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입을 다물고 손을 펴라 (출 22:21-27)

첨부 1


입을 다물고 손을 펴라 (출 22:21-27)


[너희는 너희에게 몸붙여 사는 나그네를 학대하거나 억압해서는 안 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몸붙여 살던 나그네였다. 너희는 과부나 고아를 괴롭히면 안 된다. 너희가 그들을 괴롭혀서, 그들이 나에게 부르짖으면, 나는 반드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어주겠다. 나는 분노를 터뜨려서, 너희를 칼로 죽이겠다. 그렇게 되면, 너희 아내는 과부가 될 것이며, 너희 자식들은 고아가 될 것이다. 너희가 너의 가운데서 가난하게 사는 나의 백성에게 돈을 꾸어 주었으면, 너희는 그에게 빚쟁이처럼 재촉해서도 안 되고, 이자를 받아도 안 된다. 너희가 정녕 너희 이웃에게서 겉옷을 담보로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그가 덮을 것이라고는 오직 그것뿐이다. 몸을 가릴 것이라고는 그것밖에 없는데, 그가 무엇을 덮고 자겠느냐? 그가 나에게 부르짖으면 자애로운 나는 들어주지 않을 수 없다.]

• 지금 울고 있는 이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가정마다 비 피해는 없으셨는지요? 우리가 함께 모여 예배드리는 이 시간,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가족들을 속절없이 떠나보낸 모든 이들의 가슴에 주님의 위로가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봉사활동에 나섰다가 참변을 당한 인하대 발명 동아리 학생들, 민간인을 구하기 위해 물에 뛰어들었다가 죽음을 맞은 조민수 의경, 천변에 외롭게 살다가 죽어간 독거노인들, 비닐하우스 촌에 살다가 생명과 재산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무심한 하늘을 탓해 보지만 이미 벌어진 일은 돌이킬 수 없습니다. 넘어진 이들은 울면서라도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하지만 그럴 힘이 없는 이들이 많습니다. 지금 그분들에게 필요한 것은 ‘나는 혼자가 아니다’라는 확신입니다. 슬픔과 아픔을 함께 나누려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처럼 든든한 일은 없습니다. 여리고 길에서 강도 만난 사람은 성경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 곁에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누가 그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가끔 이 말씀이 천둥처럼 울려올 때가 있습니다. 혹시라도 그들과 연루될까 무서워 우리 시대의 ‘강도 만난 이들’ 곁을 무심히 지나칠 때 특히 그렇습니다. 이웃이 누구라고 규정할 수도 없고, 우리가 임의로 선택할 수도 아닙니다. 이웃은 우리가 누군가의 필요에 응답하고, 그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위험을 무릅쓸 때 발생하는 실체입니다. 이웃됨은 거룩한 삶의 입구입니다.

지금 울고 있는 이들의 이웃이 되어주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이런 재난이 더 이상 벌어지지 않도록 노력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개발이라는 미명 하에 파헤쳐진 땅의 신음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부푼 욕망을 따라 사는 우리 삶의 방식을 바꾸지 않는 한 비극은 계속될 것이고 그 규모도 훨씬 커질 것입니다. 바람을 심어 광풍을 거두는 형국입니다. 한 가지 속상한 것은 책임을 져야 할 이들이 이번 수해를 ‘104년 만에 쏟아진 폭우’ 탓으로 돌린다는 사실입니다.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발부하는 셈입니다. 누구 하나 내 탓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겉을 꾸미는 일보다 사람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도록 보이지 않는 곳에 도사린 위험을 제거하는 일에 마음을 쓰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아끼지 않는 정책은 반생명적이고 반신앙적입니다. 재난은 사람을 가리지 않지만, 재난에 더욱 취약한 것은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정치는 가난한 이들을 늘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 땅의 소리에 민감하신 분이라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애굽의 압제 아래 살던 히브리인들의 울부짖음을 차마 모른 체 하실 수가 없으셔서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겠습니까?”(출3:11) 하며 주저하는 모세에게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단순합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성경의 하나님은 ‘함께 하시는 하나님’, 곧 ‘임마누엘’이십니다. 하나님은 가장 낮은 이들의 울부짖음을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라는 기도로 들으십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사회의 밑바닥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아는 것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 유배

히브리인들은 야훼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야 자기들도 존엄한 인간임을 자각했습니다. 자기들도 행복을 꿈꿀 수 있고, 자기 삶의 결정권을 가지고 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소수의 사람들만 특권을 누리고 나머지는 그 체제를 떠받치기 위한 도구로 취급되고 있는 세상은 하나님 보시기에 불의한 세상임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들은 노예가 되기 위해 태어난 것도, 관리들에게 매를 맞고 착취당하기 위해 태어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극복되어야 할 현실이었습니다.

출애굽은 하나의 혁명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수의 사람을 비인간으로 만드는 바로의 체제를 심판하셨습니다. 애굽에 내렸던 열 가지 재앙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해방된 그 백성이 가장 인간답게,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토라 곧 율법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해방된 백성들이 따라야 할 삶의 강령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가운데 일부이지만, 일부만 보아도 전체를 알 수 있습니다. 

“너희는 너희에게 몸붙여 사는 나그네를 학대하거나 억압해서는 안 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몸붙여 살던 나그네였다.”(21)

‘몸붙여 사는 나그네’(ger)는 고아, 과부와 함께 사회적 약자의 대명사입니다. 그들은 사유재산권이 없었고, 그를 보호해 줄 법적 후견인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경제적 착취나 물리적 폭력에 노출되기 쉬웠습니다. ‘학대하다’(yanah)라는 동사는 강자가 약자를 경제적으로 착취한다는 뜻으로 쓰입니다. ‘억압하다’(lahas)는 동사는 짓밟는다는 뜻입니다. 사람 취급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루어 살게 될 새 세상에서 나그네를 학대하거나 억압하지 말아야 할 까닭은 이스라엘의 역사 체험과 무관치 않습니다. 그들도 애굽에서 학대와 억압을 당했으니 함께 살고 있는 이민자들에게 괴로움을 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과부나 고아를 괴롭히면 안 된다는 명령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그들을 괴롭혀 그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반드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어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내용은 섬뜩합니다. 억압자들은 칼에 찔려 죽게 되고, 그 아내는 과부가 되고 아이들은 고아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가난하게 사는 사람에게 돈을 꾸어 주었을 때에도 빚쟁이처럼 자꾸 재촉하지 말아야 하고 이자를 받아서도 안 됩니다. 이자는 결국 채무자를 노예로 전락시키기 때문입니다. 채무자가 도저히 빚을 갚을 형편이 못될 때에는 채권자 행세를 하기보다는 차라리 원금을 포기함으로 이웃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는 것이 낫다고 말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출애굽 정신을 현실화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웃에게 겉옷을 담보로 잡고 돈을 빌려주었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 것도 맡길 것이 없는 채무자는 종종 자기 겉옷을 담보물로 맡겼습니다. ‘겉옷’은 사실 그의 존재를 상징하는 것이었기에, 겉옷을 담보로 맡긴다는 것은 빚을 갚지 못하면 자기 몸을 팔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자기 몸의 통제권을 넘져준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출애굽의 하나님은 해지기 전에 그 담보물을 즉시 돌려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사람에게는 추위를 막기 위한 겉옷이 한 벌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애로운 분이시기에 그들이 추위에 떠는 것을 차마 보실 수가 없는 분이십니다. 

이 말씀은 이미 편안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 이 세상에서 누릴 것을 다 누리고 살고 있는 이들에게는 불편한 말씀입니다.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마련(If you can't live the way you think, think the way you live)이랍니다. 어느 신학자는 삶을 위한 도구를 바꾸는 순간 하나님도 바꾸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늘 하나님의 뜻을 기준음으로 삼아 우리 삶을 조율하는 것인데, 자기 좋을 대로 말씀을 왜곡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 못하는 현실을 일러 랍 벨 목사는 ‘유배’라 했습니다. 그는 “유배는 자신이 받은 복을 다른 사람을 위한 복으로 바꾸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에서 벗어나는 것”(랍 벨․던 골든, <<네 이웃의 탄식에 귀를 기울이라>>, 포이에마, 71쪽)이라고 말했습니다. 누릴 것을 다 누리면서도 다른 이들의 고통에 응답하지 못하는 이들은 유배당한 사람들입니다. 

• 노르웨이 참사

최근에 우리는 노르웨이에서 벌어진 참사에 놀랐습니다. 수도인 오슬로 정부청사 폭탄 테러 보도를 접하며 놀랐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우토야 섬에서 청소년들이 학살당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범인은 템플 기사단의 일원임을 자처한 아네르스 베링 브레이비크입니다. 그는 경찰에 체포된 후에도 후회하지 않는다면서 “잔혹했지만 필요했다”는 말로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려 했습니다. 무슬림들이 증가하면서 다문화사회로 이행해가고 있는 ‘노르웨이에 혁명을 가져오고 싶었다’고도 말했습니다. 그가 호송되는 차 안에서 보여준 미소는 섬뜩했습니다. 

극우적인 민족주의가 종교적 신념과 결합할 때 얼마나 파괴적일 수 있는지를 그는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어쩌면 ‘순수한 아리안의 나라’를 꿈꿨던 히틀러와 닮은 사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가끔 ‘순수성’이라는 말이 얼마나 왜곡되기 쉬운 말인가 생각하곤 합니다. 일전에 어떤 토론 프로그램에 나갔을 때 패널 한 분은 누구든지 동기만 순수하다면 그의 행위를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 말에 즉각 반박했습니다. 그가 인간의 지성과 감성과 의지라는 것이 얼마나 왜곡되기 쉬운 것인지를 간과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무지한 순수, 왜곡된 순수도 있는 법입니다. 순수성에 대한 집착은 타자에 대한 폭력을 낳고, 그 폭력은 세상을 천국으로 만들기보다는 지옥으로 만들게 마련입니다. 순수하지 말자는 말이 아니라, 나만 순수하다는 착각에서 깨어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브레이비크는 길을 잃은 영혼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은 다양성에 기초하고 있다는 근본적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피부색, 나이, 국적, 경제력, 종교의 차이를 넘어 서로를 소중한 인간으로 존중하는 일이야말로 인간다움의 척도입니다. 큰 충격을 받은 노르웨이 사람들이 보인 반응은 참 존경할만한 것이었습니다.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의 손에는 장미꽃이 들려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랑과 희망의 상징’이었습니다. 거리에 나온 15만 명의 사람들은 어떤 폭력도 평화를 염원하는 공동체의 꿈을 파괴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징표였습니다.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저는 아프리카 응구니족의 언어인 우분투(Ubuntu)라는 말을 떠올렸습니다. 그 단어는 매우 복합적인 의미로 사용됩니다. 관대하고 남에게 호의를 베풀며, 친절하고 다정하고 남을 보살필 줄 아는 자비로운 사람을 보면 그들은 ‘우분투가 있다’고 말합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성공회 대주교인 데스몬드 투투는 우분투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분투가 있는 사람은 열려 있고, 다른 사람을 위해 시간을 내고, 다른 사람들을 인정하고, 인격과 능력이 탁월한 사람 앞에서도 위협을 느끼지 않는다. 자신이 더 큰 전체에 속한 존재임을 아는 그에게는 온당한 자기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데스몬드 투투, <용서없이 미래없다>, 41쪽) 

낯선 사람들은 위험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던 선물을 가지고 오는 손님들입니다. 영적으로 특히 그러합니다. 낯섦은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세계로의 초대입니다. 지금 고통 받는 사람들, 사람들에게 외면당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우리를 하나님께로 안내하는 인도자들임을 잊지 마십시오. 성경은 그래서 나그네를 영접했다가 하나님의 사자를 영접한 사람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 선 자리를 벗어나

믿음은 삶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믿음은 언제나 삶으로 번역되어야 합니다. 그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인지는 무얼 보면 알 수 있을까요? 이웃을 대하는 모습을 보면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심정이 되어 세상을 살핍니다. 정치인이나 경제인이나 언론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았기에 예수님은 병든 사람, 귀신 들린 사람, 세리와 창기들을 극진한 정성으로 돌보실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세상에서 천대받는 사람들도 소중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존재들입니다. 그 사실 하나만 제대로 알아도 우리 삶이 달라집니다.

내가 선 자리를 벗어나 누군가의 부름에 응답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성도가 되는 길이요 참 사람이 되는 길입니다. 날이 갈수록 몸과 마음이 굼떠지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불의를 보아도 세상이 으레 그러려니 하며 오불관언하는 것은 불신앙입니다. 사회 불의에 대해 분노조차 할 줄 모른다면 우리는 그저 살덩이일 뿐입니다. 지금 세상에 똑똑한 사람, 힘 있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꼭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마음에 공감하고 또 누군가의 좋은 이웃이 되기 위해 마음 쓰는 사람들이 좋은 세상을 만듭니다. 다행히 세상에는 그런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어쩌면 새로운 세상의 그루터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때에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믿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의 뜻을 거역할 때조차 우리가 변화되어 주님이 기뻐하시는 세상을 만들어 가는 일에 동참할 거라고 믿어주십니다. 이게 은혜입니다. 많은 말은 분쟁을 낳습니다. 사랑의 섬김은 일치를 낳습니다. 지금 기독교인들이 해야 할 일은 세상 현실에 대한 해석이 아니라, 세상을 친구의 나라로 바꾸기 위한 땀 흘림입니다. 무더운 여름날이지만 우리의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하늘나라의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