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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천국에서 큰 자 (마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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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에서 큰 자 (마 18:1-4) 
 
  
1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2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3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흔히들 말하기를 인간의 삼대 욕망을 가리켜 식욕과 성욕과 명예욕이라고 합니다. 식욕과 성욕이 강한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이듯이, 명예욕 또한 인간의 본능적인 커다란 욕망가운데 하나임이 틀림없습니다. 여러 해 전에 이런 인간의 명예욕을 충동하는 전형적인 광고문이 있었습니다. “에드윈 유진 올드린 2세. 암스트롱에 이어 두 번째 달에 발을 디딘 사람. 하지만 아무도 그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엘리샤 그레이. 그레이엄 벨보다 조금 늦게 전화발명 특허신청을 한 발명가. 

아무도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세상은 2등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오직 1등만을 기억합니다.”라는 모 기업의 광고문입니다. 지난 번 세계수영 선수권대회 400m 자유형에서 1등을 한 박태환 선수는 3분 42초 04를 기록하여, 2등을 한 중국의 쑨양 선수의 3분 42초 24보다 1/3초가 더 빨라 우승을 할 수 있었습니다. 모든 올림픽 기록이 다 이런 식입니다. 어떻게 보면 2등을 한 선수나 3등을 한 선수도 대단한 선수들이고, 그날의 컨디션에 따라서 얼마든지 뒤집힐 수 있는 기록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금메달을 딴 선수들에게만 환호와 박수갈채를 보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누구나 으뜸이 되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고, 성공과 출세를 위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습니다. 이에는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본문 1절에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라고 질문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주요 관심사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아로 오해한 제자들은, 벌써부터 주님께서 대권을 잡는 날 누가 높은 자리에 앉게 될 것인지에 관심이 쏠려 있었고, 그들 사이에서는 이미 서열과 관련된 알력이 자리하고 있던 터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두 번이나 자신이 당하실 수난을 예고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이렇게 땅위에서나 천국에서 누가 더 큰 자가 될 것인가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천국에서는 누가 크냐는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제자들 가운데 세우시고, 이르시되 누구든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이전의 가치관으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의 자격 조건을 말씀하셨습니다. 곧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돌이킨다’는 말은 완전한 방향 전환을 가리킵니다. 방향을 잘못 잡은 사람이 이를 깨닫는 순간에, 즉시 방향을 바꾸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돌이키도록 촉구하셨다는 사실은, 결국 그들이 지금 추구하는 것이 옳지 못함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즉 천국에서의 서열에나 관심을 치중하는 그들의 태도가 잘못되었음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특별히 그들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은, 그들이 장성한 어른으로서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가치관을 철저히 버려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과 함께 하면서도 가치관이나 생각에 거의 변화가 없이, 이전과 같은 상태였던 것입니다. 성경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새롭다’는 말은 시간적인 새로움이 아니라, 본질적인 새로움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인 것이 확실하다면, 먼저 가치관이라든지 생각부터 바꾸어져야 합니다. 만일 어떤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이후에도 여전히 세속적인 가치관과 사고방식에 지배되고 있다면, 그의 신앙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기 이전에 어떤 가치관, 어떤 사고방식을 갖고 살았는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지금도, 이런 것들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 심각한 문제입니다.

우리의 이전 것들이란 ‘허물과 죄’로 특징지을 수 있습니다. 그 때에 우리에게는 아무런 소망도 없었습니다. 죄에는 사망이 따를 뿐이기 때문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성경의 경고는 언제나 누구에게나 유효합니다. 이전에 우리는 모두가 이처럼 무시무시한 죄에게 종노릇하고 있었으므로, 그 때의 가치관이라든지 사고방식 등은 선하지 못한 게 당연합니다. ‘돌이키라’는 주님의 말씀이 지시하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세속적인 가치관과 사고, 생활방식 등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삶을 본받아 사는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각과 가치관을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새롭게 함으로 모두 다 천국의 주인공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에서는 누가 크냐는 제자들의 질문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신 후, 천국에서 진정 큰 자가 어떤 자인가를 말씀해주셨습니다. 본문 4절에서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천국에서 큰 자를 가리켜 어린아이에 비교하셨을까요?

1. 어린아이는 솔직하고 진실하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는 마음에 무엇을 숨겨 두거나 감추지 않고 솔직하고 진실합니다. 어린아이는 마음이 오염되지 않았기 때문에, 어른보다는 단순하고 솔직합니다. 언제나 꾸밈이 없고 외식이나 형식이 없습니다. 거짓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어린아이를 통하여 단순함과 솔직함을 배워야 합니다. 아일랜드 격언 중에 “아이들은 거짓에나 비밀에는 쓸데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주님 앞에 참으로 거짓이 없고 진실한 성도가 될 때, 그 마음속에 천국이 깃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인강도도 구원하셨고, 창녀도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셔서 용서해 주셨지만, 그러나 한 가지 미워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외식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위선자들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주님은 미워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린아이처럼 솔직하고 단순한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에는 너무 어리석게 보일정도로 솔직하고 진실하면 바보 같은 사람이라 하고, 그래서 그러한 사람이 손해를 많이 볼 것 같지만,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총으로 더욱더 번성해지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순진하고 진실한 사람이라야 신령한 진리의 빛이 비추어지게 됩니다. 우리가 위선의 껍질을 많이 쓰고 있으면,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가 그 사람 속에 들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돌이켜 어린아이가 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2. 어린아이는 겸손하기 때문이다.

바클레이는 어린아이와 관련하여 “그는 자기를 내세우는 대신 도리어 뒤로 자취를 감추려고 하며, 자기를 나타내기를 원치 않고 알려지지 않는 자리에 머물러 있으려 한다.”고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요구하신 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들이 어떤 위치에 있든지 자기를 내세우거나 나타내고자 애쓰지 말고, 알려지지 않는 자리에 머물도록 힘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크고 위대한 사람은, 겸손하여 자기를 낮추는 사람입니다. 겸손한 사람이 가장 훌륭한 사람이고, 하나님 편에서 가장 큰 사람이며, 하나님 섬기기에 가장 적합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하나님의 쓰임을 받고, 축복을 받는 비결은 자기를 낮추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의 한 가지 특징은 겸손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와서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예수님의 마음은 겸손한 마음이요, 어린이는 마음도 겸손한 마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의 겸손을 배워야 하고, 돌이켜 어린아이에게서 겸손을 배워하는 것입니다.

3. 어린아이는 신뢰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는 언제나 자기 혼자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부모가 함께 있다고 생각할 때, 안심하고 잘 놀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늘 충만할 때, 매사가 형통하고 평안하게 됩니다. 사 26:13절에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여 주 외에 다른 주들이 우리를 관할하였사오나, 우리는 주만 의지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어린아이를 통하여 신뢰와 의지하는 마음을 배워야 합니다. 자기의 경험과 지혜와 실력만을 믿고, 무엇을 하려고 하면 실패를 합니다. 어린아이는 부모 없이 살지 못하기 때문에, 부모를 따르게 되고 의지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도 그와 같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약하고 힘이 없듯이, 우리 스스로 자신의 약함과 무력함을 깨닫고, 하나님만을 의뢰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만을 의뢰하는 사람에게 성경은 놀라운 축복을 약속합니다. 렘 17:7-8절에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다’란 말의 원어적 의미는 단순한 의미의 겸손이 아닌 멸시, 천대, 굴욕 등을 당하면서까지 겸손한 것을 의미합니다. 천국 시민의 자격으로서의 자기를 낮춤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실천함으로 진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부터, 수모와 멸시를 당하는 것을 기뻐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것이야말로 모욕과 조롱을 받고 저주의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길을 그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복음을 위해 고난과 형극의 길을 걷는 예수님의 삶을 닮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도 왕, 귀족, 고관, 일반 백성들의 구분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자신들이 천국에서 큰 자가 될 것인가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과연 어떤 자가 큰 자 일까요? 그 모범을 우리는 주님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빌 2:6-8절에 보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그토록 자신을 낮추신 결과가 어찌되었습니까? 

빌 2:9-11절에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이렇듯 자신을 완전히 낮추신 예수님을 따라, 주님을 위하여 고난과 모욕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충성한 성도들이야말로, 반드시 천국에서 큰 자들이 될 줄로 믿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부족하고 약합니다. 모든 것이 안전하거나 보장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도 내일을 모릅니다. 그래서 교만해도 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만 높여야 합니다. 사람이 자기를 낮추기란 쉽지 않습니다. 남을 공격하고 깎아 내리고 낮추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남을 높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높아집니다. 우리 스스로 더 낮아지면 하나님이 높이시고 축복하십니다. 우리 자신을 낮추면 천국에서는 점점 더 높아지고 커지게 되는 것입니다. 

‘뿌리’(Roots)는 ‘알렉스 헤일리’(Alex Haley)가 흑인들의 애환을 그린 소설입니다. 헤일리는 어려서 할머니에게서 전해들은 가족사를 책으로 엮는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전국의 도서관과 문서보관소를 샅샅이 뒤졌고, 결국에는 노예로 끌려온 7대조 할아버지 쿤타 킨테의 심리상태를 파악하려고, 남아프리카에서 미국까지 가는 화물선을 타고 10일 동안 속옷만 입은 채 밤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드디어 소설 ‘뿌리’가 발표되었습니다. 1977년에 퓰리처상과 미국도서특별상을 받았으며, 미니시리즈로 TV에 방영되면서, 전 세계에 폭발적 인기를 모았습니다. 소설은 31개 국어로 번역되었고, 8백만 부 이상이 팔려나갔습니다. 덕분에 그는 당대의 최고 작가가 되었으며, 명예학위만 3백 개를 받았습니다. 그는 7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의 사무실에는 거북이 한 마리가 높은 담장 꼭대기에 올라가 있는 그림이 걸려있었습니다. 궁금히 여긴 사람들이 곧잘 그에게 물었습니다. “저 이상한 그림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가 대답했습니다. “나는 내가 쓴 작품에 대해 스스로 자화자찬하며, 교만한 마음이 생길 때가 간혹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담장 꼭대기에 올라간 거북이 그림을 쳐다보곤 합니다. 저 거북이가 담장 꼭대기에 올라간 것은 누군가의 도움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제가 이렇게 유명한 작가가 된 것도, 하나님의 도우심이었다는 것을 기억하기 위해 이 그림을 걸어놓았지요.” 여기에서 우리는 그의 겸손한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놀라게 한 믿음은 자신의 연약함을 알고, 자신의 능력으로 감당치 못하는 것을 아는 겸손의 믿음이었습니다. 

윌리암 캐리는 위대한 선교사이며 우수한 언어학자였습니다. 그는 성경을 인도의 34가지 방언으로 번역하였습니다. 그가 선교사로 인도에 왔을 때, 어떤 이들은 멸시와 경멸의 눈으로 그를 보았습니다. 어느 만찬회 석상에서 거드름을 피우는 한 사람이, 캐리를 망신시키려고 여러 사람이 듣도록 큰 소리로 “캐리 씨, 당신은 옛날에 구두 짓는 사람이었다면서요?” 하고 비웃으며 말했습니다. 그러자 캐리는 오히려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닙니다. 선생님, 저는 구두 짓는 사람이 아니라 구두 수선공이었습니다.” 자신은 구두를 만들 줄도 모르는 수선공에 불과했다고 겸손히 대답한 것입니다. 캐리가 평생 선교하다가 임종을 맞이하게 되었을 때, 곁에 있는 사람이 물었습니다. 

“당신의 장례식 설교에 성경 어느 본문을 택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그러자 윌리암 캐리는 “나같이 죄 많은 인간에게 무어라 말해 준다는 것부터 과분하게 생각되지만, 꼭 말해준다고 하면 ‘오! 하나님, 주의 인자하심을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주의 많으신 자비를 쫓아 내 죄를 도말하소서.’라는 구절을 읽어 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윌리암 캐리는 마지막까지 예수님의 겸손을 잃지 않고, 훌륭히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유언에 따라 쓴 비문에는 이렇게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윌리엄 캐리 1761년생, 죄 많고 약하고 능력 없는 벌레인 나는, 당신의 긍휼하신 거룩한 손에 기대어 잠드나이다.” 그는 평생 동안 ‘나는 벌레다.’라는 겸손한 생각을 품고 살았던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천국에서는 누가 큰 자니이까?”라는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종종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자가 큰 자라는 이전의 가치관에 지배되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의 법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고 겸손한 자를 높입니다. 주님께서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자신을 가리켜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천국에서 큰 자가 되려고 하면 반드시 주님께서 보여 주신 모범을 좇아 자기를 낮추는 자가 되어야만 합니다. 자기를 낮추지 않고서는 천국에서 큰 자가 될 수 없습니다. 사회적인 신분이나 지위가 어떠하든지 개의치 않고,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녕 천국에서 큰 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어떠한 경우에도 교만해서는 안 됩니다. 주 앞에서 모든 사람은 죄인일 뿐이며,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이 점을 우리는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되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지난 세기 최고의 크리스천 지성인 C. S 루이스 교수가 옥스퍼드 대학에서 강의하고 있을 때, 한 학생이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 이 세상에는 왜 그렇게 고통과 재난이 많습니까?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사랑의 하나님이라면, 왜 인간에게 고통을 많이 준단 말입니까?” 그러자 루이스 교수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형제여, 그러잖아도 교만한 세상과 인간들에게, 고통과 재난마저 없다면 얼마나 더 교만하겠는가?” 중부지방에 쏟아진 물 폭탄은 우리에게 큰 상처를 안겨주었습니다. 우리 민족도 금번의 재난 앞에 더욱 겸손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겸손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가장 큰 미덕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는 자들이 되어서, 장차 천국에서 모두 큰 자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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