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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가 잡아야 할 작은 여우: 게으름 (삼상 3: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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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잡아야 할 작은 여우: 게으름 (삼상 3:10-14)


우리 모두가 잘 아는 이야기이지만 인간은 사회적 동물입니다.  결코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모든 사람은 누군가와 함께 더불어 공동체를 이루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공동체 속에서 함께 살아가면서 우리는 상처를 받아본 적도 있고, 때로는 실망을 한 적도 있습니다.  그 아픈 상처와 고통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 자기의 삶을 비통하게 만들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분개합니다.  때로는 마음의 평화도 영혼의 풍요도 육신의 건강마저 다 망쳐 놓을 때도 있습니다.  그렇게 쌓아왔던 인간관계의 신뢰에 대한 믿음이 허물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여러분, 모든 관계의 문제는 상대적입니다.  결코 한 사람만의 문제로 인해서 관계가 허물어지지 않습니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것처럼 관계의 문제도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상대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사실을 쉽게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니 좀더 솔직하게 말씀을 드리자면 다른 사람의 문제일 경우에는 그것이 상대적인 문제라고 인식을 합니다.  둘 다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다른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내 문제일 경우에는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우리의 관계가 허물어지는 것은 전적으로 내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만 깊은 상처를 받았다고 항변합니다.  그래서 인간관계에서 배신을 당했다는 생각으로 온 핏줄이 조여오는 것 같아서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인간관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는 일방적이 아니라 쌍방적입니다.  그러므로 관계의 회복을 위해서는 그 사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이 무엇입니까?  바른 믿음이란 인생 길에서 당하는 삶의 모든 애매 모호함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합력하여 하나님의 선을 이끌어내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대답은 분명합니다.  함께 더불어서 하나님의 선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사람들은 나를 해하려고 해도 하나님은 이것을 선으로 바꾸어 놓을 줄을 믿습니다.

이 사실을 믿는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사소한 일에서 시작된 분노와 증오로 귀중한 인생을 소모하지 말고 금보다 귀한 믿음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인생 길에서 당하는 삶의 모든 애매 모호함을 함께 합력함으로써 하나님의 선으로 바꿀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연약한 우리들이 모인 이 작은 공동체를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가 이 시대에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눈으로 보고 세상에서 증인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의 역사는 함께 만들어 가는 역사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도 혼자서가 아니라 우리 사람들을 통하여 함께 일하기를 원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역사는 관계 속에서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공동체 속에서 함께 합력하여 하나님의 선을 이루는 방법을 배우셔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가 되지 못하게 하는 분열의 영들이 역사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작은 여우들을 잡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성도들과의 아름다운 사랑의 교제를 통한 행복한 신앙생활을 가로막는 작은 여우의 정체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아름다운 믿음의 공동체를 허무는 작은 여우의 정체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반드시 잡아야 할 작은 여우, 그 네 번째는 게으름입니다.

교회 역사에서 초대교회와 중세기를 거치는 동안에 일곱 가지 대표적인 큰 죄악을 말할 때 게으름을 포함시켰다고 합니다.  칼 바르트라는 신학자는 죄 가운데 가장 나쁜 죄는 게으름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게으름이라고 하는 것은 그저 단순히 바람직하지 않은 상태 정도가 아니라 죄악이라는 것입니다.  이 게으름이라는 말의 원래 뜻은 "돌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게으름이라는 말은 거의 무책임하다는 의미와 동일하게 쓰여질 수가 있는 말입니다.  따라서 '타워스 어카이너스'라는 신학자는 게으름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무슨 일을 하고자 하는 에너지가 고갈되었거나 그것을 거의 상실한 상태가 바로 게으름이다."

어느 한 게으름뱅이가 떡 두 개를 얻어 가지고 길을 떠났습니다.  그는 손에 들기가 귀찮다고 머리 위에 얹어 매고 갔습니다.  배가 고팠지만 끌어내리기 귀찮아서 참고 가는데, 저편에서 갓을 쓴 사람이 입을 크게 벌리고 걸어오는 것이었습니다.  배가 고파서 저러려니 생각하고 머리 위의 떡을 내려주면 그 하나를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양반은 이렇게 대답을 하더랍니다.
"늘어진 갓끈을 조이기가 귀찮아서 입을 벌리고 가는 걸세."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의 시대에 귀찮은 것을 지독하게 싫어하고 혼자 생활하는데 익숙한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들을 가리켜서 소위 '귀차니스트'라고 부릅니다.  먹고, 입고, 자는 기본적인 일상의 수고로움조차 극도로 꺼리는 게으름뱅이들, 그래서 이런 귀차니스트들을 위한 아이디어 상품들이 쏟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게으름의 죄악은 오늘 현대인들을 부정적인 현대인으로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낙담한 사람, 절망 속에 있는 사람, 권태로운 사람, 우울한 사람, 고독한 사람, 이런 사람의 밑바닥에는 바로 게으름이라는 죄악이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게으른 사람은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런 게으른 사람은 기뻐하지도 않습니다.  게으른 사람은 흥분하지도 않습니다.  게으른 사람은 감격하지도 않습니다.  게으른 사람에게는 의욕이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게으름이라고 하는 것은 소리 소문 없이 우리의 삶을 잠식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자신만을 파멸시킬 뿐만 아니라 가정과 공동체를 무너뜨리게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삶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살아가는 게으른 사람의 한 전형적인 모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엘리라고 하는 제사장입니다.  이 사람은 특별히 그의 자녀 교육에 있어서 거의 포기한 상태로 자녀들을 보고만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게으른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면 그가 나중에 그의 직업인 제사장직을 수행하는 일에 있어서도 그는 거의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처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변명할 수 없는 게으름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사람을 통해서 이 게으름의 정체를 한 번 규명해 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 게으름이 왜 한 개인과 가정과 공동체를 무너뜨리게 되는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게으름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첫째로, 성경은 게으름은 죄악이다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시작되는 10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이르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니."

그 이하의 내용은 엘리라는 사람과 그의 자녀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가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엘리에게 직접 경고하거나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무엘에게 말씀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당시에 사무엘은 아직도 어린 소년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엘리 제사장에게 경고할 일을 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습니까?  우리는 이 점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이 때 엘리 제사장이 하나님과의 커뮤니케이션을 잃어버렸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는 제사장입니다.  제사장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며 또 사람들의 기도 제목을 하나님 앞에 올려드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엘리 사이에 있어야 할 의사 소통이 단절되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게으름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의 시대에 많은 신앙인들이 매일 일정한 시간을 정해놓고 성경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일, 즉 하나님과 의사 소통하는 일을 잘 하지 못합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정확하게 핵심을 말한다면 게으르기 때문입니다.  엘리 제사장의 문제도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의 자녀 양육에서 여실히 드러났습니다.  자녀 양육의 실패 원인이야 많이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버지로서 그가 게을렀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에 대해 어떻게 경고하십니까?  본문 13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그의 집을 영원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말한 것은 그가 아는 죄악 때문이니 이는 그가 자기의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엘리는 그의 자식들을 그저 내버려두었습니다.  무한한 자유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녀들은 잘못된 길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 제사장은 그것을 금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에 대해서 "자녀 교육을 잘못했다"는 정도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한 마디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죄악이다."  자기도 알고 있는 죄악이라는 것입니다.  자식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않은 것에 대해 하나님은 그가 죄를 범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 장면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더 나아가 아주 무서운 경고로 발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14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맹세하기를 엘리 집의 죄악은 제물로나 예물로나 영원히 속죄함을 받지 못하리라 하였노라 하셨더라."

성경학자들은 이 부분에 대해서 무척 곤혹스러워합니다.  이것이 정말 용서받지 못할 죄악인가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어떤 구약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미 엘리의 마음 속에는 이 문제에 관해 회개할 의지조차 없었다."

사랑하는 여러분, 회개하는 것도 부지런해야 합니다.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마저도 포기했다면 엘리는 돌이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가 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무서운 죄입니다.  게으름이 이러한 죄악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신약성경에서도 지속되는 하나의 강조점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달란트 비유를 생각해 보십시오.  주인이 먼 나라로 떠나가면서 종들에게 각기 다른 달란트를 주었습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입니다.  주인이 다시 돌아왔을 때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다섯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도 두 달란트를 더 남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때 주인이 뭐라고 책망합니까?  "악하고 게으른 종아!"  성경은 게으름과 악함을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게으름은 죄악입니다.  주인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은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게으름은 단순히 바람직하지 못한 삶의 스타일 정도가 아닙니다.  게으름은 죄악입니다.  그것도 가정과 공동체를 허무는 무서운 죄악입니다.

두 번째로, 게으름은 습관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게으름은 습관입니다.  그런데 이 습관은 아주 안 좋은 습관입니다.  우리를 파멸시킬 수밖에 없는 불행한 습관입니다.  그런데 엘리 제사장의 게으름은 하루아침에 형성된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지속적으로 시간을 두고 형성되어 나온 습관이었습니다.  그것은 점점 더 악화되어 온 습관이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엘리의 삶의 모습을 추적해 보려고 합니다.  먼저 사무엘상에서 처음 볼 수 있는 그의 모습은 사무엘상 1장 9절입니다.  사무엘상 1장 9절을 찾아서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들이 실로에서 먹고 마신 후에 한나가 일어나니 그 때에 제사장 엘리는 여호와의 전 문설주 곁 의자에 앉아 있었더라."

여기에 보면 엘리는 앉아 있었습니다.  물론 우리는 그가 앉아 있다는 것을 가지고 이 사람을 정죄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지금 앉아 있지 않습니까?  피곤하면 앉아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을 계속해서 보면 문제가 좀 있습니다.  그 다음절 이하에 보면 한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나가 마음의 괴로움을 가지고 성전에 와서 통곡하고 울면서 기도합니다.  그런데 이 한나를 보고서 엘리가 뭐라고 말합니까?  1장 14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엘리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 하니."

보십시오.  지금 마음의 괴로움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통곡하면서 기도하고 있는 여자에게 술 취했다고 합니다.  저는 엘리 제사장이 술 취한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엘리 제사장이 앉아 있었다는 것은 그냥 앉아 있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넋을 놓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는 말입니다.  분별력이 없습니다.  이미 판단력을 상실했습니다.  이것은 습관화된 게으름이 이 사람의 삶을 변질시키고 있는 모습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그의 마지막 모습들을 통해서도 분명히 나타납니다.  사무엘상 4장을 한 번 읽어보십시오.  사무엘상 4장 13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가 이를 때는 엘리가 길 옆 자기의 의자에 앉아 기다리며 그의 마음이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떨릴 즈음이라 그 사람이 성읍에 들어오며 알리매 온 성읍이 부르짖는지라."
여기에서도 엘리 제사장은 여전히 앉아 있습니다.  그러니까 계속해서 앉아 있습니다.  길 옆 자기 의자에 앉아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가 어떤 상황입니까?  그의 마음이 여호와의 궤로 말미암아 떨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4장의 첫머리 부분에 보면 법궤를 빼앗깁니다.  법궤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습니다.  법궤를 가지고 있다.  행진을 할 때 법궤를 모시고 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메시지였습니다.

그런데 이 법궤 관리는 누구의 책임입니까?  제사장 책임입니다.  그런데 법궤를 빼앗겼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심각한 문제라는 것을 알아서 떨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떨기만 하면 뭐합니까?  일어나서 뭔가를 해야 합니다.  법궤를 찾고자 하는 어떤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앉아 있습니다.  아니 무릎을 꿇고 엎드려서 통곡하고 회개하는 기도라도 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계속 그냥 앉아 있습니다.  그러다가 엘리는 최후를 맞이합니다.

이제 그의 마지막 최후의 모습을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4장 18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궤를 말할 때에 엘리가 자기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으니 나이가 많고 비대한 까닭이라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사십 년이었더라."

그의 마지막 그 불행한 최후의 비극을 어떻게 조명합니까?  그 때도 의자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랬다가 자빠져서 목이 부러져 죽었다.  이것이 이 사람의 최후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재미있는 것은 그가  비대했기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허구한날 앉아만 있어 보십시오.  그러면 비대해질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는 끝까지 그런 모습으로 살다가 죽었습니다.  이것은 거의 습관화된 그의 게으름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게으름이 이 사람을 파멸시키고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잠언서에 보면 게으름에 관한 많은 증언들이 코믹하게 풍자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잠언 22장 13절에는 "게으른 자는 말하기를 사자가 밖에 있은즉 내가 나가면 거리에서 찢기겠다 하느니라."고 합니다.  "내가 밖에 나가면 사자를 만날 것이고 사자를 만나면 나는 찢겨 죽을 테니 꼼짝하지 않고 여기에 있겠다."  이것은 게으른 사람이 자신이 방에만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을 변명하는 말입니다.

잠언 26장 14절에는 "문짝이 돌쩌귀를 따라서 도는 것 같이 게으른 자는 침상에서 도느니라."고 합니다.  히브리 사람들의 집 문은 요즘의 회전문처럼 돌을 둥글둥글 굴려서 들어가는 문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문짝이 돌쩌귀를 따라서 계속 도는 것같이 게으른 자가 침상에서 하루종일 돈다니 얼마나 신랄한 비유입니까?

더 코믹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잠언 26장 15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  게으름의 절정까지 간 모습입니다.  그렇습니다.  게으름은 죄악일 뿐 아니라 무서운 파멸의 습관입니다.

따라서 잠언에 보면 이 게으름이 가져온 결과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일을 게을리하는 자는 패가하는 자의 형제니라."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된다."
"게으른 자는 부림을 받는다."
"게으른 자는 마음으로 원하여도 얻지 못한다."
"게으른 자의 길은 가시 울타리 같다."

세 번째로, 게으름은 소명의 결핍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엘리가 왜 이렇게 되었느냐?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그가 소명감을 잃어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엘리가 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하는 모습을 사무엘상에서 보면 그는 거의 자포자기의 상태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미 말씀을 드렸지만 제사장에게 가장 중요한 책임 가운데 하나는 법궤를 관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던 언약궤를 잘 관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4장 4절을 보면 그것을 자기 자녀들에게 다 위임해 버렸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엘리 제사장이 법궤를 자식에게 맡겼다는 것이 잘못은 아닙니다.  문제는 이 자식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4장 11절을 보면,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인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문제를 삼아야 할 것은 엘리가 자기 아들을 모릅니까?  이 아들들이 어떤 아들입니까?  사무엘상 2장 12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빴다.  그리고 여호와를 알지 못했다.  그 뿐만 아니라 13절 이하는 그들의 행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버지가 제사를 드리는 곳에서 들락날락 하면서 그 제물을 짓밟고 좋은 고기는 빼 먹었습니다.  그래서 2장 17절에 보면,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서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 아들들의 죄악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2장 22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엘리가 매우 늙었더니 그의 아들들이 온 이스라엘에게 행한 모든 일과 회막 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과 동침하였음을 듣고."
성전 회막을 드나드는 여인들과 성적인 불륜의 관계를 맺으면서 거룩해야 할 하나님의 성소 전체를 더럽히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모가 최선을 다해도 자식들이 잘못되는 경우는 더러 더러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거기까지는 우리가 그냥 넘어간다고 하십시다.  그런데 그런 아들들에게 법궤를 맡깁니까?  하나님의 궤를 맡길 수가 있습니까?  이것이 얼마나 무책임한 일입니까?

이것은 나라를 망치는 일입니다.  교회를 망치는 일입니다.  가정을 망치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무책임한 아들들에게 맡겼다는 사실 자체가 얼마나 엘리라는 사람이 무책임한 사람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동시에 그가 얼마나 게으른 사람인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 가지에 게으른 사람은 모든 것에 다 게으릅니다.  결국 이 게으름이 전체를 망쳐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도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작은 일에 충성된 자가 큰 일에도 충성할 수가 있다고 말입니다.  결국 한 가지에 게으른 사람은 인생 전체에 게으를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이 게으름의 죄악을 극복할 수가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나 자신과 가정과 믿음의 공동체를 허무는 이 게으름에서 해방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가 있겠습니까?

첫째로, 결론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소명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소명의 상실이 게으름을 초래했다면 이제는 그 소명을 회복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아니면 아예 지금까지 소명 없이 살아왔다면 지금 이 순간에 소명을 발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매튜 폭스라는 신학자는 그의 에세이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게으름을 치유하는 처방은 부지런함이 아니다.  여러분,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게으름을 치료하는 처방은 단순히 부지런해지자 라는 결심만으로 되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게으름에 가장 적절한 유일한 처방은 당신 안에 있는 불꽃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가 이런 표현의 말을 썼습니다.  "당신 안에 있는 불꽃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 소명을 불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 속에서 일어나는 불꽃.

사랑하는 여러분, 소명이 무엇입니까?  소명이란 하고 싶은 일입니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 그리고 할 수가 있는 일, 그것이 바로 소명입니다.  사람이 소명을 발견하면 신바람이 납니다.  일할 수 밖에 없습니다.  소명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들에게 중요한 것은 소명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소명이라고 하면 그것은 목사에게만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부르십니다.  목사에게만 소명이 있는 아닙니다.  여러분에게도 소명이 있습니다.  사역이 다를 뿐이지 나름대로 각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소명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에서의 직분은 하나님 앞에서 감당해야 할 사역이지 사람에게서 대접받는 직급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한국 교회 안에는 직분이 직급으로 오해되고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교회의 직분이 직급이 되면 교회는 타락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중세 교회가 타락했던 이유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 한국 교회가 세상 속에서 지탄의 대상이 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잘못된 직급 의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소명을 따라 사역을 붙잡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교회에서 섬김을 받으라고 직분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섬김의 대상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는 섬김을 받기 위해서 직분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섬김의 사역을 위해서 직분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내가 해야 할 나의 소명을 발견하십시오.  나에게 주신 소명이 무엇인지 깨달아지지 않는다면 기도해 보십시오.  그리고 마음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여보십시오.  사무엘을 부르시던 그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올 때까지 기다려 보십시오.  "사무엘아 사무엘아, 내가 너에게 시킬 일이 있다."  그것이 소명입니다.

내 이름을 부르시면서 나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 그리고 너를 통해서 해야 할 일이 있다고 하시면서 하나님이 나에게 맡기시고자 한 일, 비록 그 일이 작아도, 다른 사람과 달라도 나에게는 소중한 나만이 할 수 있는 일, 내가 해야 할 일, 내가 하고 싶은 일, 내가 그 소명을 발견한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그 순간부터 내 인생은 달라질 줄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소명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하면 게으름의 죄악에서 해방되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가 있겠습니까?

두 번째는, 사랑을 결단하는 것입니다.

단테는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게으름은 사랑을 포기한 죄악이다."  그렇습니다.  게으름은 사랑을 포기한 죄악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엘리가 정말 자식을 사랑했더라면 어떻게 그대로 내버려 둘 수가 있습니까?  자식을 붙들고 울어야지요.  호소를 해야지요.  설득을 해야지요.  이 길로 나가면 되겠는가, 네가 이런 행동을 하면 되겠는가, 사랑하는 아들아, 돌이켜야 하지 않겠느냐?  그런데 그대로 놔 뒀다는 말입니다.  왜요?  사랑하지 않은 것입니다.  사랑을 포기한 것입니다.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저주했던 베드로를 보십시오.  그래서 이제는 모든 것을 등지고 떠나가고 싶었던 시몬 베드로였습니다.  그렇지만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디베리야의 바닷가에 시몬 베드로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향해서 질문을 던지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모든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바꿔서 말할까요?  "베드로, 너 아직도 나를 사랑하니?"  "주님, 아시잖아요.  제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베드로의 이 고백을 받으시면서 주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그래, 그러면 내 어린 양을 먹여다오.  내가 사랑하는 어린 양,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너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헌신해 다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하면 헌신하게 됩니다.  사랑해서 사랑의 눈을 뜨면 이 세상은 할 일이 많습니다.  사랑하면 내가 도울 사람이 많고 섬길 사람이 많습니다.  사랑하면 내가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랑을 결심하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66주년 조국의 광복을 기념하는 주일을 지나고 있습니다.  왜 나라를 잃어버렸습니까?  당시에 이 나라를 관리했던 사람들이 게을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가 다시 독립을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역사적인 흐름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 우리의 선배들이 다시 나라에 대한 사랑을 갖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피와 땀을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가져온 결과가 조국의 독립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민족을 사랑한다면 할 일이 있습니다.  교회를 사랑한다면 할 일이 있습니다.  내 인생을 사랑한다면 할 일이 있습니다.  내 자식들을 사랑한다면 할 일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이 세상은 할 일이 많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진실한 신자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거룩하게 살기를 원하십니까?  내 자녀들에게 아름다운 믿음의 부모된 모습을 보여주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게으른 옛 본성과 피 터지게 싸우십시오.  기억하십시오.  게으름의 죽임이 없이는 거룩한 삶도 없습니다.  게으름은 거룩한 삶의 은밀한 대적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세워가야 할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를 사랑하는 안목으로,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안목으로, 그리고 내가 태어난 이 땅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세계를 바라보십시오.  얼마나 할 일이 많은 세상인가를 말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결심하면 우리는 새로운 인생을 살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소명을 발견하십시오.  사랑을 결심하십시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제 주를 위해 일 하기로 결심하십시오.  그리고 일터로 나가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내게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다가와 손을 내미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걸어라.  내가 새 힘을 주겠다.  일어나 너 걸어라.  할 일이 있다.  세상은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무기력, 우리의 좌절을 떨치고 일어나서 하나님의 꿈을 향해서 살아가도록 도우시는 전능하신 주님의 목소리를 들어보십시오.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님께서 다가와 손을 내미시고 나를 붙들어 일으켜 주시는 주님을 만나보십시오.
그 분이 함께 하실 때, 그 분의 비전이 임할 때, 그 분의 능력이 임할 때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의 능력을 의지해서 다시 내 가정과 믿음의 공동체를 세워갈 것입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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