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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두 가지 삶의 방식 (롬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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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삶의 방식 (롬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1장 17절

삶에는 하나님을 믿고 믿음에 의지하여 사는 방식과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자신의 생각과 경험을 통하여 사는 방식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자신의 경험 사이에서 이것도 저것도 아닌 중간 상태의 삶을 살며 고민과 갈등을 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1. 열두 정탐꾼

민수기 13장 17절로 20절에 “모세가 가나안 땅을 정탐하러 그들을 보내며 이르되 너희는 네겝 길로 행하여 산지로 올라가서 그 땅이 어떠한지 정탐하라 곧 그 땅 거민이 강한지 약한지 많은지 적은지와 그들이 사는 땅이 좋은지 나쁜지와 사는 성읍이 진영인지 산성인지와 토지가 비옥한지 메마른지 나무가 있는지 없는지를 탐지하라 담대하라 또 그 땅의 실과를 가져오라 하니 그 때는 포도가 처음 익을 즈음이었더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열 명의 정탐꾼은 믿음으로 사는 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홍해를 지나고 광야를 지나오면서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이었지만 그 기적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모세가 가나안 땅을 정탐하기 위해서 보낸 열두 정탐꾼이 돌아왔습니다. 그중 열 명의 정탐꾼이 보고하기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우리가 치지 못할 정도로 강하다”고 했습니다. 그 주민은 강하고 성읍은 크고 견고하다고 보고합니다. 그들과 비교하니 “이스라엘 민족은 메뚜기와 같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부정적인 말을 잘 듣습니다. “못한다. 안된다. 할 수 없다”는 말에 쉽게 동요합니다. 열 정탐꾼의 이야기를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혼비백산하여 고함을 치고 통곡하며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온 이스라엘이 혼돈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은 백성들을 안정 시키며 긍정적인 보고를 합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정복하자고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말자고 합니다. “하나님이 이미 우리에게 주신 땅”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그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원래 부정적인 것에 솔깃하기 쉽습니다. 긍정적인 말에는 귀기울이지 않습니다. 

오늘날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들어가면 부정적인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어떠한 개인이나 사업이나 국가가 한 일에 대해서 부정적인 말을 많이 적어 놓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읽기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긍정적인 말을 적어 놓으면 자기 선전한다고 합니다. 자기를 잘나게 보이려고 긍정적인 말을 올렸다고 하면서도 부정적인 말을 적어 놓으면 쉽게 공감합니다.

아담과 하와 이후로 타락한 죄악성이 마음속에 들어와서 사람은 의로운 것보다는 부정적인 것에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설 때 항상 말씀으로 서야 합니다. 환경과 감각으로 서면 승리하는 삶을 살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에는 거짓이 많습니다. 살아온 전통과 습관과 경험을 통해서 만물을 바라보면 잘못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바라보고 말씀 위에 서고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을 입으로 말하면 하나님처럼 생각하고 보고 말할 수 있게 되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2. 예수님과 마리아와 마르다

예수님께서 마르다와 마리아, 나사로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요단강 건너편에 예수님이 계실 때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말을 듣고 이틀을 더 거하다가 오셨습니다. 그때 이미 나사로는 죽어 무덤에 들어간지 나흘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보고 마르다가 뛰어 와서 울면서 주님이 계셨다면 나사로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사로가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11장 23절에서 26절에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살리라고 말씀하는데 마리아와 마르다는 감각적인 인간지식에 서 있어서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말씀을 하는데 마리아와 마르다는 인간지식과 경험으로 대답하는 것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믿음과 감각적인 삶의 갈등에서 헤매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믿으라고 말하는데 자기의 경험이나 감각이나 생각으로는 믿을 수가 없습니다. 믿는다고 말하자니 견딜 수가 없고 안믿는다고 말하자니 주님 앞에 미안해서 중간 상태에 서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에서도 눈에 보이는 것과 실상은 다른 것이 많습니다. 지구가 눈에는 평평하게 보이나 실상 지구는 둥근 모습입니다. 우리가 ‘해가 떴다 졌다’ 얘기하지만 실상은 해는 고정되어 있고 지구가 해 주위를 도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것은 다 현실인 것입니다. 현실은 거짓된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은 실상입니다.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하나님이 말씀한 것은 참말입니다. 내 눈에 보는 것과 달라도 하나님 말씀이 참말입니다. 내 귀에 들은 것과 달라도 하나님 말씀은 참말입니다. 내가 깨달은 것과 달라도 하나님 말씀은 참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하고 말하고 그대로 행하면 그것이 다 아름다운 결말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우리가 채찍에 맞음으로 나음을 입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현재 나는 병들어 아픕니다. 내 경험으로 내 느낌으로 병들어 아픕니다. 그런데 성경은 나았다고 말씀하니 어느 것이 거짓말입니까? 우리가 느끼고 괴로워 하는 것은 실상이 아닙니다. 거짓되고 헛된 것입니다. 실상은 병에서 나은 것이 실상입니다.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실상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 보고 미쳤다고도 합니다. 안보이고 못느끼는 것을 믿으니 말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말씀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결국은 실상이 이깁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모든 만물이 그 배후에 안 보이는 실상에 의해서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거짓말을 자꾸 하는 사람도 그 사람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배후에 실상은 귀신이 붙잡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자꾸 도둑질 하는 사람은 자기가 도둑질 하는 줄 아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실상은 그 마음속에 도둑질하는 귀신이 들려 있어서 귀신에게 잡힌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회개하고 보혈로 씻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야 거짓말도 안하게 되고 도둑질도 안하게 되는 것입니다.

현실과 실상을 분별할 줄 알아야 됩니다. 세상의 안믿는 사람들은 현실만을 쫓아 사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과 듣는 것, 만지는 것과 체험하는 것을 쫓아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은 현실을 초월해서 하나님의 실상을 보고 믿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실상은 창조적인 능력인 것입니다.

우리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나라와 민족이 흥하고 망하는 것 우연히 일어나고 있고 환경에 따라서 일어나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한 나라와 민족의 흥망성쇠는 우주를 창조하고 역사를 주장하는 하나님이 배후에 계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현실의 감각적인 세상을 바라보며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실상인 하나님을 바라보며 담대하게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의 단호한 요구

예수님이 단호히 요구한 것은 ‘실상’입니다. ‘주의 말씀을 믿으라’는 말이 바보같이 들리고 사람들이 비웃을지라도 말씀이 실상이기 때문에 말씀을 믿으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요한복음 11장 38절로 39절에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돌을 옮겨 놓으라는 실상입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현실을 바라보는 죽은 자의 눈으로 “죽은 지가 나흘이 되면 냄새가 나는데요”라고 현실을 말합니다. 

마르다에게는 그것이 참말일수 있습니다. 사람이 죽어서 나흘이 되었으니 썩은 냄새가 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현실을 가지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현실을 변화시키는 실상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않았느냐”라고 말씀합니다. 참 결정하기 힘듭니다. 현실을 뻔히 알면서도 주님께서 실상을 믿으라고 하니 그렇게 하기가 힘든 상황입니다.

오늘날 예수를 믿어도 현실을 따라 믿을 뿐 실상인 하나님 말씀의 기적을 안 믿는 신자들이 많습니다. 성령이 계시지 아니하시면 아무리 예수 믿는다고 해도 현실을 따라서 생각하고 해석하고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은 성도들은 현실보다도 실상을 믿습니다.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하며 주님을 믿고 나가면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활속에 많은 고통이 다가오더라도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를 성경에서 찾고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믿고 나아갈 때 기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과 현실의 절망에 허덕이는 마르다와 마리아를 보시고 예수님이 우셨습니다. 현실이 처참한데 마르다와 마리아는 믿으려고 해도 못믿고 발버둥을 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는 것도 아니고 안 믿는 것도 아니고 예스(Yes)도 아니고 노(No)도 아니고 고통 당하는 것을 보고 예수님이 우셨습니다.

신본주의적인 믿음이냐, 인본주의적인 감각이냐를 두고 예수님하고 마르다하고 씨름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르다를 보시고 “돌을 옮겨 놓아라. 믿음으로 옮겨 놓아라. 실상을 따라 옮겨 놓아라”고 하시니 마르다는 “죽은지 나흘이 되어 벌써 냄새가 나니 못 옮겨 놓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현실이 이런데 어떻게 부인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주변에 많은 구경꾼들이 모여서 “마르다야, 네가 옳다. 네가 합리적이고 과학적이고 교육받고 올바른 사람이다. 옮겨 놓지 말아라”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실상을 받아들이려면 의심이 생깁니다. 그러나 의심을 택하지 말고 믿음을 택하라는 것입니다. 의심이 생기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우리는 “아멘! 믿습니다”라고 합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속으로는 안믿습니다. 이중인격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강요를 하는 것은 의심을 선택하지 말고 믿음을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현실을 선택하지 말고 실상을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답답하기에 마르다를 보고 화를 내셨을까요? “마르다야,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하지 않았느냐. 안믿기 때문에 하나님 영광을 안보는 것이 아니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약속을 해주셔도 현실을 바라보고 실상을 믿지 아니하면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 가운데에도 우리만의 나사로가 있습니다. 우리가 도저히 취급할 수 없는 문제의 현실 앞에 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믿으면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현실에 희망이 없더라도 하나님은 희망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절망을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희망과 믿음을 갖게 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5장 7절에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고 말씀합니다. 보는 것으로 행하면 안됩니다. 믿음으로 행해야 됩니다.

마태복음 24장 35절에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합니다. 이만한 보증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천지가 무너져도 예수님 말씀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마음속에는 항상 의심이 따랐습니다. 영혼을 믿음에 비유한다면 영혼의 집인 육체는 의심을 비유하는 것입니다. 육체가 항상 있고 그 속에 영혼이 있으므로 서로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의심과 믿음은 공존하는 것입니다. 육체를 따르지 말고 영혼을 따르는 것처럼, 의심을 따르지 말고 믿음을 따르면 우리는 모두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 의심이 생길지라도 ‘믿습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기적을 기대해야 되고 그것를 통하여 하나님의 기적은 반드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 17절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믿고 의인된 우리들은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보는 것으로, 들리는 것으로, 환경으로 살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실상으로 사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말씀합니다.

좋은 하나님, 기적을 행하는 하나님, 도와주시는 하나님,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인 것을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우리에게 한없는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믿음으로 살아야 되고 믿음의 삶에는 의심과의 씨름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씨름을 하고 의심을 따라 뒤로 물러가느냐, 믿음을 따라 앞으로 나가느냐가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의심하지 않는 완전한 믿음이란 실제로 없습니다. 오직 어느 편을 택하여 그것을 꿈꾸고 믿고 시인하며 나가면 그대로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생각하고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여 축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꿈꾸고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그대로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현실과 실상 사이에 끼어서 삽니다. 현실은 매일같이 접하는 우리의 삶인 것입니다. 우리 감각과 지성, 이성과 경험은 현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실상입니다. 실상은 우리가 도저히 인간으로써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눈에 안보이는데 하나님은 계시다고 말합니다. 현실은 안봤으니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상이 참말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가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그 사실은 믿어야 합니다.

인생을 사는데 절대로 느낌으로 살지 마십시오. 인간의 지식으로 살지 마십시오. 감각에 의지해서 살지 마십시오. 사람들이 말한다고 따라가지 마십시오. 말씀이 하는대로 생각하고 믿고 따라가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거짓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만물이 지어졌습니다.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만물이 하나님 말씀으로 지어진 바 된 것입니다.

말씀은 안보이지만 실상입니다.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것이 실상입니다. 예수 믿으면 병낫는다는 것이 실상입니다. 예수 믿으면 저주에서 해방된다는 것이 실상입니다. 예수 믿으면 천당 간다는 것이 실상입니다. 안보이지만 그것이 실상이요 믿으면 믿음대로 되는 것입니다. 안믿는 사람들은 현실만 따라 삽니다. 현재에 주어진 현실밖에 없기 때문에 앞으로 향상하고 발전하는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실상으로 받아들이고 생각하고 꿈꾸고 믿고 말하면 그것이 옷입고 현실로 나오는 것입니다. 항상 실상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성찬을 뗍니다. 성찬은 현실로 볼 때 빵조각과 포도주일 뿐입니다. 하지만 실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깨어진 몸이요 흘리신 피입니다. 이를 먹고 마심으로 죄사함을 받습니다. 저주에서 해방되고, 병에서 고침받고, 천국 시민이 됩니다. 그것을 아는 것이 실상입니다. 실상을 알고 성찬을 대해야 의미가 있지 아무 생각없이 대한다면 그것은 아무 발전도 없고 변화도 다가오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현실은 현실이지만 그 내용에 하나님 말씀이 들어오면 실상이 그 속에 있는 것입니다. 실상을 잡고 인생을 사는 사람은 항상 변화가 있고 발전이 있고 승리가 있고 성공이 있고 축복이 있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여,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몸 찢기고 피흘리셔서 우리를 위해서 죄, 질병과 저주, 절망, 죽음을 청산하시고 우리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오늘 그 실상을 먹고 마십니다. 예수님의 축복을 먹고 마십니다. 성령으로 같이 하셔서 실상을 체험하는 사람마다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는 기적을 체험하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조용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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