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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적지만 선용하기 (눅 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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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지만 선용하기 (눅 8:1-3)
  

오늘은 참 풍요한 시대입니다. 먹을 것 입을 것 쓸 것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물건이 아까운 줄 모르고 살아가기도 합니다. 아마도 지금이 유사 이래 가장 풍요한 시대가 아닐까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풍요로우니까 낭비도 많아지고 버리는 것도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한 해의 남은 음식쓰레기가 10조원이나 된다고 합니다. 10조원이면 한강다리 10개를 세우고도 남는 돈입니다. 그리고 돈도 돈이지만 이 음식쓰레기로 인한 오염의 문제도 심각하고 이것을 치우는 경비도 만만치 않습니다. 

저 북쪽의 아이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병들고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아프리카에는 물 한 모금 먹을 수 없어서 죽어가고 있는데 너무 심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너무 불공평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한쪽은 넘치고 또 한쪽은 부족해서 굶어 죽어가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버리는 것도 죄인 것입니다. 예수님도 오병이어 직후 “부스러기도 버리지 말고 주으라”고 하셨습니다. 

본문은 여제자들이 전도자들을 위해서 섬기고 선용하는 모습이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은 참 많았습니다. 

12제자들 

12제자들은 예수님이 직접 부르신 사람들입니다. 직접 각계각층에서 12명의 사람을 불러 제자를 삼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제자들의 면면을 보면 그 시대에 출중한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지극히 보통사람들을 불러서 제자를 삼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이 왜 출중한 사람들이 아닌 보통 사람들을 선택하셨을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런데 그것이 주님의 생각과 우리들의 생각의 차이점입니다. 원래 출중난 사람은 자기 과신이 강합니다. 그리고 자아가 강합니다. 

그래서 출중한 사람은 고달픈 제자의 삶을 살아가기가 어렵습니다. 제자의 덕목이 겸손이고 그 겸손에서 순종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보통사람 출신인 제자들은 처음에는 실패도 하고 후퇴도 하며 무능하게 보이기도 했지만 마지막에는 한결같이 충실하게 제자의 역할을 잘 감당한 것입니다. 물론 가룟 유다는 빼고 말입니다. 어쨌든 예수님 곁에는 이 12명의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을 극진히 섬겼습니다. 

여제자들 

이 여제자들은 예수님이 직접 부른 사람들은 아닙니다. 그냥 스스로 제자가 된 여성들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는 막달라 마리아가 으뜸이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마리아라는 이름이 많이 나옵니다. 마치 우리나라 김씨 이씨처럼 많은 이름입니다. 그래서 그 이름 앞에 막달라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 막달라라는 이름은 지명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식으로 말하면 막달라 댁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막달라 마리아는 참 기구한 여인이었습니다. 성경은 막달라 마리아가 과거에 7귀신이 들렸던 여인이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7귀신이 들렸다는 말은 정확히 7개의 귀신이 들렸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냥 최악의 상태였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일곱수를 완전수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니까 이 막달라 마리아는 한때 최악의 귀신이 들렸던 여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상상하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서 치유를 받았습니다. 최악의 상황에서 치유되어 자유하게 된 것입니다. 그 뒤로 마리아는 예수님을 따르며 주님 일행을 지극정성으로 섬기고 공궤하였습니다. 그 섬김은 분명 굉장히 열정적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섬기는 일에 그 누구보다 핵심적인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막달라 마리아는 그 후로 독보적인 행보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여인들은 사역 중에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을 가까이에서 공궤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고난당하실 때 십자가 행렬을 끝까지 따릅니다. 예수님이 운명하실 때 그 자리에도 있기도 했습니다(마태복음27장55절, 마가복음15장40절, 요한복음19장25절). 또한 시신을 매장할 때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마태복음27장61절) 심지어 안식일이 지나고 부활의 아침에는 제일 먼저 무덤으로 달려간 것도 마리아였습니다(마태복음28장1절).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 목격한 여인도 마리아였습니다(마가복음16장9절). 이쯤 되면 여기 막달라 마리아는 12제자들 보다 그 역할이 훨씬 더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주 흉악한 귀신으로부터 예수님을 만나 해방 받았으니 주저할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극정성으로 섬겼을 것입니다. 

그리고 요안나라는 여인이 나오는데 이 여인은 예수님의 부활을 천사로부터 먼저 통보 받은 여인입니다. 성경은 그 여인을 헤롯의 종 구사의 아내라고 했습니다. 그 여인의 어린 아들이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 그 아이를 고쳐주셨습니다.(요한복음4장46절) 이 요안나는 그때부터 예수님의 여제자가 되어 물질로 공궤하였습니다.

또 수산나와 다른 여성들도 나타납니다. 수산나는 백합이라는 뜻인데 이름대로 매우 친절한 여인이었을 것입니다. 그 외에도 여러 명의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이들 모두는 예수께 와서 고침 받은 여인들입니다. 질병을 고침 받고 병든 마음을 고침 받고 영적으로 고침을 받은 여인들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이렇게 고침 받는 경험과 체험이 참 중요합니다. 체험이 믿음을 더 확고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또한 믿음을 더 분명하게 하고 확실하게 함은 물론 자아상을 분명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적극적이 되게까지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특이한 것은 당시는 여성들이 인격적으로 존중받지 못할 때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인은 사람 숫자에 포함되지도 않았습니다. 성경에서조차 여성이 포함되지 않은 숫자를 기록하고 있으니 당시의 시대상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시대에 여인들을 제자로 받아들이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여성들도 남성들과 똑같이 구원받을 자격을 부여하셨고 복음의 증언자로 세우셨습니다. 이는 유대교와 전혀 다른 인식입니다. 

그런데 그 후부터 복음이 들어가는 곳마다 여성의 역할이 강화되었고 평등주의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복음이 들어오기 전까지 여성들에 대한 인식은 아주 열악했습니다. 모든 것이 남성 위주였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 복음이 들어오면서부터 여성이 해방되고 집안에서 밖으로 나오게 되고 배움의 자리로 가게 되고 자신의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여인들은 예수님의 전도사역에 공궤하는 사역을 하였습니다. 언제나 예수님의 지근에서 섬겼고 동행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동행하는 일이 마침내는 십자가의 행렬까지 그리고 무덤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여인들은 마지막에는 부활을 목격하는 은혜를 입게 되었고 그 부활의 목격자로서 그 사실을 전하는 부활의 증언자가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이 여인들에게 먼저 나타나신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그들의 공로를 인정해야 합니다. 

이렇게 이 여인들의 헌신과 섬김을 보며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은 한 가지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선용하는 생활 철학입니다. 아끼고 절약하고 섬기고 선용하는 정신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것들을 소중한 줄 알고 적절하게 선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선용할 것 몇 가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시간 선용 

이 여인들은 모두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들을 열심히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헌신의 삶을 살았고 전도의 삶을 살았으며 증거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러한 삶은 참 행복한 삶입니다. 할 일이 있다는 것 자체가 축복인데 주님을 위한 삶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사람들 중에는 할 일이 없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시간을 낭비하며 허송세월합니다. 그러다보니 탈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쁜 사람은 탈선하고 싶어도 시간이 없어서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일을 하게 하신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남는 시간을 선용해야 합니다. 

성경에서도 많은 위인들이 시간을 선용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욥바에 있는 피장 시몬의 집에 머물렀던 적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 시간이 참 무료했습니다. 그래서 그 시간에 옥상에 올라가서 기도를 하였습니다. 남는 시간을 선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 환상이 주어졌습니다. “고넬료의 집에 가서 세례를 주라”고 계시가 내린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가서 고넬료의 집안 온 식구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이방인의 집에 성령이 임하였고 그 결과 그 집이 이방선교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사도바울도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그 시간을 선용하였습니다. 그 시간에 죄수들을 찾아다니며 전도하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때에 빌레몬의 종이었던 오네시모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오네시모는 도둑질을 하고 도망하다가 붙잡혀 온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을 만나서 회개하게 됩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빌레몬이 놀라운 전도자가 된 것입니다. 또한 오네시모로 인해 사도바울의 편지들을 모아 문집을 발간하기도 한 것입니다. 

이렇게 시간을 선용하는 사람은 성공합니다. 중국의 사학자 사마천은 역적을 변호했다고 거세형을 당했습니다. 남자가 거세형을 당했으니 얼마나 상심이 크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산속으로 들어가서 깊이 묻혀 살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130권여권이 넘는 중국의 사기를 쓰게 되었습니다. 괜히 비관만 하고 있었더라면 신세를 망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주어진 시간을 선용하였기에 역사의 큰 발자취를 남기게 되었습니다. 또 중국의 손자는 발이 잘리는 사고를 당하여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사고로 비관하지 않고 앉아서 글 쓰는 일에 몰두하였습니다. 그 때 써진 책이 바로 손자병법입니다. 그도 시간을 선용한 것입니다. 또한 존 번연도 12년 동안 옥고를 겪었습니다. 그런데 그 기간 동안 천로역정을 쓰게 되었습니다. 모두가 자투리 시간을 선용한 결과입니다. 우리 주위에서도 시간의 선용의 모습이 많습니다. 여름방학 때 그리고 휴가 때 선교지에 나가 봉사하는 것도 시간을 선용하는 삶입니다. 또한 재능과 능력을 선용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 시간에 선교지에 가지 않았더라면 시간들이 다 무의미하게 사라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선용의 삶은 중요한 것입니다. 

재물 선용 

본문을 보면 이 여제자들이 자기들의 소유로 섬겼더라고 말합니다. 이 여인들은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물질로 섬겼으면 얼마나 섬겼겠습니까? 하지만 그들은 분명 자기들 힘닿는 데까지 열심히 섬겼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그 대목을 자세하게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 물질은 참 요긴한 것입니다. 그 물질을 선용하면 엄청난 결과가 주어집니다. 그러나 잘못 사용하면 화가 주어지기도 합니다. 복권의 경우가 참 좋은 예입니다. 복권을 타면 갑자기 부자가 됩니다. 아무 준비가 없이 갑자기 부자가 되니까 하나같이 타락하고 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권이 일확천금의 허황된 꿈을 가지게 하는 폐단이라고들 합니다. 이제는 나라에서도 연금복권이라는 것을 만들어 그 금액을 매월 연금으로 지급한다고 합니다. 참 잘한 것 같습니다. 이렇게 물질은 분명 좋은 것이지만 물질에는 재앙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물질을 나누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물질은 참 묘한 것입니다. 아무리 많아도 남에게 줄 것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선용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가끔 사회에 재산을 내 놓는 분들이 있습니다. 요새는 사람들이 돈이 많아서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며 겨우 그것을 내 놓는가 하고 반응을 합니다. 

그러나 단 1억의 재산을 내 놓는 것도 대단한 것입니다. 아무나 못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본문에 나오는 몇몇 여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 일행을 극진히 섬겼다고 합니다. 3절을 보면 “자기들의 소유로 주님의 일행을 섬겼다”고 합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가난한 여인들입니다. 신분으로 따지면 그 시대의 천민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구원의 감격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 일행을 극진히 섬긴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 많아서가 아닙니다. 적지만 선용할 줄 알았기에 작은 것을 모아 큰 것을 이룬 것입니다. 

그 모습이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린 것입니다. 열왕기상 17장 사르밧 과부 이야기에서도 그런 모습이 나옵니다. 당시에 가뭄이 계속되어 먹을 것이 떨어졌습니다. 너무 가난해서 마지막으로 남은 밀가루 한 접시로 음식을 해서 아들과 먹고 죽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선지자 엘리야가 왔습니다. 그러더니 먹을 것을 달라고 합니다. 밀가루가 이제 한 접시 밖에 남지 않아서 아들과 먹고 죽으려 하는데 그것을 자신을 위해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과부의 입장에서는 참 야속한 말입니다. 

그런데 그 과부는 주저하지 않고 음식을 만들어 엘리야를 공궤합니다. 이것은 말이 쉽지 참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그렇지만 그것도 시험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곳에 기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 그리스도인은 일용할 양식만 있으면 족하게 살 수 있는 철학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채움의 비법입니다. 그리고 그럴 때 내안에 기쁨으로 채워지고 위로부터 오는 은혜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용해야 합니다. 선용하지 않기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오늘의 가정의 문제들은 가난해서 발생하는 게 아니라 많아서 발생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인생 선용 

이 여인들은 어려서부터 예수를 안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인생 중반 이후에 예수를 알게 되어 고침 받고 회복 받고 회심하고 개종한 여인들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 때부터 남은 인생을 철저하게 선용하게 됩니다. 그래서 마침내 그들의 이름이 성경에 기록되기에 이릅니다. 이렇게 시간, 인생, 물질을 선용하는 것이 우리의 본분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젊었을 때는 자기와 가정을 위해서 매진합니다. 중년 때는 직장과 사업을 위해서 인생을 매진합니다. 그러다 나이 60이 넘으면 대부분 일터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사람들은 그때부터 허무를 느낍니다. 시간이 많아지니까 자기를 돌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헛살았다, 허무하다, 왜 이렇게 살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자기만을 위해 살아가느라 다른 누구를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럴 여유조차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을 위해서 무슨 큰일을 한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시간이 다 지난 후에 가서야 후회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느낀 그때부터 선용하며 살아도 늦지 않습니다. 아직 힘도 시력도 기억력도 전문지식도 남아 있습니다. 만약 그때도 선용하지 않으면 진짜 인생을 후회하게 됩니다. 

어떤 할머니는 매일 아침 7시만 되면 학교 앞 길목에서 깃발을 들고 아이들의 등교를 돌봅니다. 그것이 보람이고 행복입니다. 또 어떤 할아버지는 초등학생들을 모아놓고 오후시간에 한자를 가르칩니다. 어렵게 한자씩 익혀가는 아이들의 모습이 기쁨이 됩니다. 이것이 노년의 삶을 선용하는 것입니다. 또한 어떤 퇴직 공무원은 매일 도시락을 싸들고 구청 민원실로 출근하여 글 쓰는 것이 서툰 사람들을 위해 대필을 해주고 안내를 해 줍니다. 어떤 산림청 직원은 퇴직 후에 매일 산으로 올라가 오물을 줍는다고 합니다. 

이 같은 일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이런 사람들이 모이고 모이면 참 좋은 결과들이 생길 것입니다. 모세도 나이 80세에 부름을 받고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아브라함도 75세에 부름을 받고 고향을 떠나 새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이렇게 우리도 나이와 상관없이 선용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나이 70에 성가대와 교사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선용도 나이에 맞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꼭 교회에서만 봉사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동네에도, 지역에도 자원봉사 할 곳도 많습니다. 그렇기에 인생을 잘 마치려면 내게 주어진 인생을 선용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때 선용하지 않으면 더 늦은 후에는 정말 더 뼈저리게 후회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여인들에게 주어진 것은 아주 보잘 것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들은 그것을 아주 소중하게 선용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가시도록 길을 안내하고 공궤하고 기도로 후원하였습니다. 그들은 아주 빈천한 여인들이었지만 예수님을 만나 거듭나고 고침 받고 변화 받아 제 2의 인생을 살며 주님을 위해 극진히 섬기는 일로 그들의 마지막 인생을 선용하였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귀하게 보신 것입니다. 그것이 있는 것으로 나누고 섬기는 삶입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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