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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글로 기록된 진리 (마 4: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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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 기록된 진리 (마 4:1-11)

한민족의 역사를 반만년이라고 하는 이유는 반만 년 전에는 한반도에 아무도 살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그때도 사람들이 살았습니다. 다만 반만년 전에 글이 발명돼서 그때부터 역사의 기록이 시작됐기 때문입니다. 그 이전에도 사람들이 살았지만 기록이 없습니다. 그래서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을 선사시대라고 부릅니다. 

왜 구약의 본론이 오천년 전쯤에 시작됐느냐. 그 이유도 오천년 전에 문자가 발명됐기 때문입니다. 그때가 바로 아브라함의 시대입니다. 그러면 그 이전에는 사람들이 성경의 진리를 어떻게 보존하고 전달했느냐. 노래와 이야기를 통해서 했습니다.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의 이야기는 아마 노래로써 전달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신화라는 말이 왜 사용되느냐. 신화란 글이 없었을 시대에 사람들이 노래로써 기억하고 전달할 수 있는 이야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다만 그 속에 의미심장한 뜻이 담겨져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것을 통해서 배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창세기에는 글이라는 말이 한 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글이라는 말이 최초로 등장하는 책이 출애굽기에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돌 판에 십계명을 쓰신 사건입니다. 그것이 글에 대한 성경 최초의 언급입니다. 최초로 글을 쓰신 이가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인간의 글을 사용하셔서 전달하셨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글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이지만 과거에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이 몇 명 정도 였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소수였습니다. 이건 옛날 얘기가 아니고 중세시대에 글을 쓸 줄 아는 사람이 인구의 1에 불과했고 성직자 중에도 글을 쓰고 읽을 줄 아는 사람이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1945년 우리가 해방됐을 때 그때의 문자 해독률이 25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옛날 구약시대에 모세의 율법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됐을지는 의문스럽습니다. 왜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모세 율법의 기록시기를 후대로 추정하느냐. 그건 구약성경을 읽어봤을 때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을 쉽게 접하고 읽었던 흔적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그건 모세의 율법이 나중에 기록됐기 때문이 아니고 당시에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극소수에 불과했고 책을 발행할 수 있는 기술도 원시적이었기 때문에 널리 보급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윗이 시편을 썼다는 사실을 알지만 다윗이 직접 글을 쓸 줄 알았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오리지널을 누가 썼느냐 하는 것은 아직까지 의문으로 남아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을 모세가 직접 썼느냐. 그건 의문의 여지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일단 분량이 엄청나게 많고 또 신명기에 모세가 죽은 사건까지 포함된 것을 보면 모세가 그것까지 직접 썼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과거 자서전을 쓴 대통령 중에 자기가 직접 집필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됐으리라고 생각되십니까. 그건 문필가가 따로 있어서 써줍니다. 대통령으로부터 모든 중요한 정보를 전해 받되 그것을 직접 쓰는 것은 전문 문필가가 합니다. 그럼에도 누구의 이름으로 출판하느냐. 대통령의 이름으로 출판합니다. 

케네디 대통령이 취임식에서 한 유명한 말이 있지요. ‘국가가 여러분을 위해여 무엇을 해줄까를 묻지 말고 여러분이 국가를 위하여 무슨 일을 할까를 물어보라.’ 이 말은 원래 케네디가 생각한 말이 아니고 그의 스피치 라이터 테드 소렌슨이라는 사람이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케네디가 그것을 수용해서 자기의 연설문에 포함시켰기 때문에 케네디의 말로 우리 머릿속에 각인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모세의 율법도 모세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이 모세의 감독을 받아서 글로 썼다면 그것을 모세의 율법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뢰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는 애초부터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을 보존하고 전달하는 데 있어서 보조적인 역할이 아닌 주된 역할을 부여받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예수님이 세 번이나 ‘기록되었으되’라는 말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기록되었으되-It is written’ 마귀의 거짓과 시험을 물리칠 수 있는 방편으로 예수님께서는 글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여기에서 글의 중요성, 글의 권위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글로 기록된 성경말씀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과 동일한 권위를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기록된 성경말씀을 곧 오리지널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기셨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 중요한 순간에 기록된 성경말씀을 인용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진리를 보존하는 방법으로 글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대한 증인이 있고 아무리 증거가 있어도 세월이 지나면 증인들은 세상을 떠납니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버립니다. 그러면 후대사람은 무엇을 근거로 그것을 믿을 수가 있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후대사람들과 세상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증인들의 증언을 글로 기록하게 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21장 24절에 ‘이 일을 증거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 줄 아노라’ 증거하고 기록했다고 했고 그 증거가 참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건 요한에게만 해당되는 것뿐만이 아니고 성경 모든 책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저의 아이와 간만에 신앙에 대해서 대화할 일이 있었어요. 저의 아이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저는 순간적으로 긴장했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의 제일 중요한 부분이 예수님의 부활인데 만일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의구심을 가질 수 있다면 그건 신앙 존립을 흔들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저의 아이가 물어보기를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것이 무엇이냐?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왜 곧 승천하셨느냐?’ 그게 질문입니다. 좀 더 오래 이 땅에 계셨다면 당신의 부활을 더 널리 증명할 수 있었을 텐데 왜 곧 떠나가셨느냐. 

사실 그건 저도 좀 의아하게 생각하는 부분입니다. 사십일 동안 이 땅에 계시다가 승천하셨는데 부활이란 사건이 얼마나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알면 한 사십년 계시다가 승천하시면 더 많은 사람들이 알았을 텐데. 그러나 그건 우리가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그건 주님의 판단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주님이 판단하시기에 사십일이 족했습니다. 믿는 사람에게는 사십일이 족하고 의심하는 사람에게는 사백일도 부족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만일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눈으로 봐야만 믿는다면 이 세상에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 그건 불가능하다. 이천년 전에 이미 일어난 사건인데 우리가 과거의 임진왜란을 가서 볼 수 없는 것처럼, 과거의 625전쟁을 다시 가서 볼 수 없는 것처럼 내가 직접 눈으로 목격해야만 믿을 수 있다고 한다면 우리 중에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이냐.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의 증언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것을 경험하고 그것을 글로 기록한 것이 신약성경인데 우리는 신약성경에 기록된 사도들의 증언을 신뢰한다. 그것이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근거다.’ 오늘은 예수님의 부활을 논하는 시간이 아니기 때문에 부연설명은 하지 않겠습니다마는 제가 한 가지 저의 아이에게 물어봤습니다. 

‘천안함 사건이 작년에 일어난 사건인데도 불구하고 누가 천안함을 침몰시켰느냐에 대해서 아직도 설왕설래 하지 않느냐. 이 모든 정황이 북한의 소행임을 가리키고 있지만 북한이 ‘우리가 그랬습니다.’라고 고백하기 전까지는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아무리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이 있더라도 내가 보기 전에는 믿지 않겠다고 한다면 의심하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모든 정황을 고려할 때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증언은 우리가 충분히 신뢰할만하다.‘ 그랬더니 주제를 바꾸더라구요. 

의심하려면 한도 끝도 없습니다. 우리는 어느 시점에서는 의구심에 종결을 찍고 우리 인생에 대한 결단을 내려야 됩니다. 교회 다니는 처녀들이 평소에는 예배도 빠지던 사람이 결혼을 앞두고는 기도원에 가서 금식하면서 기도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신의 의구심에 종결을 찍을 필요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이 옳은가 아니면 더 좋은 사람이 있을까. 내가 손해 보는 건가. 이런 생각하면 한도 끝도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나의 의문에 어느 선에서는 종결을 찍고 이 사람이다! 더 이상 찾지 않겠다! 이게 하나님의 뜻이다! 이런 확신이 필요한 것처럼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이 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늘 이쪽으로 갈까 저쪽으로 갈까 돌아서 갈까, 기다릴까 말까, 살까 죽을까, 투자할까 돈을 뺄까, 늘 주저하면서 사는데 그러나 믿음이라는 것은 우리의 의문에 종결을 찍고 내 인생에 대하여 중요한 결단의 순간에 하나님이 주신 증거를 가지고 그리고 우리가 결정해야 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내가 세례를 받을 것이냐, 내가 기독교인이 될 것이냐, 내가 이 봉사의 일을 맡을 것이냐, 내가 신학교를 갈 것이냐, 내가 믿음으로 살 것이냐, 이 결정을 누가 나대신 해주는 게 아니에요. 

나대신 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갖고 있는 모든 정보를 최대한 활용하되 결정적인 순간에는 내가 결정을 내리고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는 더 이상 뒤를 돌아볼 수가 없어요. 예수님 말씀에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나에게 합당치 않다’고 하셨습니다. 손에 쟁기를 잡았으면 밭을 갈아야지요. 뒤를 돌아보면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이 성경의 신빙성은 비슷한 시대의 다른 문헌을 비교하면 확실하게 드러납니다. 첫째는 삼국사기를 생각해 봅시다. 삼국사기는 삼국시대와 고조선에 대한 유일한 역사적인 기록입니다. 우리가 삼국시대 고조선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삼국사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삼국사기가 언제 기록되었느냐면 1145년 고려시대 김부식에 의해 기록되었습니다. 신라가 멸망한 것이 주후 935년입니다. 그러니까 신라가 멸망하고 210년이 지난 후에 그 이전의 역사가 기록됐다는 얘기에요. 210년. 김부식이 직접 보고 쓴 것이 아니에요. 그도 남의 이야기를 듣고 쓴 것입니다. 그렇지만 유일하게 남아있는 역사 기록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통해서 과거 역사를 알 수 있는 것이지요. 

또 호모의 일리아드는 현존하는 고대 그리스문학의 가장 오래된 작품입니다. 일리아드는 트로이 전쟁을 소재로 해서 쓴 작품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트로이 전쟁이 일어났는지, 호모라는 인물이 정말로 존재했는지, 호모가 정말로 일리아드를 쓴 것이지 그것조차도 불분명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트로이 전쟁이 일어났었다고 하더라도 주전 1250년경의 사건인데 호모가 일리아드를 쓴 것은 아무리 옛날로 잡아도 주전 800년이에요. 그러니까 트로이 전쟁이 발생하고 몇 년 후에 그 소설을 썼다는 얘기입니까. 450년. 이게 그리스의 가장 오래된 문학작품 일리아드입니다. 

또 하나 예를 들죠. 임진왜란의 전투도. 임진왜란의 전투도 중에 가장 오래된 작품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200년 후에 제작된 그림입니다. 그러니까 화가가 자기가 직접 임진왜란을 보고 그린 게 아니고 남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자기의 상상력을 동원해서 그렸다는 얘기입니다. 

여기에 성경을 비교하자는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을 비교하면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정확성 ․ 역사성 ․ 신뢰성에 있어서 그 당시의 성경에 필적할만한 다른 문학작품이 없습니다. 

먼저 신약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언제 최초의 신약성경이 기록되었느냐면 20년 후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20년 후에 사도바울이 서신을 쓰기 시작했고 40년 후에 복음서가 기록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가장 짧게는 20년, 가장 늦게는 40년 안에 신약성경의 대부분이 기록됐습니다. 

증인들이 아직 살아있을 때 증인들이 쓰던가, 증인들의 증언을 소재로 감독을 받아서 기록했습니다. 그것도 한 두 책이 아니고 스물일곱 권의 책이에요. 여러 저자에 의해서 서로 다른 장소에서 다른 시기에 한 가지 주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기록됐는데 그 기록이 일치한다는 것은 이건 진실을 쓴 것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들이 서로 만나서 머리를 맞대고 썼다면 모르는데 서로 다른 시대에, 다른 곳에 살고 있는 여러 사람들이 한 주제에 대해서 기록한 것이 일관성 있게 예수님의 복음을 증거하고 있다는 것은 그 당시의 어떤 다른 문학작품과 비교했을 때 비교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 뿐만이 아니고 신약은 증인들의 증언뿐만이 아닌 구약성경의 성취 ․ 구약성경의 그 바탕 위에 기록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기록되었으되’라고 인용하신 것은 구약성경입니다. 예수님께서 글로 기록된 구약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소위 직통계시를 받으실 수 있는 분이에요. 하나님의 음성을 직통으로 들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귀의 거짓과 유혹을 물리치는 데 있어서 글로 기록된, 예수님의 시대로부터 1500년 이전에 기록되었던 글을 인용해서 마귀를 물리치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글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의 위력을 엿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건 놀라운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말씀을 인용하실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예수께서 성경말씀을 신뢰하셨다면 우리도 성경말씀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그냥 글로만 보면 안 됩니다. 이건 글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글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를 접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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