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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를 자녀되게 하시기 위하여 (엡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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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자녀되게 하시기 위하여 (엡 1:7-1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축복합니다.

복 중의 복은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입니다. 지복(至福)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주시는 권세(요 1:12)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하늘에 앉은 자(엡 2:6)들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예배당에 갔습니다. 나란히 앉아서 기도를 시작하였습니다. 먼저, 아버지가 “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 하며 기도하였습니다. 그러자 옆에 않는 아들이 “오! 하늘에 계신 하나님 할아버지!”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버지는 아들에게 “너도 하나님 아버지라고 하는 거야!” 하고 속삭였습니다. 아들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아빠한테도 아버지고 나한테도 아버지야?”하고 아버지께 되물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말을 제대로 알아듣는 것이 대견하여 “그렇지! 우리 아들 똑똑하구나! 이제 알겠지?” 하고 칭찬하였습니다.

이 때, 아들이 마지못해 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래, 알았어! 형!”

촌수 계산 확실하게 하였습니다. 같은 한 분을 아버지라고 부르니 아버지와 아들이 형제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동일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에게도, 아들에게도, 할아버지에게도 아버지이십니다. 각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게 하시는 영혼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몸은 부모님께로부터 받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영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새롭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영적으로 모든 사람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까? 

먼저, 우리가 육신적으로 어떻게 자녀가 되었는지를 생각해보겠습니다. 자녀가 되는 첫 번째 방법은 출생(出生)입니다. 부모가 낳았으면 자녀입니다. 이것이 자녀가 되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으로 혈연에 의한 방법입니다. 

자녀가 되는 두 번째 방법은 입양(入養)입니다. 낳지 않았지만 양자를 들임으로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됩니다. 아들이 없는 집에서 대를 잇기 위하여 조카뻘 되는 남자아이를 데려다 기르는 양자가 옛날에 있었습니다. 요즘은 태어난 가정에서 양육이 곤란한 아동에게 건전하게 양육될 수 있는 다른 가정을 제공하기 위하여 입양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법률에 의한 방법입니다.

자녀가 되는 또 하나의 방법은 회복(回復)에 의한 것입니다. 본래 자녀로 태어났는데 중간에 잘못되어 자녀 관계가 끊어진 것을 되찾는 것입니다. 어떤 이유에서 아이가 뒤바뀌어 되찾는 경우로 드라마의 소재가 됩니다. 이것은 본래 현연에 의한 자녀관계인데 잘못되었기에 회복하기 위하여 법률적 절차를 밟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본래 하나님의 자녀로 창조되었으나 중간에 잘못된 것을 바로 잡는 회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히 남의 자식이 된 것을 되찾아오는 것이기에 법률적으로는 양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약성경 로마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양자라고 합니다(롬 8:15 8:23).

우리가 성경에서 보는 것은 한편의 ‘인간 구원의 드라마’입니다. 본래 하나님의 자녀이었으나 자녀의 자리를 잃은 자들을 되찾아 회복시켜 자녀로 삼는 양자의 과정입니다.


I. 양자

오늘 성경은 우리가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하여 우리가 받은 것이 무엇인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7절 말씀입니다.
: 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사도 바울은 자신을 포함하여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이, 그리고 우리를 포함하여 예수님을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e[cw/에코] 것이 있다고 선언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받은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들에게는 이미 이루어진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베푸신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받았습니까? 우리를 자녀 삼아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베푸신 것은 무엇입니까? 

7절 말씀은 “속량”이라고 표현합니다. 우리가 받은 것은 속량입니다. 속량이라는 말은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말은 아닙니다. 속량을 이전 성경에서는 ‘구속’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구속이라는 말은 자칫 오해가 심합니다. 

신문이나 텔레비전 뉴스에서 구속(拘束)은 ‘행동이나 의사의 자유를 제한하거나 속박함’을 가리킵니다. 교회에서 사용하는 구속과는 정반대의 뜻입니다. 성경에서 구속은 한자로 구할 구(救)자를 사용하는 구속(救贖)입니다. 성경에서 구속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인류의 죄를 대속(代贖)하여 구원함을 가리킵니다. 죄를 지어 가두는 구속과 죄에서 풀어주는 구속은 전혀 다른 말입니다. 

그래서 개역개정판의 신약에서는 구속이라는 말을 속량이라는 말로 바꾸었습니다. 구속이나 속량[ajpoluvtrwsi"/아폴뤼트로시스]은 ‘몸값을 지불하여 자유롭게 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자녀 삼으시기 위하여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우리가 속량 받은 것은 하나님께서 속량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녀 삼으심에는 속량이 있었습니다.

1. 우리를 속량하셨습니다.

속량, 사람을 위하여 몸값을 지불한다는 것은 우리의 주변에서 흔한 일은 아닙니다. 뉴스에서나 들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현재 부산지방법원에는 소말리아 해적들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나라 삼호주얼리호를 납치하여 몸값을 요구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정부에서는 몸값을 지불하는 대신 청해부대를 보내 그들을 진압하고 생포하였습니다.

소말리아 해적들이 또 우리나라 선원들을 납치하여 몸값을 요구하고 있다는 뉴스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선원 4명이 탑승한 싱가포르 선적 ‘제미니’호를 납치하였습니다. 그들은 이번에 납치한 한국인 선원 4명의 몸값과 지난번에 삼호주얼리호를 납치했다가 생포되어 재판을 받고 있는 해적 5명의 석방과 당시 사망한 해적 8명의 몸값을 요구하고 있다고 합니다.

소말리아 해적들은 지나가는 배를 납치하여 선원들의 몸값을 요구하는데 이것이 엄청난 사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해적들은 죄 없는 선원을 인질로 삼고 몸값을 달라고 하는 그야말로 해적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정부의 방침은 원칙적으로 해적과 협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위하여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이것은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자녀 삼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값을 지불하신 속량입니다.

하나님께서 값을 지불하셔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삼기 위하여 해결하여야 할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

다시, 7절 말씀은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속량은 곧 죄 사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값을 지불하신 것은 죄에서 벗어나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속량 받았다는 것은 우리가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에게 해결하여야 할 죄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죄[paravptwma/파랍토마]는 ‘옆으로 미끄러짐’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곁에 있어야 할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진 것입니다.


2. 우리의 죄를 사하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심을 받았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1:27)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닮은 사람,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람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이것이 에덴동산에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어느 날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어버렸습니다. 하나님과 사이에 틈이 생겼습니다. 관계가 깨어졌습니다. 이것을 성경은 죄라고 부릅니다. 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았습니다. 죄가 하나님의 얼굴을 가리어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실 수 없게 하였습니다(사 59:2).

하나님과 사람의 사이에 틈이 생긴 것은 심각한 것입니다.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지으심을 받았는데 그것에 사이가 났다는 것은 본래의 가치를 완전히 잃어버린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죽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죽으리라’(창 2:17)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가 완전히 깨어졌습니다.

하나님과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하여 오히려 하나님이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잘못이 없으신 하나님이 잘못한 자들을 용서하시기 위하여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 속량,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사람을 본래의 자리,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시키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치르신 값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하여 어떤 값을 치르셨습니까?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어떤 값이 필요하였습니까?

다시, 7절 말씀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속량 곧 죄 사람을 받은 것은 그의 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말미암아 값이 치러진 것입니다. 

여기서 ‘말미암아[diav/디아]’는 무엇을 ‘통해서’ 또는 ‘때문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셨기 때문에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신 것을 통해서 값이 지불되었습니다. 사람은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비로소 속량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자녀 삼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게 하셨습니다.


3.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셨습니다.

여기에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그 많은 종교가 지적하고 있는 문제는 거의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본질적이든 실존적이든, 그것을 ‘죄’라고하든 ‘소외’라고하든 아니면 ‘고통’이라고 하든지 인간이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데서 종교는 시작합니다. 그러나 누구를 통하여 어떻게 문제를 해결하고 궁극적인 평화에 이를 것이냐 하는 것에는 종교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신앙은 사람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사람을 대신하여 피를 흘리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막힌 담을 헐고 사이를 다시 이어 주시는 분은 한 분,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딤전 2:5). 

처음 사람인 아담이 죄를 지음으로 그 후손인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리셨습니다(히 9:15). 예수님께서 자신의 피로 값을 지불하였기에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이것을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님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하셨습니다. 

성경은 “그는(=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을 버려 희생의 제물이 되신 예수님을 통하여 사람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자녀 되게 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십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아닌 다른 것을 통하여 인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신앙이 다른 사람, 타종교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이야기하면서도 예수님으로는 부족하여 무엇인가를 더해야 할 것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은 기독교처럼 보이는데 기독교가 아닌 이단들입니다. 

요즘 우리의 주변에서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하려는 신천지는 예수님을 이야기하면서도 ‘이만희’라는 인간을 덧붙이는 이단입니다. 이러한 이단은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벧후 2:1)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여야 할 사람들입니다(딛 3:10).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이 자녀가 되는 이 믿음에서 흔들리지 않으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죄 때문에 왜 예수님의 피를 값으로 지불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다시, 7절 말씀은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가 풍성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랑 안에서’(:5) 이루진 것입니다. 이것은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 6)로 된 것입니다. 자신들의 죄에 대한 값을 지불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사랑 때문에 거저 은혜로 대신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값을 지불하지 않고 죄 없다고 하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값을 지불할 수 없는 사람을 위하여 대신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너무나도 심각하고 엄청난 죄이기에 예수님이 친히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값을 치를 수 없는 사람을 위하여 거저 값을 지불하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서 된 것입니다. 


4.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기에 다른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어떤 왕자가 시골로 사냥을 갔습니다. 왕자는 그곳에서 아름다운 소녀를 만났습니다. 왕궁에 돌아와서도 왕자는 그 소녀를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 소녀를 자신의 신부로 맞아들일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하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자신의 사랑이 진실이라는 것을 믿게 하고, 엄청난 신분의 격차를 극복하고, 모든 문제를 자신이 책임지고, 자신이 그녀를 사랑하는 만큼 그녀도 자신을 사랑하게 할 수 있을까 하고 고민했습니다.

드디어 왕자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왕궁에서 입던 화려한 옷을 벗어버리고 소녀가 사는 시골 마을로 가서 조그마한 방을 얻고 목수가 됩니다. 왕자는 시골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가난한 사람들과 깊이 사귀었습니다. 마침내 그 소녀와도 만났습니다. 사랑이 익어갔습니다. 이윽고 왕자는 “내가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렇게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찾아왔다.”고 고백합니다. 비로소 그 소녀는 왕자의 엄청난 사랑을 알고, 믿고, 깨닫고 받아들여 왕궁으로 들어가 왕비가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덴마크의 신학자 키에르케고르의 저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에서 왕자는 다름 아닌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인간을 사랑하셔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고통을 당하신 이유는 오직 사랑 때문입니다.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오직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사랑하셔서 풍성한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값을 치르시고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이렇게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인간 구원의 드라마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예수님 한 분만으로 충분합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 되는 신앙에서 흔들리지 않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인간 구원의 드라마를 계획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기획, 감독, 주연 모두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II. 주권

인간 구원의 드라마를 우리들이 어떻게 알 수 있게 되었습니까? 

8절과 9절 전반절 말씀은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온갖 지혜와 총명을 넘치도록 주셔서 당신의 심오한 뜻을 알게 해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비밀이었습니다. 

1. 이것은 비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그것도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인간을 구원하시는 것은 하늘의 천사도 몰랐을 것입니다. 더욱이 인간을 사로잡고 있던 사탄은 이런 방법이 있다는 것을 몰랐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인간의 지혜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알게 하셨습니다. 이것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이 또한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런 계획을 세우셨습니까?

9절 후반절 말씀은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인간 구원의 드라마는 그리스도를 시켜 이루시려고 하나님께서 미리 세워놓으셨던 계획대로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2. 이것을 기뻐하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인간을 이렇게 구원하셨느냐는 질문에 가장 정확한 답은 이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셨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니 다른 방법을 찾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기쁨을 기뻐하십시오.

사람을 구원하시는 것은 누구의 계획이었습니까?

11절 말씀은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원하시는 뜻대로 결정하시고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때때로 세상은 혼돈스럽게 보이고 무질서하게 보입니다. 하지만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대로 됩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계획하셨습니다.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3. 이것을 계획하셨습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의 생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계획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미쳐 깨닫지 못하는 것에도 하나님의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역사는 아름답습니다. 십자가를 통한 인간 구원의 드라마는 하나님이 계획하셨기에 가장 완벽하고, 가장 놀라운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계획과 기뻐하심을 따라 구원의 비밀을 깨닫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받은 가장 놀라운 복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값없이 거저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 삼아 주시기 위하여 엄청난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습니다. 우리는 값을 주고 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피를 값 주고 우리를 사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참으로 형편없는 자이나 또한 얼마나 존귀한 존재한 자인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자랑할 것이 없으나 그러나 아무렇게나 살아서는 안 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들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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