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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 되는 교회 4 : 하나 됨의 목적 (엡 4: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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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되는 교회 4 : 하나 됨의 목적 (엡 4:13-16) 
 
 
❚공룡이 되지 않으려면...

한 때 이 지구상에는 공룡이라는 동물이 살았습니다. 엄청난 몸집에 그 누구도 대적할만한 상대가 없어 공룡은 마치 세상의 주인이라도 된 양 활보하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한 순간 너무나 갑작스럽게 공룡이 멸망하고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공룡이 하루아침에 사라지게 된 까닭에 대해 의견이 분분합니다. 

어떤 학자들은 빙하기가 와서 공룡이 멸종되었다고 하고, 혹은 지구에 커다란 유성이 충돌해서 핵폭탄의 몇 백 몇 천배 위력의 폭발이 일어나 갑자기 멸망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기독교를 믿는 학자들 중에는 창세기에 나오는 노아의 홍수가 공룡을 멸망시켰다고 말하는 등 참 여러 가지 가설과 주장이 있습니다. 도대체 어떤 것이 정답일까요?

그런데 최근에 주목할 만한 이론이 나왔습니다. 바로 공룡이 너무 머리가 나빠서 멸망했다는 것입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공룡이 그 커다란 몸집에 비해 뇌의 크기가 너무 작아서 자신을 보존할 능력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가장 똑똑한 지능을 가진 공룡도 현재 타조 수준의 뇌 크기를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심지어 백 톤에 이르는 육중한 몸집을 가지고 있지만 뇌의 크기는 겨우 60그램인 공룡도 있었다고 합니다. 코끼리의 30분의 1 수준에 불과한 크기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뇌 용량이 적은 공룡은 지능이 매우 낮았고 이로 인해 빙하기나 여러 가지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는데 실패해서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주장은 어디까지나 가설에 불과합니다. 사실인지 아닌지 알 도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아주 분명합니다. 머리와 몸은 반드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공룡처럼 몸집은 산더미 만한데 머리는 작다, 그러면 도저히 살아갈 수 없겠지요. 반대로 머리만 크고 몸집은 자라지 않는다면 그 또한 심각한 문제가 될 것입니다. 

사람은 어떻습니까? 머리만 크고 몸은 안 자란다? 반대로 몸은 크게 자랐는데 머리가 안 큰다? 그래서 두뇌의 성장이 몸의 성장을 따라가지 못한다?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이든, 동물이든, 혹은 어떤 공동체든 반드시 머리와 몸은 함께 자라야만 합니다. 머리와 몸이 균형 있게 함께 성장해 나가야만 참된 성장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안 그러면 공룡처럼 되고 맙니다. 언젠가 세상에서 사라지고 말 처지가 된다는 말입니다. 특히 주님의 몸 된 교회가 그렇습니다.

❚하나 됨의 목적

오늘은 <하나 되는 교회> 시리즈 설교의 마지막 시간으로 ‘하나 됨의 목적’에 대해 알아보려고 합니다. 즉 교회가 하나 되려는 최종적인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왜 교회가 하나 되어야 하지요?” 하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그야 당연히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니까 하나 되어야지요. 말로만 주님 안에서 한 형제자매라고 하지 말고 정말 하나 되어야지요.” 혹시 이번 시리즈 설교를 들은 분이라면 뭐라고 대답할까요? “성령님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하나 되셨기 때문입니다.” 이 정도로 대답하시는 분이라면 정말 설교를 잘 들은 분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여러 가지 이유로 교회가 하나 되어야 하는 것은 잘 알겠는데 도대체 하나 되고자 하는 최종적인 목적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해야 하겠습니까? 그 정답이 바로 본문 13절에 나옵니다. 함께 읽읍시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13절 맨 뒤에 뭐라고 했습니까?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그렇습니다. 하나 됨의 목적은, 교회가 하나 되어야 하는 최종 목적은 바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기 위해서”입니다. 좀 말이 어렵지요? 이 말을 딱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이것입니다. 따라 하세요. ‘성숙’(成熟), 예, 바로 성숙입니다. 그리고 그 성숙의 결과로 또 한 가지 일이 일어납니다. 바로 ‘성장’(成長)입니다. 이 두 낱말, ‘성숙과 성장’이 교회가 하나 되어야 하는 최종적인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사도 바울은 이 성숙과 성장을 설명하면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라는 말을 썼을까요? 이 말은 우리가 누구처럼 성숙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준 것입니다. 누구입니까?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 되어야 한다고 지금까지 누누이 강조했지요? ➛ 교회가 하나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 성도들이 성숙해진다 ➛ 그러면 성도들이 어떻게 되는가? 예수님처럼 된다. 예수님처럼 성숙한 성도가 된다 ➛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 성도들이 모두 예수님처럼 성숙해지면 그 교회 안에 성숙함이 충만해지고 가득하게 된다 ➛ 그러면 그 교회는 반드시 성장한다. 이것이 바로 본문이 말씀하는 ‘장성’(長成)이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가 하나 되어야 하는 것은 단순히 성도들의 교제나 친목을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의 화평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주 적극적인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장성’입니다. 즉 교회가 하나 될 때 반드시 그 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처럼 ‘성숙’해지고, 그 결과로 교회는 놀랍게 ‘성장’한다고 성경이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믿으십니까?

❚어른과 어린아이의 차이

그런데 사도 바울은 14절부터 비유 하나를 들고 있습니다. 바로 어른과 어린아이의 비유입니다. 왜 이 비유를 들고 있는지 여러분도 아시겠지요? 여기서 어른이란 성숙한 성도를 뜻합니다. 예수님처럼 성숙한 성도, 성숙한 교회 말입니다. 반대로 어린아이란 미숙한 성도와 그런 성도들이 모인 미숙한 교회를 뜻합니다. 먼저 14절은 어린아이, 미숙한 성도와 교회의 특징을 말씀합니다.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교회를 다녀도 여전히 영적으로 미숙한 어린아이면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어디에 빠진다고요?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집니다.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게 됩니다. 어린 아이의 특성이 무엇입니까? 남에게 잘 속습니다. 달콤한 유혹에 잘 빠집니다. 부모들이 그토록 낯선 사람 조심하라고 신신당부해도 유괴사건이 자꾸 일어나는 것은 “맛있는 것 사줄게” 같은 달콤한 유혹에 쉽게 빠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어린 아이 같은 미숙한 신앙은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잘 빠진다고 한 것입니다. 또한 어린 아이들은 아이스크림 하나에도 쉽게 마음이 흔들립니다. 마찬가지로 어린 아이 같은 미숙한 신앙은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 즉 쉽게 흔들린다고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직 성숙하지 않은 신앙을 가지면 자꾸 마귀의 속임수와 죄악에 대한 유혹에 쉽게 빠집니다. 세상적인 풍조에 자꾸 흔들립니다. 그래서 유혹에 넘어가고, 시험에 걸려 넘어지고 실족하는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특히 처음 신앙생활 시작한 초신자 여러분,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반대로, 15절부터는 어른, 즉 성숙한 성도와 교회의 특징을 말씀합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어른 신앙, 성숙한 신앙을 가진 성도는 어린 아이 같이 미숙한 신앙인들이 쉽게 넘어가는 속임수나 유혹에 잘 안 빠집니다. 세상 풍조에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대신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것만 행합니다. 그래서 결국 어디까지 자라게 됩니까?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고 했습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앞서 13절에서 이미 성숙한 성도의 특징을 말씀한 바 있습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우리 성도들이 믿는 것과 아는 것에 하나가 되면 온전한 사람이 됩니다. ‘온전한 사람’이란 완벽한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성숙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성숙한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령이 충만한 데까지 이른다고 했습니다. 즉, 예수님처럼 장성하고 성숙한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어른스러운 신앙인, 성숙한 신앙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초신자나 신앙생활 시작한 지 얼마 안 되는 분들은 신앙이 아직 미숙하지요. 그래서 세상 유혹에도 쉽게 빠지고 이런 저런 시험 때문에 흔들리고 신앙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런 초신자가 아니라 오래 교회 다닌 사람들입니다. 초신자는 시간이 지나가고 신앙생활만 열심히 하면 저절로 성숙해집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를 오래 다녀도 여전히 미숙한 신앙인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겉으로 봐서는 미숙함이 잘 안 드러납니다. 겉으로는 아주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처럼 보이고 교회생활에 아주 ‘익숙’하기 때문에 절대 미숙해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겉으로는 아주 성숙한 신앙인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익숙과 성숙이 전혀 다르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미숙한 신앙인과 성숙한 신앙인을 구분할 수 있느냐? 겉으로 봐서는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 기준이 바로 뒤 16절 말씀에 나옵니다. 함께 읽읍시다.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뭐라고 했습니까? 그에게서, 누구입니까? 바로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된다고 했습니다.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닮아 성숙해지면 그 사람을 통해 머리이신 온 몸이 연결되고 결합됩니다. 다른 사람, 다른 지체를 돕고 연결시키고 결합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바로 그 사람을 통해 각 지체가 머리 되신 그리스도와 연결되고 성숙해져서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운다”는 것입니다. ‘마디’라는 표현이 나오지요? 말하자면 성숙한 성도는 교회 안에서 마디, 즉 연결고리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 교회의 성숙한 성도들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다른 지체를 연결시켜 온 교회와 성도가 성숙해지고 성장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교회 안에 예수님처럼 성숙한 성도가 있으면 그 교회 전체가 성숙해지고, 교회가 성숙하면 교회가 자연스럽게 성장하게 됩니다. 정말 예수님처럼 장성하고 성숙한 성도는 다른 성도를 성숙하게 만들고 나아가 교회를 성장시키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뜻이지요. 이것은 교회 오래 다녔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되는 것 아닙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과연 그런 성숙한 성도인가?

❚우리교회 점수는?

저는 가끔 혼자서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하나님이 우리 교회에 점수를 주신다면 몇 점이나 주실까? 건물 점수는 몇 점을 주실까? 얼마 전에 멋지게 새로 지었으니 최소한 90점 이상은 주시겠지?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러면 목사 점수는 몇 점이나 주실까? 영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면 성도 점수는 몇 점이나 주실까? 등등 여러 가지 상상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 교회에 성숙도 점수는 몇 점이나 주실까요? 그 답은 우리 스스로가 찾아야 합니다. 왜요? 교회의 성숙도는 바로 그 교회 성도들의 성숙도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바로 나 자신의 신앙적인 성숙도가 우리 교회의 성숙도가 된다는 뜻이 됩니다. 참 두려운 일이지요.

누군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교회의 수준은 절대 그 교회 목사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 얼핏 들으면 교만한 말처럼 들리지만 이 말은 오히려 저 같은 목사들에게 엄청난 부담감을 주는 말입니다. 맞습니다. 목사 수준이 높아지지 않으면 교회 수준이 높아질 수 없습니다. 목사는 설교나 인격이나 모든 수준이 형편없는데 교회와 성도들은 수준이 높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정말 부담이 큽니다. 끊임없이 목회자로서 수준을 높여가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어떤 목사님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은 너무 수준이 낮아.” 아마 목회하면서 무슨 힘든 일이 있으셨나봅니다. 그런데 여러분, 만약 “교회의 수준은 절대 그 교회 목사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말이 맞는다면 이 목사님의 말은 무슨 뜻이 되는 겁니까? “우리 교회 성도들 수준이 너무 낮아. 왜냐하면 목사인 내가 수준이 낮기 때문이야.” 이런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심각한 말입니까? 얼마나 목사에게 부담 되는 말입니까? 그러니 여러분도 제가 수준이 더 높아질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고 도와주셔야 합니다. 저뿐 아니라 우리 교회 모든 목회자의 수준이 높아져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교회도 따라서 수준이 높아질 테니까요. 저도 정말 최선을 다해 노력할 테니 여러분도 제 수준을 좀 높여주세요.

그런데 저는 이 “교회의 수준은 절대 그 교회 목사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말에 한 마디를 덧붙이고 싶습니다. “교회의 수준은 절대 그 교회 성도들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 예, 틀림없습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까? 성도들이 성숙해야, 그 교회 성도들이 예수님처럼 성숙해져야 교회가 성숙하고 성장한다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각자가 이 말에다가 자신의 직분을 집어넣어 보기 바랍니다. 장로님들은 “교회의 수준은 절대 그 교회 장로들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 예, 정말 맞는 말입니다. 안수집사님들은 “교회의 수준은 절대 그 교회 안수집사들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 예, 맞는 말입니다. 권사님들은 “교회의 수준은 절대 그 교회 권사들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 예, 꼭 맞는 말입니다. 모든 성도들은 스스로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교회의 수준은 절대 그 교회 성도들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 정말 지당한 말입니다.

결론은 이것입니다. 우리 교회 목회자가, 그리고 장로 집사 권사 모든 성도들이 오늘 에베소서 말씀처럼 예수님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자란다면, 주님처럼 성숙한 성도가 된다면 우리 교회는 반드시 아주 성숙한 교회가 될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이 약속하신대로 우리 교회에는 반드시 장성하고 ‘성장’하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숙과 성장의 원리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이 위대한 성숙과 성장의 역사는 반드시 온 교회와 성도가 하나 되는 데에서만 시작된다는 사실 말입니다. 저는 모든 조건이나 환경이 최상이지만 하나 됨에서 실패해서 성장하지 못하는 교회와 반대로 최악의 상황에서도 하나 되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교회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하나 됨은 그토록 소중한 것입니다. 온 성도가 하나 되고, 온 교회가 하나 되어 몸집만 크지 곧 사라지고 말 공룡 같은 교회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점점 장성하고 창대해가는 교회 만들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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