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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광복절] 홍해의 광야 길 (출 13:17-14:31)

첨부 1


홍해의 광야 길 (출 13:17-14:31)


찬송가에 보면 우리의 인생을 바다에 비유하는 가사들이 많이 있습니다.
'큰 물결이 설레는 어둔 바다', '구주여 광풍이 일어', '물 건너 생명줄 던지어라', '험한 시험 물속에서' 등등 세어 나가자면 한이 없을 정도입니다.
공중의 길은 최근에 생긴 것이니 일단 접어 둔다면, 사람이 다니는 길은 전통적으로 크게 육로와 해로로 나누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을 땅 위의 길보다는 바다에 비유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은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우선 바다에는 정해진 길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지도상에는 항로라는 선으로 나타나지만 실제 바닷물 표면에 길이 그려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에 해로는 길이 닦여져 있고 포장이 되어 있으며 때로는 휴게소까지 설치되어 있는 육로와는 큰 대조를 이루게 됩니다.
바닷길의 또 한 가지 특성은 예상치 못할 위험이 항상 잠재해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큰 배라도 순식간에 침몰시킬 수 있는 암초라든지 예고 없는 풍랑이 그 잔잔한 물밑에 항상 도사리고 있는 까닭에 지진이 나지 않는 한 땅바닥 자체가 꺼지거나 흔들릴 리는 없는 땅의 길보다는 훨씬 더 위험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구원의 역사로 인하여 출애굽하게 되어 이제 가나안 복지를 향한 대장정을 내딛게 된 이스라엘 민족 역시 그런 어려운 길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여로는 사실상 '바닷길'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아무 길도 보이지 않고 이정표도 없는 '광야'를 통과해야만 했으며 '홍해'와 같은 전혀 예기치 못한 큰 위험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선민 이스라엘의 광야 행진을 어떻게 인도해 주셨습니까?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오늘날 역시 과연 어떤 성도들이 이 정처 없고 환난 많은 인생길을 가면서도 낙오하거나 파선하지 않고 끝내 '가나안 복지'에까지 입성할 수 있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의 동행하심'을 믿는 성도는 막막한 인생행로에서도 '바른 방향'으로 인도받을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길을 인도하셨던 방법이었습니다.
본문 13장 17절로 22절의 말씀에 "17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보면 뉘우쳐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18그러므로 하나님이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백성을 인도하시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항오를 지어 나올 때에 

19모세가 요셉의 해골을 취하였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케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필연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나의 해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었더라 20그들이 숙곳에서 발행하여 광야 끝 에담에 장막을 치니 21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사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으로 그들에게 비취사 주야로 진행하게 하시니 22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출애굽했던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할 때 사실 가장 가까운 지름길이 있었는데 그것이 곧 17절에 나오는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입니다.
이 길은 애굽에서 지중해 쪽의 해변을 따라 가나안까지 이어진 것으로서 실제로 고대근동사회에서 애굽과 메소포타미아를 잇는 매우 중요한 교통로였습니다.
하지만 그처럼 중요한 길인지라 거기에는 곳곳에 중무장된 애굽군의 요새들이 진을 치고 있었으며, 따라서 이스라엘 민족이 이 길을 통과하고자 하면 그들과의 힘든 전쟁들이 불가피했습니다.
"이 백성이 전쟁을 보면 뉘우쳐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행로를 그 대신에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인도하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여 가나안으로 이끄신 길은 지름길이 아니라 일부러 멀리 돌아가는 길이었으며 길다운 길이 아예 없는 광야였던 것이었습니다.
특히 지도나 나침반도 없던 당시에 이전에 한번 가 본 사람도 변변히 없는 가운데 그런 광야 길을 간다는 것은 참으로 막막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 사실은 14장 3절에서 "바로가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들이 그 땅에서 아득하여 광야에 갇힌 바 되었다"라고 기록된 말씀에서도 재차 확인됩니다.
여기 "아득하여"라고 번역된 말은 '헤매다'라는 뜻입니다.
바로가 보기에 이스라엘 백성의 행로라는 것은 문자 그대로 광야에서 '정처 없이 헤매는' 것에 불과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과연 이스라엘 백성의 행로가 그처럼 우왕좌왕하는 것이었습니까?
실제로는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길은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시는" 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셨으며 "밤에는 불 기둥으로 그들에게 비취심"으로서 실로 "주야로 진행하게" 하셨던 것이었습니다. 

그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앞에 어떤 모양으로 나타났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임재를 일깨워 주는 확실한 증거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출애굽기는 물론이며 그 외 구약 성경 여러 곳에서 '구름과 불'은 바로 그 시간 그 자리에 하나님께서 임재하고 계심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상징물임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을 낮밤으로 보게 될 때마다 그들이 광야에서 어떤 길로 행하고 있든지 간에 항상 하나님께서 동행해 주고 계신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비록 바로가 보기에는 아무도 모르는 길,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아득한 길'을 헤매고 있는 것 같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과 항상 동행해 주심을 믿는 이스라엘 백성들 자신은 더없이 확고하고 분명한 길을 "항오를 지어" 질서도 정연하게 나아가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비행기 조종사들에게 제일 위험한 것 중에 하나가 '조종사 착시 현상'입니다.
맑은 날 시계(視界)가 활짝 트인 날은 괜찮지만 흐린 날이나 어두운 밤에는 하늘과 땅 혹은 하늘과 바다 자체가 아예 잘 구분이 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조종사는 자기 비행기가 수평상태인지 거꾸로 날고 있는지조차 스스로 인식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경우일수록 조종사는 자기 눈에 보이는 것이라든지 혹은 자기 몸에 느껴지는 감각에 절대로 의존하지 말고 반드시 계기판에 나타나는 정보만을 철저히 믿어야 안전한 비행을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막막한 인생길을 가면서 만약 자기 스스로의 판단에만 의지하면 필연적으로 '착시 현상'에 빠질 수밖에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특히 우리 모두는 다들 자기가 이전에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새로운 날, 새로운 상황을 매일 접하게 되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 기독신자들은 바로 성경 말씀이라는 이 가장 정확한 '인생 계기판'만을 보면서 모든 상황을 바로 판단하고 바른 결정을 내릴 줄 알아야만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방향도 목적지도 찾을 수 없는 '광야 길'과 같은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이 인생의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들려 준 사람이 없었습니다.
역사상의 그 어느 고명한 현자도 '이런 방향으로 살아가는 것이 바른 인생이다.'라고 그 누구에게나 공감이 될 길을 보여 주지 못했으며, 그 어느 명철한 학자도 '모든 사람의 생의 마지막 목적지는 이것이 되어야 한다.'라고 시원하게 제시해 주지 못했습니다.
실로 이 지구상의 60억 인구 대부분이 그야말로 '아득하여 광야에 갇힌 바' 된 인생을 살다가 끝나고 마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루도 빠짐없이 하나님께서 자기와 동행해 주심을 바라보며 사는 성도의 걸음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똑같이 이정표가 보이지 않는 인생을 걸어가는 것 같지만, 성도의 발걸음은 세상의 그 어느 사람보다 더 밝히 더 멀리 내다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인도하심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엄마 아빠의 손을 잡고 있는 어린이가 자기는 길을 알지도 찾을 줄도 모른다고 해서 무슨 걱정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안내자가 이끄는 대로 따라다니며 관광을 즐기는 여행객이 처음 와보는 곳이라고 무슨 염려를 할 것이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항상 나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는 성도는 하루하루의 삶이 늘 올바른 방향과 분명한 목적을 향하여 나아가는 걸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 말씀을 통하여 가르쳐 주시고 '성령'의 조명을 통하여 밝혀 주시는 길을 '교회'를 중심으로 항오를 지어 함께 걸어가기만 하면 절대로 곁길로 빠지거나 낙오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때로는 그 인도하시는 길이 '내가 생각하는 지름길'이 아니라 할지라도 조금도 조바심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캄캄한 밤에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의 길 되시고 나에게 밝은 빛이 되시니 길 잃어버릴 염려 없네"(찬 502장) - 이것은 참으로 매일을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가는 삶을 체험하는 성도만이 확신 중에 부를 수 있는 찬송이 아니겠습니까?
비록 막막한 광야 같은 인생길이지만 오로지 주님과 동행하는 믿음 가운데서 그 방향과 목적을 항상 똑바로 찾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성도는 그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구원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홍해'를 만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셨던 방법이었습니다.
14장 10절 이하 14절에 "10바로가 가까와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 뒤에 미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11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 12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뇨 이르기를 우리를 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13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14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고 기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리신 열 가지 재앙으로 실컷 얻어맞은 후에야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 주었던 바로는 또 금세 마음이 변했습니다.
그는 "우리가 어찌 이스라엘을 우리를 섬김에서 놓아 보내었는고"(14:5)라고 크게 후회하면서 즉시 추격부대를 편성했습니다.
  
그것은 "특별 병거 육백승과 애굽의 모든 병거와 장관"들로 구성된 것으로서 다시 말하자면 그 당시 최신식의 무기로 무장한 최정예부대였습니다.
그 바람같이 빠른 애굽의 기동부대가 추격해 왔을 때, 공교롭게도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를 마주보고 있었습니다.
14장 9절에 기록된 장소 "바알스본 맞은편 비하히롯 곁 해변 그 장막 친 데"가 정확하게 오늘날의 어느 지점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애굽의 추격부대가 그들에게 미쳤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느 쪽으로도 탈출할 길이 없는 '막다른 골목'과 같은 지형에 숙영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당연히 이스라엘 백성들은 순식간에 공포의 도가니에 빠져들었습니다.
본문 10절부터 12절에 기록된 말씀에 보면, 그처럼 두려움에 빠진 백성들은 하나님께 부르짖고 또 모세에게는 원망을 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는 살려 달라고 부르짖으며 기도하고서는 그 하나님의 종 모세에게 와서는 온갖 악담을 퍼부었습니다.
즉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켰기 때문에 온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집단 장례식을 치르게 되었다고 모든 비난을 그에게 돌렸던 것이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모세도 정말 참담한 심경이었을 것입니다. 
그토록 천신만고 끝에 그들을 애굽에서 해방시켜서 데리고 나온 것이 엊그제 일인데 벌써부터 그 출애굽을 두고 자기에게 감사하기는커녕 욕을 퍼부어대는 백성들에게 둘러싸이게 되었으니 모세로서도 얼마나 낙심될 일이었겠습니까?
게다가 모세 또한 지금 그들에게 닥친 위급한 상황에 대하여 인간적으로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뒤에는 애굽 군대가 노도와 같이 덮쳐 오고 있었고 앞에는 좌우의 끝이 보이지 않는 홍해가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정말이지 모세라고 무슨 뾰족한 수가 있었겠습니까?
모르기는 하지만 그의 심경도 그저 캄캄했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런 사면초가의 위기 상황 속에서도 모세의 입에서는 너무나도 멋진 말이 흘러 나왔습니다.
바로 "너희는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는 말이었습니다.
모세는 그저 '가만히' 있으라고 백성들에게 말했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요동하거나 우왕좌왕하지 말고 그저 있는 자리에 가만히 서 있으라고 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말은 만사를 체념한 사람이 모든 희망을 포기하고 하는 말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 가만히 서 있을 이유는 놀랍게도 바로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구원을 보기 위함'이었습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해 주실 것을 철저히 의지하는 믿음 가운데서 가만히 서 있으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사실 이런 말을 하고 있던 모세 자신도 그 순간에는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도와주실지는 전혀 알지 못하고 있던 형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홍해 사이로 길을 만들어 이스라엘 백성을 통과시켜 주시고 애굽 군대는 그 안에서 수장시키시려는 작전을 모세에게 일러 주신 것은 그 뒤에 15절 이하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모세에게는 이때 이미 그 어떤 방법으로든지 하나님께서 그 위기를 돌파할 길을 반드시 열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자기와 이스라엘 백성이 사람의 힘으로서는 아무 대책이 없는 '독 안에 든 쥐'와 같은 환난을 만났지만, 자기네들을 여기까지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들을 구원해 주실 뿐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들이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도록"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해 친히 "싸워"서 애굽 군대를 완전히 섬멸해 주실 것까지도 철석같이 믿었던 것이었습니다.

참 얼마나 멋진, 얼마나 귀한 모세의 믿음이었습니까?
하나님은 물론 그런 모세의 믿음을 저버리실 분이 결코 아니셨습니다.
'가만히 서서 하나님께서 행해 주실 구원을 믿고 의지하는'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는 아예 그 홍해 한가운데를 활짝 열어 '마른 땅의 대로'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어지는 사건은 설명할 필요도 없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대로입니다.

오늘날 역시 이런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성도는 그 어떤 불가항력적이고도 절망적인 환난을 만나더라도 넉넉히 통과해 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길에도 '홍해'와 같은 환난은 반드시 닥쳐오게 됩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가라고 명하신 길을 가고 있는데도 때때로 그 행로에도 어처구니없는 장애물들이 가로막고 나서는 것입니다.
생전 처음으로 당해 보는 엄청난 시험, 오른쪽으로도 끝이 없고 왼쪽으로도 끝이 보이지 않는 홍해처럼 아무리 눈 씻고 찾아보아도 건너갈 길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재난이 우리의 인생 항로에 그야말로 숨어 있는 암초처럼, 예기치 못했던 풍랑처럼 닥쳐오기 마련인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 무엇보다도 우선 '입으로 원망하는 죄'를 범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차라리 신앙생활인지 뭔지 하지 않고 있을 때가 더 나았는데 괜히 교회에 나왔다."라든지, "오히려 직분을 받지 않고 교회생활할 때가 더 편했는데 왜 전도사님은 나한테 이런 부담되는 일을 시켰나?"라는 따위로 '하나님의 종'들에게 불평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 직접 원망하는 말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에 교회의 장년회 어른들을 모시고 레프팅을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배웠던 주의사항이 고무보트가 강한 물살에 흔들릴 때에 절대로 당황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보트에 타고 있는 사람들이 스스로 겁에 질려 한쪽으로 몰려 앉거나 벌떡 일어나 버린다면 그때는 진짜로 물에 빠지거나 혹은 고무보트가 완전히 전복되는 사고를 당하게 될 위험이 가중되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일수록 그 무엇보다도 모두가 다 침착하게 자기 위치를 지키고 자기 노를 꼭 붙잡고서 보트 뒤쪽에 앉아서 지휘하는 안내자를 믿고 그의 지시에 따라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신 길을 걸어가다가 환난을 만났을 때, 자신으로서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서도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에 우리는 결코 우왕좌왕하지 말아야 합니다.
바로 그때야말로 저와 여러분이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행하시는 역사'를 차분하게 기다려야 할 순간입니다.
원망하거나 당황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이제부터는 하나님께서 친히 나서셔서 이 환난 가운데서 나를 건져 주시기 위하여 전능의 도우심을 반드시 베풀어 주실 것을 기도하면서 기다릴 줄 아는 믿음을 발휘해야만 할 때인 것입니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기다리는 성도에게는 반드시 놀라운 기적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 '홍해', 도저히 길이 보이지 않는, 아니 길 같은 것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바로 그 홍해의 한가운데를 직통으로 통과하는 길을 하나님께서 보여 주십니다.
그 '애굽 군대', 신자와 교회의 힘으로서는 속수무책처럼만 보이던 세속 권력의 핍박을 살아 계신 여호와께서 친히 앞장서서 싸워 주심으로써 단 한순간에 '수장'시켜 버리시는 통쾌한 역전승을 목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위해서라면 '반석에서도 샘물이 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따지고 보면 반석만큼 물과는 거리가 먼 물질이 어디 있겠습니까?
나무 둥치에서나 땅 속에서 물이 솟아 나온다는 것은 그래도 조금이나마 기대할 수 있을 만도 하겠지만, 반석에서 물이 나온다는 것은 사람의 상식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기적을 당신의 백성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베풀어 주십니다.
"나는 심히 고단하고 영혼 매우 갈하나 나의 앞에 반석에서 샘물 나게 하시네"(찬 434장) - 우리 기독신자들은 실제로 이런 기적을 체험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바닷물' 속에 어떻게 '마른 땅'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도저히 길이 있을 수 없는 '홍해' 바로 그 한가운데에 우리가 통과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놓고 계시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는 아무 대책이 없고 피할 길이 없는 절망적인 상황을 만날 때일수록 끝까지 당황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하나님께서 행하실 구원을 믿고 기다림으로써 그 능력의 도우심을 꼭 체험하고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자기를 '태양신의 아들'로 스스로 높이던 애굽의 바로는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의 인도함을 받아 가나안으로 향하던 이스라엘을 붙잡을 길이 없었습니다.
애굽이 자랑하던 '병거와 말'로 무장한 군대는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구원'만 기다리던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의 눈앞에서 홍해의 깊은 물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말았던 것이었습니다.

내일은 '8.15 광복 66주년'을 맞이하는 날입니다.
실로 우리의 선조들 역시 일제를 대항하여 이스라엘과 똑같은 해방과 승리를 누렸지 않았습니까?
일본은 지금도 세계 제1의 '미신 국가'이지만 그때 역시 '천황'을 신으로 숭배하던 나라였습니다.
하지만 그처럼 악령의 인도를 받았던 일제는 침략국이 되었다가 결국 패전국이 된 반면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았던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끝내 일제의 압제를 벗어나 해방의 길을 찾게 되었습니다.
  
동남아 최고의 군사력을 자랑하던 일본은 마지막에 가서는 가미가제 특공대까지 투입하면서 처절한 발악을 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가미가제 특공대로 인하여 자국 병사들의 피해가 커지자 미국은 태평양 전쟁을 더 빨리 끝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 원자폭탄 개발을 서두르게 되었으며, 바로 그 결과 오로지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기다리던 옥중성도들은 집단 사형집행 예정일 딱 3일 전에 '8.15 광복'을 맞이함으로써 극적인 구원을 받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실로 '8.15 광복'은 예나 지금이나 그 어떤 '인간 최고의 힘'도 '하나님의 인도'와 '하나님의 구원'을 의지하는 믿음 앞에서는 필적할 상대조차 되지 않는 것임을 다시금 만천하에 드러낸 역사가 아니었겠습니까?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저희는 굽어 엎드러지고 우리는 일어나 바로 서도다"(시20:7-8)라는 실로 통쾌한 역전승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기다렸던 우리 신앙의 선조들에게 실제로 일어났던 것이었습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역시 당신의 택하신 백성을 '홍해의 광야 길' 가운데로 이끌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동행하심을 믿는 성도, 그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교회는 절대로 방황하거나 실패할 수가 없습니다.
'광야' 같은 인생 여로 가운데서도 늘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의 인도함을 따라 나아가야 할 '방향'을 똑바로 찾고, '홍해' 같은 역경이 앞을 가로막을 때에도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기다리는 가운데 '구원의 도우심'을 체험함으로써 끝내 저 영원한 '가나안 복지'에까지 꼭 함께 도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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