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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가 받은 구원의 보장 (요 10:2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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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받은 구원의 보장 (요 10:27-29)
 

성경을 살펴보면. 구원의 확실성을 보장하는 말씀이 자주 나옵니다. 다시 말하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은 결코 멸망하는 법이 없으며 반드시 영생에 들어간다는 구절을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한번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그 신분이 취소되는 법이 없습니다. 한번 구원 받은 사람은 다시 멸망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저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그 중에서 몇 구절을 소개하면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롬 11:29)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 1:6)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살후 3:3)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 1:12)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딤후 4:18)

방금 읽어 드린 말씀은 하나 같이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원의 확실함을 보장해 줍니다. 이를 성도의 견인(堅忍)이라고 하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성도들은 그 은혜로운 신분에서 완전히 혹은 궁극적으로 타락하지 않고 끝까지 견디어 내어 최종적인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고 의롭다 하심을 받은 성도들도 때때로 죄를 짓고 잘못을 저지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에서 완전히 타락하여 영원한 멸망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힘쓰고 애써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구원 받은 우리를 붙들어 주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그렇다면 이제 성도들은 절대로 구원이 취소되지 않을 것이니 마음껏 죄를 짓고 세속적으로 살아도 무방하단 말이군요”라고 할 사람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성경은 이같이 말씀합니다.

“15)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16)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17)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18)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롬 6:)

진실로,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은 사람은 영적으로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곧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이전에는 영적으로 죽은 자요 소경이었으므로 하나님에 대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그저 이 땅의 것만을 위하여 살았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났고 마음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이 누구신지, 예수님이 왜 십자가 고난을 받으셨는지, 영생이 무엇인지,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예수 믿기 이전과 이후의 우리는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받았고 다시는 멸망하지 않는다고 해서 믿음을 저버리거나 죄를 짓고 방종하는 생활을 하지 않습니다. 이는 구원 받은 성도들은 가치관과 좋아하는 분야가 달라졌음을 의미합니다. 과거에 믿지 않을 때에는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가치관을 갖고 살았지만, 믿은 후로는 성경적인 가치관을 갖게 되었습니다. 과거에 믿지 않을 때에는 세속적인 것들을 좋아했으나 이제 믿은 후로는 과거에 좋아하던 것들이 추하고 유치하게 보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믿고 나서야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얼마나 고상한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말하기를 ‘믿기 전에 귀하게 여겼던 것들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습니다. 사회적인 신분과 지위, 학식, 재산, 명예, 따위를 배설물 곧 오줌이나 똥처럼 하찮게 여겼습니다. 그 대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사는 것을 삶의 최상의 목표로 삼았습니다.

따라서 성도들이 궁극적인 구원을 보장 받은 것이니까 더 이상 신앙생활에 열심을 내지 않고 각자 마음대로 살자고 할 것이 아니냐는 우려는 기우에 불과한 것입니다. 진실로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은 이제 구원받았으니 죄짓고 방종하자고 생각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구원 받은 성도는 절대로 죄를 짓지 않는다거나 나쁜 생각이나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성도들도 죄를 짓습니다. 나쁜 생각이나 말과 행위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죄를 짓고 악을 행하면 양심에 고통을 느낍니다.

로마서 7장에 보면, 이 같은 사도 바울의 탄식이 나옵니다.

“15)나는 내가 하는 일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내가 원하는 것은 하지 않고 도리어 원치 않는 것을 하기 때문입니다. 16)만일 내가 원치 않는 일을 하게 되면 그것은 율법이 선하다는 것을 내가 인정하는 것이 됩니다. 17)그러나 이것을 행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있는 죄입니다. 18)선한 일을 하고 싶어 하면서도 그것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나의 옛 성품 속에는 선한 것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19)나는 내가 바라는 선한 일은 하지 않고 원치 않는 악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20)만일 내가 원치 않는 것을 한다면 그렇게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있는 죄입니다. 

21)여기서 나는 하나의 원리를 발견했는데 그것은 선한 일을 하려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다는 사실입니다. 22)나의 내적 존재는 하나님의 법을 좋아하지만 23)내 육체에는 또 다른 법이 있습니다. 그것이 내 마음과 싸워서 나를 아직도 내 안에 있는 죄의 종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24)아아, 나는 얼마나 비참한 사람인가요!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구해 내겠습니까? 25)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아직도 내 마음은 하나님의 법을 따르고 육신은 죄의 법을 따르고 있습니다.”

이 탄식은 비단 사도 바울 뿐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살려고 하지만 자주 실패를 경험하는 우리 모두의 탄식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탄식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성도들의 내면에는 항상 영적 싸움이 있습니다. 이 싸움에서 이길 때는 우리 심령에 기쁨이 있지만 패하면 슬픔과 고통을 맛보게 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영적 싸움을 통해서 성도들은 연단을 받아서 점점 더 강해지고 드디어는 성숙한 성도들이 되어 죄를 이기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위하여 사죄의 길을 활짝 열어놓으셨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하신 요한일서 1장 8절 말씀이 그것입니다. 구원 받은 성도들도 죄를 지을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 나아가 죄를 자백하고 회개할 때 다시금 죄를 용서해 주시고 정결케 만들어 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죄를 지어도 심령에 고통이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살겠다는 마음의 소원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아무리 교회 생활을 오래 했을지라도 거듭나지 못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그는 무늬만 기독교인이지 실은 구원 받지 못한 사람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형식적인 신자와 거듭난 신자는 뚜렷한 차이가 있습니다. 믿은 지 오래되지 않은 신자는 영적으로 갓난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도 잘 모르고, 하나님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교회 생활도 서툽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진실로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은 사람이라면 그 속에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갓난아기를 보세요. 아기가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혼자 일어서지도 못하고, 젖도 먹여주어야 하고, 옷도 입혀 주어야 하고, 기저귀도 갈아주어야 합니다. 보살피지 않으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갓난아기가 잘 하는 것이 있습니다. 젖을 사모합니다. 금방 먹었는데도 또 달라고 울고 보챕니다. 그리고 똥오줌을 눕니다. 엄마는 아기가 똥오줌을 잘 누는 것을 보고 예뻐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기의 신진대사가 원활하다는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기는 배가 고프거나 몸의 상태가 좋지 않으면 울고 보챕니다. 배가 부르고 편안하면 방긋방긋 웃습니다. 비록 말을 하지는 못하지만 아기도 의사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기 인형은 이 가운데 하나도 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믿은 지 오래되지 않았더라도 거듭난 사람은 기본적인 영적 갈급함이 있기 마련입니다. 설교의 내용을 다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예말씀을 사모합니다. 주일이 기다려지고 예배를 빼먹으면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사소한 것 같지만 이러한 것들이 신자들의 영적인 건강 상태를 말해 줍니다.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탕자의 비유를 보면,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졸라 자기 몫의 재산을 받아가지고 먼 나라로 갔습니다. 거기서 그는 허랑방탕한 생활로 재산을 다 탕진하였는데, 그러고 나자 그 나라에 큰 기근이 들었습니다. 이 아들은 들판에서 돼지치기가 되어 돼지가 먹는 쥐염 열매를 나누어 먹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나마도 배불리 먹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비참한 형편에서 이 아들은 비로소 자기 잘못을 깨달았습니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눅 15:17-19)

이 아들은 병들고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아버지 집으로 돌아옵니다. 아직도 상거가 먼 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기를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온 이웃 사람들을 잔치에 불러 함께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였습니다.

이 비유를 읽어 보면, 둘째 아들이 진심으로 뉘우치고 아버지께로 돌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아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언급이 없지만, 우리는 그가 새사람이 되어 아버지의 말씀을 순종하였을 것이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유추해 낼 수 있습니다. 만약에 이 아들이 돌아온 후에도 다시금 불순종하고 가출할 기회를 엿보았다면, 앞서 아버지 앞에서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다고 한 말은 진심이 아니라 곤란한 순간을 모면하려는 속임수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비유에 나오는 둘째 아들은 진심으로 자기의 잘못을 뉘우친 것이 분명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 역시 형식적인 회개가 아니라 진실한 회개를 한 사람들입니다. 반면에, 진실한 회개를 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오랫동안 기독교인으로 살아왔고 직분을 맡았을지라도 여전히 구원받지 못한 불신자에 불과합니다. 이렇게 볼 때, 견인의 은혜는 진실로 구원 받은 성도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구원은 돈을 주고 기차표를 산 것과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믿으면 하나님께서는 기계적으로 구원을 주신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구원은 우리가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은 것을 의미합니다.

에베소서 2장에 보면, 구원 받기 전에 우리의 실상은 죄와 허물로 영적으로 죽었던 자들이었으며, 죄 가운데 살면서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 곧 마귀를 따라 살았고,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그러던 것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고나자 본질적인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영적으로 거듭났습니다. 거듭남은 존재의 본질적인 변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듭난 성도들이 견인 교리를 빙자하여 고의적으로 죄를 짓고 하나님을 배반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성도들도 죄를 짓지만, 그것은 인간의 연약함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불신자들과 같이 죄를 좋아하기 때문에 짓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요한일서 3장 9절에 보니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로서 난 자”란 거듭난 성도를 말합니다. 성도들은 거듭난 자들로서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짓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죄를 짓지 않다니요? 나는 예수님을 믿지만 죄를 짓는데요.”라고 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죄를 짓는다’는 것은 고의적이고 상습적으로 죄를 짓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죄를 짓되 고의적이고 상습적으로 죄를 짓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하나님의 자녀’ 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성도들이 고의적으로 죄를 짓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곧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자기 자녀로 삼으셨고,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에 참여케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증표로서 성령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제, 성령께서 성도들의 심령에 임하여 계십니다. 

이를 “성령의 내주”(內住)라고 합니다. 성령께서 성도들 안에 계신 것은 곧 성도들에게 궁극적인 구원을 보장하신 것과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성령의 내주하심을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친히 도장을 치신 것에 비유합니다. 에베소서 1장에 보니 “13)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14)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도장을 함부로 찍지 않고 매우 중요한 일에 한해서 찍습니다. 집을 사고 팔 때에 계약서에 인감도장을 찍습니다. 등기서류에도 인감을 찍습니다. 은행에서 대출을 받기 위해서도 인감도장을 찍습니다. 호주에서는 들판에 소를 방목하는데, 다른 사람들의 소 떼와 섞였을 때 분간하기 위해서 소의 가죽에 불도장을 찍습니다. 이처럼 도장은 소유권을 의미합니다. 나의 도장이 찍힌 부동산을 다른 사람이 함부로 손댈 수 없습니다.

그 도장의 효력은 그 도장의 주인이 가진 권위에 비례합니다. 가령, 법원이나 국세청에서 강제 집행을 하기 위해 어떤 건물이나 물건에 압류 증서를 붙여 놓으면 아무도 거기에 손을 댈 수가 없습니다. 국법이 보장하기 때문이지요. 봉건시대에는 왕의 옥쇄가 찍힌 봉인을 붙여 놓으면 아무도 그것을 떼어 낼 수가 없고 그 물건에 손을 댈 수가 없었습니다. 그 도장은 왕의 권위를 의미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성령의 도장을 치셨습니다. 우리 심령에 성령께서 계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요,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증표와 같습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8장 14절에 이르기를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이라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우리의 노력이나 공로로 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요한복음 1장에 이르기를 “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하였고, 에베소서 1장에는 이같이 말씀합니다.

“3)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4)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 믿는 자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을 자녀로 삼으셨으므로 그 누구도 이를 취소할 수 없습니다. 그 누가 하나님의 결정을 취소시킬 수 있겠습니까? 성도들이 죄를 미워하고 의로운 삶을 좋아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은 아버지를 닮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고 하셨습니다. 왜, 성도들이 서로 사랑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선을 행할 때 사람들의 칭찬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닮아서 자연스럽게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언급한 대로, 성도들도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곧 죄를 깨닫고 회개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둔해서 깨닫지 못하고 계속해서 범죄하면 하나님께서 징계를 가하셔서 깨닫게 해 주십니다. 다음과 같은 히브리서 12장 말씀이 이를 의미합니다.

“5)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7)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9)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늘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10)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시느니라”

우리가 범죄하고 그릇된 길로 갈 때에 하나님의 징계가 임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라는 증거임을 알고 감사해야 합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받은 구원이 영원히 변함없는 이유를 말해 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어떻게 아느냐?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 안에 와 계신 것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받은 구원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고 또한 우리의 실수로 취소되지 않는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요 14:16)라고 하셨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와 영원히 함께 계시는 한 우리의 구원은 영원히 변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이 확고함을 보증해 주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27)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28)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보혈을 주고 우리를 사셔서 당신의 양으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셨고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셨습니다. 그처럼 고귀한 대가를 치르시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하셨는데, 마귀에게 빼앗기실 리가 있겠습니까! 성도들이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날 세상은 성도들의 믿음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과연, 주님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모두 믿음을 지켜나갈 수 있을까요? 시험과 역경, 세상 유혹이 쓰나미 처럼 밀어 닥쳐도 변함없이 믿음을 지켜나갈 수 있을까요? 그러나 염려하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각 사람을 부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을 후회하지 않으시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시는 그 날까지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할 일은 우리의 구주시며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주님께서 그 능력의 손길로 우리를 붙들어 주셔서 영원한 천국까지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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