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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 이름 바벨 (창 10: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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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름 바벨 (창 10:1-11:9) 
 
 
오늘 본문은 창세기의 4번째 톨레도트인데, 먼저 “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후예”를 소개하고(10:1-32), 바벨탑 사건(11:1-9)을 기술합니다.

이 족보는 “셈의 후예” 족보(11:10-26)와 비교하면 하나님의 대적자들을 중심으로 기록된 것처럼 보입니다. 후대에 하나님께서 선택하실 이스라엘 민족에게 가장 큰 대적이 될 함의 후손에 대한 기록이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것도 그렇고, 그 중에서도 이스라엘의 정복전쟁에서 대적이 될 가나안 족속에 대해서는 좀 더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니므롯”(8)은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개인인데, 그의 이름 뜻도 ‘대적자’입니다. 객석이 어두우면 영화의 화면이 보다 선명하게 보입니다. 이처럼 때로 역사의 어두운 면을 살피면 무엇이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올바른 길인지 보다 선명해집니다.

니므롯은 세상의 처음 “영걸”(8)이었는데, 유력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의 이후 시대에 뛰어난 사람이 나타나면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은 특이한 사냥꾼이로다”(9)라는 말이 생길만큼, 니므롯은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걸출한 인물이었습니다. 10절에 “그의 나라”는 그가 최초로 자기 왕국을 세웠음을 알게 합니다. 그는 “시날” 땅의 “바벨”을 기점으로 땅을 넓혀 앗수르까지 진출했고 레센이라는 “큰 성”을 건축했습니다(11). “시날”, “성”, “바벨”이라는 단어는 바벨탑 기사에서 다시 등장하는데(11:2, 8, 9), 바벨탑도 니므롯의 지도하에 이루어진 것 같다는 추정을 하게 합니다. 아무튼 이런 과정에서는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전제 군주에 의해 정복하고 죽이고 노예로 만들고 착취하는 일들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니므롯은 이전에 없던 “특이한 사냥꾼”이라 할 수 있겠지요.

오늘날도 세상이 기억하고 인정하는 영웅호걸들은 대체로 니므롯 같은 특성을 지닙니다. 세속 역사의 위인들은 강력한 리더십으로 많은 사람들을 휘어잡고 많은 땅을 확보하고 큰 건물들을 세우는데,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고 노예가 되고 착취되는 사실들은 흔히 묻혀버립니다. 사람들은 “그의 나라”가 얼마나 광활했으며, 그가 얼마나 웅장한 건물들을 세웠는지를 생각합니다. 그리고는 그들을 능가하거나 비교되는 인물이 되고자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 16:32)고 했습니다.

셈의 후손 중에 강조된 “에벨”(21)을 보십시오. 니므롯과 비교하면 업적이랄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에벨은 두 아들을 낳고 하나의 이름을 벨렉이라 하였으니 그 때에 세상이 나뉘었음이요 벨렉의 아우의 이름은 욕단이며”가 그에 대한 설명의 전부이기 때문입니다(25). “세상이 나뉘었음”은 바벨탑 사건으로 민족들이 여러 땅으로 나뉜 사건과 연관되는 것 같습니다. 에벨은 아들의 이름에 반영할 만큼 바벨탑 사건에 남다른 의미를 두었습니다. 그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께서 나뉘게 하셨던 바벨 정신들을 떠올리고 기억했겠지요. 니므롯이 한 일에 비해 초라하지만 성경의 관점에서 에벨은 니므롯이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위대한 사람입니다.

인생의 성공을 많은 숫자의 획득과 관련하여, 혹은 큰 업적과 관련하여 생각하는 것은 세상의 가치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런 것을 얻고자 분주하며 마음을 빼앗길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 그리고 우리에게 앞으로 주실 영광스러움에 비교한다면 세상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들조차 배설물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빌 3:8). 성도의 마음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에 남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의 의미를 기억하고, 그 의미를 묵상하는 마음이 가치 있습니다. 여러분이 닮기 원하는 사람은 니므롯과 에벨 중 누구입니까? 세상 가치관에 휩쓸리거나 흔들리지 않는 영혼이 되어야겠습니다.

11장 1-9절은 하나님의 언약하신 대로 노아의 자손들이 열국백성으로 나뉘는 과정이 인간의 반역을 통해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바벨탑 사건 이전에는 한 가지 언어뿐이어서(1), 지금처럼 외국어와 제2 외국어를 배우지 않아도 말이 잘 통했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논의하니 신기술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자연석 대신 구운 벽돌이, 진흙 대신 역청이 건축자재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노아 후손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방주를 짓던 노아와 달라졌습니다.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3). 이 정신을 중심으로 모든 사람이 뭉쳤습니다.

계시록에서 “바벨론”은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로 일컬어지고 반드시 멸망될 것이 선언됩니다(계 17:5, 18:21). 바벨론은 언제나 하나님의 나라를 대적하는 세상 나라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의 정신이 바벨론 제국을 통해 다시 나타났는데(단 4:30), 이스라엘 백성이 죄로 말미암아 바벨론에 사로잡혀 지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곳으로부터 구속하셨지요(사 48:20). 바벨론은 하나님의 백성이 나와야 할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계 18:4)고 하셨습니다.

성경이 철저하게 대적하며 거기서 나와야 할 바벨 정신은 무엇일까요? 첫째는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라는 말로 표출된 ‘교만’입니다. 사실 사람이 아무리 높은 건물을 쌓는다 할지라도 하나님 과 비길 수 있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탄은 처음부터 사람을 하나님같이 될 수 있다고 유혹했습니다(3:5). 이사야는 바벨론에 대해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사 14:13-14)는 정신을 가졌음을 폭로합니다. 하나님의 영역에 도전한다는 말 자체가 가소롭습니다.

둘째는 “우리 이름을 내고”로 표현된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정신’입니다. 교만한 자의 인생 목적이지요. 성경은 하나님 백성에게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고 했습니다. 바벨 정신과는 방향이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의 백성도 이름이 나는 수가 있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에 따라 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람과 족보에 기록된 믿음의 선진들과 사도들이 그러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어기면서까지 이름을 내려는 것은 바벨 사상입니다.

셋째로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라는 말로 표현된 ‘불순종’입니다. 불순종은 교만의 열매입니다. 자기 판단을 하나님의 뜻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뿌리에서 불순종이 나옵니다. 바벨탑을 쌓는 사람들은 온 땅에 번성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정면으로 대적했습니다. 반면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베띠를 사서 네 허리에 띠고 물에 두지 말라”, “네 허리에 띤 띠를 가지고 … 그것을 바위틈에 감추라” 등, 사소해 보이는 말씀조차 그대로 순종했습니다(렘 13:1, 4). 반역적인 바벨의 정신과 순종하는 하나님 백성의 정신은 확연히 구별됩니다.

“여호와께서 인생들의 쌓는 성과 대를 보시려고 강림”하셨습니다(5). 적극적으로 바벨의 반역의 역사에 개입하셨습니다.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한 인간들이 한 가지 언어로 의사소통하므로 죄 짓는 일에 손발이 척척 맞고 효과적인 것을 보시고,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고 하셨습니다(6). 그대로 두면 악을 궁리하고 행하는 것을 중단하지 못하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간단히 “언어를 혼잡케”하여 “알아듣지 못하게”하심으로 상황을 완전히 역전시키셨습니다(7). 말귀를 못 알아듣는 사람과는 더 이상 함께 일할 수 없었던, 그들은 성 쌓기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8). 그들의 모든 노력과 기대와 대담한 도전이 한 순간에 실패하게 하셨습니다.

사건의 결론은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로 마감됩니다(9). 바벨탑 기사는 “이들은 노아 자손의 족속들이요 그 세계와 나라대로라 홍수 후에 이들에게서 땅의 열국백성이 나뉘었더라”(10:32)는 상황이 인간의 순종에 의한 것이 아님을 부연 설명합니다. 홍수 심판은 새로운 시작을 통해 다시 희망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벨탑은 그냥 중단되었습니다. 하나이던 언어를 다양하게 하셔서 죄를 억제하셨을 뿐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재림 때까지 새로운 시작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류는 어디서 희망을 찾을 수 있을까요? 

창세기 1-11장은 ‘과연 인류에게 희망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합니다. 에덴에서도 타락했다면 아무리 좋은 환경 속에서도 인간은 타락할 것이고, 홍수 후에도 타락했다면 아무리 무서운 형벌을 가할지라도 죄 짓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터넷의 보급과 함께 오늘날 지식 발전 속도는 엄청나게 가속되고 있습니다. 72일마다 기존 지식이 배로 증가된다는 말을 들은 지도 벌써 오래되었습니다. 인터넷의 보급, 언어 번역기의 사용 등으로 사람들의 기술은 전 방향으로 나날이 새로워집니다. 이와 함께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도 급속히 확대되고 있습니다. 새로운 바벨탑들이 지금도 여전히 건설되고 있는 셈입니다. 과연 바벨 정신으로 가득한 이런 인류에게 희망이 있을까요?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람 한 사람을 부르심으로 구체화되어진 하나님 백성의 형성은 이처럼 철저한 절망의 터전에서 시작합니다. 참된 기독교 교육도 인간에게는 전혀 희망이 없다는 심각한 절망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심각한 죄악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역전시키시고 합력하여 당신님의 언약을 신실하게 완성하시는 하나님께만 희망을 두지요. 인간의 끊임없는 죄 속에서도 하나님의 언약은 언제나 신실하게 성취되었으며, 반드시 성취될 것입니다. 믿음의 선진들의 삶은 이 하나님의 언약을 붙드는 자들만이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인간의 어두운 죄악의 역사 속에 서면 하나님만이 희망이 되심을 더욱 선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에벨처럼 세상이 어찌하여 나뉘었는지 기억하고, 바벨의 정신으로부터 나와서 겸손히 말씀에 순종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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