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우리가 가질 힘은 어떤 것인가? (삼상 17:41-49)

첨부 1


우리가 가질 힘은 어떤 것인가? (삼상 17:41-49)


지난번에 아이티를 갈 때 뉴욕에 들려 하룻밤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저를 안내해준 목사님과 같이 부르클린 다리를 건너게 되었습니다. 이 다리는 교각이 없는 다리로도 유명한 다리입니다. 이 다리가 세워지게 된 동기가 감동적입니다. 뉴욕이 번창하자 맨하튼 섬과 부르클린을 왕래하는 사람이 늘어만 갔습니다. 다리가 없던 때라 사람들은 배를 이용할 수 밖에 없었고, 워낙 물살이 세서 다리를 세울 것은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존 뢰블링이라는 기술자가 교각 없는 다리를 설계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전문가들이 존을 보고 공상가라고 놀리고 비웃습니다. 이에 굴하지 않고 존 뢰블링은 아들 워싱턴 뢰블링과 함께 교각 없는 다리를 건축하기 시작했습니다.처음부터 난공사였습니다. 불과 몇 달 되지 않아 뜻하지 않은 사고로 존 뢰블링은 공사장에서 숨을 거두었고, 아들 워싱턴 뢰블링은 뇌를 다쳐 걷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면서 중환자실에 누워있게 되었습니다. 뢰블링 부자의 꿈뿐만 아니라, 교각 없는 다리도 좌절되는 듯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겨우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있었던 워싱턴 뢰블링은 침대에 누워서 자기 아내의 팔을 두드리며 대화를 시도했고 침상에서 다리 공사를 진행시키기에 이르렀습니다. 워싱턴 뢰블링의 열심에 감동 받은 공사장의 사람들도 침식을 잊어가며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러기를 13년, 마침내 브루클린 다리는 세워졌습니다. 이것은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인 1883년의 일입니다.교각 없는 다리를 한번도 본적 없는 사람들의 조롱도 거센 물살도 예기치 않은 사고로 인한 죽음과 장애도 맨하튼 섬과 브루클린 사이에 교각 없는 다리를 세우겠다던 뢰블링 부자의 꿈을 꺾지는 못했습니다. 

이 다리는 교각 없는 최초의 다리라는 것 보다 수많은 좌절에 굴하지 않고 세워진 다리로 더욱 유명합니다. 인생의 거친 돌 앞에 무릎 꿇지 않고 운명에 맞서 극복하며 삶을 아름답게 마무리 했던 사람들이 오늘 우리 주위에도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습니다.오늘 우리가 걸어가는 인생길에는 장애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장애물은 지치게 만들고 때로는 그 앞에 주저앉게 합니다. 우리 중에도 지금 삶의 어떤 희망을 가지고 가다가 장애물 앞에 주저앉아서 가만히 계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행복하게 살고자 했는데 건강에 이상이 옵니다. ‘이번 일만 잘 되면 새로운 인생을 출발할 거야.’ 하는 마음으로 어떤 일을 진행하다가 상황이 더 악화되기도 합니다. 이제는 방황하지 않고 잘 살아야 되겠다고 결심하는 순간 더 큰 방황의 여건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이럴 때 여러분들은 어떻게 합니까? 인생의 거침돌 앞에 중단하고 멈추어 설 수는 없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사울과 이스라엘 백성이 불레셋과 싸움을 하기 위해서 엘라 골짜기라는 곳에서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이 '엘라 골짜기'라는 말의 뜻은 '상수리나무의 골짜기'란 의미로 당시 그 지역 내에는 나무가 무성한 곳이지만, 그것은 어쩌면 겉모습뿐이지, 그 속에는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죽음의 냄새가 짙게 깔린 곳입니다. 이 골짜기에는 팽팽한 힘의 대결이 있었고, 40여 일간 공포와 두려움이 가득했었습니다. 거기에는 증오의 힘이 있었습니다. 두려움의 힘이 있었습니다. 불안과 죽음의 힘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블레셋과의 전쟁이 치열했던지 이스라엘 왕인 사울 왕이 직접 나서서 진두지휘 할 정도였지만, 이스라엘은 블레셋을 이기지 못하고 도리어 계속 밀리기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블레셋 군대에 전쟁에 능한 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골리앗입니다. 

그는 신장은 283cm입니다. 머리에는 놋투구, 가슴에는 작은 철편들을 물고기 비늘모양으로 붙여 만든 갑옷이 있었습니다. 다리와 종아리는 놋쇠로 만들어진 갑옷이 싸고 있었고, 어깨에는 언제고 던져 찍을 수 있는 단창 통이 얹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입고 있는 갑옷 무게만 57Kg이었고, 창 무게가 7Kg에 달했습니다. 골리앗은 상대방을 죽이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춘 모습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러한 모습의 골리앗을 만나면 어떤 태도를 취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세 종류의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자신에게 있는 힘을 주어진 기회에 사용하지 못한 자들입니다. 

사실 우리 인생을 보면 모든 사람에게 기회는 찾아옵니다. 주어진 기회를 잡지 못하는 사람은 있어도,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블레셋의 골리앗을 앞에 두고 사울 왕은 백성들에게 제안을 했습니다. 25절을 보겠습니다. “더러는 가로되 너희가 이 올라온 사람을 보았느냐 참으로 이스라엘을 모욕하러 왔도다. 그를 죽이는 사람은 왕이 많은 재물로 부하게 하고 그 딸을 그에게 주고 그 아비의 집은 이스라엘 중에서 자유하게 하시리라..” 이제 이스라엘에 사는 그 누구라도 골리앗만 꺾을 수 있다면 많은 재물을 얻을 수 있고, 왕의 사위가 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이것은 인생이 새롭게 될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지금까지 그 사람이 귀족으로 살았든지, 아니면 평민으로 살았든지 관계없습니다. 설혹 그 사람이 종이나 노예로 살았다 할지라도 상관없이 자유로운 신분으로 바뀔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24절을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그 앞에서 도망하며” 그들이 골리앗 앞에서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이 골리앗과 싸워보기나 했습니까? 아니면 골리앗을 향해 고함이나 한번 질러 보았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단 한번도 골리앗과 싸워보려고 하지도 않은 채, 단지 거인 골리앗을 보고 심히 두려워했다고 했습니다. 거인을 보고 자기 자신들을 보니까 그들은 기가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두려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골리앗 앞에게 감히 도전하지 못하고 누군가가 해결해 주기만을 기다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무도 도전할 용기를 내지 않았습니다. 결국 주어진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기회는 도전하는 사람에게 찾아온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도전하는 사람만이 승리의 기쁨을 맛볼 수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우리 주위에 보면 안 되는 이유만을 주야로 묵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언뜻 보면 매우 신중한 사람처럼 보입니다만, 사실 그러한 사람은 비관주의자에 가깝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평생 동안 ‘안 되는 이유’만을 반복해서 말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실패를 두려워하는 자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는 줄로 믿습니다. 도전해서 실패 볼 수 있지만, 그 실패를 통해서 얻게 되는 배움이 성공의 디딤돌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2) 주어진 힘을 비판하며 용기를 꺾는 사람들입니다.블레셋의 거인 골리앗 앞에는 또 다른 부류가 있었습니다. 비판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람의 용기를 팍팍 꺾어 놓는 사람들입니다. 28절을 보겠습니다. “장형 엘리압이 다윗의 사람들에게 하는 말을 들은지라 그가 다윗에게 노를 발하여 가로되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들에 있는 몇 양을 뉘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 큰 형 엘리압은 다윗을 가리켜 교만하고 마음이 완악하다고 심하게 비판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다윗이 자신의 주제를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주위에 보면 자기는 아예 도전조차 하지 않으면서 큰 맘 먹고 도전하려고 하는 사람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는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으면서 시도하는 사람의 기를 여지없이 꺾어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특히 엘리압처럼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욱 그런 경향이 있습니다. 아예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은 비판도 하지 않습니다. 아예 서로 교류가 없는 사람은 브레이크를 걸지 않습니다. 그런데 조금 그 사람에 대해서 안다든지, 약간 교류가 있는 사람이 오히려 낙심케 합니다. 

특히 엘리압처럼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욱 그런 경향이 있습니다. 아예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은 비판도 하지 않습니다. 아예 서로 교류가 없는 사람은 브레이크를 걸지 않습니다. 그런데 조금 그 사람에 대해서 안다든지, 약간 교류가 있는 사람이 오히려 낙심케 합니다. 그러나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대적은 골리앗이지 엘리압이 아닙니다. 엘리압의 공격이 있을 때, 이기는 유일한 길은 참는 것입니다. 마귀는 할 수만 있으면 엘리압하고 싸우기를 원합니다. 엘리압하고 싸웠다면 이겨도 문제요, 저도 문제입니다. 

만약 다윗이 엘리압을 이겼다면 도덕적인 비난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아무리 형이 잘못했어도 형 때린 동생을 칭찬하는 문화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혹시라도 졌다면 골리앗과의 싸움에는 나가보지도 못하고 온 힘을 다 쏟아 부어 탈진 상태가 되었을 것이고 그 게임은 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현실을 살펴보면 많은 교회가 골리앗과는 싸움도 해 보지 못하고 밤낯으로 교회 안에 있는 엘리압과 싸움을 벌이느라고 탈진을 해 버립니다. 우리의 대적은 골리앗이지 엘리압이 아닙니다. 잘 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누구와 싸우는 가가 더 중요합니다. 

3) 주어진 힘을 남을 살리는 일에 당당하게 도전하는 사람입니다.본문을 보면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으로 인하여 도전할 마음조차 먹지도 못하고 있는 가운데 어린 소년 하나가 도전자로 나섰습니다. 바로 양치기 소년 다윗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주저하고 있는데, 그가 32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고하되 그를 인하여 사람이 낙담하지 말 것이라. 주의 종이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리이다.” 지금 누가 누구에게 말하고 있습니까? 어린 소년 다윗이 이스라엘 왕인 사울에게 말하는데, 그 내용이 정말 기가 막힌 내용입니다. “저 골리앗 때문에 낙담하지 마십시오. 내가 나가서 싸우겠습니다." 사울왕은 두려워서 떨고 잇는데 반해, 어린 소년 다윗은 당당했습니다.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는데, 다윗은 골리앗과 맞짱 뜨겠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사울왕은 3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기에 능치 못하리니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니라.” 사울 왕이 보기에 다윗은 아무래도 챔피언 감이 아니었습니다. 저 무시무시한 챔피온에게 도전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왕은 다윗에게 골리앗과의 대결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입고 있던 군복을 입히고 투구를 다윗의 머리에 씌워주고 갑옷을 입히고 자신의 칼을 주었지만, 다윗에게 전혀 맞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움직이는데 심한 어려움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결국 들판에서 양을 칠 때 사용하던 막대기 하나 들고 시내에서 주운 다섯 개의 돌맹이를 가지고 골리앗에게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골리앗에게 도전한 이유가 있습니다. 무슨 이유인지 아십니까? 어린 소년 다윗이 거인 골리앗에게 도전한 이유를 아십니까? 46절과 47절을 보겠습니다.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이 아침, 묻습니다. 

신앙이 무엇입니까? 신앙은 오늘의 현실을 넘어 역사 하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는 눈을 갖고 사는 것이 믿음이요, 신앙입니다. 성경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고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진정한 신앙인이라면 저 골리앗 너머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너머를 보지 못하면 일반인들과 똑 같은 모습을 보고 살아가게 됩니다. 일반인들이 보는 것은 현실뿐입니다. 현실만 보게 되면 그때 신앙은 아주 사치스러운 것이 되고 맙니다. 그리고 현실은 언제나 사람으로 하여금 낙심하게 하고 두렵게 하고 용기를 잃게 합니다. 모세가 눈앞에서 넘실거리는 홍해의 물결만 바라보았더라면 모세는 홍해를 건너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그냥 주저앉고 말았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가도, 가도 끝이 없는 황무지 땅만 바라보았더라면 그도 실패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다윗도 두렵고 떨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습니다. 떨리는 순간 다윗 마음에 떠오른 기억은 아버지 양을 칠 때 공격해 왔던 사자로부터 어린양과 자신을 구원해주신 하나님이었습니다. 여호와 이름을 대적하고 그 백성을 멸시하는 블레셋 군대를 하나님께서 꼭 심판하실 것이라 믿고 싸움에 나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과 동행해 주실 것이라 믿었습니다. 다윗은 무기를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물맷돌 몇 개가 다였습니다. 곰이나 사자를 잡을 때 썼던 그런 물맷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승리하였습니다. 믿음의 눈은 승리합니다. 믿음의 눈은 어둠을 꿰뚫고 어둠 너머에 있는 희망을 노래하게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육신의 눈으로 보면 두렵고, 무섭지만 믿음의 눈으로 보면 다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열명의 정탐꾼이 가데스바네아에서 가나안을 보았던 눈은 이성적인 눈이었습니다. 경험의 눈이었고, 지식의 눈이었습니다. 합리적인데 결정적으로 실수했습니다. 약속하신대로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에 기초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눈으로 보았다면, 능히 정복할 땅으로 보았을 것입니다. 역사는 비전과 꿈을 가지고 도전했던 사람들이 정복했습니다. 두렵고 무서워하는 사람에게 역사를 주도할 기회는 결단코 오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것은 우리들이 너무 현실을 보고 계산하기에 바쁘다는 것입니다. 나타난 현실을 보고 계산을 해 보니까 골리앗의 키가 286㎝이고 갑옷 무게만도 58k이고 창날의 무게만도 7kg이라는 것만 보고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그것을 보고 누가 그 앞으로 나가겠습니까? 

그러니까 싸워 보지도 않고 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미래의 주신이십니다. 동시에 나의 인생의 생사화복의 주인이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나의 암담한 현실 속에서도 함께 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을 절대로 과소평가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적을 과대평가 하지도 마십시오. 하나님을 믿고 다윗처럼 나아가면 골리앗은 작게 보일 것이고 사울처럼 현실만 보고 계산만 하다 보면 골리앗은 더욱 크게 보일 것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 엘라 골짜기에서 일어나십시다. 지금까지 잘못된 영에 사로 잡혀있었다면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하고 눈물로 회개하며 그 자리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또한 꿈이 없는 성도들은 이제 생각을 주님께 드리십시오. 내 인생의 선장이 예수님이심을 고백합니다. 나를 써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 아름다운 삼손의 머리를 자른 것은 사탄입니다. 그러나 그의 머리를 사탄은 잘라 놓을 수는 있었지만, 다시 자라게 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이제 일어나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에 자신을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이유는 세상과 충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서 있는 그 자리에서 세상의 빛으로 세상과 충돌해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령의 능력의 옷을 입어야합니다. 슥4:6절의 말씀처럼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큰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 믿음의 자녀들이 가질 힘은 성령의 능력의 옷을 입어야합니다. 그 능력을 힘입고 성결과 아름다움으로 자신을 믿음으로 가꾸어야합니다. 시대를 변화시킬 능력을 길러야합니다. 

오늘 여러분 손에 들려진 물맷돌은 세상의 모든 타락된 것을 무너뜨리며,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들을 쓰러뜨리며 세상의 변화를 복음의 물줄기로 바꾸어 놓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사는 자에게 승리케 해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도전하는 자와 함께 해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현실에 안주해서 안 되는 것만을 앞세우지 말고 믿음으로 담대하게 골리앗에게 도전하십시오. 골리앗은 무너질 것입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