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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누가 구원을 얻습니까 (마 19: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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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구원을 얻습니까 (마 19:16-30)

행운의 복권 대박으로 인생은 행복할까? 인터넷을 찾다가 특이한 제목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는 USA투데이의 보도를 토대로 과거 복권 당첨자 사례로 미뤄 복권 "대박"은 비극의 시작인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소송에 휘말리기 일쑤고, 까맣게 잊었던 친지가 몰려들고, 듣도 보도 못한 자선단체의 기부요청이 끊이지 않으며, 종종 도박이나 약물에 빠져 빈털터리로 대부분 삶을 마감한다는 것입니다. 

1988년 펜실베니아주에서 1620만달러(약157억)복권에 당첨된 윌리엄 포스트는 유산을 노린 형제의 살해 음모 등 갖가지 음해에 시달리다 재산을 모두 날렸습니다. 결국 그는 사회보장 연금에 의존해 연명하다 사망했습니다. 1997년 텍사스주에서 310만달러(약300억원)복권으로 횡재한 빌리 하렐은 불과 2년여 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합니다. 최고급 자동차와 저택을 사들이고 가족 교회 친구들에게 마구 돈을 뿌렸으나 뜻밖의 재산이 가져온 심리적 부담을 이기지 못해서 자살했다는 겁니다. 

2001년 남편과 함께 1100만 달러 (약106억원) 당첨금을 탄 빅토리아 젤은 미네소타주 교도소에 수감돼 있다. 마약과 술에 취해 운전하다 행인을 치어 숨지게 했습니다. 2001년 4100만달러 (약397억원)를 횡재한 메인주 어윈 웨일스는 직장 동료들로부터 당첨복권이 공동소유란 소송을 당했습니다. 소송에 대응하고 재산을 지키기 위해 그는 전문 변호사를 고용해야했습니다. 

복권 당첨자, 운동선수, 연예인 등 갑작스레 떼돈을 번 사람이 빈털터리로 망해가는 과정을 연구해 책을 펴낸 텍사스공대 게리 바이어교수는 "돈을 다 써버리면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는데 사람들은 그걸 깨닫지 못한다" 고 말했다. 돈이란 것은 사람의 삶속에 필요하지만 돈 자체에 목숨을 걸면 돈과 함께 사라지는 안타까운 인생을 살게 됩니다. 

이런 글을 읽으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그건 그 사람의 이야기고 나도 돈을 한 번 실컷 써보고 싶어. 예배 마치고 가는 길에 마켓에서 열장 살 거야 하는 생각을 하는 분은 안계십니까? 

본문을 보니 어떤 사람이 예수님 앞에 나옵니다. 그 동안 예수님 앞에 나온 사람들은 질병에 걸렸거나 귀신에 들렸거나 사회적으로 소외된 계층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들과는 전혀 다릅니다. 

22절에 보면 “그 청년은 재물이 많으므로,” 누가복음 18:18에는 “어떤 관원,” 마가복음 9:25에는 “부자”로 소개됩니다. 종합해 보면 예수님께 나온 사람은 부자 청년이요 관원입니다. 젊음과 실력, 부와 권세를 겸비한 그야말로 세상에서 부러울 것이 없이 성공한 사람입니다. 

그런 청년이 예수님으로부터 재물을 포기하고 그분을 따르라는 말씀을 듣고는 근심하며 그 곁을 떠납니다. 왜 그럴까요?  오늘 성령님께서 이 자리에 계신 교우들에게 가진 재물을 포기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라 한다면 과연 그 말씀대로 순종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본문 앞부분에는 예수께서 안수하고 기도해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니까 제자들이 꾸짖으며 막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주님은 제자들을 책망하시면서 그들이 오는 것을 용납하고 부모들도 사랑으로 맞아주셨습니다. 주님은 천국이 '어린아이와 같은 이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무력하다는 것을 깨닫고 겸손하게 주님을 의지할 때 구원을 얻고 천국백성이 됩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주님이 원하시는 어린아이의 모습과 전혀 대조적인 사람이 등장합니다.  
부자 청년은 선행을 영생의 조건으로 생각합니다.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16절) 

물론 예수님 앞에 나온 청년이 대단합니다. 그는 그저 세상의 것만을 목표로 삼고 육신의 쾌락을 추구하는 보통 젊은이들과 달리 영생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계명을 열심히 지켰습니다. 그가 주님께 온 것은 보다 성공적인 삶을 살기 위함이 아닙니다. 청년은 예수님께‘선생님이여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주'라 부르는데 그 청년은 '선생님'으로 부릅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해가 깊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청년에게 있어 예수님은 사람들이 서로 미워하지 않고 사랑을 실천함으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도록 가르치기 위하여 오신 선생님입니다. 그 청년은 구원을 하나님의 은혜로 생각지 않고 자기 힘으로 얻는 것이라 생각하고 선을 많이 행하여 구원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계명 그 자체를 잘 지키는 것으로 만족할 뿐이지 그것을 통하여 이웃 사랑을 실천한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계명을 지켜도 기쁨이 없고 영생의 확신이 없으니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예수님께 나아 왔습니다. 제대로 찾아오기는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선한 이는 오직 한분이시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이 선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만약 선하지 않으시다면 예수님은 죄인이요, 예수님이 죄인이면 우리의 구원자가 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도가 무엇입니까? 인간은 절대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한 존재입니다. 하나님만이 선하시다는 것을 강조함으로 어느 누구도 선할 수 없고 어떤 행위로도 영생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십니다. 구원은 자신의 선하지 못함, 즉 죄악 됨을 고백하는데서 출발합니다. 나는 죄인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에게는 구원자 예수님이 필요 없습니다. 

진정한 생명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17절 하반절에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을 지키라"고 하십니다. 그렇다고 계명을 지키는 것이 구원을 얻는 조건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성경을 많이 읽거나, 기도를 많이 하고, 금식을 많이 하는 것이 구원의 조건은 아닙니다. 구원은 우리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계명을 지키라고 하셨을까요? 이미 구원을 받은 백성은 계명을 지키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계명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구원받는 백성이 죄를 짓지 않으려는 것은 그 죄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구원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며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분이 주신 계명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청년은 예수님께 묻습니다. 내가 지켜야 할 계명이 어느 것입니까? 아직까지 자기가 지키지 못하고 있는 계명이 어느 것이냐는 것입니다. 자기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려고 애를 썼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기 위하여 주신 지침입니다. 선하신 하나님의 요구대로 율법을 행하면 하나님은 '선한 일'을 한다고 인정하시고 복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청년의 질문에 대한 정확한 의미를 아시고 "계명들을 지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십계명 가운데 제6계명, 제7계명, 제8계명, 제9계명, 제5계명 순서로 언급하십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십계명 가운데 인륜에 관한 계명들만 언급하신 것은 이 계명들이 하나님께 대한 계명들을 자연스럽게 표현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라는 말씀을 하신 이유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과 더불어 구약에서 가장 핵심인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청년은 자기가 어릴 때부터 잘 지켰다고 자부한 계명들을 예수님이 언급하시니 아마 회심의 미소를 띠었는지도 모릅니다.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청년은 '자기 의'를 과시합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부족한 '한 가지'를 지적하십니다.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21절) 

부자 청년은 자신 있게 계명을 다 지켰다고 답변을 하지만 예수님은 그의 영적인 상태를 정확히 진단하십니다.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면 예수님은 청년에게 전에 하던 대로 계명을 계속해서 완벽하게 지키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이상 계명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습니다. 청년은 지금까지 자기 힘으로 계명을 지키며 살아왔습니다. 그저 지옥에 가지 않으려고 계명을 열심히 지켜왔습니다. 그 마음속에는 죄 사함의 확신이 없었고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난 체험도 없었습니다. 

이제 청년은 자기 힘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지금이라도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예수님 앞에 시인하고 나와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하나님 앞에 교만한 삶이었다는 것을 고백하고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는 아무런 부족함이 없을 것 같은 그 청년, 계명을 다 지켰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청년을 기특하게 여기시면서도 예수님은 그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을 지적하십니다.  "네가 온전한 사람이 되려면 가서 네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얻을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자신이 모든 계명을 잘 지킨다고 생각했지만 주님 보시기에 그의 순종은 불완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청년에게 단지 나를 따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겁니다. 가라. 네 소유를 당장에 다 팔아라. 가난한 자들에게 당장 나누어 주라. 그리고 나서 나를 계속해서 따르라고 하십니다. 신앙의 본질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면 신앙인의 본질은 하나님의 성품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웃을 향한 우리의 삶의 태도가 어떤 신앙인인지 드러내는 척도가 됩니다. 이웃을 사랑할 때 하나님을 향한 사랑도 실천하게 됩니다. 지금까지의 삶이 세상적으로는 성공적인 것이었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삶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예수님께 나아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 청년이 영생을 얻기 위하여 지불해야하는 대가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며 영생을 얻을 것이냐 아니면 자기의 재물에 집착할 것이냐의 기로에서 재물이 많은 그 청년은 고민합니다. 그러다가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버렸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청년이 이해한 영생의 가치는 그의 재물보다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사랑하였고,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의지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제자들처럼 말씀의 능력을 주시며 기도의 응답의 복을 주시며 영혼을 살리는 능력을 주기 원하셨습니다. 그에게는 재물이 우상이었기에 예수님의 초청에 응하지 못하였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하신 명령은 예수 믿는 모든 부자에게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말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재산을 다 포기하고 직장을 버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 청년은 재물에 대한 탐심이 하나님께 나오는 데 걸림돌이 되었기에 재물 문제를 언급하셨습니다. 각 사람의 상황에 따라 주님은 다른 내용으로 도전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모든 성도들의 궁극적인 목표요 그런 과정에서 걸림돌이 되는 것은 없애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데 방해되거나 지체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됩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좇다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 보다 가치 있고 영원한 것을 놓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됩니다.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고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산 장사와 같이 주님을 위하여 진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결단력이 필요합니다(마 13:45-46).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보니 전에 대단하게 여기던 모든 것을 배설물과 같이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천국은 어린아이처럼 절대적으로 주님을 의존하는 사람들의 것입니다. 그런데 부자 청년은 영생에 깊은 관심을 가지기는 하였으나 그뿐이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재물을 포기하면서까지 영생을 얻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청년은 예수님께서 제시하는 영생의 길을 마다하고 예수님 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지 말라고 하면서 그를 붙들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지켜보시기만 하셨습니다. 청년은 문제를 가지고 왔다가 제대로 해결 받지 못하고 도리어 마음에 부담만 안고 떠난 몇 안 되는 사람들 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하시면서 주님은 우리의 무거운 짐을 함께 져 주시는데 이 청년은 오히려 더 무거운 짐을 지고 갑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차이입니다. 자기가 세상에 가지고 누리던 것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영생을 얻으려 한다면 문제입니다. 

예수를 믿는 순간부터 이제 나의 모든 것은 주님의 것이며 나는 그저 주님의 것을 관리하는 청지기라는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다면 내가 더 이상 나의 삶에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가 붙들고 있는 것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을 때만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게 되고 영생을 소유합니다. 이 시간 주님께서 여기 오셔서 우리를 진단하신다면 그 부족한 것이 무엇이라고 하실까요?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26절)   

예수님께서는 청년이 율법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사랑과 신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잘 아셨습니다. 진정한 사랑에서 비롯되었다면 마땅히 가난한 자를 위하여 소유를 팔 수 있어야 하며 또한 진정한 신뢰가 있다면 하늘의 보화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부자 청년의 행동으로부터 재물이 천국에 들어가는데 얼마나 큰 걸림돌이 되는가에 대한 교훈을 이끌어 내십니다.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약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말씀하십니다. '약대'는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가장 큰 짐승이고 '바늘귀'는 가장 작은 통로를 가리킵니다. 가장 큰 짐승이 가장 작은 통로를 통과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일종의 과장법적인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재물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깜짝 놀랍니다. 

그 청년 같으면 구원은 당연히 받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가진 재물관과 구원관이 근본적으로 흔들립니다. 구약에서 '부'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시 128:1-2) "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심 때문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의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의 소유물이 땅에 넘치게 하셨음이니이다"(욥 1:10). 

따라서 부자는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이고, 선한 일을 많이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입니다. 구약의 복의 개념에 익숙해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교훈은 '그렇다면 부자는 전혀 구원을 받을 수 없겠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은 부자도 얼마든지 구원받게 할 수 있다고 하십니다. 

실제로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을 따른 사람들 중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 삭개오 등 부자들이 있습니다. 사람의 행위나 노력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지만 하나님은 능히 하실 수 있습니다. 구원의 주체는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구원이란 전적으로 하나님 편에서 베푸시는 은혜로운 선물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좇는 일도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자, 하나님이 구원하기를 원하는 자가 이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처럼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그 청년은 재물에 대한 집착 때문에 메시야 되시는 주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며 따르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그렇다면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 제자들이 불안해집니다. 부자 청년과 대조적으로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한 제자들을 대변하여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라고 묻습니다. 이 때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기들은 주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렸다고 합니다. 

사실 제자들은 이 부자 청년처럼 버릴 것이 많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비교적 쉽게 버리고 주님을 좇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세상적으로 성공한 후에 주님을 따르겠다고 하면 할수록 그만큼 주님을 따르기 어려워진다는 점입니다. 그만큼 많은 것을 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록펠러는 자기가 젊어서부터 십일조를 드리지 않았더라면 억만장자가 되고나서 십일조를 제대로 드리지 못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이 모든 것을 다 버렸을 뿐 아니라 주님을 먼저 따랐으니 다른 사람들보다 주님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받을 것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다른 지체보다 주님을 더 사랑했다고 생각하거나 더 헌신했다는 우월감을 버려야 합니다. 내가 저 사람보다 먼저 믿었으니 저 사람보다 더 일을 많이 했으니 하는 것은 우리의 생각이지 주님의 판단 기준은 아닙니다. 우리의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중심과 동기를 보시는 하나님께서 판단하실 때 기대 밖의 결과가 나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순수한 동기로 헌신해야 합니다. 교만하지 말고 모든 판단을 하나님께 맡기고 겸손하게 주님을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인자의 영광을 가지고 만물을 새롭게 할 때에, 곧 자신을 통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질 때, 제자들이 주님과 함께 영광스러운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게 될 것을 약속하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급과 영생의 선물은 제자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곧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동시에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실 분임을 알고 그를 따르기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하는 자들에게는 누구든지 상급과 영생이 주어질 것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에서의 상급과 영생의 선물이 결단코 제자들 자신의 공로에 대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임을 밝히시기 위하여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는 말씀과 함께 20장에서 포도원 품꾼들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위하여 손해를 보는 것은 결코 손해 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만큼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그만큼 능력으로 채움 받게 됩니다. 구원은 인간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구원은 인간의 재물이나 행위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습니다.  

외견상 모든 것을 가졌지만 그것으로 영혼의 갈증을 풀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한 부자 청년의 이야기는 제자도에 관한 교훈이라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께 나온 부자 청년은 도덕적으로, 종교적으로 나무랄 데가 없었습니다. 영생에 관심이 있었고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을 정도로 겸손하였고 율법을 잘 지킬 정도로 모범적인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문제점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다는데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가진 재물을 포기하고 당신을 따를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참된 제자가 되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으나 재물을 포기할 수 없어 예수님의 제자됨을 포기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는 영생을 얻는 데 실패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과 하나님을 동시에 사랑하고자 했던 한 청년을 통하여 영생을 구하는 것은 관심을 가진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까지라도 포기할 수 있어야 함을 가르쳐주십니다. 

물질이 우리의 삶에 필요하지만 자칫하면 신앙생활에 걸림돌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재물이 많다는 자체가 하나님 나라에 부적합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의 자세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계속 붙들려는 것을 이제는 주님 앞에 내려놓기 원하십니다. 물질적으로 풍부한 삶을 살아도 우리의 마음이 평안이 없을 수 있습니다.

영적인 빈곤은 하나님의 말씀, 위로와 사랑에 힘입지 않고는 결코 채워질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를 대신 담당하고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한 번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하여 천하보다 귀한 당신의 귀한 생명까지 내어 주셨습니다. 주님과 복음을 위하여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실 뿐 아니라 이 땅에서 풍성한 삶을 약속하십니다. 


*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1) 예수님이 누구신지 아는 사람입니다. 그분의 우리의 구원자요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그분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2)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인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행위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3) 인생의 우선순위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영생의 진정한 의미는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분을 안다는 것은 그분과 교제를 나누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려면 그분의 말씀을 알고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만약으로 믿는다고 입으로는 고백하지만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그의 믿음은 거짓 믿음이요 죽은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자 청년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모든 것을 다 할 것처럼 보였으나 재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요구를 듣고 나서 망설이다가 결국 주님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재물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도구가 되어야지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재물로부터 자유하지 못하면 재물의 노예가 됩니다. 그러면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하십니까? 그렇지 않다면 언젠가는 주님 곁을 떠나게 됩니다. 참된 신앙은 예수님을 삶의 우선순위로 삼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교우들에게는 우선순위가 어디에 있습니까? 주님입니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제라도 그 자리에 주님을 모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온 땅을 두루 감찰하시면서 주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새에게 날개는 무거우나 그것 때문에 날 수 있고, 배는 그 돛이 무거우나 그것 때문에 항해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십자가는 짐이 되나 그것이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천국으로 향하게 만든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과 동행하며 그분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며 마지막 날 주님 앞에 섰을 때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칭찬을 받으며 상급을 받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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