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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귀합니다 (요 4: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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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귀합니다 (요 4:1-42)

사람에게는 영향력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긍정적인 영향력을 강하게 발휘를 하고, 어떤 사람은 부정적인 영향력을 강하게 발휘합니다. 여러분과 저는 늘 긍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만난 사람 그리고 기도하는 사람은 긍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저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주님을 만났습니다. 우리 집에서는 제가 가장 먼저 주님을 만났습니다. 저는 주님을 만난 후에 가정 구원을 위하여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루에 3번씩 가족들의 이름을 불러가며 기도했습니다. 처음에는 우리 가정이 변화될 것 같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너무나 완고하셨고, 어머니는 우상숭배에 너무 깊이 빠져 계셨습니다. 그리고 형제들은 신앙생활에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른 후 가족들을 보니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저는 목사가 되어있고, 아버지는 장로님이시고, 어머니는 권사님이시고, 큰누나도 목사가 되었고, 여동생은 선교사로 사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이 하셨는데 저를 통해서 하신 것입니다.
   
본문에는 사마리아에 수가라는 마을이 변화된 이야기가 나옵니다. 주님은 이 마을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한 여인을 사용하셨습니다. 그 여인은 행실이 좋지 않았던 여인이었습니다. 특히 남자관계가 복잡한 여인이었습니다. 남편이 다섯이나 되었고 지금 사는 남자도 자기 남편이 아닙니다. 아마도 가정 있는 남자와 눈이 맞아서 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여자가 우물가에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구세주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녀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라고 외쳤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그 여인의 외침에 놀라운 반응을 보입니다. 모두가 우물가로 가서 주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주님을 믿습니다. 여인의 외침을 통해서 주님이 역사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주님을 만나고 변화된 여인에게 긍정적인 강력한 영향력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을에서 이틀을 유하셨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처음에는 여인의 말을 듣고 주님을 믿었는데, 이틀 동안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그들의 믿음은 더욱 강해졌습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은 여인에게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설교는 본문의 내용을 통해서 주시는 몇 가지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보겠습니다. 
 
1. 주님은 모든 사람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여인은 사랑 받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여인입니다. 앞에서 말씀을 드린 것처럼 이 여인은 행실이 좋지 않은 여인이었습니다.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사는 사람도 불륜관계지 자기 남편이 아닙니다.
   
여인은 자기 자신도 자신이 부끄러웠던 것 같습니다. 6절에 보면 여인이 우물가에서 주님을 만날 때가 여섯 시쯤 되었을 때라고 나옵니다. 여섯시는 우리 시간으로 12시 정오를 말합니다.
   
사마리아 지방에서는 햇빛이 너무 강하고 기온이 높기 때문에 정오에는 사람들이 우물가에 나오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정오에 우물물을 기르러 나왔습니다. 이 여인은 사람들 보기가 낯부끄러워서 일부러 우물가에 사람들이 없을 시간에 나왔던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여인은 남들이 보기에도 부끄러운 여인이고 자기가 자기를 생각해도 부끄러운 형편없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의도적으로 그 여인을 찾아가셨습니다. 4절에 보면 “사마리아를 통과 하여야 하겠는지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에서 주님의 어떤 강력한 의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사마리아로 통과해야 된다. 통과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강력한 의지가 느껴집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사마리아가 좋지 않은 땅입니다. 예로부터 이스라엘은 북쪽의 침략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이 북쪽에서부터 침략을 받게 되면, 침략자들은 갈릴리를 거쳐서 사마리아를 거쳐서 예루살렘이 있는 유다로 갔습니다. 특히 사마리아는 침략자들이 정복자들이 되어서 그 땅에 머물렀던 일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사마리아는 자연스럽게 국제결혼이 이루어져서 국제결혼을 한 분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이 있는 유다 쪽 사람들은 사마리아 땅에 사는 사람들을 굉장히 천시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선민의식이 강합니다. 그들을 피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방인들의 피가 섞인 사마리아 사람들과는 상대도 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예루살렘에서부터 갈릴리쪽으로 볼 일이 있어서 갈 때도 사마리아라를 통과하면 빨리 갈 수 있었지만 시간이 많이 걸리더라도 일부러 돌아서 갈 정도였습니다.
   
주님은 그 여인을 만나기 위해서 일부러 사마리아를 통과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사러가게 하고는 우물가에 앉아서 그 여인을 기다리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천하게 생각하고 상종을 하지 않는 사람도 주님에게는 귀하다는 것입니다. 주님에게는 어떤 사람도 다 귀한 것입니다. 배운 사람도 귀하고 배우지 못한 사람도 귀합니다. 재산이 많은 사람도 귀하고 재산이 없는 사람도 귀합니다. 건강한 사람도 귀하고 병든 사람도 귀합니다. 권세가 있는 사람도 귀하고 권세가 없는 사람도 귀한 것입니다. 주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귀합니다.
   
사람이 천하게 사는 것은 사람이 원래 천해서가 아닙니다. 주님을 만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주님을 만나면 아무리 천한 사람도 귀하게 살게 됩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자신을 귀하게 보신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에 귀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다윈은 진화론의 창시자입니다. 그가 1833년에 자기 이론을 증명해 보겠다고 인간과 원숭이의 중간상태를 찾아서 나섰습니다. 남양군도에 간 다윈은 대단히 미개한 식인종의 무리를 발견하고 기뻐했습니다. 그들의 생활은 거의 짐승에 가까울 정도로 원시적이었으며 식인종이었습니다. 이런 종족은 결코 개화되거나 발전될 수 없는 부류의 인종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는 이들이야말로 진화론의 이론을 뒷받침할 수 있는 인간과 원숭이의 중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34년 후에 그 섬을 다시 방문할 기회가 있었을 때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섬에는 여기저기에 교회가 서 있었습니다. 원숭이도 교회를 갈 수 있나 이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학교가 서 있었습니다.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짐승 같은 식인종 야만인들이 집을 짓고 거기서 문화인처럼 살고 있습니다. 그는 30여 년 전의 식인종들이 이제는 옷을 입고 다니며 함께 모여 찬송을 부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너무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기가 막혔습니다.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그때 자세히 알아보니 패턴이라는 선교사가 그 섬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섬에 복음이 들어오자마자 사람들이 변화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잡아먹으며 짐승같이 살던 사람들이 변화되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예배자들로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본 찰스 다윈은 패턴 선교사를 보낸 영국 런던 선교회에 거액의 헌금을 보냈습니다.
   
주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귀합니다. 주님을 만나면 사람이 변화되어서 귀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2. 주님을 만나면 목마르지 않습니다. 
   
주님은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셨습니다. 여인은 주님에게 “당신은 유대인인데 어찌하여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라며 거절했습니다. 10, 13, 14절을 보면 주님은 그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사람의 몸은 70%가 물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매일 물을 마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언제나 물의 갈증이 있습니다. 인간은 물외에도 여러 가지의 갈증을 가진 존재입니다. 육적인 갈증은 물론, 문화적 갈증도 있고, 또 정신적 갈증도 있고, 영적인 갈증도 있습니다.
   
인간의 갈증은 끝이 없습니다. 마치 물을 마셔도 또 마시고 싶어지는 것처럼 무엇이든지 현재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물질의 소유도 만족하는 선이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얼마큼의 돈을 벌면 만족할까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부자는 아마 록펠러일 것입니다. 한번은 어떤 신문 기자가 록 펠러를 찾아와서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당신은 얼마큼 돈을 벌어야 만족하십니까?” 이 때 록펠러가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조금만 더”
   
어느 분이 신앙생활을 시작하면서 기도 제목이 하나 생겼습니다. 예전에는 화장실이 집 밖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친구 집에 갔다가 화장실이 집안에 수세식으로 잘 만들어진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새벽기도를 하면서 “하나님, 저도 화장실이 집 안에 있는 집으로 이사하고 싶습니다”라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후에 그가 기도하던 대로 화장실이 집 안에 있는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분이 화장실이 집 안에 있는 곳으로 이사를 하니 너무나 편리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분이 다른 친구 집에 놀러갔더니 그 집은 집 안에 화장실이 2개가 있는 것입니다. 이 분이 당장 새벽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 친구 집에 갔더니 집 안에 화장실이 2개이던데, 저도 화장실이 2개인 집으로 이사하게 해주세요.” 

이분이 그 기도 제목을 가지고 몇 년을 기도하더니 드디어 화장실이 2개인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분이 너무 좋아하는데 또 어느 날 친구 집에 놀러갔더니 그 집은 화장실이 집 안에 3개가 있었습니다. 이분은 다시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저도 화장실 3개 있는 집으로 이사하게 해주세요” 

이분은 또 몇 년 기도해서 화장실 3개있는 집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화장실 3개 있는 집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분은 오랫동안 새벽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기도는 무슨 기도였습니까? 화장실 숫자 늘리는 기도였습니다. 이분의 기도 생활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이분은 만족을 모르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렇게 만족하지 못하고 항상 갈증을 느끼며 사는 존재입니다.
   
사람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영적인 만족이 없으면 언제나 목마르게 되어 있습니다. 목마름의 대상이 다를 뿐이지 인간은 끝없는 목마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북한의 생활은 너무나 비참하다고 합니다. 북한 동포들이 남한에 오면 남한은 마치 천국처럼 좋아보인다고 합니다. 하지만 처음에는 모든 것이 좋고, 모든 것이 만족스럽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들은 또 다시 목마름을 느끼게 됩니다. 얼마 전 북한에서 귀순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남한에서의 생활이 행복한가에 대한 조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응답자 중 80%가 행복하지 못하다고 대답했습니다. 왜 그들은 지상낙원처럼 생각했던 남한 땅에서 행복하지 못할까요? 그것은 영적인 필요가 채워지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주님을 제대로 만나면 부족함이 없습니다.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환경적으로, 물질적으로 만족스러운 것이 아니라 내면의 만족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만나면 인간의 근본인 영적인 목마름이 해결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코미디언 이주일 씨가 간암으로 돌아가시기 전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을 웃기면서 자신은 한 번도 웃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세상의 우물을 찾아보았으나 안식 없이 방황하다가 죽음 앞에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죽음 직전에서야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만난 것입니다.
   
우리 자랄 때는 동네 공동수도에서 물을 받아다가 먹었습니다. 물통을 들고 줄을 길게 늘어서서 기다리다가 물을 받아서 집으로 가져가곤했습니다. 그러다가 집 안에 수도가 들어오면서 공동수도에 가서 줄서고 무거운 물통을 들고 다녀야 하는 수고가 사라졌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을 공동수도 사용하듯이 하면 안 됩니다. 집안에 있는 수도꼭지만 틀면 물이 꽐꽐 쏟아져 나오듯이 여러분 안에 생수가 터져야 합니다. 주님을 만나면 가능합니다. 주님을 제대로 만나면 언제나 만족스럽습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습니다. 
 

3. 주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주님과 수가성 여인은 오늘 처음 대면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여인을 들어다보는 것처럼 훤히 알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여인과 대화를 하시면서 남편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이 여인이 “나는 남편이 없습니다”라고 말하자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7, 18절입니다.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18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여인은 놀랐습니다. 자기의 속사정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아시는지.. 놀란 여인이 주님에게 “주여, 내가 보니 당신은 선지자 이십니다”
   
주님은 이 여인만을 아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을 아십니다. 때로는 내가 내 속을 몰라도 주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요 1장에 보면 나다나엘이라는 사람이 주님을 만나는 내용이 나옵니다. 나다나엘은 친구 빌립의 인도로 주님 앞에 나아가게 됩니다. 처음에는 주님이 나사렛 출신이라는 말을 듣고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며 무시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주님을 만나자마자 주님 앞에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의 임금’이라는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다리던 메시야라는 뜻입니다.
   
아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고 말했던 나다나엘이 이렇게 변한 것일까요? 나다나엘을 깨드린 것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나다나엘은 혼자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 시간은 나다나엘과 하나님과의 비밀스러운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던 나다나엘을 보았다고 하니 나다나엘이 ‘이분이 주님이구나’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은 나를 사실적으로 잘 아시는 것만이 아닙니다. 주님은 내 기쁨도 아시고, 내 슬픔도 아시고, 내 갈등도 아시는 분입니다.
   
이동원목사님은 참 대단히 목회를 잘하시는 분이고 설교의 대가하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분도 대학에 떨어졌었답니다. 목사님은 자기 같은 사람을 왜 떨어트렸는지 지금도 대한민국 교육부가 의심스럽답니다. 그래도 공부를 잘 했다고 늘 생각을 했는데, 촌에서 공부를 잘해서 서울에 있는 좋은 학교로 왔고, 서울 와서도 공부를 잘했는데 처음으로 시험에 떨어진 것입니다. 목사님은 너무나 황당하더랍니다. 인생이 노래 보이고, 죽어버리고 싶고. 거기다 그 무렵 목사님의 집안이 휘청거리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갑자기 행방불명이 되어 버리시고, 집이 파산상태였습니다. 

목사님은 앞길에 아무런 희망도 보이지 않아서 심신을 달래기 위해서 조계사를 찾았답니다. 그리고 불당 안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어요. 평상시에는 부처님의 얼굴이 너무나 평안해 보였답니다. 세상의 아무런 번뇌, 걱정, 근심을 모르는 얼굴로 보였답니다. 그런데 그날 방황하고 고통스럽고, 헤매고 있었던 청년 이동원에게는 부처님의 얼굴이 좀 다르게 보이더랍니다. 

갑자기 그 편안한 얼굴을 바라보다가 문뜩, 이동원 청년 속에서 문뜩, 솟아나는 질문하나가 있었습니다. 그게 뭐냐하면, ‘저 분이 내 사정을 알까? 저 분이 내 사정 알까, 저 돌 속에 편안하게 앉아계신 저분이 나를 알까? 지금 인생의 문턱에서 좌절해버리고 꺾여버린 나의 고통과 내 좌절과 내 눈물과 내 아픔을 저 분이 알까, 저분이 과연 나를 알까’ 그러다가 갑자기 부처님 뒤에 close up되는 영상 하나가 있었습니다. 청년 이동원하고는 전혀 인연이 없다고 생각했던 예수님이 갑자기 생각이 났습니다. 

몸부림치는 예수, 십자가에서 고통하고 있는 예수, 보기 흉한 예수, 젊은 예수, 그러나 십자가에 달린 그 예수님의 영상이 Close up되면서 이동원의 마음속에 문뜩 이런 질문이 솟았습니다. ‘그 분이면 알까. 아냐, 그분이면 알지 몰라. 고통 받으신 예수, 몸부림치시는 예수, 그는 알지 몰라.’ 이 문득 일어난 호기심, 예수님에 대한 목마름. 예수에 대한 호기심. 그래서 이동원 목사님은 불당에서 예수님을 만났다고 합니다.
   
주님은 다 아십니다. 우리의 기쁨도, 우리의 슬픔도, 우리의 고통도, 우리의 갈등도 다 아십니다.
   
여러분! 나를 모르는 우상을 찾아다니며 방황하지 마십시오. 나를 모르는 사람 붙잡고 매달리지 마십시오. 나를 나보다 더 잘 아시는 주님 앞에 나오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무거운 짐을 그분 앞에 내려놓으십시오. 주님은 나의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4. 주님을 만나면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수가성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 갈증을 해결한 후 어떻게 했습니까?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갔습니다. 이 여인은 주님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서 마을로 들어갔던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깨닫게 되는 것은 어떤 사람이든 정말 주님을 만났다면 그는 주님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는 것입니다.
   
수가성 여인이 주님을 만난 후 마을로 들어가서 주님을 전했더니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마을 전체가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주님을 전하는 것은 인간적인 조건과 상관없습니다. 내가 비록 세상적으로 부족하지만 그래도 주님을 전하면 역사는 주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아프리카에서 선교를 하시던 선교사님께서 어떤 원주민 할머니의 독특한 전도법을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이 할머니는 문맹에다가 시각 장애를 가지고 계신 분이셨다고 합니다. 그런 분이 어떻게 전도를 기가 막힐 정도로 잘 할 수 있었을까? 할머니의 독특한 전도법은 이러했습니다. 

할머니가 예수님을 영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선교사님을 찾아와서 대뜸 이렇게 묻는 것이었습니다. “선교사님, 요한복음 3장 16절이 성경 어디에 있습니까?” 선교사님은 영문도 모른 채 할머니의 요구대로 성경을 찾아 빨간 줄을 그어주었습니다. 그날 이후부터 할머니는 전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할머니는 날마다 학생들이 수업을 마칠 시간쯤에, 학교 정문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 학생들에게 “학생, 나 좀 도와줄 수 있겠어?”라며 말을 건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할머니가 도와달라고 하니 학생들은 거절 못하고 “뭘 도와드릴까요?”라며 다가옵니다. 

그러면 할머니는 그 학생에게 “사실은 말이야. 이 할미가 좋아하는 책이 있는데 눈이 잘 안보여서 볼 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말인데 여기 빨간 줄 쳐 놓은 부분만 좀 읽어주겠어?”라고 부탁합니다. 그러면 학생은 요한복음 3장 16절을 할머니가 잘 들을 수 있도록 또박또박 읽어줍니다. “정말 고마우이. 

그런데 학생은 방금 읽은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어?” “잘 모르겠어요.” “내가 가르쳐줄게. 이 말씀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거야. 나와 학생을 사랑하셔서 그분의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인 예수님을 주셨다는 거야. 그런데 우리가 그 예수님을 믿으면 죄를 다 용서함 받고 자녀가 되며 영생을 얻게 된단다.” 할머니의 이 독특한 전도법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을 전도했습니다.
   
진정으로 주님을 만난 사람은 성령을 받은 사람입니다. 성령님은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시며 전도와 선교에 헌신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정말 주님을만난 사람들은 성령의 역사하심 때문에 주님을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5. 주님을 아는 것은 남의 말을 듣고 아는 정도에서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내가 주님을 친히 경험하여 알아야 합니다. 
   
수가성 여인이 동네 사람들에게 주님을 소개하니 동네 사람들이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주님과 이틀을 함께 보냈습니다. 주님과 이틀을 함께 보내면서 사람들의 믿음은 처음하고는 차원이 달라졌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처음에는 여자의 말을 듣고 믿었는데, 이제는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더욱 충만한 믿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42절에 보면 동네 사람들의 고백이 나옵니다.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많은 사람들이 남의 말을 듣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이 수준에 있는 사람은 그가 교회를 얼마나 오래 다녔는지, 교회에서 어떤 직분을 받았는지, 주를 위하여 얼마나 큰일을 했는지와 상관없이 신앙의 초보입니다.
   
신앙의 깊은 세계로 들어가려면 남의 가르침을 통해서 믿는 수준을 넘어서야 합니다. 내가 직접 주님을 경험하고, 내가 직접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욥은 주님을 직접 대면한 후에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0) 그의 신앙은 귀로 듣던 신앙에서 눈으로 본 신앙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신앙도 주님에 대해서 듣기만 하던 신앙에서 눈으로 보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그럼 눈으로 보는 신앙생활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기도하고 주의 음성을 들으시고 그 음성에 순종하는 생활을 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주님이 멀리 하늘에만 계시는 분이 아니라 내 생활 속에 깊이 관여하시는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음성에 순종해서 경험한 주님에 관한 간증이하나 생각납니다. 지금 교회 식당에 있는 정수기는 저희교회에 온지 12년 정도 되었습니다. 어느 날 새벽기도회 시간에 주님께서 저에게 세미한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정수기를 하나 구입해라”, “주여! 돈이 없습니다.”, “정수기를 하나 구입해라”, “알겠습니다” 그날 저는 정수기 파는 사장님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지금은 목사님이 되신 분인데 그 당시에는 집사님이었습니다. 이분이 오셔서 저하고 대화를 하다가 두툼한 서류봉투 하나를 주셨습니다. 그 속에는 만 원짜리 지폐가 3백장이 넘게 들어 있었습니다. 이런 사건들이 귀로 듣던 하나님을 눈으로 보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성령으로 우리에게 감동 하십니다. 성령님은 세미한 음성을 들려주시면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기도하면서 주의 음성에 귀기울이고 그 음성에 순종하는 생활을 한다면 하나님이 살아계신 증거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들은 사도행전적인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오늘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정리해봅시다.
   1. 주님은 모든 사람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2. 주님을 만나면 목마르지 않습니다.
   3. 주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4. 주님을 만나면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5. 주님을 아는 것은 남의 말을 듣고 아는 정도에서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내가 주님을 친히 경험하여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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