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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혼의 진보를 가져온 놀라운 생각 (막 11: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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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 전 인터넷에서 ‘때 저물어 날 이미 어두니’라는 찬송가 곡을 검색하고 있었습니다. 찬송가 531장이지요. 이 찬송가는 국내에서는 장례식에 주로 부르는 노래로 인식되고 있지만 외국에서는 평소에도 애창되는 곡입니다. 그런데 인터넷에 영국의 가수 엘튼 존이 이 노래를 부른 동영상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저는 그를 개인적으로 잘 모르지만 그의 라이프스타일이나 연예인으로 드러나는 삶을 고려할 때 신앙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을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호기심에 그 동영상을 보았습니다. 엘튼 존이 콘서트에서 구세군 관악대의 반주에 맞춰서 ‘때 저물어 날 이미 어두니 내 주여 나와 함께 하소서’ 이 찬송가를 아주 진지하게 4절까지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콘서트 분위기가 아주 숙연하고 예배 분위기였습니다. 저는 아주 놀랐습니다. 공개 콘서트에서 찬송가를 진지하게 부를 사람이라면 그는 분명히 신앙인이거나 아니면 신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분명했습니다. 

제가 이미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지만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중심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으로 판단할 수 없다는 사실, 신앙인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사람, 신앙에 대해서 관심이 없을 것처럼 보이는 사람 중에도 의외로 깊은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이 많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사람이 교회를 얼마나 자주 다니고 어느 교회에 속했느냐 만을 가지고 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느냐 안 믿느냐를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교수 두 사람이, 한 사람은 종교학 교수이고 한 사람은 경제학 교수인데 이 두 사람이 유럽의 기독교에 대한 논문을 썼습니다. 논문의 제목이 ‘공급자적 해석으로 본 유럽의 세속화’입니다. 좀 복잡하지요. 이 논문에서 저자들은 유럽의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세속화 현상과 실제적으로 사람들이 고백하는 신앙 사이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주목합니다. 

그 예로 유럽에서 사장 세속적이라는 아이슬란드라는 나라를 거론하는데 아이슬란드는 유럽에서 교회를 다니는 인구의 비율이 가장 낮은 나라입니다. 인구의 2 정도만이 교회를 다닙니다. 그것만을 가지고 볼 때는 아이슬란드는 상당히 세속화된 나라입니다. 그런데 정작 아이슬란드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그렇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아이슬란드 사람들 대부분이 세례를 받고, 거의 모든 결혼식을 교회에서 하고, 신문 부고란을 보면 영생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부고가 많다는 것입니다. 

천국 가셨다든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든가. 그리고 아이슬란드 사람들에게 당신은 스스로를 종교적으로 생각하느냐를 물을 때 인구의 66가 그렇다고 대답하고, 인구의 75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고 오직 2만이 무신론자라고 대답한다는 것입니다. 상당수가 집에 성경책을 소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기한 것은 이러한 통계가 미국인과 비교했을 때 별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미국인 74가 자기를 종교적이라고 말하고 95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다만 아이슬란드와 미국에는 현저한 한 가지 차이점이 있는데 그건 교회 출석률입니다. 아이슬란드에서는 2만이 교회를 다니는데 미국에서는 인구의 43가 교회를 다닙니다. 그래서 이 논문의 저자들은 그 이유가 무엇일까를 연구했어요. 왜 유럽인들은 반드시 비 신앙인이 아닌데 교회 참석률이 저조할까? 

반대로 미국인들은 더 신앙적인 것이 아닌데 그렇게 교회를 많이 다닐까? 저자들이 내린 결론은 공급자적 관점에서 교회의 역할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수요는 존재하는데 공급이 시원치 않다는 것입니다. 미국 같은 나라는 교회가 많아요. 교단이 다양합니다. 교회 세우기가 쉬워요. 목회자가 되는 길이 다양해요. 원활한 공급이 이루어집니다. 

반대로 유럽은 오랫동안 국가가 교회를 통제하고 독점체제를 유지했습니다. 국가의 교회, 국가의 세금으로 지원하는 교회. 그러다 보니까 사람들의 다양한 신앙적인 욕구를 채워주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공급자 쪽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논문을 읽고 제가 그동안에 한국교회의 단점이라고 생각했던 부분이 단점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대한민국에는 교회가 많아요. 동네마다 교회가 있습니다. 골목마다 교회가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한 상가 건물에 교회가 두 세 개가 들어가 있습니다. 신학교가 많아요. 교단이 많습니다. 목사 되는 길이 의외로 쉽습니다. 교회 간에 경쟁이 많습니다. 그 단점은 교회들이 통제가 안 되고 감독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개교회주의, 교회 간에 경쟁이 심하고 교인들의 수평이동이 잦습니다. 

저는 이와 같은 현상을 단점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 논문을 읽고 나니까 그게 우리의 장점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많고 다양하고 여러 종류의 교회가 있다 보니까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품고 그들에게 필요한 신앙적인 도움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공급이 원활하다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교인 숫자가 많고 출석률이 높아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왜 이 이야기를 하느냐? 목사로서 제 사명은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복음을 변증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좀 더 많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좀 더 바르게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을까를 고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 자신이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됩니다. 제가 예수님을 아는 만큼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할 수가 있습니다. 

제가 예수님을 바로 알수록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바로 전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만일 제가 알고 있는 예수님이 무섭고 엄하고 사람들의 죄를 따지고 사람들을 비판하는 분이라면 저도 사람들에게 그런 예수님을 전하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제가 오랫동안 알고 있었던 예수님은 그런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그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왜 늘 예수님 믿기를 부담스러워하는지를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나처럼 일찍 정신을 차리고 욕심을 버리고 사심이 없이 예수님을 따르지 왜 사람들은 주저할까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예수님을 오래 믿고 성경을 깊이 연구하다보니까 실제 예수님은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옛날에 제가 생각했던 예수님은 옥죄이는 분이었습니다. 뭔가 인간의 인간됨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시고 부인하시고 또 사람을 바꾸려고 하시고 사람의 인간됨을 벗겨버리고 경건한 존재로 바꾸려는 그런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연히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없지요. 주는 것보다 빼앗는 게 많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람들이 교회에 많이 오는 것은 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가 성경을 연구하면서 특별히 복음서의 예수님의 말씀, 행적을 깊이 연구하면서 예수님이 반드시 그런 분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 편에 서서 사람을 비판하고 야단치고 사람을 재촉하는 그런 분이 아니고 반대로 인간 편에 서서 인간을 이해하시고 긍휼히 여기시고 변호하시고 하나님 앞에서 인간을 대변하고자 하는, 문자 그대로 인류를 섬기러 오신 분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것뿐만이 아니고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얽매고 있는 많은 것에 대해서 통탄하게 생각하시고 그것들로부터 사람을 자유하게 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무엇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시기를 원하셨느냐 하면 

첫째는 자연의 횡포로부터입니다. 질병, 죽음, 풍랑, 가난, 이런 자연의 횡포 앞에서 예수님은 맞서셨습니다. 그래서 병자를 고쳐주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풍랑을 꾸짖으시고 가난한 자를 먹이셨습니다. 

또한 인간의 인간에 대한 횡포로부터 사람을 자유케 해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부자의 가난한 자에 대한 횡포, 남자의 여자에 대한 횡포, 유대인의 이방인에 대한 횡포, 의인의 죄인에 대한 횡포. 그래서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을 찾아가시고 병든 자들을 고치시고 여성과 죄인과 이방인을 환영하셨습니다. 창기와 세리가 바리새인보다 먼저 천국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또한 예수님은 종교의 횡포로부터 사람을 자유케 해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이게 제일 중요한데 제일 덜 알려진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종교인들이 백성을 억압하고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을 지워주고 천국 가는 길을 막고 위선을 조장하고 천국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고 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보시는 백성의 모습은 목자 없는 양과 같다고 했습니다. 이 도령이 변 사또의 횡포로부터 춘향이를 구해주고자 했던 것처럼 예수님은 이런 모든 횡포로부터 인류를 구원해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참모습입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러한 면에 대해서 잘 알고 있지 못합니다. 예수께서 인간을 자유케 하신다는 말은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현대인의 발전을 가능하게 하신 분이라고 보면 됩니다. 다시 말하면 오랜 세월동안 인류를 지배했던 미신, 무지, 편견, 두려움으로부터 인류를 해방시켜서 인간의 존엄성, 인간의 가치를 확인하고 환경의 지배를 극복하고 운명의 족쇄를 극복하고 신앙적인 면 뿐만이 아니고 정치, 경제, 문화, 과학, 모든 면에 진보를 이룰 수 있는 바탕을 예수님이 마련하신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관심사는 정치, 경제, 문화 이런 데에는 직접적인 관심은 없으셨지만 정신적인 차원에서 인간을 자유하게 했더니 그 이외의 부분에 발전이 이루어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영화 캐스트 어웨이를 보면 주인공 톰 행크스가 타고 가던 비행기가 바다에 불시착해서 톰 행크스가 무인도에 홀로 살아남습니다. 현대판 로빈슨 크루소입니다. 그래서 그는 비행기에서 떨어진 물건을 이용해서 살아가는데 예를 들어 피겨 스케이트의 날로 야자수를 깬다든가 또 통증이 있는 이를 스케이트 날로 뽑는 장면이 인상적이지요. 

톰 행크스가 뗏목을 만들어서 이 무인도를 벗어나려고 하는데 매번 파도가 그를 다시 섬으로 돌아오게 합니다. 그 파도의 힘을 극복할 수가 없습니다. 개인의 힘으로는 무인도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가 뗏목에 조립식 가건물의 벽을 돛대로 사용해서 팔로 뗏목을 젓는 게 아니라 바람의 힘을 이용했더니 파도의 힘을 극복해서 망망대해로 벗어나는 데에 성공하고 지나가는 화물선에 구조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인류에게 예수님은 그 돛대와도 같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이 섬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애쓰고 애쓰지만 운명의 파도가 다시 사람을 섬으로 돌아오게 하는데 인간을 가두어 두었던 섬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러한 예수님의 정신을 가장 잘 포함하고 있는 성경구절 중의 하나가 바로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믿음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이것이 인간의 자유함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얘기냐. 예수님이 이루고자 하시는 인간의 자유는 혁명을 통한 것이 아니고 개혁을 통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없는 자유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루고자 하시는 자유는 하나님이 있는 자유요, 믿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자유, 믿음의 능력으로 인간의 불가능, 두려움 ․ 인간의 죄, 운명의 족쇄를 극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가르침을 전하신 분은 인류 역사상 예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인류 역사상 많은 철학자와 현자와 사상가가 있었지만 오늘 이 본문 같은 말씀을 가르치신 분은 예수님이 유일합니다.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여기에 계속 등장하는 단어를 주목해야 됩니다. 이루리라, 되리라, 그대로 되리라, 이런 단어를 사용한 사람이 어디 또 있습니까. 이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인간의 영혼을 새처럼 자유하게 하는 길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은 늘 안 된다, 못한다, 어렵다, 어림없다, 안 이루어진다는 벽에 갇혀서 삽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루는 길, 될 수 있는 길, 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셨습니다. 그게 바로 믿음을 통한 것입니다. 이것이 평범하게 보이지만 어느 누구도 말하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제시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은 이상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기 때문에 믿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고 경험하고 그리고 그 예수님을 바로 전한다면 이 세대에 알고도 예수님을 거부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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