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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일컬음 받는 그리스도인 (행 11: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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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컬음 받는 그리스도인 (행 11:19-26)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가 사형 당하게 될 실의에 빠진 사형수들과 함께 지낸 적이 있었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사형수들에게는 영원히 살 장소가 바뀌는 중요한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사형수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을 위해 죽으시고 그들을 천국으로 맞아들이기 위해 기다리고 계심을 확신하면서 사형장으로 갔습니다. 짧은 시간 동안에 이러한 일들이 일어난 까닭은 찰스 웨슬리라는 진정한 그리스도인 한 사람 때문이었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에게는 보이지 않는 강한 힘이 있습니다. 그 힘은 주위 사람들을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는 힘입니다. 어떤 사람의 구원을 놓고 기도하고 있다면 우선 자신이 진실한 그리스도인인지부터 점검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고자 한다면 먼저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하기 때문입니다. 요한 웨슬리(John Wesley)는 그의 설교에서 ‘거의 그리스도인(Almost Christian)’ 에 대해서 말합니다. ‘Almost’라는 단어는 ‘거의, 대체로’ 라는 뜻을 가지는데 비슷하게 보이지만 진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같으나 아니라는 것입니다. ‘거의 그리스도인’ 은 하나님과 재물의 두 주인을 동시에 섬깁니다. 또 ‘거의 그리스도인’은 입만 발달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참된 경건은 말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무늬만 그리스도인인 ‘거의 그리스도인’ 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그리스도인을 찾고 계십니다. 결코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본문에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어진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곧 Christian이라는 말은 두 단어가 합쳐져 만들어진 합성어입니다. 그리스도 곧 Christ라는 말은 헬라어에서 나온 말이고, 끝에 붙어 있는 ‘-ian’ 이라는 어미는 라틴어에서 나온 것으로 ‘무엇에 속해 있다’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 곧 Christian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 이라는 의미입니다. 

본래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스스로 불러저 생겨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보고 붙여준 별칭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어떠합니까?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교회를 다니는 사람 정도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별다른 가치가 없는 흔한 말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생겨났을 때 특별한 의미가 담겨져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신분을 표현하는 이름이기에 너무도 귀중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그리스도인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표시는 십자가의 형상으로 보이는 표시만으로는 그 본질을 드러낼 수가 없습니다. 장식용 십자가로도 안 됩니다. 모름지기 작은 예수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본 듯해야 합니다. 예수께 속한 자요 예수의 사람이요 예수를 따르는 자의 모습이 반드시 나타나야 합니다. 도대체 안디옥 교인들은 어떻게 살았기에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았습니까? 
 
첫째로 편견을 넘어서매

영국의 비평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가 사회의 잘못된 면을 비평하는 가운데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미켈란젤로(Michelangelo)의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로뎅 (A. Rodin)의 작품을 굉장히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버나드 쇼는 편견을 교정하기 위해 계획을 세웁니다. 파티를 열고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초청했습니다. 만찬이 무르익어 갈 즈음 버나드 쇼가 말합니다. “제가 귀한 그림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로뎅의 작품입니다.” 순간 장내가 웅성대기 시작합니다. 잠시 후 편견에 사로잡힌 비평들이 마구 쏟아집니다. “색깔이 왜 저 모양이냐!” “그래, 우중충하지?” “어떻게 구도가 저 모양이냐?” 급기야 “저것도 그림이라고 그렸나?” 이러한 난도질이 끝나갈 무렵에 버나드 쇼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사과를 합니다. “여러분, 제가 큰 실수를 했습니다. 그림을 잘못 가지고 나왔습니다. 이 그림은 로뎅의 작품이 아니라 미켈란젤로의 작품입니다.” 그러자 갑자기 찬물을 부은 것처럼 장내가 숙연해집니다. 

미켈란젤로 팬의 입장에서 로뎅의 작품을 보았을 때는 그림이 형편없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혹평을 했는데 사실 미켈란젤로의 작품이었던 것입니다. 편견은 사실을 사실되게 바라보지 못하게 합니다. 편견은 진리를 진리로 보지 못하고, 사실을 왜곡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편견은 갈등과 오해를 일으킵니다. 서로를 미워하게 하고, 심지어 살인과 전쟁을 일으킵니다. 편견을 가지고 남을 대하거나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죄입니다.

본문 20절입니다.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에게만 구원이 있고 이방인은 멸망해야 한다는 종교적인 편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편견과 미워하는 감정을 넘어섰을 때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고 일컬음 받게 된 것입니다. 벽을 헐 때 비로소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편협한 민족주의, 지역주의, 혈연주의, 당파주의를 넘어서야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 받게 될 것입니다. 

종교적인 편견을 버리고 이방인에 대한 장벽이 무너졌을 때 비로소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미움이 사라져야 비로소 그리스도인입니다. 장벽이 무너져야 비로소 그리스도인입니다. 부자유하게 하는 모든 장벽을 넘어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편견의 장벽을 허물고 하나님의 사랑을 흘려보내는 바로 거기에 귀한 이름,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일컬음 받게 될 것입니다. 
 
둘째로 고난을 극복하매

일본의 소설가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가 '만연원년의 풋볼'로 1994년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소감을 말했습니다. “나는 일찍이 문학계의 명성을 얻었던 문학평론가였습니다. 그런데 나의 삶에 커다란 전환의 계기가 왔습니다. 그것은 우리 부부에게 히카리라는 정신박약아가 태어난 것입니다. 어째서, 왜, 우리에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현실을 거부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밝히고 싶은 것은 이 아이가 나의 문학에 새로운 빛을 던져 주었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 아이를 통해 생명의 신비로움과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나의 소중한 아들, 히카리는 오늘 이 자리의 나를 있게 한 문학의 스승입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고난을 겪으며 사람을 미워하며 복수심을 키우며 인생을 낭비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고난을 겪으며 하나님을 바라보는데 모든 에너지를 사용합니다. 결국 고난을 통해 성숙하며 더 위대하게 쓰임을 받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고난 앞에서 절망하지 않습니다. 누구 때문이라고 비난하지 않습니다. 책임을 전가하지도 않으며 고난을 극복합니다.

본문 23절입니다.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만 바라보고 절망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나를 고통스럽게 할지라도, 환경이 나를 어렵게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소망을 가집니다. 그리스도를 붙잡고 그 안에서 절망을 이기며 굳건한 마음으로 고난을 극복하는 모습이 비로소 그리스도인입니다. 고난과 비웃음 조롱과 비난을 넘어서서 고난을 즐거워하며 극복할 때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았던 것입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그리스도인으로 불리어지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그 이름으로 인한 핍박을 오히려 기뻐했으며 그 이름으로 불러주기를 간절히 사모했습니다. 

한경직(韓景職) 목사의 글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사람에게는 남을 위해 져야 하는 십자가가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를 믿기에 져야 할 고난의 십자가입니다. 고통당하는 자 가난한 자 억압 받는 자 탈선 한 자 영혼이 죽어가는 자들을 위한 십자가를 기쁜 마음으로 져야 합니다. 이를 잘 감당해 나가는 사람을 참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릅니다. 십자가를 축복의 예행연습으로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외면하지 말고 고난을 넘어섬으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일컬음 받으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주님이 함께 하매

로버트 모리슨(Robert Morrison) 선교사가 중국으로 가기 위해 배를 탔습니다. 선장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신이 선교 사역을 위해 중국으로 가고 있다는 목적을 들려주었습니다. 선장은 모리슨의 선교비전에 대해 회의적인 견해를 말했습니다. 그 순간 모리슨 선교사는 걱정과 두려움에 쌓이게 되었습니다. 괴로웠습니다. 선교사가 배에서 내릴 때 선장은 한마디 더 했습니다. 

“당신은 스스로 중국 사람들에게 대단한 감화를 끼칠 거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때 모리슨 선교사는 대답했습니다. “아니요, 선장님. 나는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이나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배 안에서 계속 두려움과 괴로움에 빠져 있던 것은 모리슨이 스스로 자기가 해야 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국 땅에 발을 딛는 순간 하나님이 동역자이시니 나는 못해도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하실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본문 21절입니다.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안디옥교회 성도들에게 주의 손이 함께 하시고 주께서 더하게 하실 때에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불리어 졌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중심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고 일컬었던 것입니다. 오직 주께 붙어 있으시기 바랍니다. 오직 주의 편에 서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의 손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때마다 일마다 주께서 더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비로소 그리스도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허드슨 테일러(J. Hudson Taylor)에게 한 청년이 찾아와서 물었습니다. “선교사님! 그리스도인으로 일생을 살고 싶습니다. 정식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몇 해나 걸립니까?” 그러자 테일러가 대답합니다. “촛불은 언제부터 빛을 내지요?” “그야 심지에 불을 붙이는 순간부터이지요”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연조나 지식이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불러 필요한 사람으로 사용하려고 하신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부터 그리스도의 빛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 때부터 그리스도인입니다.” 초는 아무리 오래 두어도 초일뿐 촛불이 아닙니다. 교인은 아무리 오래 다녀도 교인이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빛이 나타나고 그리스도의 모습이 드러나야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음을 드러내고 사십니까? 드러내 보이는 그리스도의 냄새가 풍겨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세월이 흘러가면 갈수록 그리스도의 향기가 더욱 강렬해지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예수쟁이가 아닌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부디 편견의 장벽을 넘어섬으로, 고난을 극복함으로 오직 주님이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광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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