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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두려움이 다가올때 (삼상 18: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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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이 다가올때 (삼상 18:10-16)
 
사울은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이었습니다

매일같이 우리가 느끼는 감정 중에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내면 깊숙한 곳에 도사리고 있는 감정입니다. 이 두려움의 감정은 우리를 살리기도 하고 때로는 우리를 죽이기도 합니다. 올바른 두려움은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위험을 감지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우리로 준비하게 합니다. 때로는 용기를 가지고 새롭게 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잘못된 두려움에 붙잡히게 되면 우리의 감정이 뒤흔들립니다. 때로는 비겁해집니다. 분노를 아무데나 쏟게 만듭니다. 그 두려움을 대체하기 위해서 누군가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비난하게 됩니다.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해서 잘못된 두려움에 가득 찬 한 지도자를 만나게 됩니다. 최고지도자가 되었는데 감정이 통제되지 않으면 위험합니다. 본인도 위험하고 그가 속한 공동체도 위험해집니다. 두려운 마음을 불쑥불쑥 노출시킵니다. 어떤 사태가 일어날지 아무도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수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 수밖에 없습니다. 

사울은 일국의 왕이었습니다. 왕이 되었는데도 불안합니다. 왕이 되었는데도 만족감이 없습니다. 왕이 되었는데도 자기 목표가 없습니다. 왕으로써 두려운 것입니다. 그것은 백성에게는 재앙이었습니다. 사실 사울이라는 인물은 출중한 인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사울을 택하셔서 첫 번째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또한 사울에게 인복도 허락해주셨습니다.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이스라엘이 위기 중에 처해있을 때 다윗이라는 젊은 용사를 얻게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인복이 도리어 그에게 화가 되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가 잘못된 두려움에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그때 다윗은 좋은 신하가 된 것이 아니라 비교의 대상, 두려움의 존재가 되었습니다. 사울은 두려운 마음에 매몰되고 있었습니다. 다윗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더 큰 두려움 속에 빠져들었습니다. 

두려움은 사울의 인생을 망가뜨렸습니다

사울과 다윗이 블레셋을 무찌르고 개선장군이 되어 들어오게 됩니다. 그때 온 백성들이 그를 맞이했습니다. 7절의 말씀을 보면 그 노래 소리가 들려옵니다. 

“여인들이 뛰놀며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사무엘상 18:7) 

자기가 죽인 자는 천 명이지만 다윗이 죽인 용사는 만 명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을 자기보다 더 큰 용사인 것처럼 칭송하는 여인들의 노래를 들으면서 사울은 갑자기 왕으로서의 체면이 구겨졌다 생각했습니다. 기분이 나빴습니다. 화가 났습니다. 

여러분이 사울 왕 같았으면 어땠을까요? 화를 안냈을까요? 불쾌하지 않았을까요? 내게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하는 두려움이 생기지 않았을까요? 어쩌면 이러한 모습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화가 나고 마음속에 두려움이 생겼을 때 그는 거기서 멈춰야했습니다. 잠깐 화를 내고 잠깐 두려워하다가도 그것으로 끝내야했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생각을 비약시키기 시작했습니다. 8절 말씀은 사울이 어떻게 그 다음단계에 들어갔는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사울이 그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이르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가 더 얻을 것이 나라 말고 무엇이냐 하고” (사무엘상 18:8)

‘이제는 저 친구가 이 나라를 삼키겠구나. 이제 내게 반역을 하겠구나.’ 사울은 엉뚱한 생각으로 확대하면서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러한 허상에 잡히면 그 다음에는 모든 것이 불안해지고 두려워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다윗을 자기 곁에 가까이 두었습니다. 그래도 마음이 찜찜했습니다. 다윗을 멀리 떨어뜨려 놓았습니다. 그래도 불안했습니다. 어떤 사건이 일어날 것인지를 알지 못해서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사울에게 있어서 가장 두려운 존재는 다윗이라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다윗이 옆에 있는 것이 싫었습니다. 두려웠습니다.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 (사무엘상 18:12) 

“사울은 다윗이 크게 지혜롭게 행함을 보고 그를 두려워하였으나” (사무엘상 18:15) 

다윗만 생각하면 골치가 아팠습니다. 그는 자기 주위가 상실할 것을 염려했습니다. 이 두려움에 붙잡히게 되었을 때 사울 왕의 삶은 추락하게 됩니다. 

사울왕의 생애를 보면 참으로 불쌍합니다. 그는 청년 때 왕이 되었습니다. 가진 것이 많았습니다. 용기도 있었습니다. 담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두려움 때문에 한 순간에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다윗을 쫒는데 나머지 그의 일생을 바쳤습니다. 어떻게든 다윗을 잡으려고 시간을 낭비했습니다. 그는 지도자의 품격을 잃어버렸습니다. 백성을 이끄는 비전도 사라졌습니다. 이 두려움은 나만 파괴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웃까지도 파괴시킵니다. 지도자가 되었을 때는 공동체 전체가 무너집니다. 

두려움의 마음을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그렇다면 사울 왕이 이러한 두려움을 가져서는 안 되었을까요? 아니요. 우리는 모두가 똑같은 두려움에 봉착합니다. 예외 없이 그렇습니다. 나보다 잘 나가는 사람이 선배일 때는 배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동료가 되면 위기의식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후배가 되면 받아드릴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얄팍한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울은 그 두려움을 해소하는 방법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두려움이 닥쳐왔을 때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많은 해소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으로서 첫 번째 해야 할 것은 하나님 앞에서 그것을 그대로 아뢰어야 합니다. “하나님, 제가 두렵습니다. 제게 염려가 있습니다. 제게 의문이 있습니다. 제게 불신앙이 있습니다.” 내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아뢰면서 기도해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악령에 붙잡히게 됩니다. 사울이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영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드리지 않았을 때 거짓 영에 붙잡히고 악령에 붙잡혔습니다. 

“그 이튿날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힘 있게 내리매 그가 집 안에서 정신 없이 떠들어대므로 다윗이 평일과 같이 손으로 수금을 타는데 그 때에 사울의 손에 창이 있는지라.” (사무엘상 18:10)

이후의 사울 왕과 다윗의 차이를 그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악령에 붙잡혀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영에 붙잡혀있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인물이 되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사울의 생애를 보면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윗과는 조금 달랐습니다. 형식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너무 조심스러워 했습니다.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를 꺼려했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그것을 자기 혼자 해결해보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맡기지 않았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방식대로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가장 결정적인 두려움이 그를 붙잡았을 때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고 해결하려 했습니다. 그랬을 때 다윗과의 관계가 틀어졌습니다. 그를 왕으로 세웠던 사무엘 선지자와도 결별하는 아픔을 겪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에게도 걱정과 근심이 있습니다. 때로는 이것을 어찌 감당할까 하는 두려움에 붙잡힐 때가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 앞에서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는 약한 사람입니다. 내 속에 근심이 나를 고통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두렵습니다. 어찌해야 할까요?” 하나님께 아뢰고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내가 겪을 수 있는 실패와 이 두려움으로 인해 상실하게 되는 다른 것들보다, 내가 믿는 하나님께서는 결코 나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헬라의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니코마코스윤리학」에서 용기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용기란 두려움이 없는 상태가 아니고 오히려 두려움을 직시하면서 직면하고 활동할 수 있는 능력이다.” 신학자인 칼 바르트 또한 용기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용기란 두려움을 그대로 가지고 기도하는 것이다. 기도하는 두려움이 곧 용기이다.” 그리스도인의 용기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본래 성품이 용감해서 용기 있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내 모습 그대로를 아뢰는 것입니다. 내가 갖고 있는 연약함과 두려움을 그대로 하나님께 맡긴 채, 거기에서부터 생각하고, 거기에서 판단하고, 거기에서 행동하는 것이 바로 용기입니다. 

우리에게는 좋은 지도자를 찾아야할 몫이 있습니다

사울 왕은 두려움에 빠지면서 백성들의 신임을 잃었습니다. 지도자로서의 품성과 품격도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신임마저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정말 두려워해야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정말 믿어야할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다윗을 두려워하고 환경을 두려워하는 두려움에 매몰되었을 때 그는 더 이상 지도자의 역할을 감당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저는 본문 말씀을 묵상하면서 오늘날 우리나라의 정치지도자들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어쩌면 사울 왕과 같이 겁쟁이 지도자들이 너무 많은 것이 아닌가? 두려움으로 가득한 비겁한 사울의 모습이 정치인들의 모습 속에 들어있는 것은 아닌가? 예수를 믿지 아니하는 정치인들에게는 하나님이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민주주의 시대에는 국민이 있습니다. 정치인의 올바른 두려움이란 국민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국민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치가란 이미 버림받은 정치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정치인들은 예외가 없습니다. 국민의 이름을 들먹이도록 되어있습니다. 하지만 국민들이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탐구하고 있는가? 대한민국의 미래와 100년 대계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면서 애쓰고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선거와 투표에 이기기 위해서 어떻게든 국민을 끌어들이고 있지는 않은가 되돌아보게 됩니다. 

놀랍게도 선거 날짜가 가까울수록 정치인들은 겸손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뻣뻣하던 정치인들도 무릎을 꿇고 덥석 절하기까지 합니다. 언제까지 그럴까요? 선거결과가 발표되는 그날까지만 그렇습니다. 그리고서는 국민들을 잊어버립니다. 국민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국민들이 어떠한 방향으로 가야하는지, 대한민국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마치 하루살이처럼 자기의 탐욕에 온 정신을 쏟아 붓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국민들도 몇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그중에 제일 큰 부분은 자꾸만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정치인들이 잊어버리는 것처럼 국민들도 잊어버립니다. 정치인들이 과거에 어떤 사고와 어떤 정책을 가지고 어떤 행동을 했는가를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어떤 정치인은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내가 무슨 정치행태를 하든 3개월만 참으면 국민들은 다 잊어버린다고 허튼 소리를 합니다. 자기 욕심대로 하는 기고만장한 정치인들이 우리 주위에 있습니다. 몰래 뒤편에 있다가 필요할 때만 한마디 하고 숨어버리는 비겁한 정치인들도 있습니다. 거짓선동으로 헛소문을 퍼트리고 국민을 불안하게 하는 악한 정치인들도 있습니다. 

자신이 행한 부정부패로 인해 신문 한 면에 자기 이름이 나와도 이름만 기억하면 다음 선거에서 이길 수 있다고 기를 쓰는 못된 정치인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 국민의 몫이 있습니다. 좋은 정치인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나쁜 정치인을 솎아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 참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이룩해 나아가는 것이 우리 믿음의 성도들이 기도하면서 해야 할 일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변화의 역사에 동참하십시오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전통을 보수한다고 하면서 변화와 개혁을 잃어버린다면 그 보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야말로 세상 젊은이들이 말하는 보수 꼴통이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반대로 진보를 한다고 떠들면서 대한민국의 자기 정체성을 잃어버린다면 이는 국민 불안을 조성하는 정치 망나니들을 양상하고 맙니다. 

이번 수요일이 주민 투표일입니다. 주민이면 당연히 참여해야할 투표입니다. 그런데 정치논쟁의 핵심은 주민투표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하는 양자택일의 문제처럼 흘러가고 있습니다. 아주 저급한 후진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민주주의의 틀에서 누가 도대체 국민이 투표할 수 있는 권리를 막을 수 있는 것일까요? 자기의견을 명백히 표시하는 민주사회에서 우리가 투표하고 결정하는 것이 국민과 시민의 용기이자 권리입니다. 이것은 의무이기도 합니다. 민주사회의 주인은 권력자가 아닙니다. 우리 국민들입니다. 국민들에게는 결정할 권리가 있고 정책을 확인할 권리가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내용이기도 합니다. 

지금이야말로 용기 있고 멋진 지도자가 필요한 시기입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들을 택해야 합니다. 정말 용기 있는 국민이 요청되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와 성도들이 이 시대의 사회, 정치적 책임에 더 민감해야합니다. 참여해야 합니다. 우리의 의견을 말해야 합니다. 

편협한 언론 뒤에 숨는 정치인들도 있습니다. 국민의 이름으로 자기 탐욕을 과시하는 못된 지도자들도 주위에 있습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우리에게 주어진 일들을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두려움, 또한 정치인에게는 국민과 나라를 향한 두려움의 마음이 있어야 참된 변화의 역사에 참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참된 지혜의 근본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일까요? 잘못된 두려움이 나와 이웃을 해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진정으로 용기 있는 판단과 결정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 진정한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때 가능합니다. 하나님께 나의 두려움을 아뢸 때 가능합니다. 기도하는 두려움을 가질 때에 용기가 생기고 담대함이 생깁니다. 내 마음속에 결정이 생기면 말하고 행동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동행해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 나라와 민족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삶의 처지를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귀한 사명들을 우리가 있는 그 자리에서 온전히 감당해나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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