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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을에 기뻐할 수 있는 사람 (시 12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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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 기뻐할 수 있는 사람 (시 126:5-6)

지금 우리는 여름의 절정을 떠나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을을 구체적으로 준비해야 할 시점에 도달하고 있습니다. 가을은 수확의 계절입니다. 이것을 성경적으로 표현하면 무엇을 거두느냐는 심판의 계절입니다. 가을의 기쁨은 우리가 봄과 여름을 어떻게 보냈느냐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잘 아는 이솝 우화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여름철에 거두어들인 곡식을 말리며 개미들은 겨울나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배고픔으로 비틀거리던 베짱이 한 마리가 그 앞을 지나다가 먹을 것을 달라고 통 사정을 하지요. 그때 개미들이 반문합니다. “왜 넌 여름에 음식을 모으지 않았는가?”고. 베짱이는 “노래하다 보니 어느새 여름이 다 지나가 버렸다”고. 개미들은 빈정거리기를 “그럼 겨울에도 밥먹지 말고 노래나 부르라”고 합니다.

전에도 한번 소개한 일이 있었습니다만 최근에 ‘개미와 베짱이 21세기형 버전’이 나왔습니다. 이어령 선생이 쓰신 <젊음의 탄생>에 보면 세 가지 대표적인 버전이 소개됩니다. 하나는 일본판 버전입니다. 베짱이가 겨울에 개미집 문을 두드리니 안에서 아무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사정을 알아보니 여름에 너무 일을 많이 해서 과로사한 것입니다. 

소련판 버전도 있습니다. 베짱이가 문을 두드리니 개미가 문을 활짝 열고 “동지들, 오서 오시오. 프로레타리아 형제들, 함께 나누어 먹읍시다”. 그리고 겨우내 함께 나누어 먹은 개미와 베짱이는 이듬해 봄에 함께 굶어 죽었다고 합니다. 

미국판(헐리우드) 버전도 나왔습니다. 베짱이가 문을 두드리니 개미가 안에서 소리칩니다. 내가 열심히 일해서 모은 곡식을 왜 너와 나누어 먹어야 하느냐? 자기 밥벌이는 자기가 해야 하는 법. 어서 꺼지라고. 베짱이는 너무 슬퍼 집에 돌아와 노래를 불렀는데 음반 기획사가 그 노래를 듣고 반해 음반을 내게 되었고 그 음반이 히트해서 베짱이는 돈 방석에 앉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새 버전이 나와도 이 우화가 던지는 변치 않는 레슨이 있습니다. 사실 이 이야기의 새 버전은 베짱이의 노래가 개미의 노동과 반대가 아니라는 것을 전달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요즈음 한류 바람을 타고 전 세계에 영향을 끼치는 오늘의 한국산 베짱이들의 노예적 훈련과 노동이 세계적 이슈가 되는 것을 보면 심은대로 거두리라는 성경적 상식을 확인할 따름입니다. 가을의 결실은 여전히 봄과 여름의 노력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시편 126편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은 3절이라 할 수 있는데 여기서 시편기자는 “기쁘도다”고 고백합니다. 이 3절을 중심으로 1-2절은 역사적 과거의 경험을, 4-6절은 미래의 기대를 말합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해방의 기쁨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돌아온 시온의 땅에는 아직도 만만치 않은 그들을 여전히 포로되게 하는 것들이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미래에 진정 기뻐하는 사람 되기 위해 오늘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묻습니다. 인생의 가을에 기뻐할 사람 되기 위해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일 무엇일까요?

1.말씀의 씨를 뿌려야 합니다.

해방된 이스라엘 민족이 그들의 본향 시온의 땅으로 돌아오고 있을 때 민족의 지도자들은 각각 다른 비전을 가지고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정치만이 민족의 내일을 열수 있다고 믿은 지도자가 있었는가 하면, 어떤 지도자는 교육만이 민족의 소망이라고 믿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지도자는 새 경제 제도의 청사진을 가지고 민족의 내일을 꿈꾸고 있는 지도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때 전혀 다른 민족 구원의 꿈을 가지고 시온으로 돌아오고 있었던 한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에스라7:9-10입니다. “첫째 달 초하루에 바벨론에서 길을 떠났고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어 다섯째 달 초하루에 예루살렘에 이르니라 (10)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더라” 

다시말하면 에스라는 여호와의 율법 곧 하나님의 말씀의 씨를 자기 땅 자기 백성에게 뿌리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시편 119편을 묵상해 본 적이 있습니까? 말씀이 축복이고, 말씀이 거룩이고, 말씀이 삶의 길이고, 말씀이 고난중에 위로이고, 말씀이 지혜요, 명철이요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신약에도 변함없는 말씀에 대한 증언은 이 말씀만이 인간을 거듭나게 하고, 인간을 구원하고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해 말씀의 씨를 좋은 땅에 뿌리는 비전을 가르치시지 않았습니까? 

요6:63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살리는 것은 영이니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하여, 이 말씀의 씨를 불신자들에게 뿌리면 그들이 거듭 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믿음이 연약한 자들에게 뿌리면 그들이 온전하고 성숙한 자들로 설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딤후3:16-17)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가을이 오기 전 이웃들의 마음 밭에 말씀의 씨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뿌려야 합니다.


2.눈물로 씨를 뿌려야 합니다.

시편기자는 씨를 뿌리는 과정이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을 것을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눈물의 파종 과정은 마침내 기쁨으로 보상 받을 것을 언약하는 것입니다. 5절의 말씀이 그 언약이 아닙니까?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그래서 더 더욱 말씀의 파종 자들에게는 눈물 흘릴 각오가 필요합니다. 예수님도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그 씨를 사단이 빼앗고 훔칠 것을 경고하시지 않았습니까? 

또한 환난과 박해로 말씀을 받는 자들을 넘어지게 할 것을 경고하시지 않았습니까? 또한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으로 말씀의 결실을 방해할 것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사단은 누구보다 말씀의 능력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 더욱 말씀은 눈물을 흘려서라도 뿌려져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말씀의 파종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그 결실이 없는 답답함으로 울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렇더라도 눈물을 흘리면서도 계속해서 말씀의 씨는 뿌려져야 합니다. 

우리 중에 어떤 이는 전도 사역을 통해, 어떤 이는 교육 목장의 목자로, 우리중의 어떤 이는 장년 목장의 목자로서 말씀의 씨를 뿌리는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역의 마당도 쉽지는 않습니다. 모두가 눈물의 기도를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아픔의 눈물을 흘려야 할 때 반드시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눈물 없이 거둠의 기쁨을 경험할 수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의 예수님을 그린 히브리서 기자는 그가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다고 증언합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히5:7)그런데 그 눈물을 무엇이 견디게 하셨을까요? 

요12:24이 대답입니다.“내가 진실로~~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그 많은 열매의 추수 비전이 그로 십자가의 눈물과 고통을 기쁨으로 견디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눈물은 필요한 것입니다.


3.기도하며 거둠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이미 말씀의 씨를 뿌리는 자들이 흘려야 할 눈물의 경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눈물의 때를 잘 견디기 위해 본문에서의 충고는 눈물의 파종 시간 건너 “곡식의 단”을 바라보는 비전의 중요성입니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6절) 그 비전이 선명할수록 우리는 기도하며 잘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그 기다림의 시간은 결코 낭비가 아닙니다. 

본문의 배경을 이루는 팔레스틴 땅은 농산물의 수확이 결코 쉬운 땅이 아닙니다. 팔레스틴 남쪽의 네게브 사막은 특히 황량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여름의 건기를 지나 우기가 되어 사막에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한순간 이 사막은 장미처럼 피어나고 아름다운 생명들이 춤추기 시작합니다. 4절은 그 희망을 노래합니다.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같이 돌려 보내소서” 이 남방 시내로 마지막 추수가 준비되는 것입니다.

이런 가을의 비전을 바라보며 여름의 마지막 더위를 견디고 씨를 뿌린 사람들만이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유명한 시 <가을날>을 공감하며 읖조리게 될 것입니다. 

“주여, 때가 되었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위에 놓으시고/ 벌판에는 바람을 풀어주시옵소서/마지막 열매들을 결실토록 명하시고/보다 따뜻한 이틀만 더 허락하시옵소서/그것들은 익음으로 재촉하시고/강한 포도주에 마지막 감미를 불어넣시옵소서” 바울 사도도 같은 바램을 가르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고. 그 위대한 가을을 준비하는 마지막 위대한 여름의 시간을 사십시오.  (이동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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