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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새 힘을 주시는 하나님 (사 40:27-31) - 안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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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힘을 주시는 하나님 (사 40:27-31)

쉼이 필요합니다

김종록의 「장영실은 하늘을 보았다」라는 책에서 세종대왕에 관한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합니다. 조선왕조 최고의 과학자였던 장영실은 세종대왕에게 이런 말을 아룁니다. 세종이 책읽기를 너무나 좋아하기에 눈이 자주 피곤하고 눈이 나빠지는 것을 염려하면서 드린 충정어린 조언이었습니다. 

“대군마마, 독서를 장시간 하지 마십시오. 한두 시경 하신다음 잠시 쉬시고 청솔가지나 대나무 숲을 보시면서 눈의 피로를 풀어 주십시오. 녹색은 눈을 밝게 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한번 나빠진 눈은 좀처럼 회복될 수 없습니다. 더 나빠지지 않게 꼭 독서법을 고쳐보십시오.” 

너무 독서에만 몰입하지 말고, 일에만 몰두 하지 말고 가끔 쉼을 가지라는 제안입니다. 피곤함을 극복하는 삶의 지혜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 너무 바빠서 쉼을 누릴 기회를 상실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음악에는 항상 쉼표가 있습니다. 쉼표가 있어야 그 음악이 멋들어지게 드러나 우리에게 아름답게 들리는 것입니다. 만약 음악에 쉼표가 없다면 그것을 듣는 우리 귀가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래서 잠시 높은 구름도 보고 푸른 하늘도 보고 저 산과 푸르른 숲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시간이 생기면 자연 속을 걷다가 맑은 시냇가에 발을 담그고 한번 휘둘러보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너무 쉽게 일에 쫒기기 시작합니다. 일에 매몰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삶이 피곤해지고 곤고해집니다. 생각하는 기능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인생이 싫증납니다. 내가 왜 이렇게 열심히 뛰어가고 있는가를 스스로 가늠할 수 없게 됩니다. 

우리의 쉼을 방해하는 생각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피곤한 적이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때로는 일에 매몰되어 살 때가 많습니다. 피곤함에서 벗어나고 싶은데 쉼을 가지지 못할 때가 참 많습니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일수록 그렇습니다. 자기 일에 적극적으로 매달리는 사람일수록 쉼을 누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떤 생각 때문에 그럴까요?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한번 일을 시작하면 그 일을 끝날 때까지 쉬지 않고 계속할 것이다.’ 굉장히 좋은 생각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무언가 결실을 맺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강박관념처럼 우리를 누르고 있으면 쉼이 쉬이 오지 않습니다. 한 가지를 거의 끝내려고 하면 또 다른 일들이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죽을 때까지 쉴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때로 쉼을 의도적으로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짬을 내고, 공간을 만들고, 자연 속을 걸어가며 쉼을 위해서 자신을 잠깐 내려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또 하나의 생각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쉬면 나 자신이 견딜 수 없어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스스로를 게으름뱅이처럼 여기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쉼은 결코 게으름이 아닙니다. 물론 게을러서 항상 쉼을 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쉼과 게으름은 동일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 쉼을 게으름과 동일시하게 되면 우리에게는 죄책감이 생겨져서 결코 쉴 수가 없습니다. 그냥 쉼의 자리에 우리를 열어놓을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또 이런 생각도 우리의 쉼을 억누르고 있습니다. ‘쉼이란 약한 사람만 쉬는 것이지 나 같이 건강한 사람, 팔팔한 사람은 쉴 필요가 없다’ 라고 생각하여 쉼과 연약함을 일치시키려고 합니다. 그래서 쉬게 되면 ‘아, 내가 이제는 무능력자가 되었구나. 이제 내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게 되었구나’ 라고 하면서 스스로를 축소시켜 버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육체의 쉼을 허락하셨습니다

구약에 보면 가장 용감했던 사람 중 하나가 선지자 엘리야입니다. 그는 바알 선지자 450인과 1대 450으로 맞섭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들을 물리칩니다. 아주 용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이 있은 후 잠시 뒤로 물러서게 되었을 때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이제 내가 할 일이 없구나. 이제 내가 무능력자가 되었구나. 나는 쉬기만 하는 구나.’ 그러면서 어느 순간에 하나님 앞에서 원망을 합니다. “하나님, 나를 좀 데려가 주세요. 내가 죽기를 원하나이다.” 이렇게 용감했던 엘리야조차도 자살충동을 느끼면서 쉼을 거절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엘리아에게 그저 쉬라고만 말씀하십니다. 잠 좀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냥 일어나면 먹고 마시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그의 육신의 쉼을 가져다주셨습니다. 쉼이란 열심히 일한 사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하늘과 땅을 엿새 동안 정성을 들여 만드셨습니다. 하나님도 수고하고 애쓰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일곱째 날은 쉬셨습니다. 하나님이 피곤했기 때문일까요? 하나님이 힘들었기 때문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인간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들도 열심히 일하다가 쉼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기쁨에 동참하라는 것입니다. 다음에 할 일을 위해서 새롭게 충전하는 시간을 가지라고 우리에게 쉼을 허락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육체적인 쉼이란 소중한 것입니다. 

육체적 쉼뿐만 아니라 영혼의 쉼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럴 때도 있지 않습니까? 육체적으로 쉬었는데 찝찝합니다. 쉰 것 같지가 않고 힘듭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우리의 정신, 영혼과 관계가 있습니다. 영혼의 쉼과 마음의 평안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을 하면서도 불안합니다. 쉬면서도 불안합니다. 일을 해도 걱정이고 쉬어도 걱정입니다. 피곤을 푼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오래 쉬는가에 달려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어떤 마음과 어떤 태도로 쉬는가에 따라서 쉼이 우리에게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늘 피곤해 하는 이유는 단순이 휴식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진정한 휴식의 방법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휴식의 근원자인 하나님과 예수님에게 다가가지 않고 그냥 쉬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일과 쉼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며칠 전에 세상을 뜬 온누리교회의 하용조 목사님이 떠올려졌습니다. 그는 육체적으로 쉼이 부족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영적으로 하나님의 평안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대학생 때 C.C.C라는 대학선교단체에서 그를 처음 만났습니다. 그리고 장로회신학대학원에 입학해서 함께 신학을 했습니다. 그는 정말 열심히 있는 친구였습니다. 열정의 사람이었습니다. 40여 년의 세월 동안 지켜보면서 그를 한마디로 말하라고 한다면 제가 만난 사람 중에 가장 열정이 있었던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일에 몰두했습니다. 질병을 앓으면서도 어떻게 해서든지 복음을 땅 끝까지 증거하는 선교의 꿈을 가지고 거기에 목숨을 걸었던 인물이었습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었던 모든 달란트를 쏟아 부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20대 초반에 폐결핵을 앓았습니다. 계속해서 간경화를 앓았고 그것이 간암으로 확대되었습니다. 마지막 순간에는 당뇨로 일주일에 3번씩 투석을 하면서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그의 삶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저는 로이드 존슨 목사님이 「설교란 무엇인가?」에서 말한 설교의 정의를 좋아합니다. 그는 설교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Logic On Fire.” 이성으로 말하는 논리가 Logic입니다. 

그런데 그 Logic이 “On Fire”, 즉 불타는 논리라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활활 타오르는 논리가 설교라는 것입니다. 지성과 영성과 감성이 함께 들어있는 것이 바로 설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목사님은 그렇게 설교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평생의 삶 자체가 “Life On Fire”였습니다. 성령의 불꽃으로 타오르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는 교회도 그런 교회가 되기를 꿈꾸면서 65년의 생을 마감했습니다. 다 죽을 것 같아서 병원에 입원했다가도 어느 정도 지나면 다시 조금 괜찮아져서 퇴원을 했습니다. 

그때마다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목사님을 정말 사랑하시는 것 같아. 하나님께서 또 새로운 일을 주시려고 하는가봐.” 그러면 그는 자기가 다시 살아나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고 자기에 모든 에너지를 사역에 아낌없이 쏟아 부었습니다. 

자기는 에너지를 소진하면서 남에게는 에너지를 불어넣어주었습니다. 한마디로 에너자이저였습니다. 남에게도 에너지를 용솟음치게 했던 꿈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에 쉼이 없었지만 영혼의 쉼을 가지고 마지막까지 달려갔습니다.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는 지난주일 교회 강단에서 설교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밤에 쓰러졌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화요일 아침에 하나님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어떻게 하면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삶을 다 쏟아 부을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인 기쁨, 영적인 능력이 그를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의 삶을 위해서 육체적인 쉼은 물론 중요합니다. 그런데 더 큰 쉼이 필요합니다. 쉬는 것이 중요한데 정말 잘 쉬는 것이 중요합니다. 무엇이 있어야 잘 쉴 수 있을까요? 비록 아프더라도 어떻게 하면 잘 쉴 수 있을까요? 비록 가진 것이 없어도 어떻게 하면 잘 쉴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일을 하면서도 영혼의 평안이 있고 쉬면서도 가슴에 기쁨을 가지고 쉴 수 있을까요? 그것은 쉼의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 나올 때에만 가능합니다. 그때에 비로소 우리는 새로운 힘과 용기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참된 쉼의 시작입니다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랫동안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자기들의 고통이 조상들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조금 견뎌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너무 오래 지났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우리 백성은 하나님이 포기한 백성이구나. 우리 백성은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이 아니구나. 하나님의 약속은 다 사라졌구나.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버림받은 인생이구나.’ 라고 여기며 푸념하고 원망하였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용기를 가지라고 말씀합니다. 위로를 받으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새 힘을 얻으라고 말씀합니다. 

“야곱아 어찌하여 네가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이르기를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 (이사야 40:27) 

여기에서 ‘야곱’이란 이스라엘 백성들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향해서 꾸짖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아, 네가 어찌하여 여호와 앞에서 네 길이 숨겨졌다고 말하느냐? 하나님은 안 보이신다고 말하느냐? 너희들이 아무리 부르짖어도 하나님은 듣지 않는다고 말하느냐?” 

이스라엘 백성들은 스스로가 버림받았다는 의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우리는 어떨 때 슬픕니까? 어떨 때 가장 상처를 받습니까? 어떨 때 가장 가슴이 아픕니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버림을 받을 때입니다. 내가 신뢰했던 사람에게서 배반당할 때 받는 슬픔과 아픔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았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모든 가능성과 희망이 사라졌음을 처절하게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종종 어렵고 힘든 분들이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저는 목사로서 대답할 유일한 길은 한 가지 뿐입니다. “성도님,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예배를 드리세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맡기세요. 그리고 진정한 예배자가 되세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우리의 치유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참된 쉼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우리가 회복되는 길입니다. 우리는 피곤하면 하나님께 나아오지 않고 세상의 재미로 풀어보려고 합니다. 우리는 낙심하면 하나님께로 나아오지 않고 절망 속에 주저앉아서 한번 버텨보려고 합니다. 

우리는 피곤해질 때, 상처받았을 때, 무능력함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을 때 누군가에게 하소연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내 연약함을 하소연해도 나를 부끄럽게 하지 않을 친구 한두 명이 있는 것은 참 좋은 것입니다. 그런 친구는 참 멋진 친구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친구라도 한계가 있습니다. 욥이 고난 받았을 때 친구들이 찾아왔습니다. 일주일 동안 함께 통곡하면서 옆에 있어줬습니다. 그런데도 그 친구들이 위로가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누구에게 나아가야 할까요? 

우리의 진정한 친구이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에게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참된 위로가 생기고 우리의 상처가 치유될 수 있습니다. 그래야 낙심하여 기진했던 우리 속에 새 힘과 능력과 용기가 생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이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다시 알라! 다시 기억하라!”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이사야 40:28) 

하나님은 어떤 분이라고 하십니까? 하나님은 영원하신 하나님, 땅 끝까지 창조하신 창조의 하나님이십니다. 결코 피곤하지 아니하고 곤비하지 않으며 하늘의 지혜와 명철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 앞에 나아오라는 것입니다. 다른 곳에서 찾지 말라는 것입니다. 없어질 것에 대해서 찾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이사야 40:29-30) 

하나님은 피곤한 자에게 능력을 주시고 무능한 자에게 힘을 더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소년도 피곤하고 장정도 넘어지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너무 기대하지 말란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기대하면서 삽니다. 그러나 마지막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마지막 종국은 하나님을 향해서 가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요구하십니다. 인간은 피곤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아무리 귀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무너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바라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새 힘을 주십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이사야 40:31)

어떤 사람에게 새 힘을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 하나님에게 소망을 둔 자, 하나님에게 온전히 예배드리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독수리의 날개 침과 같은 새 힘과 용기를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앙망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뜻합니다. 예배란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옛 자아를 죽이는 것입니다. 내 모습 그대로를 하나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나 자신을 꽉 붙들고 매고 있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예배드릴 때에는 빗장을 걸었던 그 문을 열어놓아야 합니다. 

“하나님, 내 모습 이대로 왔습니다. 나의 부끄러운 모습 이대로 주님 앞에 보입니다. 내 속에 부정한 것들이 있습니다. 내 속에 연약한 것들이 있습니다. 내 속에 답답한 것들이 있습니다. 상처가 있고 낙심이 있습니다. 절망이 있고 슬픔과 외로움도 있습니다. 내가 갖고 있는 이 모습들 그대로를 주님께 아룁니다.” 

그때에 주님께서 내 짐을 지시고 새로운 하나님의 사람으로 우리를 조성해주십니다. 예배란 그냥 우리의 발걸음으로만 왔다 갔다 하는 시간이나 장소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토해놓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 생명과 치유와 은혜의 역사를 받는 시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주님 안에서 죽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 (시편 116:15) 

하목사님은 20대에 질병에 걸려서 오랜 시간 질병에 시달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다른 사람 같으면 수없이 낙심했을 것입니다. 자기 인생을 포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절망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하나님과 더불어 살기를 원했습니다. 

여러분, 질병에 들렸습니까? 거기에서도 하나님을 만남으로 하늘의 소망과 평안, 하늘의 힘을 얻으셔야 합니다. 건강하십니까?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새 힘과 더불어 그 건강을 바르게 사용해야 합니다. 일하고 계십니까? 마음에 평안을 가지고 일하셔야 합니다. 

쉬고 계십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쉼을 누리면서 쉬여야 참된 쉼이 될 수 있습니다. 호흡할 때에 쉼 호흡을 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성령을 받기를 열망하십시오. 호흡을 내뿜을 때에는 여러분의 모습을 주님께 아뢰십시오. 

예배를 드릴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모습 이대로 주님께 아룁니다. 이 시간 말씀과 성령으로 임재 하여 주시고, 내 속에 하나님을 만나는 즐거움을 주시고,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내게 힘과 능력이 되게 하옵소서.” 이렇게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새 힘을 받는 성도님들 한분 한분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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