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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때가 이르면 (요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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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가 이르면 (요 16:1-3)


국민일보 2011년 8월 7일자 "미션"란에 고신대학 대학원의 유력한 교수가 장로교 분열의 역사를 다룬 책에 대한 퇴출논란이 가시화된 기사가 실렸습니다
예장 고신 총회운영위원회는 고신대학 대학원 교수의 저서 [한국장로교회사](생명의 말씀사)에 대해 교단정신을 왜곡했다는 이유로 폐기처분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와 함께 해당 서적의 신학대학원 교재 사용금지, 해당 교수의 순환보직 지시, 총회 앞에 사과할 것 등을 결의했습니다. 

조사위와 운영위원회가 문제 삼은 것은 교단 설립자인 한상동 목사를 장로교 분열의 원인으로 본 것입니다. 그의 책에서 "한상동이 사실상의 교회 분열을 의미하는 고려신학교 복구를 선언한 것이 교단 분열의 원인"으로 본 것입니다. 
이에 대해 총회 운영위원회는 이 책은 학문의 자유를 남용하고 교단의 권위와 정신을 침해했을 뿐만 아니라 다분히 의도적으로 교단 정신을 왜곡했다고 지적했습니다. 
운영위원회를 통과한 이번 보고안은 다음 달 열리는 61회 총회에서 채택 여부가 판가름 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운영위원회에서도 조사위 보고를 놓고 격론 끝에 찬성 41, 반대 28로 겨우 통과했다는데 의미를 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욱이 교단징계가 우선이 아니라 학문적 검토와 토론이 우선이라는 저자의 변함없는 소신이 개인과 교단의 발전이라는 그의 무책임한 주장에 대해 멀리 있는 저로서도 당혹감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닥칠 환난과 핍박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장차 일어날 박해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면서 제자들에게 대비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16장 1절에 『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지 않게 하려 함이니 』라고 했습니다. 
그 핍박은 먼저 민족공동체의 중심이었던 공회(sanhedrin)로부터의 핍박입니다. 그 다음은 로마제국으로부터 오는 정치적 핍박입니다. 핍박의 내용은

Ⅰ. 너희를 출회(출교)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본문 16장 2절에 『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 아니라… 』고 했습니다.
여기 예수님의 제자들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출교는 단지 종교적 출교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출회"는 단순히 "유대 공동체"에서 쫓겨나는 것만 의미하지 않습니다. 보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에서 제외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비록 유대 랍비들은 "출회"를 몇 가지로 세분하였습니다. 그러나 구약적 의미에서 "출회"는 "하나님의 백성"에서 제외되어 유대인들과 교제의 떡을 뗄 수 없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출교는 파문(破門-종교의 자리를 박탈시키고 유대교에서 쫓음)을 의미합니다. 구약에서는 당시의 의식법을 어겼거나 공동체의 규율을 어겼을 때 출교가 가능했습니다. 
출애굽기 12장 15절에 『 너희는 칠일 동안 무교병을 먹을찌니 그 첫날에 누룩을 너희 집에서 제하라 무릇 첫날부터 칠일까지 유교병을 먹는 자는 이스라엘에서 끊쳐지리라 』고 했습니다. 

레위기 17장 4절에 『 먼저 회막문으로 끌어다가 여호와의 장막 앞에서 여호와께 예물로 드리지 아니하는 자는 피흘린 자로 여길 것이라 그가 피를 흘렸은즉 자기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 』고 했습니다. 
에스라 10장 8절에 『 누구든지 방백들과 장로들의 훈시를 좇아 삼일 내에 오지 아니하면 그 재산을 적몰하고 사로잡혔던 자의 회에서 쫓아 내리라 하매 』라고 했습니다. 
신약시대에는 이단사상을 퍼뜨릴 경우 출교처분이 가능했습니다. 

요한복음 12장 42절에 『 그러나 관원 중에도 저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을 인하여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회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출교의 절차를 마태복음 18장 15-17절에 『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고 했습니다. 

유대교에서 행해졌던 출교는 ① 네지파(비공식적인 징계, 책망) ② 니두이(공식적인 징계, 30일간 종교 활동 금지, 효과 없을 때 추가 30일) ③ 헤렘(무기한 동안 출교) ④ 솸마다(영구적 출교)였습니다. 
이렇게 출교당한 자들은 문둥병자와 같이 2m 이내의 접근이 금지되었습니다. 그런 자가 죽었을 때 애곡하는 것도 금지되었습니다. 이런 것 외에도 태형도 행해졌습니다. 
우리 헌법 예배모범 제 16장 시벌 6항에 징계 받은 자와의 교제 단절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쯤 되고 보니 예수를 믿는 신앙과 예수를 배척하는 유대교의 긴장 관계는 제자들이 현실적으로 직면하는 민감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출회"는 종교적인 것으로부터 쫓겨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그 시대의 문화, 교육, 경제 외에 사소한 마을의 공고문이나 시장 정보 등으로부터도 분리되는 현실적인 고난이었습니다. 실제로 유대 지도자들은 급속히 성장하는 기독교 세력을 억제하기 위해 유대 기독교인들을 회당으로부터 파문(excommunication)시키는 일들을 강행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후 90년경에는 랍비 가말리엘 2세(Rabbi Gamaliel Ⅱ)가 마침내 기독교를 이단으로 정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출회"라는 고난의 역사를 통하여 기독교 공동체 문화를 더욱더 견고하게 형성했습니다. 무릇 경건하게 살려고 하는 자는 핍박을 받는다고 했습니다(딤후 3:12). 그 핍박이 생존의 위협을 받기까지 갑니다. "때가 이르면"

Ⅱ. 진리에 대한 도전을 하나님 섬기는 예 (예배)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본문 16장 2절에 『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고 했습니다. 
여기 『 때 』는 예수의 생전의 사역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이 『 때 』는 예수가 이 세상을 떠난 후에 있게 될 예수의 제자들과 성도들의 순교의 때 곧 박해의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 『 때 』에 대한 (호라, )관사가 생략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의 사역 때와 구분하기 위함도 있지만 이러한 박해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탄생과 함께 이 땅에 환난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탄생과 함께 말세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자들이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라 한다고 했습니다. 2000년 기독교 역사를 돌아보면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하는 자들에 의해서 진리가 무참히 수난을 당했습니다. 

진리를 외치는 자들에 의하여 수많은 신앙인들이 순교의 피를 흘렸습니다. 예컨대 사도 바울은 그가 다메섹에서의 개심(改心) 전에는 하나님을 섬기는 열심으로 성도들을 죽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열심은 외국에 있는 성읍 다메섹까지 찾아가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다고 고백했습니다(행 26:9-12). 이것이 당시 바울로서는 자기 나름대로의 진리운동이었습니다. 
종교개혁시대 수많은 지도자들이 로마 교회로부터 숱한 박해와 순교를 당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종교적 맹종이 빚은 어리석음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맹종은 예수를 결박했습니다. 
요한복음 18장 40절에 『 저희가 또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러라 』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의 맹신은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요한복음 19장 6절에 『 대제사장들과 하속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질러 가로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노라 』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9장 15절에 『 저희가 소리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가로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 』라고 했습니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앞으로 있을 핍박에 대해 미리 가르치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이 핍박과 죽임을 당할 때 이상히 여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때가 이르면" 

Ⅲ. 무지한 자들이 득세한다고 했습니다. 

본문 16장 3절에 『 저희가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고 했습니다. 
직역하면 "이것들을 행하는 자들은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라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의 종교적인 열정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를 알지 못하는 영적 무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로 집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로마서 1장 21절에 『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9절에 『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 하려하느냐 』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들을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요한일서 2장 3절에 『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라고 했습니다. 

요한일서 3장 16절에 『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의 관계는 요한복음 1장 1절에 『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8장 54-56절에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 것도 아니어니와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 만일 내가 알지 못한다 하면 나도 너희 같이 거짓말장이가 되리라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이 땅의 교회와의 관계에서 일체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0장 28절에 『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고 했습니다. 

골로새서 1장 18절에 『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라고 했습니다. 
골로새서 1장 24절에 『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지식에 대해 풍부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예수의 관계에 대해서는 무지했습니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려고 애를 썼으나 결국 한계에 부딪치고 말았습니다. 그 대표적인 파가 에비온파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할 수 없었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유일신 사상의 죽은 전통이 결국 예수를 하나님과 동일한 분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해서 진리를 도전하고 핍박하고 죽인다고 했습니다. 안다는 말은 체험적인 만남을 통해서 구체적이고도 충분한 앎을 말합니다. 
구약에서 야다( ), 신약에서 기노스코( )가 그렇습니다. 외적인 앎은 아는 것이 아닙니다. 
신학이 없다는 말을 우리에게 익숙해질 만큼 많이들 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성경적 깊은 사색에 기초를 두지 않고 있다는 말입니다. 필요한 말만 한다면 하나님과 성경과 예수와 교회의 관계가 성경적 깊이에서 사색되지 않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시의존사색이 우리 삶의 궤도가 되어야 합니다. 신학적 기초가 없는 자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도전을 받습니다. 이 세상 과학 지식은 항상 배워도 진리지식에 이를 수 없다고 했습니다(딤후 3: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리를 도전하는 자들은 영적으로 무지해서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의 학벌이나 지식을 영적 지식과 상대적 위치에 두거나 당돌하게 우위에서 거래하려고 하는데, 참으로 심히 유감입니다. "예수도 평신도였다"는 소위 기독교 지도자들의 말은 목사의 권위를 도전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한 말입니다. 한참 무식한 말입니다. 예수는 우리의 신앙의 대상이지, 예수는 의존적 존재가 아닙니다. 

루터파 세계연합회 회장인 크리우세 감독과 로마 천주교 특사인 캇시디는 "루터가 널리 일으킨 오직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이신득구 교리의 중심 논제가 모두 오해에서 비롯되었다"고 선언하고 칭의 교리에 대한 재평가에 들어갔습니다. 

예장 고신측의 젊은 교수들이 교단 설립과 한상동 목사를 교단 분리주의자로 재평가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예장 합신측의 설립자 박윤선 목사님이 헌법 선언문에 "W.C.C.와 관계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교단중심에 있는 지도자들이 W.C.C.와 공조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예입니다. 예장 합동측의 설립자 박형룡 목사의 신학사상과 신앙이 어떤 경우에도 계승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초대형 교단인 합동측은 여러 가지로 사상적 혼재에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앞서간 신앙조부들의 순교적 신앙이 후손들에 의해 파손되고 재평가 된다면 결국 아버지세대(체험세대)는 비참하게도 자식세대(역사세대)에 의해 순교당하는 것입니다. 신앙조부들이 해놓은 일에 묻어갈 줄도 알아야 합니다. 

구운몽의 작가 서포 김만중은 나이 오십에 어머니 앞에서 동물 흉내를 내어 어머니를 즐겁게 해드렸다고 했습니다. 말세의 징조니 도리가 없겠지만 순교적 신앙으로 물려준 고귀한 신앙유산이 오늘의 잣대로 재평가라는 값싼 이데올로기에 포박당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내 생각의 최대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 죽는 법이 없다는 말이 날이 갈수록 새로워지고 있습니다. 출회당할 각오를 해야 합니다. 무지한 자들이 진리를 도전하는 것이 저들의 예배라고 하는 적반하장의 시대에 우리는 죽음으로써 대처해야 합니다. 이미 때가 이르렀습니다. 『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치 않게 하려 함이니라 』고 했습니다.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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