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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왕중왕의 복음(4) : 사람들의 어부 (막 1: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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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중왕의 복음(4) : 사람들의 어부 (막 1:14-20)
 
몇 주 전 월요일 청도 강에 물고기 잡으러 갔습니다. 낚시 줄 끝에 떡밥을 달고 그 위에 아주 작은 낚시 바늘이 6개 달려 있는 낚시를 물에 던졌습니다. 한 마리도 잡히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안 되겠구나!” 생각하다가 물이 쫄쫄 흐르는 얕은 곳에 던져 보았습니다.

던지자마자 피라미들이 올라오는데 손맛도 좋고 기분도 좋았습니다. 물고기가 안 잡힐 때는 덤덤하더니, 물고기가 연거푸 올라오니까 감사가 절로 터져 나왔습니다. 피라미도 나오고 무지개무늬가 들어 있는 먹주도 나왔습니다. 피라미의 10배 이상 큰 고기도 서너 마리 잡히고, 은어도 한 마리 잡혔습니다. 두 시간에 쉰다섯 마리를 잡았습니다. 짧은 시간에 잡은 고기로는 평생 제일 많이 잡았습니다. 모든 스트레스가 다 날아가는 것 같았습니다.

본문은 물고기 잡는 내용입니다. 본문 17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시몬과 안드레 형제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를 따라 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사람을 낚는 어부”라는 표현은 마치 낚시로 사람들을 낚아 올리는 느낌을 주지만, 헬라어 원문에는 “낚는”이란 단어가 없습니다. 원문은 고기 잡는 방법을 암시하지 않고, 그냥 “사람들의 어부들”(할리에이스 안쓰로폰)로 나옵니다.

하나님은 구약 성경에서 어부 비유를 사용하실 때에는 주로 심판의 의미로 사용하셨습니다. 예레미야 16장 16-17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보라 내가 많은 어부를 불러다가 그들을 낚게 하며... 그들의 죄악이 내 목전에서 숨겨지지 못함이라.” 하나님은 이 말씀에서 죄인들을 심판하신다는 의미로 어부들이 사람들을 물고기처럼 잡는다고 하셨습니다(겔 29:4; 38:4; 암 4:2; 합 1:14-17 참조).

본문에서 “사람들의 어부”는 심판의 의미로 사용된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어부”란 사람들을 죄와 심판의 물에서 건져내어 주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어부”라는 표현을 사용하신 것은 사람들이 죄와 심판의 물에 빠져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신 것입니다. 정말 사람들이 죄와 심판의 물에 빠져 죽어가고 있습니까?

집중 호우로 재난을 당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느 리포터의 보도를 들어봅시다. 
“시간당 40mm가 넘는 폭우가 쏟아진 오늘 새벽. 산사태로 밀려든 토사가 쏟아집니다. 강원도 춘천시 신북읍의 한 야산에서 10분 간격으로 2차례 산사태가 일어나면서 펜션 등 건물 5동을 덮쳤습니다. 펜션 건물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부서져 쓸려 내려갔습니다. 일대는 아수라장으로 변했고, 펜션에서 자고 있던 39명이 매몰됐습니다.

긴급 구조작업 끝에 26명은 중경상을 입은 채 구조됐지만, 20살 이경철 씨 등 인하 대학생 10명과, 마을주민과 관광객 3명 등 13명은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대부분 깊은 잠에 빠져 있을 시간이어서 피해가 더 컸습니다.”

주민의 인터뷰도 보도되었습니다. 주민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저도 평생 살면서 사진이나 텔레비전에 나오는 남의 일만 같았지...제가 겪기로는 처음이네요.” 
우리도 재난 방송을 들을 때 같은 심정이 아닌가요? 평생 재난 보도를 읽거나 재난 방송을 들으면 남의 일처럼 여기지 않습니까? 그러나 사실 그 주민처럼 우리 중 누가 언제 재난을 당할지 알 수 없습니다. 멋진 휴양지라고 해서 지은 펜션이 산사태 쓰나미를 당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사람들은 100년 만의 폭우 재난 같은 것을 볼 때는 죽음의 위험을 느끼지만, 평소에는 천년만년 살 것 같은 착각을 합니다. 사실 죽음의 쓰나미가 지금 살아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밀려오고 있는데 말입니다. 죄와 사망의 쓰나미가 누구에게나 몰려오고 있는 이 세상에서 참으로 영원히 안전한 곳이 어디에 있을까요? 재난과 죽음과 질병과 사고와 고통으로부터 영원히 안전한 곳이 어디에 있을까요?

죄와 재난과 질병과 사고와 고통과 사망과 지옥으로부터 영원히 안전한 곳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왕국’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름부음 받으신 왕중왕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왕국’입니다.

지금 세계에서 보이는 나라는 한국 중국 일본 러시아 미국 영국 이집트 등 200여 개 국이지만, 보이지 않는 나라는 딱 두 개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왕국’이고, 다른 하나는 ‘사탄의 왕국’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6장 11절에서 사탄을 ‘세상의 왕’이라고 하셨습니다. 사탄은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지 않는 불신자들의 왕입니다. 바울은 우리도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이 세상 왕 사탄의 통치를 받아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이었다고 했습니다(엡 2:2).

사탄은 파괴의 왕입니다. 사탄은 죄를 발판으로 삼고 사람들을 파괴합니다. 미움과 원한과 복수심을 품고 회개하지 않으면 악령이 검은 물체로 휙 하면서 집안에 들어와서 가족들을 괴롭히기도 합니다. 남편에 대한 증오심과 앙심을 회개하지 않고 오래도록 품고 있으면, 악령이 불안과 공포와 불면증으로 괴롭힙니다. 사탄은 현세에서 지옥의 고통으로 마음과 가정을 파괴하다가 마침내 내세의 지옥으로 이끌고 갑니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9장에서 지옥을 “꺼지지 않는 불”이라고 하셨습니다(9:43). 예수님은 지옥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고 경고하셨고, 지옥에서는 “사람마다 불로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9:48-49). 사탄은 지옥의 불같은 고통으로 현세에서 마음과 가정과 공동체를 괴롭히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지옥 불로 괴롭힙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왕국의 왕으로서 하늘에서 이 땅까지 내려오셨고 회개의 세례를 받으심으로 죄인들인 백성들과 하나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탄 왕국의 왕 사탄과의 결투에서 승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음과 가정과 공동체를 천국의 평화와 안식과 기쁨으로 다스리십니다.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요 16:22, 24).

우리가 겪는 온갖 고통과 심지어 사망까지도 현세 천국과 내세 천국의 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빼앗아가지 못합니다. 바울 사도는 이 진리를 확신하고 이렇게 감탄했습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 8:38-39).

춘천에서 산사태로 매몰된 대학생 10명 중에 예수님을 왕으로 모신 대학생들은 잠을 자다가 “눈을 떠 보니 천국이네!”라는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지금 그들은 하늘 천국에서 지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사탄의 왕국과 하나님의 왕국, 두 왕국만이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인생을 걸고 가장 시급하게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사탄의 왕국에서 하나님의 왕국으로 건져내는 것입니다. 사탄의 왕국에서 심판의 물을 먹고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왕국으로 건져내서 예수님이 주시는 생수를 마시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사탄의 왕국에서 하나님의 왕국으로 건져내는 “사람들의 어부”가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사탄의 왕국에서 하나님의 왕국으로 사람들을 건져내는 “사람들의 어부”가 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사람들의 어부”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체포된 후에 갈릴리에서 하나님 왕국의 복음을 전하심으로 사람들을 사탄의 왕국에서 하나님의 왕국으로 건져내셨습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구약의 역사는 하나님의 왕국 도래를 고대하는 역사였습니다. 이제 드디어 하나님이 정하신 결정적인 때가 왔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하나님의 왕국이 온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시는 것은 하나님 왕국의 왕을 모시는 것이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왕국의 최후의 통첩입니다.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시던 하나님께서 최후통첩으로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 왕국의 백성이 되는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15장 탕자 비유를 보면, 집 밖의 탕자도 있고 집 안의 탕자도 있습니다. 집 밖의 탕자는 자기 몫을 받아서 아버지 집 바깥으로 나가서 탕진한 후 돼지죽으로도 배를 채울 수 없어 죽게 된 둘째 아들입니다. 집 안의 탕자는 아버지와 함께 있으면서 아버지의 재산과 환희를 마음껏 누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누리지 못하고 둘째 아들이 돌아와서 아버지의 환희를 누리는 것을 보고 시기하고 불평했던 첫째 아들입니다. 집 밖의 탕자는 자신의 죄를 깨닫고 뉘우치고 아버지께 돌아옴으로써 회개하고, 아버지의 재산과 환희를 누리는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집 안의 탕자는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고 아버지의 재산과 환희를 누리지 못했습니다.

교회 밖의 탕자도 있고, 교회 안의 탕자도 있습니다. 교회 밖의 탕자는 예수님을 믿지 않고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우상숭배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하면 하나님 왕국에서 하나님의 환희에 동참합니다. 교회 안의 탕자는 교회에 열심히 나오고 열심히 봉사하지만, 불평하고 원망하고 시기하고 경쟁할지언정 하나님의 환희를 누리지 못합니다. 교회 안의 탕자는 하나님의 환희를 누리지 못하니까,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배려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는 마음의 여유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상태에 있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버리고 멀리 떠나 사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집에 살고 있으면서도 원망과 불평과 시기와 경쟁과 미움 속에서 사십니까? 아버지를 떠난 죄를 회개하고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와서 아버지의 품에 안기면 하나님 왕국의 환희를 점점 더 크게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전하심으로써 사탄의 왕국에서 하나님의 왕국으로 사람들을 건져내시는 “사람들의 어부” 역할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의 어부”이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들의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로 “사람들의 어부”가 되게 하실 때에 본문의 제자들처럼 아버지와 품꾼들과 배와 그물, 즉 가족과 재산과 직업을 다 버리고 따르라고 하시지는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생업을 버린 풀타임 ‘어부’로 부르시고,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생업을 하는 ‘어부’로 부르십니다.

생업을 하면서 사람들을 건져내든, 생업을 버리고 사람들을 건져내든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최우선에 모시고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최우선으로 모시고 따르면서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라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의 어부”가 되어야 합니다.

저는 며칠 전 89세 되신 어르신이 예수님을 영접하시는 감격스러운 모습을 보았습니다. 몇 달 전 소천하신 부인께서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갑니다”는 491장 찬송을 좋아하셨다며, 어르신은 그 찬송을 부를 때 눈물을 줄줄 흘리셨습니다. 제가 복음을 전할 때 어르신은 바로 예수님을 영접하시고 저를 따라 영접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저도 감격했고 가족들도 감격했고, 참석자들도 감격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기도와 말씀 선포로 “사람의 어부” 역할을 한 것입니다. 거기에 감격과 환희가 있었습니다. 

조지 멕도날드(George MacDonald)의 동화 <공주와 도깨비>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주인공은 8세의 소녀입니다. 다락방에 올라가면 요정 할머니가 때때로 나타났습니다. 할머니가 어느 날 실타래로 연결된 실이 붙은 반지를 주셨습니다. 
할머니와 공주는 이런 말을 주고받았습니다. “이제 내 말 잘 들어. 네가 언제든지 위험에 빠지면 반지를 빼서 침대 베개 밑에 두렴. 너의 집게손가락을 실에 대고 어디든지 실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 가면 된다.” “할머니, 정말 재미있겠네요. 실 따라 가면 결국 할머니한테 갈 거잖아요.” “맞아. 그렇지만, 네가 볼 때 빙빙 도는 느낌일지 몰라. 그래도 실을 의심하면 안 돼. 한 가지는 분명해. 네가 실을 붙잡고 있으면 나도 그 실을 붙잡고 있다는 거.” 며칠 후 공주가 침대에 누워 있는데 도깨비들이 으르렁거리며 집으로 들어왔습니다. 공주는 반지를 빼서 침대 밑에 넣었습니다. 반지와 연결된 실에 집게손가락을 대고 실을 느꼈습니다. 실을 따라가다가 보니 바깥으로, 또 도깨비들 소굴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도깨비 동굴 안에는 돌 더미가 쌓여 있었습니다. 공주는 순간 실을 뒤로 따라가면 동굴 밖 안전한 곳으로 가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거꾸로 가려고 했더니 실 느낌이 사라졌습니다. 할머니의 실은 앞으로만 가게 되어 있었습니다. 공주는 한 바탕 짜들어 울고 난 후에 실을 따라가기 위해서 돌을 하나씩 치웠습니다. 피가 흘러도 계속 돌을 하나씩 치웠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어떤 음성을 들었습니다. 도깨비 동굴에 갇힌 친구의 음성이었습니다. 친구도 놀라서 “야, 너, 어떻게 이리 들어왔어?”

할머니가 인도해서 왔다고 한 후, 돌을 다 치우고 이제 구멍이 생겨 실을 따라가려고 하는데, 친구는 동굴 바깥으로 점점 더 기어 올라가고, 공주는 동굴 속을 더 깊이 들어갔습니다. “공주, 어디로 가? 거긴 아니야. 거긴 내가 바깥으로 나올 때 빠져나오기 힘들었던 곳이야.” “나도 알아. 그러나 내 실이 인도하는 곳이야. 나는 실을 따라가야 해.” 할머니를 믿는다면, 실도 믿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나를 따라 와. 내가 너와 함께 여행을 할 거야. 좌로도 우로도 가지 말라. 앞에 있는 나를 보고 따라오기만 하면 돼. 날 믿고, 나를 바짝 따라 와. 아무리 실망스러운 일과 억울한 일을 만나도 뒤도 돌아보지 말고, 포기하지도 말고, 나를 따라 와야 해. ‘세상에 왜 나를 이런 곳으로 인도하십니까?’라는 생각이 들 때도 넌 나를 믿고 따라와야 해.”

우리는 “사람들의 어부”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어부”이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최우선에 모시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아무리 험악하고 실망스러운 일을 당해도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지 않아도 우리는 끝까지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실을 잡고 앞으로만 나가야 했던 공주처럼 우리는 말씀을 붙잡고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끝까지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라갈 때에 왕중왕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최악에서도 최선을 이끌어내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신음소리도 들으시고 응답해 주십니다. 우리가 풍랑이 심한 바다 같은 삶을 살아도, 예수님은 깊은 바다 속처럼 고요한 안정과 평온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그윽한 안식과 평화를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환희를 체험하게 해 주십니다.

저는 낚시질 하면서 설교와 교육과 심방과 전도를 통해서 사람을 건져 올리는 생각을 합니다. 쉰다섯 마리를 잡았을 때 기분이 좋은 게 바로 그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사람들의 어부”로서 지금까지 몇 사람을 건져내셨습니까? 여러분은 89세 아버님을 건져내시기 위해서 눈물로 기도한 따님처럼 기도하면서 복음을 전하십니까?

우리는 “사람의 어부”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들의 어부”입니다. 우리의 가족 친척 친구 이웃을 죄와 사망과 지옥의 물에서 건져내는 “사람들의 어부”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어부”로서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세요.”라고 해야 합니다. 사람들을 건져내는 사명에 우리 시간과 재능과 인생을 기울이면서 하나님의 환희를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권성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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