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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유를 얻은 이들에게 주시는 사명 (눅 4: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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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를 얻은 이들에게 주시는 사명 (눅 4:16-20)


호주의 시드니교도소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실화입니다. 그 교도소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빵을 배달하는 트럭이 왔습니다. 매일 빵을 배달하는 트럭이 오는 것을 알게 된 죄수 한 사람이 기회를 엿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빵을 배달하는 트럭에 몸을 숨겨 탈출해야겠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는 계획대로 모범수가 되어 빵을 트럭에 싣고 나르는 부서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에게 기회가 왔습니다. 그를 워낙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에 모두 안심하고 있는 사이에 그는 빈 박스 속으로 들어가 숨었습니다. 트럭의 화물칸이 찰카닥 잠기는 소리가 들리고 차가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서서히 추워 오기 시작했습니다. 빵을 싣고 다니는 냉동차였기 때문입니다. 몸이 꽁꽁 얼었지만 ‘오늘부터 나는 자유다!’라는 생각 하나로 꾹 참고 견뎠습니다. 한참을 지났을까, 트럭이 어느 곳엔가 섰습니다. 그는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가 열리자마자 재빨리 뛰쳐나갔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뛰어가다 보니 동서남북이 철조망이고, 총을 든 군인들이 서 있었습니다. 그 트럭은 모든 교도소를 돌며 빵을 배달하는 차였습니다. 그는 단지 다른 교도소로 옮겨진 것입니다. 

여러분, 자유를 얻었습니까? 무엇으로부터 자유를 얻으셨습니까? 집에서입니까? 학교에서입니까? 직장에서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자유를 찾아 뛰쳐나가지만 단지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겨질 뿐,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느 것으로부터 자유를 얻었지만 다른 것에 의해 또 속박이 되고 매이는 부문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진정한 자유는 아무것으로부터도 매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무엇에 매이냐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에 가치를 두고 그것을 위해 사느냐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430년간 고통스러운 노예생활을 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울부짖었고 하나님은 그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해방을 시켜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애굽의 억압으로부터 해방을 시켜 주시면서 그들의 조상에게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곳에서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애굽의 바로 왕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해방을 원치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내리신 열 가지 재앙을 겪은 후에 결국 바로 왕이 이스라엘의 해방을 선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통스러웠던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벗어나 감격 속에서 자유를 외치며 애굽에서 뛰쳐 나왔습니다. 그들은 자유를 노래하며 축제를 벌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애굽에서 나와 광야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찬양과 감사 대신 불평과 원망을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평과 원망을 하며 해방을 주신 하나님 대신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을 섬겼습니다.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때마다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시고,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먹고 싶은 것, 마시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없다고 끊임없이 불평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떠나 음란한 생활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명예와 권력에 대한 욕망을 가지고 불평하며 다퉜습니다. 애굽으로부터 정치적인 노예 상태로부터 해방이 되었지만 그들은 광야에서 자신들의 욕망에 노예가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해방시키신 것은 단순한 정치적인, 공간적인 해방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해방시키신 것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 하나님의 정신과 가치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지켜야 할 기본적인 원칙을 세워 주셨습니다. 그것이 십계명, 즉 율법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이 만들기 원하시는 정신과 가치를 담은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꿈이며 비전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율법과 비전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 것보다는 지금 내가 원하는 대로 먹고, 마시는 욕망과 내가 더 큰 영향력을 갖고, 높아지는 것에 대한 욕심에 급급했습니다. 하나님의 꿈이 아닌 자신의 욕망을 가지고 광야를 지나다 보니 다시 노예의 근성이 살아나 원망과 불평을 일삼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광야 40년을 통해 하나님의 꿈이 아닌 자신의 욕망을 중심으로 다시 노예근성이 되살아나 원망과 불평으로 이스라엘 공동체를 혼란스럽게 하는 모든 사람들을 광야에서 죽게 하고 단 한 사람도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애굽에서 해방된 1세대들 가운데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만이 광야에서 태어난 2세대들과 함께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의 광야 40년의 삶을 보면 그들은 어떤 어려움과 역경 가운데서도 자신들의 욕망이 아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모두가 할 수 없다고 원망하고 불평할 때 그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에 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모두가 불평하며 하나님의 비전에 등을 돌릴 때 그들은 하나님의 비전 앞으로 더 가까이 나아갔습니다. 이스라엘 모두가 자신의 욕망을 중심으로 삶을 살아갈 때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중심으로 삶을 살아갔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광야 40일간을 금식기도 하시고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처음으로 설교한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회당에서 이사야서 61장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참된 자유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눌린 자에게 자유롭게 함을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사역을 통해 이 땅에 죄의 속성과 아픔으로부터 억압되어 있는 이들에게 복음을 증거 하시며 자유를 선포하십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먹을 것을 제공하셨습니다. 눈 먼 자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워주셨습니다. 중풍병자와 문둥병자를 낫게 하셨습니다. 사회로부터 소외 된 사람들의 진정한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가르쳤고 그들이 하나님 백성 됨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사역을 하시면서 그들에게 분명한 사명감을 심어 주셨습니다. 19절에서 그것을 말합니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눌린 자에게 자유를 주심은 하나님이 은혜를 온 세상에 전파하게 하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인 사람들을 보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자유가 자신들의 욕망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총독 빌라도도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예수님께서 죄가 없으시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형을 집행하게 했습니다. 대제사장과 제사장, 바리새인과 서기관, 사두개인 그들도 자신들이 누리는 명예과 기득권을 유지하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12제자와 군중들도 자신들이 바라는 욕구가 충족되지 못했을 때 예수님을 배반했고, ‘호산나’라고 부르던 찬양이 ‘예수를 죽이라’는 거친 함성으로 변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애굽에서 해방되어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자기의 욕망에 사로잡혀 원망하고 불평하던 모습이 그대로 나옵니다. 예수님은 참 자유는 자신의 욕망만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삶의 자유를 주신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이라고 십자가의 삶을 통해 본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갈라디아서 5장 13-15절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한 번 찾아서 읽어보겠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죄의 권세를 쥐고 있는 사단의 세력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셨는데 그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유가 나를 위한 것이 아닌 타인을 위한 것이 될 때 자유의 진정한 가치와 정신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 안에서 참 자유를 얻은 우리들이 지녀야할 사명입니다. 

내일은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침략을 받아 36년간 억압의 통치를 받다가 해방을 맞이한 광복절입니다. 이스라엘에 가보면 2차 세계 대전 때에 히틀러에 의해 600만 명이 학살을 당했던 아픔을 기억하며 세운 박물관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습니다. ‘용서는 하자 그러나 잊지는 말자’ 이것은 힘이 없을 때 일제로부터 온갖 억압을 받았던 우리나라와 민족이 마음 깊은 곳에 새겨야 할 말입니다. 강대국의 틈바귀 속에서 약한 나라들이 독립적으로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영토의 식민지는 아닐지 모르지만 보이지 않는 정치적, 경제적인, 정신적인 식민지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변의 강대국들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우리나라를 이용할 수는 있어도 자국의 이익을 포기하고 우리나라의 이익을 위해 희생할  나라는 없습니다. 일본이 독도를 자신들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것은 침략의 역사를 반성할 줄 모르는 어리석은 자들의 모습입니다.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힘의 논리입니다. 정말로 눈을 잠시 감으면 코를 베어 가고도 남을 세상입니다. 자신의 권리와 자유를 지키려면 그것을 지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자유가 자신을 위한 자유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꼭 명심해야 합니다. 

8·15 광복절을 맞아 우리들이 누리고 있는 자유가 진정한 자유인가를 한 번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억압으로부터 자유를 얻었지만 그 자유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억압에서 해방되었지만 그 자유가 광야에서 자신들의 욕망과 욕구의 노예가 되는 곳에 사용된 것처럼 우리의 자유가 그런 모습이 아닌지 한 번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 해방 이후에 놀라운 경제적인 성장과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뒷면을 보면 자살율과 이혼율은 세계 1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알콜 중독자 300만 명이 거리를 비틀거리며 걷고 있습니다. 정신적인 치료를 받아야 할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거리를 헤매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분단된 유일한 국가로 남아 동족끼리 총부리를 겨누고 으르릉 거리고 있습니다. 공정한 사회를 외치기는 하지만 사회 곳곳이 부정과 부패로 얼룩져 공정한 사회가 실현되기까지는 아직도 요원합니다. 밤거리가 불야성을 이루며 휘황찬란 하지만 골목 뒷켠에는 아직도 눈물로 지새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8·15 광복절을 맞아 광야에서 자신의 욕망을 뒤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약속의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향해 자신들의 자유를 바르게 세웠던  여호수아와 갈렙의 참 자유의 영성이 우리 가운데 회복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오늘 본문에서 하신 첫 번째 설교 내용 중에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눌린 자에게 자유를 주심은 그들로 하여금 참 자유를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전파하려 하심이다는 말씀을 마음에 새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안에서 얻게 된 참 자유를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웃을 위한 것으로,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위한 것으로 사용하는 참 자유자의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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