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함께, 함께, 함께 (엡 3:1-6)

첨부 1


함께, 함께, 함께 (엡 3:1-6) 
   
남아프리카에 위치한 남아공에 다녀왔습니다. 남아공을 위시한 잠비아, 짐바브웨 등 이웃나라에서 사역하는 여러 목회자들과 선교사들을 위한 영성집회를 인도했습니다. 실제로 가서보니 유럽 못지않게 잘 사는 나라처럼 느껴졌지만 남아공의 속살을 들여다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빈민들이 밀집해 있는 다운타운, 극빈민촌, 예배처소, 살림집 등을 위험을 무릅쓰고 살펴보았습니다. 한마디로 극과 극이었습니다. 

이런 경제적인 빈부격차보다 더 안타까운 현실은 흑백 인종분리였습니다. 우선 거주지가 다르고, 노는 장소가 다르며, 생활 근거지도 다릅니다. 물론 예배처소도 다릅니다. 백인은 흑인을, 흑인은 백인을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고 있는 듯했습니다. 이들이 피부색깔을 뛰어넘어 하나가 되는 것은 실로 요원(遙遠)해 보였습니다. 

남아공의 흑백분리보다 더 두터운 장벽은 구약시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가로놓여 있던 장벽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선민의식은 지금 남아공 백인들의 백색 프라이드(pride)와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오직 자기네만이 여호와의 적손(嫡孫)이고, 이방인은 모두 자기네들의 들러리로서, 거느리고 다스리며 때로는 소멸시켜도 하등의 심각한 의미를 찾지 못하는 쓰레기, 지옥에 던져져야 할 존재 정도로 알고 있었습니다. 

이 무서운 선민의식을 깨트리는데 혼신을 다한 사람이 바로 바울입니다. “이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인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이 말하거니와”(엡 3:1). 이방인이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인 자신의 몸을 던질 만큼 가치 있는 존재임을 온 몸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비밀’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때문에 바울은 ‘비밀’이라는 단어를 의도적으로 쓰고 있습니다(엡 3:3,4,9). 

그러면 그가 깨달은 그리스도의 비밀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엡 3:6). 

이방인들도 이젠 유대인들과 똑같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 부자와 가난한 자, 건강한 자와 병든 자, 백인과 유색인, 동서남북, 지식인과 무식한 자, 권력자와 힘없는 자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모든 벽이 다 무너진 것입니다. 

에베소서를 펴면 ‘안에서’, ‘함께’라는 두 단어가 쉴 새 없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특히 본문에서는 ‘함께’라는 단어가 세 번이나 반복되어 의도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교회란 무엇일까요?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는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약속의 언약에 대해서도 외인(外人), 즉 밖의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에서 소망 밖에 있었고, 하나님 밖에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이런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습니다. 

그러면 교회의 일원이 된 우리는 어떤 자가 되었습니까? 첫째, 함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둘째, 함께 지체가 되었습니다. 셋째, 함께 약속에 참여한 자가 되었습니다(엡 3:6). 이 세 가지가 예수를 믿는 순간 우리에게 나타난 축복입니다. ‘상속자’란 말은 예수를 믿는 그때 그 순간, 즉 과거, 나에게 일어난 일입니다(롬 8:29). ‘약속’은 장차 저 천국에서 누릴 영광, 즉 미래에 일어날 일을 의미합니다(히 11:13). ‘함께 지체가 되는 것’은 지금 ‘현재’ 우리 안에서 일어나야 할 일입니다. 

구원에는 세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이미 이루어진 구원, 
둘째는 지금 이루어가는 구원, 
셋째는 장차 이루어질 구원입니다. 

첫째는 상속자란 단어와 관계가 있습니다. 
둘째는 지체와 관계가 있습니다. 
셋째는 약속에 참여하는 자와 관계가 있습니다. 

상속자와 약속에 참여한 자 사이, 즉 과거와 미래 사이, 지금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피로 값 주고 이 땅에 교회를 주신 것입니다(마 16;18). 이 교회에서 우리는 ‘함께 지체가 되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 즉 교회를 지체에다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고전 12:12-15, 26-27). 그러면 왜, 우리가 예수 안에서, 함께 지체가 되기를 힘써야 할까요? 첫째, 혼자 있으면 무엇보다 매우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 둘이 서로 떨어져 있을 때, 탕자가 아버지 집을 떠나 먼 곳으로 갔을 때,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혼자 내려가다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마리아인은 그 강도 만난 자를 어디에 데려다주었습니까? 혼자 딴 짓하던 아간과 가족의 최후는 어떠했습니까? 

둘째, 함께하면 시너지(synergy)효과가 나기 때문입니다.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전 4:10).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19-20). 

셋째, 무엇보다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 133:1).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 

모두가 함께 있을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공동체의 모습이 됩니다. 신앙은 혼자 예수님을 믿고 혼자 천국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의사요, 상담가였던 폴 투르니에(Paul Tournier)는 “우리가 세상에서 혼자 할 수 없는 것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결혼이다. 결혼은 혼자가 아닌 반드시 둘이서 해야 한다. 또 하나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혼자 살 수 없다. 예수님을 믿으면 친구가 생기고 이웃이 생기며 공동체가 생기기 때문이다.”라고 한바 있습니다. 

이번에 우리는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라는 쾌거를 이루어 내었습니다. 최종 결정이 있던 7월 6일 현지시각 오후 5시, IOC위원회가 열린 남아공 더반에 저도 있었습니다. 현지에서 가장 점수를 많이 딴 것은 ‘한 마음’이었습니다. 온 국민이 한 마음이 되어 올림픽을 유치하려는 열기가 위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초대교회처럼 우리 모두가 늘 함께 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믿음의 공동체에서 서로 함께 하는 시간을 갖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때문에 1년도 아닌, 2년에 한 번씩이라도 함께 하는 시간을 갖자는 취지에서 ‘전교인수련회’를 가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지체를 이루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적 성장은 함께하는데서 나타납니다. 이번 기회를 놓치지 말고 함께하는 지체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옥성석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