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빈 배 같은 인생, 넘치는 인생 (눅 5:1-11)

첨부 1


빈 배 같은 인생, 넘치는 인생 (눅 5:1-11)
 
 
1. 빈 배

중국 철학자로 인류의 스승 가운데 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莊子(본명은 莊周, BC 4세기)의 “빈 배(虛舟)”라는 시 중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方舟而濟於河 한 사람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다
有虛舟來觸舟 빈 배가 와서 그의 배에 부딪치면
雖有惼心之人不怒 그가 아무리 성격이 나쁜 자일지라도 그는 화를 내지 않을 것이다.
有一人在其上 그러나 그 배 안에 사람이 있으면
則呼張歙之 그는 그 사람에게 피하라고 소리칠 것이다.
一呼而不聞 그래도 듣지 못하면
再呼而不聞 그는 다시 소리칠 것이고
於是三呼邪 더욱 더 큰 소리를 지르면서
則必以惡聲隨之 저주를 퍼붓기 시작할 것이다.

向也不怒而今也怒 이 모든 일은 그 배 안에 누군가 있기 때문에 일어난다.
向也虛而今也實 만일 그 배가 빈 배라면 그는 소리치지 않을 것이고 화내지 않을 것이다.
人能虛己以遊世 세상의 강을 건너가는 그대 자신의 배를 그대가 비울 수 있다면
其孰能害之 아무도 그대와 맞서지 않을 것이다.
이 ‘빈 배(虛舟) 이야기’는 시남자(市南子)라는 사람이 노나라 임금에게 한 충고로서 ‘자신을 비우고, 자신을 낮추고, 욕심을 버리면, 그리고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하면, 그 만큼 삶이 여유로워지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좋아진다’는 뜻에서 한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빈 배”라는 것은 이러한 긍정적인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공대 교수가 논문을 발표하기 위해서 10년 이상을 연구하여 막 발표하려고 하는데, 그와 똑같은 주제와 똑같은 내용으로 다른 나라의 다른 교수가 발표를 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가 10여 년 자신의 전부를 쏟아 부은 논문은 하루아침에 휴지조각이 되어버렸습니다. 정말 허망한 일이죠! 그런가 하면 서울의 어느 대형교회 목사님의 다음과 같은 고백도 있습니다. 

1부에서 6부까지 드리는 예배의 설교를 하고 나면 몸이 지치기도 하지만, 마음이 텅 비고 공허해져서 주일 밤에 시속 200km로 대전까지 달려갔다고 다시 돌아가곤 한답니다. 아무리 목회가 성공적으로 보여도 그 마음에 공허함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아니 죽을 둥 살 둥 모르고 달렸는데도, 그 끝이 허망한 경우들이 삶에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빈 배”라는 말이 주는 또 다른 의미이지요.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가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2. 빈 배였는데 …

1) 베드로의 빈 배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 첫 제자 네 사람을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의 첫 제자들은 세례 요한과 관련이 있는데요. 원래 세례 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와 요한은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을 듣고 곧바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자신들이 기다려왔던 메시아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후 안드레는 자기 형제 베드로를, 요한은 자기 형제인 야고보를 예수님께로 인도했습니다(요 1:35~52). 그런데 4개의 복음서를 잘 비교해 보면, 그들은 처음부터 즉각적으로 주님을 따른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마태복음 4장과 마가복음 1장 16절 이하에 예수님께서 갈릴리 해변을 거니시다가, 바다에 그물을 던지고 있던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부친과 함께 그물을 깁고 있던 야고보와 요한을 한 번 더 부르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도 그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했으나(마 4:18 이하, 막 1:16 이하), 그때 역시 모든 것을 완전히 버리고 전적으로 예수님을 따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마지막 세 번째 예수님께서 그들을 부르셨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어느 날 아침, 예수님은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무리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1). 그곳은 시몬이 사는 가버나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그때가 비록 예수님의 사역 초창기였지만, 이미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른 아침인데도 수많은 군중들이 몰려와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너무 많아 예수님께서 그 많은 무리들을 가르치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생각해내신 방법이 호수를, 물 위를 강단으로 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호수 쪽에 계시고, 무리들은 자연스럽게 층을 이루고 있는 호수 변에 앉거나 서면 말씀전하시기가 한결 쉬울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물 위 강대상 역할을 할 배를 찾던 주님은 호숫가에 배가 두 척 있는 것을 보셨는데, 그 중에 한 척은 시몬 베드로의 배였고, 다른 배는 야고보와 요한의 배였습니다. 그때 그들은 배 곁에서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밤새 작업을 하고 돌아와, 배와 그물을 갈무리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때 주님은 시몬의 배에 오르시고는 베드로에게 ‘배를 육지에서 조금 떨어지게 하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 배를 강대상으로 삼아 무리들을 가르치셨습니다(3).

말씀을 마치신 후, 예수님은 다짜고짜 시몬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4)!”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지금까지 이런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나서 자랐으며 어부로서 잔뼈가 굵어온 베드로 아닙니까? 그런데도 웬일인지 간밤에는 고기 한 마리 구경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중에 날은 밝아 고기 잡히는 시간은 지났고, 밤새 고생도 실컷 했고 배고 고프고 쉬어야 오늘 밤에 다시 물일을 나갈 수 있었기에, 그물 씻는데 열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하셨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베드로의 心身은 매우 지쳐 있었습니다. 그리고 고기 잡을 시간도 아니었습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그물로 고기를 잡기에 가장 적당한 때는 어두운 밤이었습니다. 반면에 태양이 물에 비치는 낮 시간은 물고기들이 이동하지 않고 잠자듯이 머물러 있는 시간이라, 고기 잡기가 불가능했습니다. 베드로는 이러한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명령은 베드로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지요. 

그러나 베드로는 이미 예수님의 비범함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기에, 예수님의 명령을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그가 그물을 씻는 동안 예수님께서 자신의 배를 타시고 무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은혜를 받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일까요? 베드로는 예수님께 대답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리이다(5).” 그리고 그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내렸습니다. 

그물을 던진 후 일반적으로 몇 시간 혹은 하루 정도가 지나야 하는데, 베드로는 그물을 곧바로 끌어올렸습니다. 그런데 그 그물에 얼마나 많은 물고기가 잡혔든지 그물이 찢어지고 있었습니다(6). 이것을 본 베드로는 아직도 호숫가에 남아있던 야고보와 요한에게 손짓하여 도움을 청했습니다. “어이, 빨리 와서 우리 좀 도와주게!” 베드로의 요청을 들은 그들은 즉시 베드로의 배가 있는 곳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힘을 합해서 그물을 끌어올렸는데요. 그들이 잡은 고기가 얼마나 많았든지, 두 배에 나누어 실어도 배가 잠길 정도였습니다(7).

베드로는 이 일을 경험하면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는 것을 처음 본 것도 아니지만, 정작 자신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자 충격이 클 수밖에 없었지요. 고기가 잡히는 밤 시간도 아닌 늦은 아침, ‘갈릴리 맨’인 자신이 아는 고기가 잘 잡히는 곳이 아닌 조류의 흐름이나 고기의 이동이 거의 없는 깊은 곳에서, 제법 긴 시간의 기다림도 없이 단 한 번의 그물질로, 그것도 갈릴리 바다와 고기잡이를 전혀 모르는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 이렇게 많은 고기를 잡은 것은 불가능한 일인데, 그 일이 베드로의 눈앞에서 이뤄진 것입니다. 

이제까지 그는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받았지만 전적으로 따르지는 않고 있었습니다. 확신이 서지 않아서, 혹은 다 버릴 수가 없어서 갈등 만 하고 있었지요. 그러나 지금 자신에게 일어난 이 일을 통해 베드로는 ‘더 이상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이 자연과 바다와 물고기를 움직이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자신도 모르게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고백했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2절에 보면, 그때까지 베드로는 “어부”였습니다. 

5절에 보면, 예수님은 아직까지 그에게 “선생님”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즉 예수님이 남다른 뭔가를 가지신 분이긴 하지만 “주”로 부르면서 전적으로 복종할 대상으로 여기지는 않았던 것이죠. 그러나 이 일을 통해 비로소 예수님이 “주”로 보였습니다. “주”, 헬라어로 “퀴리오스”라는 말은 노예가 자기 주인을 부를 때의 호칭이며, 로마 시민이 로마 황제를 부를 때 사용하던 호칭입니다. 따라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주”라고 부른 것은 어떤 뜻입니까? 아직 완전한 지식은 아니지만, 자연을 다스리시고 어느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을 하실 수 있는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 보인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갈릴리 바다 어부인 자신의 한계, 인생이라는 것의 한계, 나아가 영광과 권능의 주님을 도저히 가까이 할 수 없는 피조물의 한계를 비로소 깨달았다는 뜻입니다. 즉 베드로는 자신이 인간 예수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죠. 그 순간 그는 예수님께 자신을 떠나달라고 외쳤습니다. 왜냐하면 해가 떠오르면 어둠이 물러가는 것처럼, 죄인이 하나님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무서워하지 말라!”고 위로하셨습니다(10). 그리고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고도 하셨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그 예수님께서 자신을 부르신 이유를 깨달은 베드로를 진정한 ‘천국 어부’로 부르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치열하게 삽니까? 정말 죽을 듯이 일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고 난 다음에 느끼는 것이 공허감입니다. 오래 전, 영화에도 나왔던 “연극이 끝나고 난 뒤”라는 가요가 있었습니다. 연극이 끝난 다음, 혼자 객석에 남아서 배우들이 그렇게 열연하던 무대가 텅 비어있는 것과 배우들의 열연에 그렇게 환호하던 객석마저 비어있는 것을 보면서 “정적”, “고독”을 느끼는 그것이 공허함이라고 노래했습니다. 어디 연극만 그렇습니까? ‘빈 둥지 증후군’(empty nest syndrome)이라는 것이 있는데요. 

이것은 30여년 남편과 자녀들을 위해 열심히 살던 주부가 어느 날 문득 출세한 남편은 자기 일에 빠져 바쁘고, 성장한 자녀들은 독립하여 나간 후 혼자라는 생각을 하는 순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밀어닥치는 공허감을 느끼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주부만이 아닙니다. 상당수의 사람들이, 그것도 아주 열심히 살아온 사람들이 개인적인 무의미, 가정에서의 외로움, 그리고 자기 일이나 직장에서의 허무를 느끼고 있으며, 그것이 逸脫的이고 위험한 행동을 하게 만든다고 합니다. 즉 여러분도 그들처럼, 아니 오늘 본문의 베드로처럼 밤새도록 수고한 뒤에 감당하기 힘든 공허함을 느낄 수 있다는 말이지요. 그런 공허함을 느끼지 않으려면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가 왜 ‘빈 배 인생’일 수밖에 없었는지 그 원인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2) 당신의 삶이 빈 배가 안 되려거든…

➀ 베드로의 인생이 빈 배 인생일 수밖에 없었던 첫 번째 이유는 그의 삶에 예수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가 빈 배 같은 인생에서 충만함을 느낀 것이 그가 물고기를 많이 잡았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가 충만을 느낀 진정한 이유는 물고기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충만을 느낀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예수님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선생”으로 알 때는 빈 배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주”로 알고, 그 앞에 엎드릴 때 거기에 충만함이 있었습니다. 즉 예수님이 누구신지 아는 것, 그것도 머리가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자신의 일터에서,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서,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것이 여러분의 인생을 충만하게, 풍성하게 만든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인물이 바울입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자신만큼 똑똑하고, 자신만큼 열심히 살고, 자신만큼 명예로운 사람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정말 그런 자부심을 가질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모두 유대인의 혈통을 그대로 보존한 명문 집안의 자녀요, 날 때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진 자요, 유대 최고 학자 가말리엘의 門下生으로 이스라엘의 종교와 학문과 전통의 맥을 잇는 자요, 산헤드린 공회의 젊은 의원이요, 존경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자신을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라고 고백했습니다(딤전1:13). 

그는 또 다른 성경에서 자신이 자랑하던 그 모든 것이 “배설물”과 같다고 고백했습니다(빌3:8). 즉 바울은 자신이 그렇게 자랑스럽게 여기던 것들이 한 마디로 형편없는 것이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죠. 이렇게 바울이 증명하듯, 예수님 없는 삶은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의미 없는 삶이요 가치 없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과 함께 사는 삶이 곧 충만이요, 충만을 얻는 길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➁ 베드로의 인생이 빈 배 인생일 수밖에 없었던 두 번째 이유는 그가 자신을 잘 몰랐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신을 똑바로 아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어느 누구도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실체를 정확하게 보여주거나 말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여러분 자신을 똑바로 보게 만듭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바로 보게 되었을 때 비로소 자신을 똑바로 볼 수 있었습니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여기서 “죄”라는 원어 ‘하마르티아’와 명사 ‘하마르톨로스’는 ‘화살을 쏘아 목표를 겨냥했는데 빗나갔다’는 뜻과, ‘지적으로 모자라고 부족하다’는 뜻, ‘도덕적인 결점과 실수를 가진 자’라는 뜻, 그리고 ‘실패한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따라서 베드로가 자신을 “죄인”이라고 하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지금까지 잘못된 목표를 겨냥해서 인생의 활시위를 당겨온 삶이었다’, ‘지식이 부족하고 모자란 사람이다’, ‘도덕적인 실수와 결점투성이 인생이다’, 그리고 ‘실패자’라는 의미입니다. 자신을 제대로 모르면서 사는 사람이 성공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을 잘 모르는 사람이 인생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을 모르고서 어떻게 충만한 인생, 풍성한 삶을 꿈 꿀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 앞에 서면 자신이 바로 보입니다. 자신의 진정한 실체를 볼 수 있는 것이죠.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신을 바로 알지 못하고 사는 삶은 그 자체가 헛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과 말씀으로 자신을 똑바로 알 때, 바로 그 자리에서부터 충만이 시작된다는 것을 기억하고, 그것을 경험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➂ 베드로의 인생이 빈 배 인생일 수밖에 없었던 세 번째 이유는 인생의 진정한 목표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목표가 잘못되었는데 명중했다고 그가 성공한 인생입니까? 골프는 18개의 홀을 지나면서 각 홀의 홀컵 안에 공을 넣는 운동입니다. 어느 초보자가 자기 홀에서 공을 쳤는데 놀랍게도 한 번 만에 공이 홀컵에 들어갔습니다. 여러분, 한 번 만에 공이 홀컵에 들어가는 일은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 홀컵은 자기가 친 홀이 아니고 옆에 있는 다른 홀이었습니다. 

즉 그것은 잘한 것이 아니라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는 일이었지요. 베드로는 예수님으로부터 자신의 인생을 걸만한 바른 목표, 즉 사명을 받았습니다.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그물이 찢어지고, 배가 가라앉을 정도의 滿船의 기쁨보다 사람을 구하고 살리는 기쁨, 죄악의 홍수에 휩쓸려가는 사람을 주님의 구원의 방주로 건져내는 기쁨의 사명을 그에게 주신 것입니다. 만약 베드로가 이 인생의 목표를 받지 않았더라면 베드로의 평생은 늘 빈 배였을 것입니다. 아니 고기를 많이 잡아 滿船으로 항구에 귀향해도 허전함과 공허감을 떨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물고기가 아닌 사람을 낚는 어부라는 인생의 목표를 받고 그것에 헌신하면서 그는 얼마나 신나게 살았는지 모릅니다. 모르긴 해도, 그가 정말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다면, 그 순간에 그는 웃고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이 주신 목표를 향하여 열심히 달려왔고, 주님의 복음을 전하다가 주님처럼 십자가에 매달리니 그로서는 즐거울 수밖에 없었지요!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주신 여러분의 사명, 곧 인생의 목표를 알고 그 목표를 향하여 가는 삶이 곧 충만일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➃ 베드로의 인생이 빈 배 인생일 수밖에 없었던 네 번째 이유는 그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송명희 시인의 “주의 말씀 없으면”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주의 말씀 없으면 나는 흔들립니다
주의 말씀 없으면 나는 어둡습니다 
주의 말씀 없으면 나는 괴롭습니다
주의 말씀 없으면 나는 실수합니다
주의 말씀 없으면 나는 넘어집니다

주의 말씀 없으면 나는 슬퍼합니다
주의 말씀 없으면 나는 불의합니다
주의 말씀 없으면 나는 낙심합니다
주의 말씀 없으면 나는 멸망합니다
주의 말씀은 나의 생명이시니 
주의 말씀 없으면 나는 살지 못합니다

이 시가 보여주는 대로 말씀이 없으면 우리 삶은 그 자체가 지탱될 수 없습니다. 아니 沙上樓閣, 모래 위에 짓는 집 정도가 아니라, 아예 인생이라는 집을 지을 수가 없지요. 그러므로 말씀 없이 사는 삶이 공허함을 부른다는 것을 잊지 마시고 말씀으로 여러분을 채우시기 바랍니다. 베드로에게 주님의 말씀이 있고, 그 말씀에 순종할 때 그는 충만한 인생을 살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모든 성도를 전임 사역자로 부르지는 않았습니다. 모든 성도가 제자들처럼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를 수는 없지요. 그러나 모든 성도는 말씀을 전하는 자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일차적으로 말씀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지금은 여러분들이 말씀에 순종하여 전도하지 않아도 무탈하다고 여기실지 몰라도, 장차 주님 앞에 섰을 때, 여러분이 얼마나 헛되게 살았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즉 세상의 것을 아무리 퍼 올리고, 쌓아둘 수 없을 정도로 쌓아도, 주님의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헛될 뿐임을 알게 될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으로 여러분을 채우시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으로 여러분을 채우실 때, 여러분의 인생은 충만하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빈 배 인생이 충만한 인생으로

말씀을 맺겠습니다. 앞만 보고서 열심히 살아오다 어느 순간 ‘내가 무엇하며 살았나?’ ‘그렇게 죽자고 살았는데 도대체 남은 것은 무엇인가?’ ‘젊음, 꿈, 하고 싶은 일, 가고 싶은 것 다 포기하며 살았는데, 그 결과라는 것이 도대체 이게 뭐야?’ 라는 공허감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러한 ‘빈 배 인생’이 되지 않으려면, 즉 여러분의 인생이 충만한 인생이 되기를 원한다면, 오늘 본문의 결론에 주목하셔야 합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과 함께 할 때 비로소 삶이 충만해진다는 것입니다. 범사에 주님을 인정하고, 모든 일에 주님을 모시고, 모든 것을 기도로 주님과 의논하는 삶, 그것이 곧 충만의 지름길입니다. 두 번째는 여러분 자신을 바로 아는 것에서 충만은 시작됩니다. 자신이 얼마나 잘못 되었는지, 자신이 얼마나 텅 비었고 헛된지를 아는 것에서 새로운 충만의 역사는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이 빈 것을 아는 자는 주님께서 채워주신다는 것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충만한 인생이 되기 위한 세 번째 방법은 주님이 주시는 인생의 바른 목표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내가 살고 싶은 대로, 내가 바라는 대로가 아니라, 주님이 바라시는 대로 사는 것이 곧 충만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충만한 인생이 되기 위한 네 번째 방법은 주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채우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어디로 가든, 무엇을 하든, 언제 어디서나,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자신을 바로 알고 그런 자신을 도우시는 주님의 은혜 안에 거하시기 바랍니다. 인생의 바른 목표를 향해서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말씀으로 자신을 채우고 순종으로 갈무리하여 진정한 충만이 어떤 것인지를 맛보시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