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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광복절] 진리가 자유케 하리라 (요 8:3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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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가 자유케 하리라 (요 8:31-36)


우리는 해마다 광복절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금년은 광복 66주년이 됩니다. 당파싸움과 정치싸움만 일삼던 이조는 이 성계가 세운지 27대 519년만에 비극적 종말을 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라를 빼앗기고 자유를 빼앗긴 우리 민족은 가만히 있지 않고 항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가장 극심하게 대항하는 사람들은 거의가 다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미나미 총독은 늘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국의 10만명의 기독교인들을 조심하라. 그들이 바로 항일 투쟁가들이다.>

그래서 일본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을 가장 두려워하면서 교인들을 감시하였습니다. 그리고 할 수만 있으면 교인들을 잡아 죽이고 감옥에 넣었습니다. 그것이 그들에게는 가장 안전한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1919년 3.1 운동이 벌어졌습니다. 상동교회에서 독립선언서가 인쇄되었고 교인들이 태극기를 날랐고 연락을 책임졌습니다. 독립선언서에 싸인한 33인중 16명이 교인이었고, 9명이 감리교 목사였습니다. 이 준, 유 관순도 감리교인이었습니다.

교회는 독립운동의 전초 기지가 되었고 교인들은 독립운동가들이 되었습니다.

일본은 교회를 핍박하면서 경계하였습니다.

탄압정책은 종교의식을 간섭하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설교 내용도 검열하였습니다. 일부 찬송가는 금지되었습니다. <십자가 군병들아 주 위해 일어나> <믿는 사람들은 군병 같으니> 이 찬송가는 금지곡이었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하늘 나라’에 대해 설교했다고 체포될 것이라는 경고받기도 했습니다. 유일한 왕국은 일본뿐이라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죄에 대해 싸우라’는 말도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것은 ‘일제에 대항하여 싸우라’는 말로 해석하였기 때문입니다.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로 설교하는 것도 금지되었습니다. 실제로 평북 선천의 선교사 맥큔이 학교 성경 시간에 이 이야기를 했는데 이것은 곧 반역행위로 당국에 보고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1945년 8월 6일에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렸습니다. 20만명이 몰사하였습니다. 그래서 일본은 8월 15일 무조건 항복하였습니다.

참으로 신기한 것이 있습니다.
일본은 8월 17일 한국의 애국지사, 교육계 지도자, 종교계 지도자, 정계 지도자 20만명을 죽이려고 명단을 가지고 준비중에 있었습니다. 소름끼치는 일입니다. 그러나 도리어 자기들이 20만명이 죽었습니다.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결론은 하나님이 주신 자유였습니다.
66년 전에 자유를 찾았습니다. 그 날은 더 바랄 수 없을 정도로 날씨가 좋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온 국민들이 밖으로 나와 만세를 부르며 신나게 즐겼다고 합니다. 어느 마을에서는 일본 사람들이 공출하여 쌓아 놓은 쌀 가마, 농산물, 소 고기들을 풀어 한 달 내내 잔치를 하였습니다. 신나는 하루였습니다. 36년만에 찾은 해방의 자유입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님 이야기 드리려고 합니다.
루터 킹 목사님은 평생 흑인 해방 운동을 하였습니다. 감옥에 30번 들락날락하였습니다. 죽기 직전에 감옥으로 끌려갈 때였습니다. 3살된 아들이 감옥으로 끌려가는 아버지를 붙들고 몸부쳤습니다.
“아빠! 가지마! 아빠! 가지마!”
그 때 6살 된 형 마이티가 동생을 달래며 말했습니다.
“걱정하지 마. 아버지는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러 가는 거야. 아버지는 평생 손해보는 일을 하셨어.”

루터 킹 목사님은 감옥에서 수많은 세월을 지내셨지만 감옥에서 오히려 자유함을 느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1968년 멤피스에서 암살되기까지 그는 참으로 자유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유를 얻었는 데 진정한 자유는 누리지 못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진정한 자유는 무엇일가요? 예수님께서는 빌라도 법정에서 재판을 받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8;31-36)

예수님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진정으로 자유케 하는 것은 진리입니다. 진리안에서 살면 진정으로 자유로워입니다. 진리는 어떤 자유를 줍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예수안에서 만이 참된 진리를 맛볼 수 있습니다. 진리가 자유함입니다.

1. 사람들로부터의 자유

사람들은 자유에 대하여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자유다.>
<간섭을 받지 않는 것이 자유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자유가 아닙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고 하였습니다. 진리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 안에서의 자유가 진정한 자유입니다.

예를 들어 봅니다.
어린아이가 컴퓨터에 앉아서 게임을 합니다. 어머니가 말합니다.
“아들아! 컴퓨터하는 것은 좋은 공부도 하여야 하고 너무 오래 앉아 있으면 건강에도 안 좋으니 하루에 한 시간만 해라.” 아들이 말합니다.
“엄마! 내게 자유를 주세요. 하고 싶은 만큼 하고 싶어요.” 이것이 진정한 자유일가요?

내 돈주고 핸드폰을 사서 내 마음대로 사용하고 청구하는 대로 요금을 냅니다. 그러나 남들은 고요히 자고 있는 심야 버스에서 계속 전화를 하는 것이 자유일가요?

차분히 말씀을 듣는 데 좀 덥다고 부채질을 하는 것이 자유일가요? 양 쪽 옆에 사람이 신경이 쓰이고 앞 사람, 뒷 사람에게 불편함을 주는 것이 자유일가요?

작년 <강문호와 함께 크루즈 여행을>라고 성지순례자를 모집하였습니다. 310명이었습니다. 최하 금액이 500만원이었습니다. 크루즈에서 좋은 방은 더 비쌌습니다. 한 방에 두명씩입니다. 혼자 방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 배입니다. 보통 두 명이 한 방을 사용하였습니다. 첫날 밤 자고 일어났더니 수 십 방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룸메이트를 바꾸어 달라는 요청들이었습니다.

코를 고는 것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습관입니다. 다른 사람은 반대입니다. 불을 끄라 말라 가지고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어떤 이는 자기 전에 기도하여야 한다고 무릎을 꿇고 소리를 내어 기도합니다.
나의 자유는 남의 불편함을 주는 선에서 멈추어야 진정한 자유입니다.

나는 평생 잊지 못 할 경험을 브라질 쌍파우로에서 하였습니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아내와 나는 뒷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운전하던 목사님이 길을 몰랐습니다.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는 사람에게 차창을 열고 물었습니다. 그 사람 소리가 빗소리 때문에 잘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은 비를 쪼르륵 맞으면서 이해가 될 때까지 차로 와서 가르쳐 주었습니다. 처음 보는 장면이었습니다. 조금 가다가 운전하는 목사님이 길이 헷갈렸는 지 갈림길에서 머믓 거렸습니다. 그 사람이 지켜 보고 있다가 또 달려와서 방향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나는 놀라서 말했습니다.
“저런 사람 처음 보네요.”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브라질 사람들은 길을 물으면 저렇게 될 때까지 가르쳐 줘요.”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 후 그 목사님이 한국에 귀국하였습니다. 놀란 이야기를 내게 들려 주었습니다. 목사님이 영등포 버스 정류장에서 노선을 몰라서 토큰을 팔고 있는 할머니에게 길을 물었습니다. 할머니가 소리를 질렀습니다.
“눈깔이 없어? 보면 될 것 아냐?”
그 목사님이 놀라서 나에게 말했습니다.
“브라질로 빨리 가고 싶어.” 남에게 불편함을 주지 않는 곳에서 내 자유는 제한을 받아야 참된 자유입니다.

그 때 브라질에서 있었던 다른 이야기입니다.
히오데자네이로에 세계에서 제일 큰 예수님 동상이 서 있습니다. 팔뚝 하나만도 3톤입니다. 명물입니다. 그 산꼭대기까지 올라가는 길은 외길입니다. 꼬불꼬불합니다. 가끔 내려오는 차와 올라가는 차가 마주치며 피하도록 주머니길이 있습니다. 나를 태우고 올라가던 차가 내려오는 차와 마주쳤습니다. 뒤에 조금만 가면 피할 수 있는 주머니가 있었습니다.

“조금만 올라가 주시겠어요?”
브라질 운전기사가 말했습니다.
“뒤로 운전하기가 힘드니 밑으로 내려가 주세요.” 서로 실강이였습니다. 주장은 똑같이 평행선을 이었습니다. 내가 보기에도 조금만 뒤로 가면 금방 주머니길인 데 피하여 주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나를 태우고 운전하던 분이 화가 났는 지 운전석으로 와서 앉더니 가서 브라질 차를 받아버렸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따라와! 고쳐 줄께.”
이것이 자유일가요?

해방이 되었습니다. 자유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내 자유는 제한되는 것이 참 자유입니다.

2. 하나님으로부터의 자유

진정한 자유는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하는 것이 절대 자유입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종이 진정한 자유입니다.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선택할 필요가 없습니다. 시키는 그대로 하면 됩니다. 이것이 진정한 자유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하는 곳으로 가라.>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 하고 떠났습니다.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하였습니다. 무조건이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자유입니다.

노아에게 하나님께서 산꼭대기에 배를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노아는 산꼭대기에 배를 제조하였습니다. 미친 사람이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자유입니다.

쏘련 작가 솔제니친이 쏘련으로부터 미국으로 망명하였습니다. 억압된 속에서 벗어나 미국으로 와서 자유함을 받았습니다. 신문기자가 물었습니다.
“미국에 와서 제일 어려운 것이 무엇입니까?”
그가 대답하였습니다.

“선택이 제일 어려웠습니다. 쏘련에서는 시키는 대로만 살면 되는 데 미국에 와서는 모두 내가 선택하여야 합니다.” 시키는 대로 사는 것이 자유입니다. 하나님께 절대 복종하는 것이 절대 자유입니다. 예수님이 자유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자유는 죄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죄를 지으면 결코 자유로워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명령에 절대 순종하는 것이 참 자유라는 의미입니다.

리빙스턴이 아프리카 선교사로 생명바쳐 일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사람들이 찾아와서 물었습니다.
“어째서 이런 희생을 하시나요?”
리빙스턴이 말했습니다.
“희생이라니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나는 세상에서 찾을 수 없는 참 평화를 누리고 있는 데요.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는 평화를 누리고 있지요.”
하나님께 절대 순종이 절대 자유함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덴마크의 실존주의 철학자 킬케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천재는 자기를 믿고 살고, 사도는 하나님을 믿고 사는 사람이다.”
하나님 말씀을 따를 때 참 자유함이 있습니다.

미국 선교사가 중국을 선교하며 복음을 전파하고 있었습니다.
안식년 귀국하려고 하는 데 중국에 유행병이 급속도로 퍼져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중국의 의술로는 원인도 밝히지 못 하고 있었습니다. 기도중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그들을 살려라.”

선교사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선교사님은 자기 몸속에 일부러 유행병 균을 넣었습니다. 그리고 미국으로 돌아와서 병원에 입원하였습니다. 그리고 병의 원인을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병균을 죽이는 법을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드디어 치료약과 예방약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래서 중국 사람들을 살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참 자유입니다. 

3. 죽음으로부터의 자유

사람들로부터의 자유, 하나님으로부터의 자유가 진정한 자유입니다. 그러나 나는 정말 자유가 무엇인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신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이 세 가지는 같은 것입니다. 생명이 아닌 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가 아닌 것은 길이 아닙니다. 죽음으로부터의 자유가 가장 놀라운 자유입니다.

어느 재판관이 어느 죄수에게 사형언도를 내렸습니다. 그 날 밤부터 그는 잘 수가 없었습니다. 술을 퍼마셨습니다. 그 다음 날은 독주를 마셔야 했습니다. 술 마시는 양이 점점 늘어 났습니다.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 사람이 사형당할 것을 생각하니까 불쌍하여서가 아닙니다. 자기도 죄인인 데 죄인이 죄인을 사형언도를 내린 것이 그렇게 괴로워서 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안에서는 진정한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죄인이고 모두가 죽음을 통과하여 새 생명을 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폴 쉘러는 <자유의 곤경>이라는 논문에서 현대인은 자유가 주어졌지만 세 가지때문에 진정한 자유를 누리지 못 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양심의 상실,
이웃의 상실,
그리고 하나님 상실입니다.
우리 민족이 참 자유를 누리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진리에게로 가는 길뿐입니다.
우찌무라 간조는 <그리스도 없는 곳에는 참 자유가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자유는 진리안에서 자유입니다. 진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나는 울산에 가서 로버트 만드는 공장을 가보았습니다. 수많은 로버트들을 제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로버트에게는 위장병이 없습니다. 시키는 대로만 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만 사는 하나님의 종은 자유한 것입니다.

어머니가 두 아들을 기르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어머니가 먼 시장에 가는 동안에는 결코 집 옆에 있는 물가에 들어가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큰 아들은 말을 잘 들었습니다. 그러나 작은 아들은 어머니만 없어지면 몰래 물가에 들어갔습니다. 이런 것을 안 어머니는 시장에 갈 때마다 작은 아들은 방에 가두고 문을 밖으로 꽁꽁 잠그고 갔습니다. 어머니 말씀안에 있지 않으면 진정한 자유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안에 진정한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 수양관에는 이제 닭도 많고 개도 세 마리나 되었습니다. 그런데 닭을 얻어온 군산에서는 밖에 놓아 먹이던 닭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가두어 두고 기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관리하는 이 집사에게 놓아 먹이면 안 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면 완전히 자연 토종닭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였습니다. 그러나 이 집사가 말해 주었습니다.

“목사님! 이 곳에서 닭을 놓아 기르면 족제비나 살쾡이가 많아서 당장 잡혀 먹습니다. 이렇게 길러야 답답해도 안전합니다.“

나는 가만히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만일 닭을 밖으로 내놓으면 자유로울 것같으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모이를 쪼아 먹으면서도 족제비가 어디에서 달려 드나 불안하게 망을 보아야 합니다. 항상 경계하여야 합니다.닭장안에 있으면 그런 염려가 전혀 없습니다. 불안할 리가 없습니다. 닭장 밖으로 나가면 물이 어디 있는 지 찾아야 합니다. 먹이가 어디에 있는 지 이리저리 다녀야 합니다. 그러나 닭장 안에 있으면 부자유스러운 것같아도 때가 되면 물을, 시간이 되면 먹이를 갖다 줍니다. 닭은 닭장안에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한 때입니다. 마찬가지로 진정한 자유는 예수님 말씀안에 있습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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