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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 안에서 하나이니라! (갈 3:2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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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안에서 하나이니라! (갈 3:26-29)


로빈 윌리암스가 주연한 『바이센티니얼맨』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한 가정의 가장인 리처드는 가족들을 깜짝 놀라게 해 줄 선물을 샀습니다. 설거지, 청소, 요리, 정원 손질 등 모든 집안 일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아이들과도 함께 놀아 줄 수 있는 가사 로봇이 그 선물입니다. 주인공 앤드류(NDR-114의 애칭)는 리처드를 주인님으로, 그의 아내를 마님으로 부르면서 공손하고 부지런한 가사 로봇의 소임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문제의 발단은 로봇을 제작하던 기술자가 샌드위치를 먹다가 마요네즈 한 방울을 복잡한 회로 위에 떨어뜨렸고 그 결과 로봇의 신경계에 엄청난 변화가 생겼습니다. 로봇이 사람과 같은 감정을 지니게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 로봇은 주인에게 자유를 달라고 요구하게 되었습니다. 자유를 얻더라도 주인을 떠나지 않고 계속 섬기겠다고 하면서... 물론 꾸며낸 이야기지만 한낱 기계에 불과한 로봇도 자유를 원하는데 인간의 경우는 어떻겠습니까? 어찌 보면 인류의 역사란 자유를 얻기 위한 투쟁의 역사라고 말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가 이미 자유를 얻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자유롭다는 것을 거듭 강조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자유를 얻어야 할 사람이 아니라 이미 자유를 얻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는 분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말하고 있는 자유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런 자유가 아닙니다. 그 자유는 신앙적인 의미의 자유라는 말입니다. 그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자유를 누리고 있는가 아니면 종 노릇하고 있는가를 따지듯이 묻지 않았습니까? 그가 왜 그런 질문을 했습니까? 그 까닭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믿음으로 자유를 누리는 삶을 살지 못하고 율법에 종 노릇하는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그는 제발 그런 상태에서 벗어날 것을 간곡히 촉구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사도 바울이 느꼈던 그런 안타까운 감정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묻지 않았습니까? 아니 오늘 우리에게도 묻고 있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볼 때에 우리는 모두 아브라함의 후손인데 도대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믿음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분명히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다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더 이상 무엇에 얽매이는 삶이 아니라 참 자유를 누리는 삶을 살아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사회적이거나 정치적인 차원의 자유를 말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다만 신앙적인 의미의 자유를, 즉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오늘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세례를 통해서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들은 세 가지 면에서 자유를 누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인종 차별로부터의 자유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주종 관계로부터의 자유입니다. 마지막으로는 남녀 차별로부터의 자유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자유는 결과적으로는 모두 사회적이고 또 정치적인 차원의 자유라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왜 갑자기 신앙적인 의미의 자유에서 세속적인 의미의 자유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까? 그리고 그 파격적인 세 가지 자유를 왜 모두 현재형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사람들이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해서 그 즉시 인종 차별이 사라지고, 주종 관계가 사라지고, 심지어 남녀 차별까지도 사라지는 그런 세상이 오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도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현재형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장차 이루어질 일을 하나님께서 이미 시작하셨다고 확신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는 아직 현실 세계는 그렇지 않지만 주 안에서 우리가 이미 자유를 얻었고 온전히 하나가 되었음을 종말론적으로 믿었다는 말입니다.

이해인 수녀는 “나무가 미련 없이 잎을 버리듯”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더 자유스럽게, 더 홀가분하게
그리고 더 자연스럽게 살고 싶습니다. 
하나의 높은 산에 이르기 위해서는 
여러 개의 낮은 언덕도 넘어야 하고, 
하나의 큰 바다에 이르기 위해서는 
여러 개의 작은 강도 건너야 함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삶의 깊이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하찮고 짜증스럽기조차 한 일상의 일들을
최선의 노력으로 견디어내야 한다는 것을. 

참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 우리를 얽매는 것들을 과감하게 떨쳐버려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가짐으로써 누리는 자유는 참 자유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차별함으로써 누리는 자유도 참 자유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부림으로써 누리는 자유도 역시 참 자유가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더 많이 가짐으로써 자기 혼자 자유를 누리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을 차별함으로써 자기 혼자 자유를 누리려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종으로 부리면서 자기만 혼자 자유를 누리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참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혼자가 아니라 더불어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주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모든 차별을 철폐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자유롭기 때문에 자원해서 남을 섬길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자유롭기 때문에 섬긴다!” 이 말은 위대한 역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을 실천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말입니다. 대통령을 비롯해서 많은 고위 공직자들이 취임할 때에 국민을 겸손히 섬기겠다고 분명히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섬기는 지도자를 본 적이 있습니까? 말은 그럴듯하지만 다른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서 지도자가 된 사람을 본 적이 전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은 자유를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말뿐입니다. 그러나 안타깝지만 이런 식으로는 그 누구도 참 자유를 누릴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때문에 오늘 우리는 시인 김남주가 들려주는 “자유”라는 시에 또한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만인을 위해 내가 일할 때 나는 자유이다
땀 흘려 함께 일하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싸울 때 나는 자유이다
피 흘려 함께 싸우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몸부림칠 때 나는 자유이다
피와 땀과 눈물을 나눠 흘리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사람들은 맨 날
겉으로는 자유여, 형제여, 동포여, 외쳐 대면서도
안으로는 제 잇속만 차리고들 있으니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무엇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제 자신을 속이고서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섬기는 삶을 살지 않을 것 같으면 우리는 결코 참 자유를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매우 파격적인 말입니다. 왜냐 하면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사도 바울이나 시인 김남주가 꿈꾸는 세상과는 정반대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가 어떤 시대입니까? 모든 면에서 무한 경쟁을 부추기는 신자유주의 시대가 아닙니까? 사람들은 자유를 다만 성공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아니 성공으로 말미암은 자유, 승자 독식을 통한 자유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일 것입니다.

그러나 최근에 복지 천국이라고 하는 노르웨이에서 있었던 폭탄 테러와 총격 사건은 과연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또 아직도 진행 중인 영국 청소년들의 폭동의 원인은 또한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리고 국가 부도 직전까지 간 미국의 경제 위기는 과연 어떻게 설명해야 좋겠습니까? 간단히 말해서 무한 경쟁을 부추기는 비인간적인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가 옳지 못하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해 주고 있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은 우리는 모두 다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의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종이나 자유인의 차별도 있을 수 없습니다.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라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섬겨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서로 섬기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입니다. 주님도 십자가로 죄인들을 섬기기 위해서 오셨다고 분명히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섬김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참으로 충성스러운 주님의 제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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