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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생의 샘물이 내게 있다면 (요 4: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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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의 샘물이 내게 있다면 (요 4:13-26)

우리 삶에 흔하게 쓰이는 말 중에<에너지>라는 말을 잘 아실 것입니다. 물리학에서는 물체가 물리학적인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에너지라고 하고, 사전적인 의미로는 인간 활동의 근원이 되는 힘이나 원기 또는 정력이 에너지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생각하고 활동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 즉 정신력과 육체의 힘을 다 통합한 것을 의미할 때 에너지라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과학적인 견해로 사람은 살아가는 힘이 그 속에 있는 에너지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에너지가 충만한 사람은 삶을 살아도 힘차게 살아가는 것이고, 반면에 살아있는 것 같지만은 죽은 자와 비슷할 정도로 그 에너지 지수가 약한 사람도 많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에 죽음에 가까울 정도로 에너지 수준이 낮아지는 때가 몇 번 있다고 합니다. 그 중의 한번은 바로 수치심에 싸여 있는 때라고 합니다. 말하자면 부끄러움을 당할 때입니다. 때로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거나, 혹은 수치심으로 인해서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을 때, 좀 더 나아가 살고 싶지도 않을 만큼의 형편에 있을 때 인간의 에너지는 아주 바닥에 떨어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에너지가 땅에 떨어질 만큼 약해질 때가 가장 위험한 때입니다. 병에 대해서 무방비 상태가 되어서 어떤 병도 쉽게 걸릴 수가 있고, 어떤 문제에도 견딜만한 저항력이 없어지고,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가장 초라하고 연약한 상태가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스스로 느끼는 수치심이 이렇게 사람을 맥 빠지게 만듭니다. 배고픔도 아니요, 질병도 아닙니다. 돈 걱정도 아니요, 실패의 문제도 아닙니다. 문제는 수치심입니다. 양심에 타격을 느끼는 부끄러움이 문제입니다. 그것이 사람의 에너지를 최 저하로 떨어뜨린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으로 사람의 에너지를 약하게 만드는 것이 무기력증입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고, 아무리해도 안 될 것 같은 무기력증이 사람을 나약하게 하고 그때에 에너지는 뚝 떨어진다고 합니다. 이 무기력증에 빠지게 되면 삶의 의욕마저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무기력증은 우울증이나 또 다른 병을 유발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람의 에너지가 고갈되게 하는 또 하나의 경우는 슬픔입니다. 사람이 슬픔을 극복하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정말 큰 슬픔을 당하면 그것을 극복할 만한 용기가 없고, 여력이없어서 슬픔을 그대로 당하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 에너지는 소진되고 버티기가 힘들 정도가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문제가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할 때 정신력이 약해지고, 그 약해진 정신력과 함께 인간의 에너지는 바닥나고 마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이 이렇게 될 때 스스로 일어날 수 있는 힘이 없어지고, 누군가의 에너지가 그에게 공급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소생할 수 있는 신선한 에너지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누가 그 에너지를 공급받을 수 있느냐 입니다.

인간은 이러한 에너지 고갈로부터 벗어날 수 있어야 하는데 거기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바로 콤플렉스입니다. 수치심이나 무기력증, 그리고 슬픔과 두려움이 억압된 의식 속에 잠재해서 강박관념이 되어서 콤플렉스로 자리잡아버리면 이게 문제입니다. 나는 해도 안 된다는 열등감, 도저히 벗어날 수 없다는 열등감이 이겨 내야할 문제입니다. 

요즘 아이들이 휴대폰 사용하는 것을 보면 기가 막힙니다. 그 중에 문자 보내는 것을 가만히 보세요.“다다닥”하면 문자가“슝”하고 갑니다. 뭐, 몇 초도 안 걸립니다. 여러분 다 아시다시피 저희 작은 녀석 의진이가 작년 국내대회에서 1등을 하고, 뉴욕세계대회에서 아깝게 2등을 한 적이 있습니다만 하여간 옆에서 보면 장난하는 것 같은데 순식간에 완전한 문장이 되어서 전송이 됩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걸 보고 제가“왜 나는 되지 않는 거야! 나는 제 아버지인데 더 잘해야지! 왜 안 되는 거야!”하면서 매달려서 그것만 하고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말이 안 됩니다. 이게 바로 콤플렉스입니다. 그리고 부모들이 흔히 하는 말“다른 집 애는 공부도 잘하는데 너는 왜 못하는 거야!”이게 열등감입니다. 이 콤플렉스 때문에, 열등감 때문에 실망하고 낙심하고 사는 게 인간입니다. 가만히 보면 우리 전부가 다 콤플렉스가 있습니다. 누구나 다 열등감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단 말입니다.

자, 이렇게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그것을 얼마나 깨끗하게 불식하고 극복하느냐에 따라서 일생은 좌우되는 것입니다. 
깊이 생각해 보면 모든 콤플렉스는 불신앙입니다. 나는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이라는 사실과 나에게 주어진 은사를 알아야 합니다. 이게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이걸 몰라서 교만합니다. 자기의 기준을 하나님이 내게 주신 그 곳에, 그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다양한 은사를 주셨습니다.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이 다 필요하기 때문에 각자에게 주신 은사도 다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같아지려고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모두가 똑 같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전부가 주인공이 되겠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지금은 해병대에서 잘 근무하고 있습니다만 탤런트[현빈]이 주인공으로 나왔던 드라마<시크릿 가든>인가를 보고 뭇 여성들의 남자를 보는 기준이 김주원이 되더니 얼마 전에는<최고의 사랑>이라는 드라마에서 열연한 탤런트[차승원]때문에 뭇 여성들이<독고 앓이>를 한데나 어쩐데나 하면서 시끌벅적했습니다. 

그러나 여성여러분, 세상 모든 남자들이 다 그런 남자들만 있다면 정말 좋을 것 같습니까? 아마 재미없을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세상 남자들을 다 그렇게 만드셨겠지 않습니까? 하나님께는 다 필요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가 각각 하나님께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놀라운 경륜 속에 내가 있음을 알고 내게 주신 은사를 바로 이해하고 따라갈 때 비로소 모든 콤플렉스를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아주 오래 동안 열등의식에 사로잡힌 사마리아 여자 하나를 만납니다. 당시 유대사람들은 자신들을 우월하다고 생각했고 사마리아 사람들을 아주 천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서로 상종조차하지 않았습니다. 거기다가 오늘 주인공은 여자입니다. 여자라는 말은 당시로서는 아주 천한 존재였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의 여인은 자신이 얼마나 천한 존재인지를 이미 알고 있습니다. 거듭되는 실패의 연속으로 말미암아 패배의식에 빠져 있었습니다. 남편을 데리고 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남편이 없다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실제로 그 여인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알고 계십니다.“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다.”자신의 삶을 훤히 꿰뚫고 계신 예수님 앞에 그만 무릎을 꿇고 맙니다. 

흔히 말하는 운명이 기구한 여자요,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가진 여자입니다. 하루하루가 아마 살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살았는지도 모릅니다. 다섯 남자와 살다가 지금은 남의 집 소실로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랑은 받는 것 같으나 부끄러운 여자입니다. 보통 여인들이 아침, 저녁 선선할 때 물 길러 오건만 이 여자는 그들과 어울리지도 못합니다. 자신도 어울리고 싶지도 않았지만 누구도 어울려주지 않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아마 눈앞에만 보이면 수군거리는 대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혼자서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사막 낮 열두시에 혼자서 물 길러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여자를 만났고“물을 좀 달라.”고 하십니다. 그때 하는 이 여자의 대답에 당시 여자의 심경과 삶의 모습이 담겨져 있습니다.“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하나이까?”아주 짜증스럽고 퉁명스러운 대답입니다. 그 만큼 이 여인은 콤플렉스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물 한 그릇이 뭐 그리 어렵습니까? 웬만하면 아무소리 안하고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거절할 만큼 이 여인은 마음에 여유가 없는 상황입니다. 마음에 갈등이 있고, 한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는 진리를 말씀을 하실 때 무슨 말씀인지 이해를 못해서 비꼬듯이“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라고 대답합니다. 이 말은 진리를 이해해서 그 진리를 받아들이겠다는 수용적 자세가 아니라“그런 물이 있다면 어디 한번 줘 보세요. 내가 팔자나 한번 바꿔 보게!”라는 식의 투정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가슴에 맺힌 것이 많아서 오랫동안 마음이 닫혀있었고, 그로 말미암아 진리를 알아들을 만한 형편이 되지 못했던 여인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형편에 있던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긍휼히 여기셔서 다가가셨고 그 여인에 대해서 소상히 알고 계시는 대로 말씀하시자 이 여인은 놀라면서 예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때 예수님은 예배에 대한 말씀을 하시면서 당신의 존재에 대해서 깨닫게 하십니다. 당시 여자가 알고 있던 신앙의 상식 정도를 뛰어넘는 말씀으로 깨달음을 주십니다. 그러자 이 여인이 그 동안 자신을 가두고 있던 콤플렉스와 열등감을 벗어던지고 마음을 열고 예수님을 보게 되면서 마음이 확 바뀝니다. 놀랍게도 잠깐 예수님을 만난 것으로 인해서 사람이 확 바뀌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결정적으로 26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정체를 명확히 밝히십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은 뒤에 보면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전도합니다. 자기를 못살게 굴었고, 자기를 괴롭히던 사람들을 찾아가서 전도합니다. 전에는 만나기 싫어하던 사람들을 오늘 일부러 찾아갑니다. 일순간에 콤플렉스를 다 물리치고 열등감을 이겨냅니다. 영생의 샘물이 무엇인지를 알고 난 사람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누구나 이런 형편이었습니다. 왠지 모르게 짜증스러운 삶, 괜한 열등감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며 근심했습니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그러는 중에라도 우리는 모두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아니 예수님께서 우리를 만나주심으로 다른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영생하는 샘물을 주셔서 마신 자들입니다. 영생하는 샘물이 내게 있다면 우리의 삶도 확실히 달라져야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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