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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광복절] 터가 무너질 때 (시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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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가 무너질 때 (시 11:1-7)

요즘 많이 쓰는 단어 중에 <테크, Tech>라는 말이 있습니다. 테크라는 말은 <테크롤로지, Technology>의 줄인 말로서 전문적인 과학기술을 말합니다. 현대인의 삶은 테크놀로지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흔히 쓰는 냉장고, TV, 휴대폰 등 모든 것이 과학기술의 열매입니다. 과학기술 없는 삶을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지난 7월 5일 이런 과학기술을 비웃는 듯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서울 성동구 구의동에 있는 39층짜리 빌딩이 마치 지진에 흔들리듯이 흔들린 것입니다. 건물 안에 있던 사람들이 놀라서 대피했고, 서울시에는 건물을 일시적으로 폐쇄했습니다. 참 아이러니칼한 것은 이 건물의 이름이 <테크노마트>라는 겁니다. 거기 가면 온갖 전자제품들이 산더미같이 진열되어 팔리고 있습니다. 과학을 파는 곳, 과학의 열매를 파는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첨단 공법으로 지어진 그 건물이 흔들리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안전하다는 진단이 나와서 사람들이 다시 들어갔지만, 지난 3일에는 그 안에 있는 영화관의 천정 일부가 붕괴되었고, 11일에도 진동이 느껴져 119가 출동했다고 합니다. 저는 그 사건을 보면서 <과학도 흔들린다, 인간이 만든 모든 것이 흔들린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흔들리는 것>은 우리에게 충격을 가져다줍니다. 아직도 그 고통이 끝나지 않은 일본의 후쿠시마 대지진과 쓰나미를 기억하시지요? 땅이 갈라지고, 건물이 무너져 초토화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생명을 잃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흔들리고, 흔들리다가 무너집니다. 그게 인생살이입니다. 흔들리다가 무너지는 인생은 다윗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처음에 다윗의 생애는 매우 견고해 보였습니다. 그가 베들레헴의 어린 목동일 때 당시 최고 지도자인 사무엘이 직접 찾아와 그에게 기름을 붓고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그 후 그는 골리앗을 이기고 화려하게 백성들 앞에 등장했습니다. 그는 떠오르는 태양과 같았습니다. 

그는 군대 장군으로서 충실하게 직무를 수행했고, 백성들은 환호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사울 왕의 딸 미갈과 결혼하여 왕의 부마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베들레헴의 목동이던 때와 비교하면 상상도 못할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무엇이 부러웠겠습니까? 사울 왕은 비록 마음에 없는 말이기는 했지만, <자네 밖에 없네. 자네가 골리앗을 물리쳐 주었기에 우리나라가 유지되지 않았나? 이제 내 딸과 함께 행복하게 살면서, 내게 힘이 되어 주게...>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마음이 든든했겠지요. 

그러나 다윗의 인생의 터는 하루아침에 무너졌습니다. 그가 그렇게 사랑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고 섬겼던 왕이자 장인인 사울이 그를 죽이려고 자객을 보냈습니다. 그는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고 도망했고, 얼마 후 아내도 다른 남자에게 가 버렸습니다. 그 때부터 그는 하루살이 같은 목숨을 부지하면서 끝도 없는 도망자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성공한 것처럼 보이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가장 비참한 지경에 떨어졌습니다. 그의 인생의 터가 무너진 것입니다. <터>란 히브리어로 <솨타>라고 하는데, 기초, 터전, 지지대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게 하루아침에 무너졌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인생의 터가 무너지는 고통을 경험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몇 일 전 서울에 갔다가 35년 만에 동창을 만나 그 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듣던 중 여동생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여동생은 여고 시절에 정말 날씬하고 예뻤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 어여쁘던 아이가 시집을 가서 자식을 낳고 오순도순 살았는데, 그만 아들을 먼저 보냈고, 몇 해 후에는 남편까지 세상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이야기를 듣는 동안 중고등학교 시절 교복을 입고 긴 머리를 날리면서 교회 뜰을 뛰어가던 그 아이의 모습을 떠올랐습니다. 지금은 삶의 고통에 지친 중년 여성이 되어 있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습니다. 여러분, 이게 인생입니다. 갑자가 사랑하는 이들을 잃습니다. 재산을 잃습니다. 건강을 잃습니다. 삶의 의욕을 잃습니다. 안타깝지만 이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성도 여러분, 터가 무너질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요? 도대체 뭘 할 수 있을까요? 본문 3절을 보십시오.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 이 대목을 새번역성경으로 보면 <기초가 바닥부터 흔들리는 이 마당에 의인인들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라고 되어 있습니다. 터가 무너지면 비록 그가 의인일지라도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정말 무기력합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단 하나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도망하는 것뿐입니다. 어서 빨리 도망해야 합니다. 그것만이 살 길입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문제가 제기됩니다. 그것은 <어디로 도망할 것인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의 터가 무너질 때 어디로 피해야 할까요? 본문은 두 군데의 피난처를 제시합니다. 

그 하나는 <산>입니다. 1절 후반부를 보십시오. <너희가 내 영혼에게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찌함인가>라고 되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윗에게 권한 피난처는 산이었습니다. 예로부터 적에게 공격을 받을 때 산과 들판의 집과 농토, 성을 버리고 산으로 도망하는 것은 일반적인 관행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성이 유황불로 무너질 때, 아브라함의 조카 롯도 산으로 도망했습니다. 

그렇다면 산으로 도망하는 것이 과연 현명한 처사일까요? 여기 문제가 있습니다. 만약 사람이 새라면, 새처럼 날개가 달렸다면 높은 산으로 날아가서 우거진 숲에 은신하면 안전할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은 새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새처럼 산으로 날 수 없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산으로 피하려 한다면 그는 자신을 새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는 아직도 자신에게 날개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이미 그의 날개는 꺾인 지 오래입니다. 아직도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얼마나 연약한지 제대로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산으로 가도 안전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다윗도 사울 왕에게 쫓길 때 산으로 피신한 적이 많았습니다.사무엘상 23장, 24장을 읽어보면 산과 들로 숨어 다니는 다윗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산은 다윗에게 피난처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가 산으로 피하면 사울 왕도 산으로 그를 추격해 왔습니다. 예를 들어 사무엘상 24장 2절을 보면 <사울이 온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 명을 거느리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찾으러 들염소 바위로 갈새>라고 되어 있습니다. 결코 산도 안전한 피난처는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인생의 터가 다 무너진 다윗을 보호해준 피난처는 어디였습니까? 그 피난처는 다름 아닌 여호와 하나님이셨습니다. 사울이 산에까지 추격해 왔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보호하셨습니다. 사무엘상 23장 14절을 보십시오. <다윗이 광야의 요새에도 있었고 또 십 광야 산골에도 머물렀으므로 사울이 매일 찾되 하나님이 그를 그의 손에 넘기지 아니하시니라> 할렐루야!  사울이 매일 찾아도 하나님은 매일 다윗을 보호하셨습니다.    

다윗은 분명히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가장 안전한 곳은 하나님의 품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같은 피난처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그는 마음을 정했습니다. 남은 인생 전체를 하나님께 맡기기로 했습니다. 하나님께 숨기로 했습니다. 본문 1절 상반절은 이러한 결단을 보여줍니다.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이미 그는 여호와 하나님께로 피했습니다. 망설이거나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저는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여호와 하나님께로 피하십시오. 터가 무너질 때,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때, 어디로 가야할 지 모를 때, 여호와 하나님께 피신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피난처입니다. 

제 아버님은 97세로서 이젠 기력과 기억력이 많이 쇠하셨습니다. 저희 아버님도 인생의 터가 무너지는 경험을 하신 분입니다. 7남매를 두고 오순도순 잘 살고 계셨는데, 이 아름다운 금수강산을 피로 물들인 6.25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하루아침에 모든 게 무너졌습니다. 한 순간에 가정과 재산을 다 잃었습니다. 현대판 욥이 되었습니다. 홀로 남쪽에 오셔서 신경쇠약이 되고 살 의욕을 잃었을 때, 아버님을 붙드신 분은 하늘의 아버지 하나님이셨습니다. 

살 힘을 잃었을 때 경북 의성 목재소에서 한 겨울을 보내는 동안 교회에서 눈물로 기도하면서 살 힘을 얻었습니다. 또 서울 영락교회에 몸담으면서 살 힘을 회복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일으키셨고, 욥을 회복시키듯이 다시 가정과 자녀를 주셨습니다. 아버님은 종종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살리셨다, 하나님이 아니셨다면 너도 세상에 없었을 것이다> 

저는 아버님이 강한 분으로 저를 끔찍이 사랑하셨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어린 제게 아버님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피난처였습니다. 그러나 그 분의 연약한 모습을 뵈면서 이제 다시 한번 깨닫습니다. 그 아버님보다 천 만 배, 억만 배 안전하고 강한 피난처는 하늘의 아버지이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참 피난처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와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참 피난처가 될 수 있을까요? 본문은 그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합니다. 하나님은 계신 곳부터가 다릅니다. 여러분, 터가 무너져 내릴 때 가장 안전한 곳은 어디일까요? 그 곳은 하늘입니다. 지진으로 터가 무너져도, 쓰나미가 와서 모든 것을 쓸어가도 하늘에 떠 있는 사람은 안전합니다. 그러므로 하늘로 피해야 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하늘은 하나님의 처소입니다. 여러분, 4절 앞부분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라고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보좌는 하늘에 있습니다. 

여기서 <하늘>은 <터>와 대조되는 개념입니다. 우리는 터 위에 인생과 가정, 성공과 명예의 탑을 쌓습니다. 그런데 그 터는 순식간에 무너지고 맙니다. 그러나 터가 무너지는 그 순간에도 하늘은 변함없습니다. 하늘은 여전히 높고 푸릅니다. 땅이 굉음과 함께 갈라지는 지진의 순간에도 하늘은 고요합니다. 

성도 여러분, 하늘로 날아오르시길 기원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로 날아오르십시오. 하나님께로 피하십시오. 하나님만이 우리의 피난처이십니다. 하늘 끝 가장 높은 곳에 보좌를 펼치고 계신 하나님께로 피하시길 바랍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실존적인 문제에 부딪히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는데, 어떻게 날개도 없는 우리가 하늘에까지 날아오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가장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께로 날아가겠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염려하지 마십시오. 이런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손을 내밀어 주셨습니다. 그 손을 잡으면 우리는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손은 어디에 나타나 있습니까? 본문 4절은 매우 중요한 힌트를 줍니다. 4절을 다시 보십시오.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여기서 우리는 안심하게 됩니다. 만약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늘 보좌에 계시다고만 되어 있다면 우리는 절망하게 될 것입니다.우리는 하늘로 날아오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란 구절이 먼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왜 하늘 보좌에만 계시지 않고, 이 땅에 있는 성전에도 계십니까? 그 이유는 우리의 손을 잡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너희의 터가 무너졌느냐? 어디로 피할지 몰라 망설이느냐? 내게로 오라. 와서 내 손을 잡으라. 내 손을 잡고자 하는 자는 내 성전으로 오라! 너희가 하늘로 올라올 수는 없지만, 성전에는 올 수 있지 않느냐? 성전에 와서 내 손을 잡으라. 내가 너희를 하늘로 끌어 올리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성전으로 오십시오. 성전에서 하나님의 손을 잡으십시오. 하나님께서 그 능력의 오른손으로 우리를 하늘 보좌로 끌어올려 보호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날아오를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땅에 있는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 주시는 이런 은총의 구조>는 이미 야곱의 삶에서 발견됩니다. 야곱이 형님 에서를 피해 외삼촌 집으로 가다가 벧엘에서 잠들어 누웠을 때, 그가 가장 어려운 위기를 만났을 때, 그의 마음이 춥고 시릴 때, 하나님께서 그를 어떻게 도우셨습니까? 

당시 야곱은 하나님의 품에 피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있었습니다. 하늘로 날아올라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러했기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손을 내미셨습니다. 그가 꿈에 보니 하늘에서부터 그에게로 사다리가 내려왔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사다리 위로 하나님의 사자,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면서 그를 보호했습니다. 그가 올라갈 수 없기에 하나님의 사자가 내려와 그를 지킨 것입니다. 사다리는 하나님께서 내밀어주신 손이었습니다. <네가 내게로 오지 못하기에 내가 네게로 간다. 내 손을 너에게 내민다. 내 사자를 네게로 보내 너를 지킨다>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사다리를 붙잡으십시오. 하나님의 손을 잡으십시오. 성전으로 나아가시길 기원합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안전한 하늘로 날아오르시길 기원합니다. 

그렇다면 성전은 어디입니까? 여기서 성전은 장소적 개념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이스라엘 예루살렘으로 가야 하겠지요. 그러나 여기서 성전은 장소가 아닌 영적 상황을 말씀합니다. 

성전이란 하나님의 백성들이 무릎을 꿇는 바로 그 곳입니다. 터가 무너져 당황하는 사람들, 피할 곳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품밖에 없음을 알고 하나님께 달려 나오는 사람들이 엎드려 경배하고 찬양하고 눈물로 기도하는 그 곳이 성전입니다. 결국 오늘 우리가 예배하는 이 자리가 바로 성전입니다. 

우리가 가정에서 엎드리면 거기가 성전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목 놓아 하나님을 부르는 그 자리가 성전입니다. 땅끝교회 성도 모두가 성전에 나아가시길 기원합니다. 예배자리, 기도자리에 나아가시길 기원합니다. 거기서 믿음의 손을 내밀어 하나님의 손을 잡으시고, 그 손에 붙들려 터가 무너지더라도 걱정 없는 하늘 피난처로 날아오르시길 기원합니다. 

그 때 우리는 그 곳에서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뵙게 될 것입니다. 마치 유괴되어 고생하던 어린이가 아빠 엄마를 다시 만나 기뻐 뛰며 통곡하듯이 우리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엄마, 아빠! 나 아빠 엄마 다시 만난 거 맞지>라고 하면서 부모 품에 안겨 우는 아이처럼 될 것입니다. 그 때 부모는 <내 새끼 한 번 만져보자>고 하면서 볼을 만지고 안아줄 것입니다. 다윗은 이런 기쁨을 7절에서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 할렐루야!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은 의로운 일을 좋아하십니다. 정직한 자가 그 얼굴을 뵙는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의로운 일을 하지 못한 사람들, 정직하지 못한 죄인들은 하나님을 뵙지도 못하고 쫓겨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 정직한 사람은 도덕적이고 율법적 개념이 아닙니다. 누가 의롭습니까? 누가 정직합니까? 터가 무너질 때 자신의 힘으로 구원받을 수 없음을 인정하는 사람이 정직한 사람입니다. 자신은 새가 아님을 아는 사람이 정직한 사람입니다. 산으로 피해도 산이 자신을 숨겨줄 수 없음을 깨닫고 하나님께로 나가는 사람이 의로운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의로운 사람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로 피하는 사람입니다. 즉 믿음의 사람이 의로운 사람이요, 정직한 사람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뵈옵는 영광은 믿음의 사람에게 주어지는 특권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되길 기원합니다. 

다윗은 산으로 피하는 대신에, 여호와 하나님께로 피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그를 생명싸개로 싸셔서 숨기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피난처가 되시고, 피할 바위가 되시고, 구원의 뿔이 되어 주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그렇게 되길 원합니다. 우리가 서 있는 터를 과신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것을 믿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할 분은 영원히 흔들림도, 꺼져 내려가는 것도 없으신 만세반석이신 하나님뿐입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시편 11편을 가리켜 <견고한 자의 노래>라고 불렀습니다. 누가 견고한 자입니까? 무너지는 터를 의지하지 않고, 만세반석이신 여호와 하나님께 인생의 모든 것을 맡기는 사람, 그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이 견고한 사람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우리를 하늘 보좌로 피신시키듯 우리를 지키실 것입니다. 험난한 세상에서 이런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길 기원합니다. 

오늘은 광복절기념주일입니다. 우리나라의 피난처는 어디일까요? 주가가 폭락하는 세계 금융위기 속에서, 영원히 강대국일 것처럼 보였고 우리가 늘 의지하던 미국이란 나라의 터가 흔들리는 위기에서, 북한의 핵 위협에서, 타락한 문화의 무차별 공격 앞에서 우리가 피할 곳은 어디입니까? 대한민국의 피난처, 한국교회의 피난처도 역시 하나님의 품밖에 없습니다. 우리 개인도, 교회도, 나라도 오직 하나님 품에서 안전하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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