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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광복절] 생명의 빛 (요 8:12)

첨부 1


생명의 빛 2011. 8. 14. 주일 낮
본 문: 요한복음 8:12

내일은 일제의 억압에서 해방된 날을 기념하는 66주년 광복절(光復節)입니다. 광복절이란 다시 빛을 찾은 절기라는 뜻입니다. 이 빛은 하늘에 있는 태양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본문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나는 세상의 빛이라”하셨는데, 이 또한 자연의 빛이 아닌 자유를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 8:32)하셨으며, 요한복음 14장 6절에“내가 곧...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자유를 주는 진리가 곧 예수님이시며, 이 예수님이 또한 이 세상의 빛이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자유는 이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때만 가능합니다. 

철학자 부르너는 말하기를“인간이 원하는 모든 자유의 성취는 체제가 바뀐다 하더라도 사람의 마음속에 진정한 의미의 자유를 구속하는 죄가 있는 한 구속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질서를 어기고 하나님 앞에서의 자유를 구속하는 죄가 있는 한 진정한 자유가 없다.”라고 했습니다. 죄가 있는 곳에는 그 어디에도 참 자유가 없다는 뜻입니다. 

먼저 본문에 예수님께서“나는 세상의 빛이라”말씀하신 그 배경과 의미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때는 한해 농사가 다 끝난 후 가을에 지키는 초막절이라는 명절이었습니다. 초막절이란, 이스라엘 민족이 지키는 3대 명절중의 하나입니다. 430년간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기적으로 해방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의 땅 가나안까지 가는 과정에 시나이 반도의 큰 사막을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사막에는 물이 없습니다. 물이 없으니 자연히 식물도 없습니다. 낮 기온이 40도가 넘지만 더위를 피할만한 그늘도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물이 없어 기갈로 죽어갈 때 하나님은 반석에서 샘물이 솟아나게 하셨고, 먹을 양식이 없어 굶주릴 때에는 하늘로부터 만나라는 양식을 내려 주셨습니다. 일사병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뜨거운 낮에는 구름으로 그늘을 만들어 주셨고, 일교차가 심한 싸늘한 밤이 되면 불기둥이 나타나 따뜻하게 할 뿐만 아니라, 캄캄한 밤을 밝혔습니다. 

이렇게 40년 동안 무사히 광야를 지나 꿈에도 그리던 가나안 땅에 도착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광야에서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자자손손 하나님을 잘 공경하므로 복을 받아 누리도록 하기 위해 절기를 지키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 절기 가운데 하나가 곧 초막절입니다. 곡식을 거두어 창고에 저장한 후에 지키는 절기라 하여 수장절이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초막절이라 한 까닭은, 광야에서 집 없이 살던 때를 기억하기 위하여 이 명절이 되면 한 주간동안 마당이나 들판에 풀로 움막을 짓고 그 움막 속에서 지내기 때문입니다. 이 기간 동안 그들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되새기며 감사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초막절입니다. 

이 초막절에는 특히 두 가지 의식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광야를 지나오는 동안 먹을 물이 없어 기갈에 시달릴 때 하나님께서 반석에서 샘이 솟아나게 하신 것을 기념하는 물 긷는 행사였습니다. 초막절을 지키는 동안 매일 아침 흰 예복을 입고 순금 항아리를 든 제사장을 따라 두 줄로 서서 하나님께 찬양을 하며 물을 길러왔습니다. 이 물은 10리 밖에 있는 실로암 못까지 가서 길러온 것으로 성전 뜰의 제단 옆에 그 물을 붓는 것이었습니다. 

이 행사를 보신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한복음 7:37-38) 하셨습니다. 광야의 반석에서 솟아난 샘물은 육체를 살렸지만 메시아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영혼을 살리는 샘물임을 말씀하셨습니다. 

둘째는, 여인의 뜰에서 4개의 황금 촛대에 불을 밝히는 의식이었습니다. 젊은 제사장이 사다리로 올라가서 황금 촛대에 점화했는데, 이것은 온 예루살렘을 빛으로 밝힌다는 상징적인 의미입니다. 이것은 그들의 조상들이 애굽에서 탈출한 후 광야에서 방황할 때에 하나님께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켜주신 은혜를 상징하는 의식이었습니다. 이 황금 촛대에 불을 밝히는 것을 보신 예수님께서“나는 세상의 빛이니”라고 하셨습니다. 

一. 예수님께서 세상의 빛이라 말씀하신 의미는 무엇입니까?

빛의 특징은 어두움을 몰아내는 것입니다. 빛이 있는 곳에 어두움은 사라지게 됩니다. 이 세상에 오셔서 행하신 예수님의 역할을 빛에 비유하여 말씀하신 것은 참으로 적절한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나는 세상의 빛이니”라고 말씀하신 그 시대에도 태양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심령이나 사회 구석구석에는 어두움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 어두움을 밝히시고자 예수님께서 세상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삶 가운데에 어두움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불의와 불법이 난무한 시대를 가리켜“암흑기”라고 합니다. 예수님 당시가 그와 같았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지도자들은 물욕과 명예욕에 눈이 어두워 있었습니다. 극히 부패한 시대였습니다.

또한 지식이 없어 깨닫지 못하는 경우를“까막눈”이라고 합니다. 당시의 사람들의 영혼의 눈이 캄캄했습니다. 세상적인 지식은 높은 수준에 있었지만, 가장 고귀한 지식의 근본인 하나님에 대해서는 어두운 밤과 같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으나 아무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때의 종교 지도자들을 보신 예수님은 책망하시기를 회칠한 무덤 같은 자, 독사의 새끼라 하셨습니다.

또한 앞날의 희망이 없는 경우를 가리켜“앞이 캄캄하다”라고 표현합니다. 그때 이스라엘 민족의 삶의 환경이 그러했습니다. 앞이 캄캄했습니다. 나라는 로마의 속국이 되어 억압을 받고 있었습니다. 나라 없는 민족의 살림살이가 넉넉할 수 없었습니다. 가난한 나라의 백성들이 건강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처럼 그들은 가난과 온갖 질병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구약의 말라기 선지자 이후 400여 년간 하나님의 계시가 끊어진 상태였습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임을 자부하는 이스라엘인 민족인데 하나님의 계시가 그토록 오래 동안 끊어졌다는 것은 그들의 마음을 더없이 안타깝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이 보내실 메시아를 더욱 애타게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어두운 때에 빛으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참된 진리를 밝혀줄 빛으로 오셨습니다. 절망의 어두움, 가난의 어두움, 질병의 어두움, 자유를 잃은 억압의 어두움, 마음의 상처의 어두움, 죄악의 어두움 등 갖가지 어두움으로 칠흑같이 어두운 때에 예수님께서 세상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빛은 모든 어두움을 몰아냅니다. 빛과 어두움은 공존할 수 없습니다. 빛이 있는 곳에는 아무리 짙은 어두움이라도 곧 사라지게 됩니다. 어두움을 밝히는 태양의 능력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은 태양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빛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삶의 어두움을 밝히시는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은 태양처럼 영원토록 변함이 없습니다. 

二. 그리스도의 빛을 받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본문에 말씀하시기를“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라라.”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가 그 빛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머물렀던 곳을 떠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서 따라갈 수는 없습니다. 따라 간다는 것은 있던 곳에서의 떠남을 전제로 한 말입니다. 어두움의 세상, 불의한 자리,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잘못된 옛 습관으로부터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야만 예수 그리스도의 빛의 축복을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고향과 친척과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하는 곳으로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히브리서 11장 8절 말씀에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약속하시기를“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복을 얻을 것이니라”(창세기 12:2~3) 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따르려면 떠나야 할 곳이 있고, 버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그대로 가지고는 주님을 따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4장 22절에 말씀하시기를“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라(고)”하셨습니다. 이처럼 어두움의 자리를 떠나 빛 되신 그리스도께서 지시하시는 곳으로 따라갈 때 빛의 풍성한 축복을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의 삶을 배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1장 28절~29절 말씀에“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배우는 것이 빛을 따라 가는 삶이며, 참 자유를 얻는 길입니다. 요한복음 8장 31절~32절 말씀에는“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하셨습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스승을 따라 배우는 것입니다. 배우되 이론적으로만 배워 뇌리에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삶을 배워 내 삶 속에 적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할 때 참된 자유를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 살아온 삶의 방법은 모두가 잘못된 것입니다. 살아 계셔서 우주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신데 그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우상을 숭배함이 복 받는 길로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삶의 터를 닦아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들의 삶 속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참 자유가 있게 됩니다.

어느 교회 집사님의 이야기입니다. 남편은 탈선하여 다른 여자와 살고 있고, 그녀는 파출부로 힘겹게 자녀를 키우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교회 목사님을 찾아가서 하는 말이 “시골에 홀로 계신 시어머니가 병들어 자리에 누워 계시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라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다만 아픈 마음으로 기도하고 돌려보냈습니다. 며칠 후 그 여자 집사님이 다시 찾아와서 말하기를“기도할수록 성령님은 시어머니를 섬기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양심이 괴로운 것보다 고생이 되더라도 가서 시어머니를 모시는 것이 더 낫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결국 그 집사님은 시어머니가 계시는 곳으로 달려갔습니다. 그 집사님을 떠나보내면서 목사님은 독백하기를“아, 바보 같은 여인이여! 하지만 당신은 진정한 자유자요, 승리자로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 여인이 미움과 배신, 절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았기 때문입니다. 

루터는 말하기를“그리스도인은 가장 위대한 자유인이다. 세상 누구에게도 구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반대로 그리스도인은 가장 충성된 노예이이다. 십자가 사랑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소망 가운데 참된 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3장 17절에 말씀하시기를“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하셨습니다.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는 것입니다. 여기에 진정한 자유가 있습니다. 

三. 그리스도의 빛을 따라감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1. 빛을 따라가면 생명을 얻습니다.

본문에 말씀하시기를“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받으리라”하셨습니다. 
몇 년 전 터키에 대지진이 난 후 무너진 건물더미 밑에서 한 모자(母子)가 여러 날 동안 갇혀 있다가 극적으로 살아난 일이 있었습니다. 건물더미 밑에서 불안과 좌절과 고통을 겪고 있는 가운데, 어느 날 꿈속에서 이 모자(母子)가 있는 건물더미 옆에 밖으로부터 들어오는 빛이 있음을 보았습니다. 잠에서 깨어나 캄캄한 어둠 속을 더듬으며 간신히 건물더미 뒤를 돌아가니 꿈에서 본 한줄기 밝은 빛이 있었습니다. 그 빛을 따라 사력을 다해 장애물을 해치고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어두움의 자리에서 일어나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지시하시는 곳으로 따라갈 때 빛의 풍성한 은총인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빛은 곧 생명입니다. 이 생명이란, 가난과 질병과 배신과 이별에 괴로워하는 육신의 생명이 아닙니다. 잠시 머물다 떠나는 이 세상의 육신의 생명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을 말합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하나님의 나라로 올라 가셨습니다. 그 곳은 장차 우리들도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아갈 곳 하늘나라입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다시 살아나셔서 하늘나라로 올라 가셨습니다. 그 곳은 장차 우리들도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아갈 하늘나라입니다. 

2. 빛을 따라가면 삶의 풍성한 열매를 맺습니다.

올해는 내린 비의 량도 많지만 비온 날이 너무 많아 농가의 고민이 많습니다. 농가만 아니라 추석명절을 앞둔 국민 모두의 걱정거리입니다. 과일의 일조량이 적어 과일이 굵지도 않고, 맛도 좋지 않다고 합니다. 그러한 과일도 태풍에 너무 많이 떨어져서 품귀 현상이 올 것 같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빛은 수확량이나, 과일의 색깔이나, 맛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래서 과수원을 경영하는 농부들은 과일 나무 밑에 은빛 돗자리를 폅니다. 햇빛이 들어가지 않는 곳에 빛이 골고루 반사 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렇게 하면 과일 전체의 색깔이 곱고 맛이 좋다고 합니다. 

식물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받은 국가와 사회는 반드시 문명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곡식이나 과일에 비추는 일조량과 같습니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오기 전 상황이 어떠했는지 우리는 자세히 알 수가 없습니다. 한국최초의 의료선교사인 알렌은 1884. 9. 22에 한국에 도착하여 1885. 4. 10에 한국최초의 병원인‘광혜원’을 세웠습니다. 그 후 1885. 4. 5에 우리나라에 도착한 언더우드 미국선교사는 알렌과 함께 광혜원에서 진료를 했습니다. 언더우드 목사도 의사였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우리나라에서 겪은 경험담을 선교사(宣敎史)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청년 선교사 언더우드 목사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 땅에 도착한 첫날부터 모든 것이 충격적인 것이었다. 조선 사람들이 입고 있는 의복이나 음식, 그리고 그들이 몸담아 살고 있는 가옥의 모양이야 이미 각오한 바 있어 오히려 호기심이 일고 재미있기도 한 것이었다. 하지만, 조선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가치관이나 이념은 너무나 뜻밖의 것들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것도 양반이나 귀족사회의 그것과 상민이라고 일컬어지는 백성들의 그것이 너무도 엄청나게 달라서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상민 또는 평민이라고 불리는 백성들은 무엇을 배우거나 알고자 하는 의욕을 태어나는 순간부터 가차 없이 잘라내고 사는 사람들 같았다. 

그들은 쥐어 짜이고 빼앗기면서도 왜 빼앗기는 것인지를 모르고 있었다. 왜 빼앗기는 것인지를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저 태어나면서부터 그렇게 빼앗기며 쪼들리고 살아야만 하는 것인 줄 알고 있었다. 이유를 따지는 일도 없이 그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기름기라고는 조금도 없이 배가 등에 달라붙어 도무지 힘을 쓸 수 없는 생활을 하고 있으면서도 자식을 끝없이 주렁주렁 낳고, 끝없는 가난에 쪼들리면서도 별다른 원망 없이 그냥저냥 살고들 있었다.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죽어가는 것이 인생 그것이라고들 믿고 있었다.

아예 배우고자 하는 뜻을 가질 줄 몰랐다. 배울 수 있는 것은 특권이었고, 그 특권은 양반이나 사대부의 자제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었다. 백성들은 눈뜨기를 오히려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눈이 뜨여 사리가 분명하게 보이기 시작하면 그것이 화근이 된다고 믿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가난 속에 스스로 머리를 틀어박고 그 가난 이외에 아무 것도 보려고 하는 것 같지를 않았다. 가난은 당연히 불결과 겹쳐져 있었다. 그들은 가난에 대하여 별로 불편해 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결이라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에 대해서도 마음을 쓰려고 하지 않았다. 물을 아무데서나 길어다 식수로 썼고 또 배설하는 일을 깔끔하게 뒤처리할 줄 몰랐다. 
상민의 아내들은 아이를 쑥쑥 빠뜨리듯 낳았다. 흙집 흙바닥 위에 거적자리 를 깔고 아이를 그 위에 쏟아 놓는 것이 예사였다. 유아 사망률이 대단했다.

조선 땅에는 기이하다고 생각될 만큼 천연두가 극성이었다. 죽어가는 사람 의 절반은 천연두 때문에 죽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시두(時痘)라고도 부르는 이 병이 집안에 전념되어 들어오면‘손님마마’‘별성마마’라고 부르면서 마치 위엄 있는 손님이나 온 듯이 식구들이 언행을 조심하며 그 병을 인격시 했다. 조선 사람들은 천연두를 별성마마라고 부르며 호구별성(戶口別星)이라고 해서 천연두를 집집마다 가져다 앓게 하는 여신이라고 믿고 있었다. 

조선 사람들이 믿는 이 귀신은 원래는 중국 귀신인데 그 귀신이 가끔 먹을 것을 바꾸어 먹으려고 조선 땅으로 건너오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그 귀신을 잘 대접한다는 표시로 천연두를‘손님’이라고도 부르는 것이었다. 그 손님마마가 곱게 물러가 주십사고 음식대접으로 푸닥거리를 하거나 굿을 했다. 그것도 안 되는 가난한 집에서는 정화수를 떠놓고 두 손을 싹싹 비벼 빌었다. 대개는 얼굴을 엉망으로 얽어 못쓰게 만들어 놓고 떠나는 이 병 앞에서 사람들은 쉬쉬하며 말소리도 크게 내지 않았다. 

매독환자도 흔했고, 조선사람 전체가 우글거리는 회충을 뱃속 가득하게 껴안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여름이 시작되면서 콜레라는 전국을 휩쓸었다. 장안에서도 죽는 사람의 수효가 하루에 수백 명씩이었다. 처음 얼마 동안은 수구문 밖으로 시체를 옮겨 버리더니 점차로 시체를 옮기는 일조차 포기했다. 환자가 발생했다 하면 달려들어서 환자를 끄집어내어 실어다 버리고 그 집을 불 지르고 하던 것도 초기의 일이었다. 전염병이 급속도로 번져가자 이제는 성한 사람들이 환자가 발생한 집을 피하여 달아나기 시작했다. 

콜레라에 대한 조선 사람들의 생각이 얼마나 엉뚱한지, 조선 사람들은 콜레라가 쥐의 귀신이라고 믿고 있었다. 호열자에 걸리는 건 쥐 귀신이 들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콜레라균이 쥐의 형상을 하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쥐의 발을 거쳐서 인체에 숨어들어 내장에 까지 파고드는 것이라고 단단히 믿고 있었다. 콜레라 환자의 다리근육 경련도 쥐 귀신의 짓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집 대문에다 고양이 그림을 그려서 붙여놓았다. 그것이 유일한 예방이라는 것이었다. 쥐 귀신이 덤벼들지 못하게 하려면 고양이를 내세우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농촌에서는 집 둘레에 새끼줄을 쳐놓고 그 줄에다 줄레줄레 부적을 매달아 놓기도 했다. 이것이 콜레라 귀신을 막는 방법이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우리나라의 옛 모습 즉 우리조상들이 살았던 삶이었습니다. 이는 캄캄한 어두움이었습니다. 이 어두움을 누가 밝혔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에 감동된 충성된 주님의 젊은 종들이 이 땅에 들어와서 빛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한국에서 의료선교를 펼친 알렌의사의 나이는 26세(1858년생)였고, 알렌보다 1년 뒤 우리나라에 온 언더우드도 26세(1859년생)의 총각으로 이 땅에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을 전했습니다. 이 빛이 지금은 이 나라 구석구석에 풍성한 축복의 열매를 맺혔습니다. 

3. 삶에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빛이 있는 곳에는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반면 빛이 없는 곳에는 불안과 공포가 있습니다. 산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며 기뻐할 때가 언제입니까? 햇빛이 있을 때에 한하여 아름답습니다. 해가 지고 어두움이 찾아오면 그토록 아름답던 산들은 불안과 무서움으로 변하고 맙니다. 산의 모습이 변해서 입니까? 아닙니다. 빛이 있고 없음의 차이입니다. 
우리들의 삶도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빛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삶은 언제나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희망이 있습니다. 기쁨이 있습니다. 감사함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받은 복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이것은 내 스스로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입니다. 이에 관해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6장 65절 말씀에“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빛 되신 주님을 따라 배우고 본받아 어두운 이 세상에 빛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기에 참된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참된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풍성한 삶의 축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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