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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눅 10:2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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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이와 같이 하라 (눅 10:25-37)


패션잡지 에스콰이어의 편집자 제이콥스(A. J Jacobs)의 저서 ‘미친 척하고 성경말씀대로 살아본 1년 (The Year of Living Biblically)’ 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는 성경을 읽어가며 700여개의 계명들을 정리하여 일 년 동안 그 계명대로 실행하여 보았습니다. 성경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가를 알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그는 성경에서 ‘거짓말 하지 말라’ 는 계명을 그대로 지켰습니다. 한번은 식당에서 가족과 식사하고 나오다가 부인의 동창생을 만났습니다. 그때 상대방이 아내에게 “조만간 또 다시 봅시다” 하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가 생각해 보니 얼마 후에 다시 만날 수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것이 정직한 마음입니다. 아내의 동창에게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그럴 것 같지가 않습니다, 그러니 그냥 약속하지 말고 헤어집시다.” 그 날 아내에게 엄청난 핀잔을 들었습니다. 주일에는 뉴욕 거리를 거닐면서 주일 날 일하는 사람들에게 돌을 던졌습니다. 안식일에 일하는 자에게 돌을 던지라는 말씀대로 실행한 것입니다. 그렇게 일 년 동안 미친 척하고 말씀 그대로 실행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일 년 후에 얻은 것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기도하면서 위로받게 된 것, 자신이 얼마나 무력하고 무능하고 흠이 많은 사람인가 비로소 알게 된 것, 성경에서 안식을 찾고 기쁨을 누리게 된 것들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부작용도 느끼게 되었는데 그것은 하찮은 것에도 자주 감사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삶에 탈이 없게 해주신 수천가지의 사소한 일들에 감사하다 보니 감사에 중독이 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행하였더니 놀라운 역사를 일으켜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기적을 체험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누가복음 10장은 성숙한 제자의 삶을 나타냅니다. 본문에는 잘못된 모델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제사장과 레위인입니다. 소위 성전에서 일하는 성직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일하는 헌신하고 봉사하는 전형적 모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들의 문제를 비유를 통해 드러내셨습니다. 강도 만난 유대인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도 돕지 않고 외면하였으며 도움이 절실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외면해 버리는 모순을 드러내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특히 예수께서 지적하고자 하신 내용은 무엇입니까? 물론 성직자에게는 자신을 부정하게 만들지 말라는 율법적 규례가 있는데 특히 시체와의 접촉을 금하고 있습니다. 시체를 가까이 하거나 만지면 부정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피 묻은 몸도 접촉을 금합니다. 결국 두 사람은 하나님을 잘 섬기려는 의도로 하나님의 백성의 절박한 상황을 외면했다는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잘못을 보게 됩니다. 

본문을 통해 예수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하나로 묶는 모델로 사마리아 사람을 등장시켰습니다. 이웃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제시하시는 사마리아 사람의 모습을 통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찾아내어야 합니다. 무엇을 이와 같이 하라고 하십니까?  

첫째로 사랑하기를

일본의 여류작가 미우라 아야코(三浦綾子)는 작가가 되기 전에 구멍가게를 운영하였습니다. 장사가 너무 잘 되어 이웃가게들이 문을 닫을 정도였습니다. 어느 날 남편이 퇴근하여 집에 돌아와 말합니다. “여보, 가게가 너무 잘되어 이웃 가게들이 문을 닫으면 어떻게 하겠소? 하나님의 사랑에 어긋나는 생활이 아니오?” 이 말에 자극을 받은 그녀는 일주일에 하루 이틀 문을 닫거나 일부로 상품을 다 갖추지 않고 손님이 오면 이웃가게로 보내곤 했습니다. 그리고 남는 시간에는 틈틈이 소설을 썼습니다. 바로 ‘빙점(氷点)’ 이라는 작품입니다. 이 소설은 현상모집에 당선이 되어 가게에서 버는 수입보다 더 많은 것을 안겨주었습니다. 이웃사랑의 삶이 축복의 삶을 만든 것입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나는 하루하루를 하나님과 남을 위해 살고 싶다. 영원히 살고 싶은 것은 물론이지만, 언제 어떻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더라도 기꺼이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본문 33절입니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 만난 자를 보고도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극히 냉정한 사람들입니다. 냉정이란 머리가 차갑고 가슴도 차가운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도 강도 만난 자를 봅니다. 그러나 그는 불쌍히 여깁니다. 가능한 방법을 동원해 도왔습니다. 여기의 ‘불쌍히 여긴다’는 말은 ‘동정심을 느끼는 것’ 입니다. 즉 마음이 뜨거워지면서 불쌍한 마음이 들어 앞뒤 안 가리고 돕는 모습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가슴이 뜨거운 사랑의 사람이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유대인을 돕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에게 오랜 세월 무시 당해왔고 사람 취급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이라면 치를 떨 정도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은 편견과 민족적 감정을 뛰어 넘어 유대인을 도왔습니다. 그는 사랑의 사람이었습니다. 이웃사랑은 사람을 가려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까지 사랑할 수 있을 때 진정한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가리지 마십시오. 그 사람이 누군가 따지지 말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이 시대의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둘째로 돌아보기를 

장기려(張起呂) 박사는 평생 어렵고 가난한 이들을 섬겼던 한국의 슈바이처입니다. 그의 비문에는 유언을 따라 ‘주님을 섬기다 간 사람’ 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평북 용천에서 태어난 그는 6.25 사변 때 부인과 5남매를 북에 남겨둔 채 월남하였습니다. 부산의 교회 창고를 빌려 복음병원을 세우고 피난민과 전쟁 부상자를 돕기 시작했습니다. 1968년 우리나라 최초의 의료보험 조합을 창설했고, 1976년에 청십자병원을 설립하여 무료 진료를 하였습니다. 

장기려 박사는 평생토록 버림받은 사람과 가난한 이웃들을 무료로 치료해 주는데 여념이 없었습니다. 며느리가 해온 이불을 추운 방에서 자취하는 제자에게 보내기도 했고, 심지어 병원비가 없는 환자에게는 뒷문을 열어주며 빠져 나가게도 했습니다. 그는 늘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의 벗임을 자처하며 마치 가방 하나를 들고 출장 나온 나그네처럼 일에만 몰두하였습니다. 

그는 47년간을 수절한 외로운 신사요, 고결한 어른이요, 고아의 인자한 아버지요, 유능한 의사요, 가난한 성자로 살았습니다. 장기려 박사의 삶은 그 어떤 호칭보다도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았다는 데 그 의미가 큽니다. 어떻게 그토록 낮아질 수 있었습니까? 어떻게 평생을 가난하고 불우한 이웃의 친구가 될 수 있습니까? 비문에 적힌 바와 같이 예수 사랑이 마음속에 불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사랑이 너무도 컸기에 그 사랑을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에게 베풀며 돌아보았던 것입니다. 

본문 34절입니다.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여기의 ‘돌보아 주니라’ 라는 ‘에피멜레오마이’ 인데 접두어 ‘에피’ 는 ‘무엇을 향하여’ 라는 뜻입니다. 돌봄을 받는 대상을 향한 마음의 방향을 보여줍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만난 유대인을 사랑과 정성과 책임을 다해 돌보아주었음을 시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강도 만난 자의 참된 이웃이었습니다.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부었습니다. 주막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정성껏 돌보아주기까지 했습니다. 강도 만난 자의 필요를 채우며 돌보는 이웃이었습니다.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은 상대의 절실한 필요를 채워줄 줄 아는 사람입니다. “내가 손해 봐도 괜찮습니다. 나로 인해 당신의 필요가 채워지고 당신이 행복해진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하는 마음입니다. 또한 도움을 베풀면서 보상을 바라지 않는 마음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어떤 명예도 생각지 않았고, 사람들의 관심도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묵묵하게 자신의 일을 할 뿐이었습니다. 이웃을 돌보는 일을 했다면 알리려고 하지 마십시오. 알려지기를 기대하지도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은밀한 중에 다 보시고 아신다는 자체를 믿고 돌아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도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셋째로 실천하기를 

서강대 장영희(張英姬) 교수의 수필집 ‘문학의 숲을 거닐다’ 에 나오는 글입니다. ‘홀스또메르’ 라는 연극을 지하 소극장에서 보고 나오는 날이었습니다. 소아마비 장애를 가진 그녀에게 지하통로의 계단을 올라오는 일은 무척 힘이 들었습니다. 그 순간 연극을 끝내고 옷을 갈아입고 나오던 배우 유인촌씨가 장애인이 층계를 올라오고 있는 모습이 안 돼 보였던지 펄쩍 뛰며 사양하는 나를 들쳐 업고 층계를 올랐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밖에까지 데려다 주었던 그의 행동은 한 번 베풀어지는 행동이 아니라 몸에 밴 행동이었습니다. 장애인들은 ‘당신은 할 수 있소!’ ‘하면 된다!’ 라고 외치는 백 마디의 말보다 사소하지만 몸에 밴 행동으로 전해지는 따뜻한 사랑에서 큰 위로와 용기를 얻는다고 그녀는 강조합니다. 말보다 행동, 이론보다 실천이 감동을 이끌어내는 힘이 있습니다. 어쩌다 한 번 치기어린 행동으로 보여 지는 사랑보다 몸에 밴 습관적인 행동으로 나타난 사랑이 더 큰 감동을 자아내는 것입니다. 

본문 37절입니다.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제사장과 레위인은 율법사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토론에 익숙하고 논쟁을 일삼는 사람입니다. 한참 토론해 보고 그 결론을 따라 움직입니다. 어떤 때는 토론하다 지쳐서 토론을 위한 토론으로 끝날 때가 많습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는 것은 말만 많이 하지 말고 그대로 실천하라는 뜻입니다. 예수는 제사장과 레위인의 잘못된 문제를 지적하며 사마리아 사람은 달랐다고 말합니다. 그는 묵묵히 강도만난 사람을 도왔습니다. 사랑을 몸으로 실천했을 뿐이었습니다. 

주저하며 생각하고 결단한 뒤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나오는 행동으로 사랑을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할 대상이 누군가 따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랑한 뒤 일어날 결과를 기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사랑이 몸에 배어 자연스럽게 우러나올 수 있도록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예리한 지적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이웃의 개념을 바꾸어야 합니다. 율법사는 ‘누가 내 이웃이냐?’ 물었지만 예수께서는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고 묻고 계십니다. 내게 호감을 갖고 호의를 베푸는 자가 이웃이 아니라 나의 사랑과 관심을 필요로 하는 자가 이웃이라는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을 찾으시는 주님은 우리를 향해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고 명령하십니다. 나를 미워하는 자, 반대하는 자, 나를 함부로 대하고 무시하는 사람이라도 그 생명을 소중히 여기시기 바랍니다. 부디 영혼을 뜨겁게 사랑하고 그를 위해 다 내어주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모름지기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어 예수의 심장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을 돌아보며 오로지 행동으로 실천하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광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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