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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자의 대문가에 누운 빈민 (눅 16: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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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의 대문가에 누운 빈민 (눅 16:19-31)

성경의 다른 책들과 비교했을 때 누가복음의 특징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다음 네 계층을 특별히 배려했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는 여성입니다. 여성을 배려했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은 유일하게 예수님이 안식일에 등이 굽은 여자를 고치셨다는 사실과 ‘이 아브라함의 딸을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고 반문하셨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이외에도 과부와 재판장의 비유라든가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려주셨다는 기록을 통해서 예수께서 연약한 여자들을 배려하셨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누가복음에만 기록돼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방인들에 대한 배려를 들 수 있습니다. 유일하게 누가복음에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등장합니다. 강도 만난 사람에게 누가 진짜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 사마이라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열 명의 문둥병자를 고쳐주셨는데 그 중에 유일하게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한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누가만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는 죄인들에 대한 배려입니다. 유일하게 누가복음만이 예수님이 삭개오의 이름을 부르시고 삭개오의 집에 찾아가셨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고 또 누가복음에만 세 개의 잃어버린 것에 대한 비유가 등장합니다. 잃어버린 동전, 잃어버린 양, 그리고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 소위 탕자의 비유로 알려진 것입니다. 어거스틴이 복음 중의 복음이라고 불렀던 탕자의 비유가 누가복음에만 등장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죄인을 배려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네 번째는 가난한 자들에 대한 배려입니다. 마태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라고 인간의 가난을 영적인 가난으로 해석하려고 했지만 누가는 심령이라는 단어를 빼고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저희 것임이라’라고 좀 더 확실하게 가난을 지목했습니다. 

가난한 자들에 대한 배려는 부자에 대한 비판을 동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다음에 ‘화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있을진저 너희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라는 말씀이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태조차도 포함시키지 못한 것인데 누가만이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태보다는 누가가 더 예수님의 말씀을 더 분명하고 정직하게 기록하려고 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와 부자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를 가장 잘 보여주는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의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에는 결론이 없습니다. 

이 비유에는 어떤 교훈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하라’라는 말씀이 없습니다. 적어도 선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에는 ‘가서 너희도 이렇게 하라’라는 교훈이라도 등장하는데 이 비유에는 그런 결론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너희는 그러므로 나사로처럼 되라’라든가 ‘부자처럼 되지 않으려 주의하라’는 말씀이 없습니다. 

그것 뿐만이 아니고 왜 부자는 지옥 불에 떨어지고 왜 거지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으로 갔는지 그 이유를 예수님이 설명하시지 않습니다. 나사로가 더 의로웠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 부자가 부했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 일반적으로 부자가 불의하다는 것인지, 일반적으로 가난한 자가 더 의롭다는 것인지 이러한 설명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이 비유를 읽는 사람의 마음이 불편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건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의 경험입니다. 우리가 읽기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읽기에 이 비유가 불편합니다. 불편하지 않다면 그 사람은 진지하게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닙니다. 

불편한 이유는 첫째는 지옥에 대한 언급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부자가 죽어서 지옥 불꽃 속에 던져져 고민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의문을 갖습니다. 지옥이 정말로 있는 것인가? 이건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었던가? 그리고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으로 갔다고 해서 이 세상에 살 때 나사로처럼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반대로 부자가 죽어서 지옥 불속에 떨어졌다고 해서 이 세상에 부자처럼 살고 싶지 않은 사람도 없는 것입니다. 취사선택할 수 있다면 다 이 세상에서 부자처럼 살고 싶지 나사로처럼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또한 이 비유의 비복음적인 성격에 대하여 우리는 불편하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해하는 가장 쉽게 요약한 복음은 ‘예수천당 불신지옥’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해하는 복음의 내용입니다. 사람의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다! 이것이 신약성경이 전하는 복음이요 교회가 전하는 복음이요, 우리가 믿은 복음이요, 우리가 우리의 구원의 확신을 얻을 수 있었던 방법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오늘 본문의 비유는 그게 아닐 수도 있는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하고 ‘예수천당 불신지옥이 아니고 가난한 자 천국, 부자 지옥이 아닐까 그렇다면 나의 구원은 과연 안전한 것인가 내가 부자로 살려고 하는 동안 지옥에 갈 수 있다는 얘기인가.’ 만일 여러분이 이런 질문을 한 번도 해보신 적이 없다면 성경을 진지하게 읽어보지 않았다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어려워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로 오늘 본문의 말씀은 누가 자신의 검열을 통과한 것입니다. 검열이라고 하면 좀 어패가 있지만 누가가 이 비유를 기록할 때 자기가 무슨 내용을 쓰는지를 생각하지 않고 쓴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누가가 누구입니까. 탕자의 비유를 쓴 사람이고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를 쓴 사람이고 또 삭개오를 예수님이 부르시고 찾아가셨다는 것을 기록한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인 모두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과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누가가 오늘 이 비유를 자기의 복음서에 포함시킬 때에는 자기의 다른 메시지를 부인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은 죄인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푸시고 사람이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은혜 덕분입니다. 이 진리에는 결코 변함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너무 어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또한 이 본문은 초대교회의 검열을 통과한 말씀입니다. 그 말은 무슨 말이나 하면 어떤 신학자들은, 예컨대 불트만 같은 사람은 예수님이 전하신 복음과 이후에 초대교회가 전한 복음이 서로 다르다고 주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에 대하여 전하셨지만 이후의 초대교회는 예수님에 대해서 전했다. 내용에 변화가 일어났다.’ 

이것이 불트만의 주장인데 만일 그 주장이 사실이라면 누가가 오늘 본문과 같은 말씀을 자기 복음서에 포함시킬 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누가 자신도 초대교회의 산물인데 만일 초대교회가 전하는 메시지가 예수님이 오리지널로 전했던 메시지와 의도적으로 달랐다면 누가가 왜 오늘 본문과 같은 어려운 말씀을 기록했겠습니까. 초대교회가 그것을 허용하려고 했겠습니까.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전하신 복음과 초대교회가 전한 복음이 서로 다른 게 아닙니다.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말씀에 충실했습니다. 어떤 변질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그러므로 누가가 이 비유를 기록한 이유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예수님이 그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고 초대교회도 이 말씀을 받아들이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이유로 우리가 어려워 할 필요가 없는 이유는, 구원은 어느 정도의 긴장이 필요합니다. 어느 정도의 겸손함이 늘 필요합니다. 구원의 확신은 유익합니다. 내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유익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구원의 보장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뭐라고 말했느냐면 ‘너희의 구원을 두려움과 떨림으로 이루라’고 했습니다. work out your salvation with fear and trembling. 구원에 대한 어느 정도의 긴장이 없다면 두려움과 떨림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하나님, 제가 옳은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 제가 잘못하는 것이 없습니까?’하고 하나님을 어려워하는 부분이 늘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과 아무리 가깝더라도 하나님을 어려워하는 부분이 있어야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람의 나라에 들어가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사람의 집에 들어가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은 하나님이 결정하시는 부분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고 들어가지 않는 것은 결국 하나님이 결정하시는 부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 부분에 대해서 아무리 믿음이 있고 확신이 있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늘 겸손함을 지키고 우리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같아지면 안 됩니다. 바리새인처럼 ‘하나님, 나를 구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저 죄인과 같지 않음을 감사하나이다.’ 이렇게 되면 안 되는 겁니다. 끝까지 하나님 앞에 겸손함이 있어야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오늘 이 본문의 비유를 말씀하셨느냐. 그걸 이해하려면 문학적인 감각이 필요합니다. 신학박사가 되어야만 이걸 이해하는 게 아니에요. 오늘 본문의 아이러니를 주목해야 됩니다.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그 말은 날마다 잔치를 벌인다는 얘기입니다.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여기에서 아이러니가 보입니까?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부자는 고급 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잔치를 하면서 사는데 바로 대문 밖에 있는 거지는 부자의 대문에 앉아서 헌데를 핥고 있다…. 예수께서 이 부자에게 세상의 모든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라고 하신 게 아니에요. 그건 가능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자기의 대문에 누운 거지만큼은 해결해 주어야 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자기 대문가에 누운 가난한 사람조차 돕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죽어서 천국 갈 것을 기대할 수 있느냐, 대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런 격차를 방치하는 사람이 어떻게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겠느냐 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도 어이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무관심, 인간의 이기심, 완악함, 무지함. 그래서 아무런 부연설명이 없이 나사로는 죽어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고 부자는 죽어 지옥 불에 떨어졌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걸 이해하지 못하면 예수님이 왜 이 말씀을 하셨는지 무엇을 말씀하려고 하셨는지가 사실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지금 경제를 말씀하시는 것도 아니고 정치를 말씀하시는 것도 아니고 예수님은 세상의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가난한 자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려니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여기에서 부자의 책임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 같지도 않아요. 다만 대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와 같은 격차가 있는 것에 대해서는 예수님이 진노하시는 것입니다. 이게 뭐냐는 것입니다. 신앙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것이 합당한 것이냐. 예수님은 그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어떤 특정한 분을 지목하는 게 아니고 다만 이 시대에 일반적인 소비문화에 대해서 한마디 드리고 싶습니다. 사람이 살면서 좋은 것을 누리고 살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 부자처럼, 오늘 본문을 보면 이 사람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이 시대에 무엇에 비교할 수 있을 것이냐? 명품에 비교할 수 있습니다. 명품 가방, 명품 패션, 명품 자동차, 고급 레스토랑, 고급 카페, 고급 쇼핑, 고급 여행, 고급 리조트, 이게 소위 conspicuous consumption-과시적인 소비에요. 

만일 우리에게 설사 그럴만한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대문 밖의 사람을 유념해 가면서 살아야 됩니다. 이걸 당연하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내 돈인데, 내 돈을 내 맘대로 내가 쓰는데 무슨 상관이냐고 말한다면 이 부자와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이 부자는 자기가 부자이기 때문에 입고 싶은 옷을 입고 먹고 싶은 것을 먹고 매일 잔치를 하는데 사실 자기 돈으로 자기가 쓰는데 누가 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문제는 바로 그 대문 밖의 거지는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를 채우고 자기 헌데를 핥고 있었다고 했는데 적어도 자기 대문 밖에 누가 있느냐 하는 것은 부자의 책임입니다. 세상의 모든 가난한 자를 해결하라는 얘기가 아니에요. 그러나 대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런 격차를 알면서 허용한다면 이 부자처럼 지옥에 갈 것입니다. 이건 중요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일 우리가 세상에 사는 동안에 좋은 것을 다 누리다가 세상 떠날 때 천국가기를 원한다면 그것처럼 이기적인 것은 어디 있고, 만일 하나님이 그것을 허용하셨다면 하나님의 공평함은 어디 있다는 얘기입니까. 만약 가난한 사람이 세상에서 남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나 먹고 자기 몸의 헌데를 핥고 개들이 와서 헌데를 핥아주다가 죽어서도 지옥에 갔다 하나님의 공평함은 어디 있다는 얘기입니까. 

예수께서는 궁극적인 하나님의 공의와 궁극적인 하나님의 공평함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이나 지옥이나 내세를 말할 때 하나님의 궁극적인 공평함을 배제할 수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이 부자에게 하는 말씀을 읽어보세요.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하나님의 공평함이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믿는다면 이 세상에서 어느 정도의 고난은 감수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하나님 앞에 설 때 받을 위로가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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