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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께 스카우트된 사람들 (마 4:18-22, 룻 1: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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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스카우트된 사람들 (마 4:18-22, 룻 1:15-18)

유망한 선수나 연예인· 인재 등을 물색하여 뽑는 일을 ‘스카우트’라고 합니다. IMF가 발생했을 때 유행어가 많이 떠돌아 다녔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이태백’입니다. 이는 ‘이십대 태반이 백수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단어는 요즘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요즘처럼 일자리를 구하기가 어려운 이때에 회사에 취직을 하게 되거나 어떤 일자리를 놓고 선택을 받았다면 이것은 굉장한 사건입니다. 스포츠 회사가 선수를 스카우트할 때도 무조건 훌륭하다고 해서 다 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 가지 구비조건에 맞아야 합니다. 하나님도 무조건 스카우트해서 쓰지 않았습니다. 적재적소에 맞는 사람을 스카우트했습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 3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는 ‘존 뉴턴’이라는 목사님이 지으신 노래입니다. 이 목사님 원래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잡아다가 백인들에게 파는 노예상인으로, 못된 일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어 중생하고 나서는 자신의 삶과 신앙을 고백한 가사를 썼습니다. 부흥회를 인도하고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목사님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 함께 은혜를 나누던 한 성도가 뉴턴 목사님께 물었다고 합니다. “목사님, 만일에 하나님께서 목사님에게 단 하나의 선택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신다면 무엇을 구하겠습니까?” 이때 뉴턴 목사님은 대답하기를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선택해 주시기를 요구하겠습니다.”라고 놀라운 답변을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나의 필요도 아시고 나의 약함도 아시며 나의 미래까지도 아시니 하나님께서 선택해 주시기를 맡기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선택하실 때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구약의 말씀에는 룻이 스카우트 받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고,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으로부터 제자로 스카우트 당하는 네 사람에 대한 내용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좋은 회사, 즉 좋은 직장에 입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직장도 역시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으로부터 스카우트 받는 사람이 될 까요? 오늘 읽은 본문과 성경 여러 곳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맡은 일에 생명 걸고 충성으로 감당할 사람을 스카우트했습니다. 

성경에서 홍수시대에 제일 먼저 하나님께 스카우트 받은 사람은 ‘노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께서 죄악이 관영한 세상을 심판하시려고 하면서도 창조하신 인간 가운데 선택받아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기 위해서는 심판가운데도 구원받는 사람들이 필요했습니다. 그동안 사람들은 여전히 먹고 마시고 즐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홍수로 인해 심판받을 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였습니다. 

홍수의 심판 가운데에서 살아날 수 있는 방법은 배를 만들어 그 안에 들어가는 길밖에 없습니다. 당시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방주를 짓는데 온갖 수모와 조롱을 다 받아가면서 방주를 지었습니다. 건조기간이 약120년 정도 소요되었는데 항구에 배를 지은 것이 아니라 산위에 건조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동안 받은 수모를 생각해 보세요.  

창세기 7:5절에 보면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칭함을 받았지만 오랜 세월동안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도 그것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건조할 수 있는 사람은 노아밖에 없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리고 여러분의 자녀들도 믿음의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삶을 방해하고 온갖 조롱과 무시함을 받는다 할지라도 노아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말씀에 생명 걸고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하나님으로부터 스카우트 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스카우트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 한번도 ‘왜요?’라는 반문이 없었습니다. 창세기12장에 보면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어서 4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다고 했습니다. 말씀에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5절에 보면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는 것은 힘든 여정을 극복하고 들어갔다는 의미입니다. 가는 길이 어려웠지만 결국은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기 위해서는 어려가지 우여곡절을 극복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사무엘상 16~17장에 보면 다윗이 스카우트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이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그를 버렸고 다음으로 2대 왕을 세우려고 할 때 이새의 아들 중에서 세우라고 하셨습니다.

사무엘이 이새를 찾아가서 아들 중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스카우트 받을 사람이 있다고 하면서 장남부터 사무엘 앞으로 다가오게 했습니다. 사무엘이 이새의 맏아들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앞에 있도다.”라고 생각하면서 기름을 부으려고 하는데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이새가 둘째 아비나답, 셋째 삼마, 그리고 아들 일곱을 다 사무엘 앞으로 지나가게 했으나 하나님께서는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이새에게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이새는 막내가 남았는데 그는 양을 지키고 있다고 했습니다. 

사무엘이 사람을 보내어 빨리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이새는 사람을 보내어 다윗을 데려오니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다웠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어떤 면을 보고 그를 스카우트했을까요? 

사무엘상 17장에 보면 다윗의 용맹스러운 모습, 생명 걸고 나라를 건져낸 경험을 가진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의 형님 세 사람은 사울 왕을 따라서 블레셋과 전쟁하러 나갔습니다. 반면에 다른 형님 네 명은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다만 막내 다윗은 베들레헴에서 그의 아버지의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양치는 소년으로서 사명을 잘 감당했습니다. 생명을 걸고 자신의 직무에 충실하여 끝까지 양을 잘 지켰습니다. 

그리고 골리앗과 전쟁하기 위해 사울왕 앞에 나아가 17:34-35절에 보면,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다윗은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신의 생명의 위협을 감수하면서까지 양을 지킨 충성스러운 다윗을 스카우트 해놓으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자신의 생명을 걸고 헌신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을 스카우트 하신 것입니다. 

여인 중에 하나님으로부터 스카우트 당한 사람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룻’입니다. 룻은 할례 받지 못한 이방의 모압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마태복음1장에 보면 룻이 예수님의 족보반열에 올라갔습니다. 보아스를 만나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오벳’입니다. 

‘오벳’은 이새의 아버지요, 다윗 왕의 할아버지입니다. 이렇게 된 배경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는 ‘나오미’의 며느리로서 오직 끝까지 감당했습니다. ‘나오미’가 고국으로 돌아올 때 친정 부모가 있는 모압에 그대로 있으라고 해도 듣지 않고 ‘어머니가 가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가 머무는 곳에 나도 머물고,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요,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입니다’라고 하면서 어머니가 죽어 묻히는 곳에 자신도 죽어 묻히겠다’고 했습니다. 자기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벌을 내리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룻이 굳게 결심함을 보고 결국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갔고 거기서 룻은 보아스를 만났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육신의 사명인 며느리의 역할을 어떤 희생이 주어지더라도 상관하지 않고 끝까지 감당했을 때 하나님에게 스카우트 당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오늘 신약의 말씀인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을 보시기 바랍니다. 갈릴리에서 고기 잡는 어부의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을 예수님께서 찾아가서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고 부르셨습니다. 이 네 사람을 보면 예수님의 부름에 아무런 조건 없이 순종했습니다. 핑계가 없었습니다. 궁금증도 없었습니다. 그냥 그대로 순종하여 따라나섰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베드로를 통해서는 무려 하루에 3천명이나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정말 훌륭한 어부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일생을 믿음으로 살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스카우트를 받는 기회를 가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회에서든 직장에서든 학교에서든 맡은 일에 생명 걸고 충성스럽게 감당함으로 꼭 쓰임 받고 하나님께도 이런 자세로 헌신하다가 스카우트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여러분의 자녀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스카우트 받을 수 있도록 맡은 일에 생명 걸고 믿음으로 충성하는 삶을 살도록 양육하시기 바랍니다. 


2. 끝까지 충성할 사람을 스카우트했습니다. 

아이들의 옷을 벗기는 경우가 각각 다릅니다. 엄마가 맛있는 것을 주거나 좋은 옷을 싸다 주면서 갈아입으라고 해서 옷을 벗는 것은 ‘순종’입니다. 의사가 진찰하려고 옷을 벗으라고 해서 싫지만 벗는 것은 ‘복종’입니다. 강도가 들어와 옷을 벗어라고 명령하면서 ‘안 벗으면 죽인다’는 말을 듣고 위협에 못 이겨 벗는 것은 ‘맹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순종하고 복종하는 사람도 원하시지만 때로는 단순한 순종이나 복종을 넘어 맹종하는 충성스러운 사람을 들어 사용하십니다. 

‘노아’의 경우 하나님께서는 방주를 아라랏산 산꼭대기에서 건조하게 했습니다. 그것은 노아의 경험과 이성에는 전혀 이치에 맞지 않았습니다. 그곳에 건조해서 배를 바다나 강에 띄울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노아는 배를 하나님께서 명령하신대로 행하였습니다. 그것도 120년 동안 그렇게 건조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맹종입니다. 순종과 복종을 뛰어넘는 맹종적으로 따랐습니다. 덮어놓고 따르는 것을 ‘맹종’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이치에 맞기 때문에 순종한 아닙니다. 이치에 전혀 맞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시행한 것은 ‘맹종’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노아가 이런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자세가 있었기에 인류가 죄로 다 망하는데 선택받아 구원받을 수 있는 도구로 스카우트되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를 봅시다.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불렀을 때 ‘왜?’ 라는 말이 없었습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살 때 하나님이 오셔서 불렀습니다. 그때도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변명을 하거나 왜 불렀느냐고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대로 맹종하여 하란으로 갔다가 그곳에서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으로 가서 제물로 바치라고 할 때 사흘 길을 갔다가 다시 사흘 길을 돌아옵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몇 가지 있습니다. 우선은 아들 이삭과 산으로 떠날 때 아내 사라가 전혀 등장하지 않고 있습니다.

부성애보다는 모성애가 강합니다. 짐승들도 그렇습니다. 원숭이를 실험했습니다. 엄마 원숭이와 새끼 원숭이를 뜨거운 불판에 올려놓았다고 합니다. 엄마 원숭이는 타죽으면서 새끼를 올려놓았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원숭이는 새끼 원숭이 위에 올라가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오로지 맹종했습니다. 아들을 죽여 제물로 바치라는 것에 대해 이유를 달지 않고 그대로 진행하는 것은 맹종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앞에서 살펴본 ‘룻’의 삶을 봅시다. 그가 며느리의 사명을 생명 걸고 감당했습니다만 거기에는 어머니의 말씀에 절대적 순종, 아니 맹종이 있었습니다. 시어머니가 보아스의 타작마당에 몰래가서 저녁에 보아스가 자는 잠자리에 들어가서 발치에 누워있으라고 시켰습니다. 그 말을 들은 룻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룻이 시어머니에게 이르되 어머니의 말씀대로 내가 다 행하리이다”(룻기3:5). 그리고 6 절에 보면 “그가 타작마당으로 내려가서 시어머니의 명령대로 다 하니라.”고 했습니다. 내용을 보면 그것을 거절할 수 있는 내용이지만 룻은 시어머님의 말씀에 맹종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방 여인으로서 예수님의 조상의 반열에 들어가도록 스카우트 당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맹종했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를 향하여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마태복음 4:20절에 보면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지체 없이 따랐습니다. 지체 없이 따라나선 것은 맹종입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아버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22절에 보면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도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따랐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맹종입니다. 

‘성 어그스틴’의 전집에 보면 제자가 되려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찾아온 사람 다 제자로 삼을 수 없어서 그 중에서 골라야 하는데 궁리를 하다가 지혜가 떠올랐습니다. 

배추를 한 포기씩 나눠주면서 배추가 잘 살 수 있도록 거꾸로 심으라고 했습니다. 모두들 나가서 배추를 심었습니다. 그런데 다들 위대한 스승을 삼기 위해 온 사람들이라 모두가 배추를 바로 심었습니다. 유독 한 사람이 배추를 거꾸로 심었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배추를 거꾸로 심어도 잘 살겠느냐고 했더니 그것은 모르지만 명령대로 했을 뿐입니다. 어거스틴은 바로 그 사람을 제자로 삼았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순종’과 ‘복종’보다 ‘맹종’까지 있어야 그런 사람을 사용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 다 옳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연히 맹종까지 해야 합니다. 

이유나 핑계를 대지 말아야 합니다. 환경을 탓하지 말아야 합니다. 시대를 탓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들도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맹종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자녀들도 하나님의 말씀에 맹종하도록 양육하십시오. 여러분에게도 이런 영광스런 하나님의 스카우트를 받는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3. 사명을 위하여 자기 것을 포기할 줄 아는 사람을 스카우트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기까지 포기한 것이 많습니다. 고향, 고국을 포기했습니다. 가족도 포기했습니다. 자기 권리도 포기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왔을 때 조카 롯과 같이 살다가 이제는 더 이상 같이 살 수 없을 만큼 재산이 증식되어서 서로가 나누어져 살아야 할 때 아브라함은 큰 아버지로서의 얼마든지 먼저 좋은 땅을 선택할 수 있었지만 롯에게 먼저 선택권을 주었습니다. 특히 100세에 얻은 아들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포기했습니다. 모리아산에 가서 제물로 바치라고 했을 때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이것은 자기포기가 안되면 어려운 일입니다. 자기 것을 포기할 줄 알 때 하나님은 큰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여호와이레의 역사를 경험하게 하십니다.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스카우트 당한 것은 결국 자기의 것을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궁중을 포기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히11:24-25). 

앞에서 살펴본 룻이 무엇을 포기했습니까? 역시 자기를 낳아 길러주셨던 친정 부모를 포기했습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야기입니까? 

우리나라는 시어른들에 대한 알레르기반응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은데 며느리들이 룻과 같은 태도와 생각을 갖고 대한다는 것이 쉽지 않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나오미처럼 처신하고 헌신하고 희생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룻은 자신을 위한 모든 삶을 포기했습니다. 고향을 포기했습니다. 친구들도 포기했습니다. 며느리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자신의 곁에 두고 있으면 좋은 것을 다 포기하고 낯선 땅으로 시어머니의 신앙을 따르고 시어머니가 사는 땅 베들레헴에 따라갔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의 족보 반열에 들어가 예수님의 족보에 등장하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오늘 신약의 말씀에 등장하는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은 가족과 생업까지도 포기했습니다. 이들은 그물과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위하여 자기의 것을 포기할 줄 아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자기의 것을 포기하는 자를 스카우트 하시는 것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으로부터 스카우트 된 것은 세상에서 가장 귀하게 여겼던 가말리엘 문하생으로서의 지식과, 힘의 상징이었던 로마시민권과 얼마든지 누릴 수 있는 부를 오직 복음을 위하여 배설물로 여기고 포기해 버렸습니다. 심지어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위해 결혼까지도 포기해버렸습니다. 

오직 주님을 아는 것이 가장 고상한 지식임을 깨달은 후에는 그동안 좋아하고 추구했던 모든 것을 다 포기했습니다. 편안함도 포기하고 오직 복음전파에만 매진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나의 육신을 위한 편안함을 포기하고 구원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잠을 포기하고 영혼구원을 위해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안락함을 포기하고 주님을 위해 십자가를 지는 거친 길을 걸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크리스천은 지원병이 아니라 군인으로 마라면 차출된 ‘징병인’인 셈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차출된 것을 알고 맡겨진 사명을 위해 전심전력하기 위해 나를 위해 유익이 되더라도 주님을 위해 손해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두 젊은이가 도박장으로 가는 길에 마침 교회 앞을 지나게 됐다. 교회 게시판에는 '죄의 값은 사망'이라는 설교 제목이 붙어 있었습니다. 한 젊은이는 교회로 가고 싶어 옆의 친구를 끌어당겼다. 하지만 친구는 완강히 거절하며 도박장으로 갔습니다. 그로부터 30년 세월이 흐른 어느 날 감옥에서 한 죄수가 신문을 펼쳐든 채 엉엉 울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날 신문에는 대통령 취임 기사로 꽉 차 있었습니다. 

신문을 읽으며 엉엉 울고 있는 죄수는 30년 전 도박장으로 간 젊은이였고, 신문에 기사화된 취임 대통령은 교회로 간 젊은이였습니다. 미국의 22, 24대 대통령을 지낸 그로버 클리블랜드 대통령의 이야기입니다. 인생은 선택에 의해 결정됩니다. 믿음도 선택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신앙은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을 받는 것입니다. 교회에 가고 싶을 때, 헌신할 마음이 생길 때, 신앙을 요청받았을 때가 곧 선택받는 기회이며 자신이 선택할 기회이기도 합니다. 

오늘 헌신예배를 드리는 남직원 여러분과 성도 여러분! 항상 하나님으로부터 스카우트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자녀들도 하나님께 스카우트 받을 수 있도록, 맡은 사명 생명 걸고 감당하도록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맹종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하여 자신이 가진 것과 누릴 것을 포기할 줄 알도록 신앙의 훈련을 시키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과 여러분의 후손들이 하나님께 스카우트 받아 귀한 사역에 쓰임을 받는 복된 삶이되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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