그분께서 베푸신 사랑과 은혜를 쉽게 잊어버립니다. 하나님의 약속이나 경고의 말씀도 잘 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당신님의 언약을 기억하고 계시며, 결코 당신님의 백성을 잊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기억하심은 언제나 가장 적절한 때에 구원하시고 보존하시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바람이 불고 물이 감하여 방주는 7월 17일에 “아라랏” 산에 머물렀고, 10월 1일에는 산봉우리들이 드러났습니다(3-5).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아라랏’(왕하 19:37 ; 사 37:38 ; 렘 51:27)은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 강의 상류지역에 있는데 앗수르 비문에 기록된 명칭으로는 우라르투(Urartu)입니다. 지금은 터키와 아르메니아와 이란의 접경지대인데, 노아의 후손들이 세계 각국으로 퍼져 나가기에 적합한 곳이지요. 망망대해를 정처 없이 막막하게 떠다니는 것 같았지만, 그 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당신님께서 권념하신 자를 가장 적절한 곳으로 인도하고 계셨습니다.

6-14절은 “물이 감한 여부를 알고자”하는 노아의 모습을 기술합니다. 노아는 “사십 일을 지나”(6)도록 기다린 후, “또 칠일을 기다려”(10)야 했고, 다시 “또 칠 일을 기다려”(12)야 했습니다. 육백세 2월 17일에 홍수가 시작되었고 이듬해 2월 27일에 땅이 말랐으므로(7:11, 8:14), 1년 11일 동안 방주 속에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던 셈입니다. 노아는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더 기다렸습니다. 단지 무료한 시간을 때우며 기다린 것 같지는 않습니다. 7일을 주기로 살았음이 암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홍수 전에 7일을 기다리게 하신 때부터 꾸준히 매일을 헤아리며 규모 있게 살아야 가능한 일이었지요.

광케이블이 깔린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에게 ‘기다림’이란 참 답답하게 느껴지는 요소입니다. 신호등의 빨간불이 파란불로 바뀌기까지도 조급한 마음이 되고, 컴퓨터 부팅을 기다리는 몇 초조차 짜증납니다. 원하는 때에 응답이 없으면 하나님이 나를 생각하고나 계신지 의심이 돼서, 기도도 지속하기 힘듭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립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더 이상은 기다릴 수 없으며, 신뢰를 새롭게 하고 더 기다립니다. 노아는 가만히 시간만 보내며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있게 하신 지금 삶의 자리, 곧 방주속의 동물들을 관리하면서, 또 변하는 환경을 체크하며 하나님의 때를 적극적으로 기다렸습니다. 

15-19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에서 나오고 … 다 이끌어내라”고 말씀하셨고, 그제야 노아와 일행들이 방주에서 나왔습니다. 땅이 다 말랐다는 판단을 한 후에도 노아는 섣불리 행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기다렸고 끝까지 말씀을 따라 행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비유로 가르치신 후에,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 18:1, 7-8)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때를 끝까지 기다리는 일은 믿음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임을 생각하게 됩니다.

“생물 곧 새와 육축과 땅에 기는 모든 것”(17a), “생육하고 땅에서 번성하라”(17b), “그 종류대로”(19)라는 표현들은 참 익숙합니다. 8장 1-2절의 “바람” “땅” “깊음” “하늘”이라는 단어들과 더불어 천지 창조 사건에서 사용되었던 단어들이지요. 40일 홍수 때에 궁창 아래와 궁창 위로 나뉘어졌던 물들이 다시 합쳐지면서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시는 태초의 카오스 상태처럼 돌아갔었습니다. 죄로 관영했던 땅은 물로 깨끗이 씻어서 말린 것처럼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새로운 인류의 조상인 노아를 중심으로 새 생명의 역사가 그 종류대로 다시 시작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멸망에서부터 새로운 생명의 시작까지 주체가 오직 하나님이심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셨고, 하나님께서 실행하셨고, 하나님께서 보호하셨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셨고, 하나님께서 다시 시작케 하셨습니다. 가장 적절한 하나님의 때에, 가장 적절한 하나님의 방법으로, 가장 적절한 하나님의 장소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철저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보존하심 또한 철저했습니다. 비록 노아가 수고하여 순종했고 인내로 기다렸을지라도, 홍수 심판 사건 속을 보며 노아의 구원과 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점입니다.

방주에서 나온 노아는 가장 먼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20)습니다. 새 인류의 대표로서 희생 제사를 드렸지요. 죄로 말미암아 심판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을 기억하며 회개하는 마음, 함께 멸망될 자였음에도 구원하신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 이제부터는 그분의 형상답게 살려는 결심의 마음을 담았을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21a) 하셨습니다. ‘진정시키는 향기’ 혹은 ‘기쁘시게 하는 향기’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새 역사는 하나님께서 진노를 푸시고 인간의 예배를 기쁘게 받아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시작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 분의 마음에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21a). ‘다시 땅의 저주를 더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홍수 심판 전에는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6:5)인 인간의 상태가 심판의 이유로 작용했었습니다. 이제는 유사하게 표현된 인간의 상태가 긍휼을 베푸시는 조건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원죄의 영향으로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하므로, 죄가 관영할 때마다 땅을 저주하신다면 남는 사람이 없을 것이고 땅도 견디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21절 하반절 말씀은 ‘표준새번역’ 성경으로 보면 의미가 훨씬 선명한데, “다시는 이번에 한 것같이, 모든 생물을 없애지는 않겠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심판이 전혀 없을 것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홍수로 모든 생물을 없앤 것같이 심판하지는 않겠다는 뜻입니다. 신약 성경에 따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하늘과 땅”도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되어 있으며,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질 것입니다(벧후 3:7, 12). 그리고 그 끝 날에 관해서는 예수님께서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곧 권념하시는 마지막 사람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때까지 땅은 간수될 것입니다. 따라서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22)고 하셨지요. 비록 인간의 죄악이 땅에 관영할지라도 자연의 질서는 중단 없이 패턴대로 순환할 것입니다. 비록 세상이 교회를 비방할지라도, 실상 교회 때문에 세상이 보존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땅이 심각한 죄악들에도 불구하고 아직 멸망하지 않고 있는 이유는 전파되는 복음을 듣고 구원 얻을 하나님의 백성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위해 세상이 긍휼히 여김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하기로 선택한 자를 권념하십니다. 가장 적합한 때에, 가장 적절한 방식으로, 가장 합당한 곳에서 당신님의 뜻을 이룰 수 있도록 보호하시며 신실하게 인도하십니다. 때때로 외롭고, 때로는 힘들고, 때로는 기다리기 지칠지라도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끝까지 견딜 수 있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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