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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섬기며 사명 감당합시다 (롬 1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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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기며 사명 감당합시다 (롬 12:6-8)

(롬 12:6)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롬 12:7)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롬 12:8)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밀턴이 그의 청년기 시절 6년 가량을 중서부의 한 작은 도시에서 보냈었는데, 거기서 그는 정신 지체를 갖고 있는 마이런이라는 사람을 알게 되었다합니다. 그 시기는 마이런에게 있어 무척이나도 우울해 보이는 시기였고 집 이외에는 갈 곳이 없었던 것 같았다합니다. 

그는 거기서 자기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고 도시 근교에서 할 수 있는 특이한 일을 하면서 근근히 살아가고 있었다합니다. 그는 "식물을 키우는 재능이 유달리 뛰어난" 사람이었다 합니다. 그래서 그가 일하는 곳은 아주 잘 알려져 있었다합니다. 잔디 깎기,우거진 관목, 그리고 울타리를 치는 것과 꽃을 키우는 일 등은 세심한 주의와 기술 그리고 사랑이 필요한 것들이라 합니다. 마이런은 그런 일들을 자원해서 했다합니다.

그는 과부나 스스로 일할 수 없는 그런 사람들을 위해, 잔디를 깎고 잎사귀를 긁어내며, 꽃들을 심곤 했는데 그가 아니었더라면 그곳은 아무도 찾지 않을 그러한 곳이 되었을 것이라 합니다. 

그는 아마도 "기름 통"으로도 잘 알려져 있었던 것 같다합니다. 그는 항상 그의 뒷주머니에 불을 피울 수 있는 조그마한 기름통을 가지고 다녔다 합니다. 그러다가 삐걱거리는 문이나 돌쩌귀, 그리고 대문 같은 곳이 있으면 마이런의 기름통을 "공짜"로 발라 주었다합니다. 그러나 주일에는 반드시 어머니와 함께 교회에 가기 때문에 그는 아무 곳도 가지 않았다합니다. 그래서 꼬마 아이들은 그를 놀려대곤 하였지만 그는 아주 낙천적이며 유머기질이 뛰어났고 아주 침착했기 때문에 아무도 마이런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합니다. 

마이런은 밀턴이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그 곳을 떠난 지 몇 년 후에 죽고 말았다합니다. 시간을 내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밀턴은 그의 장례식을 보러 갔다합니다. 그는 자기가 보았던 것에 대해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하지 않았다 합니다. 그 도시에 살고 있던 사람은 누구나 장례식에 참여하겠다는 결정을 내렸으므로 그 장례식에는 다른 사람의 배나 되는 인원이 참석했다합니다. 왜냐하면 밀턴처럼 아주 먼 거리에서 그 곳에 온 사람들도 많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합니다. 

의식적으로 그렇게 하려는 의도는 없었지만 마이런은 그 작은 도시에서 정말로 중요한 생활을 해 왔었던 것이라 합니다다. 아니, 그는 유명하지도, 부유하지도 않았고 그리고 존경을 받지도 않았지만 그는 노동자였고 낙관론주의자였으며. "긴장을 풀어주는 사람이었고" 예수그리스도의 신실한 제자였고 또한 자신의 마음속에 살아있는 섬김의 정신덕분에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장애를 "극복한" 사람이 되었다합니다.

우리는 사역(事役)이란 말을 많이 합니다. 사역은 남에게 어떤 동작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런 행위는 유쾌하지 못할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사역은 그것과 전혀 다릅니다. 이 사역은 강제로 시키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신성한 행동입니다. 

이 말은 헬라어로 ‘디아코노스’인데 번역하면 ‘섬기다’라는 의미입니다. 섬김의 대상은 하나님과 이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내 이웃과 형제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섬기는 일입니다. 이것이 사역이며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참여해야 할 필수 항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함, 기쁨, 온전함의 뜻을 따르며 섬길 것을 원하십니다.

(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하나님께서 섬기는 사역자 되는 자들에게 원하시는 새로운 뜻은 선함, 기쁨, 온전함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는 어그러진 세대를 변화시키는 사역에 반드시 필요한 요소들입니다.
선함에 대한 말씀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선한 목자를 생각하게 됩니다.

(요 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섬기는 자는 목자의 선함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선한 행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마 5: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선하고 온전합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선하시고 온전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의 뜻은 선하고 온전합니다. 비록 지금 우리 앞에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들이 펼쳐져 있을지라도 그것은 더 깊은 하나님의 계획을 위한 진행 과정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고난에 대해 때를 따라 돕는 분이십니다. 단지 우리가 바라는 ‘선’,우리가 바라보는 ‘때’가 아닐 뿐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선을 이루시기를 원하시며,자신의 때에 돕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궁극적인 선이며 우리에게 가장 적당한 때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고통과 아픔이 가득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악하거나 불완전하기 때문이 아니라 아직 하나님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하고 온전한 자신의 뜻을 위해 인내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의 선하시고 온전하심을 말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선하심을 말입니다. 결코 하나님은 악을 행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늘도 삶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깊이 묵상하며 그 뜻에 순종하며 섬기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기쁨’은 하나님의 뜻과 완전히 일치할 때 찾아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지은 것을 보시고 심히 좋아하셨고, 계속하여 인간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잃은 양을 찾으면 즐거워 어깨에 메고 오는 목자의 기쁨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기쁨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산 제물로 자신을 드리며 섬기는 모두가 됩시다. 

‘온전함’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가능한 일이 아니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고 이르십니다. 온전할 수 있기에 하신 명령입니다.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 즉 어리석고 손해 보는 것처럼 보이는 삶이 온전함을 이루는 조건이 됨을 기억하고 섬기는 모두가 됩시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하게 자신을 돌아보며 섬길 것을 요청 하십니다.

(롬 12: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하나님께서 바울 사도를 통하여 알려 주시는 섬김의 방법은 겸손하게 자기 자신을 돌아보라는 말씀으로 귀결됩니다. 정직하게 자기 평가를 하고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성경말씀에 따라 지혜롭게 생각하려면 겸손히 자기를 분별해 보아야 합니다. 겸손은 자신의 장점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단점에 대해 정직한 것입니다. 그래서 겸손하기가 어려운 법입니다. 우리는 흔히 자기 자신을 자신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인지를 성경은 교훈합니다.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하신 말씀은 스로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자로 경멸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인생은 어떠한 가능성도 가지고 있지 못하며, 스스로를 존귀하게 여길 그 어떤 조건도 갖지 못하였다고 하는 의미도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은 피조물 중 그 어떤 것보다도 존귀하고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존재인데 그것은 인생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경멸하지 말아야 합니다. 스스로를 지나치게 낮추고 무시하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자기 학대의 죄악인 것입니다. 성도로서의 자긍심과,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부심, 담대하고 떳떳하게 살아가는 자기 존재 의식, 이것이 오히려 우리가 지니고 있어야 할 우리 자신의 모습입니다.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인생이지만 그에 비례하여 많은 모순과 오류를 지닐 수밖에 없는 나약함,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소유하였지만 하나님께 허락받지 못한 부분도 있기에 그러한 부분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무지, 이러한 한계가 우리에게 존재한다는 것을 알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인생 스스로 자신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자신을 정확히 아는 것보다 중요한 지식도 없으며 그러한 지식에서 비로소 우리는 겸손해질 수 있음에 대한 역설적 강조인 것입니다. 

스스로에 대한 과대평가를 삼가야 합니다. 자신은 피조물이고 때문에 오류도 범할 수 있는 불완전한 인생이며, 따라서 자신의 생각, 판단, 결정이 언제나 옳을 것이라는 과대망상에서 벗어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지 않으신 지혜에 대해서는 겸손히 인정하며, 자신이 알지 못하는 분야에 대한 보다 공정한 판단이 타인으로부터 내려질 수 있고, 때문에 우리 각자는 자신에게 허락된 지혜와 믿음의 분량대로 겸손히 판단하고 생각하며 결정해야 합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올바를 판단을 내려 교만의 위험에서 벗어나라는 말씀입니다. 자신이 지닌 재능이나 부, 또는 사회적 직분으로 스스로를 판단하여 교만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기준으로 자신을 판단하여 언제나 겸손 하라는 말씀입니다. 자신에 대한 올바를 평가에서부터 겸손한 죄 인식과 구속에 대한 필요성과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단계에로의 발전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정당한 판단의 기준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정도와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경건의 열정이 모든 판단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판단 기준이 말일에 그리스도 앞에서 심판받을 판단 기준입니다(마 25장). 하나님은 심판 날에 다른 어떤 조건을 보시고 판단치 않으시고 바로 이 기준, 즉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정도와 그를 위해 바친 헌신과 충성의 정동 따라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꾸어야 할 우리 자신의 모습은 자기 자신의 과대평가나 세상적 지식이 아니라 겸손히 그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믿음, 그리고 열정적인 충성입니다. 믿음과 충성 외의 다른 표준은 가치가 없는 표준입니다. 믿음 외의 우리가 지닌 재능과 학식, 지위와 물질적 부요는 우리 자신을 평가할 수 있는 적절한 기준이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은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자들과 악한 자들도 지닐 수 있는 조건들인 동시에 그 자체가 어떤 영적, 도덕적 가치를 전혀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음 외의 다른 표준들은 우리를 겸손으로 이끌지 못합니다. 믿음의 표준은 우리를 겸손하게 하지만 믿음 외의 표준들은 우리를 교만하게 합니다. 믿음의 표준은 우리의 근본을 평가할 수 있지만 그 외의 표준은 우리의 외면적 요소들만을 판단할 수 있을 뿐 내면적 본질은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판단 기준은 주께서 요구하시는 믿음과 말씀에 대한 순종 여부가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판단 기준만이 자칫 범할 수 있는 오류의 위험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바로 인식하고 섬기는 모두가 됩시다.

하나님께서는 받은 은사를 활용하여 섬길 것을 명하십니다(롬12:6-8절).

사역의 자리로 나아가야 할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사는 각각 다릅니다. 은사란 카리스마, 곧 그 사람에게 주신 특별한 기능과 역할을 가리킵니다. 사람마다 다른 은사가 있음을 말씀하였습니다.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하라고 하십니다. 예언하는 은사란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하나님의 대언자가 되는 것을 말하는데 이 은사를 가진 자는 믿음과 합치하라고 합니다. 종교의 역할 중 '예언자적 소리'가 중요합니다. 구약성서를 펼치면 택함 받은 왕과 함께 예언자가 시대의 역사를 이끄는 주역으로 등장합니다. 

왕은 다스리는 방식으로 백성을 섬깁니다. 섬김의 다스림이 제대로 이뤄지면 훌륭한 왕이 되지만 섬김 없는 다스림은 불의와 독재를 낳습니다. 이쯤 되면 반드시 예언자가 등장합니다. 예언자적 역할에는 부정적인 현실을 낱낱이 적시하고 비판하는 '저항적 예언'과 함께 '대안 제시의 예언'을 말하기도 합니다. 전자는 심판으로 족하지만, 후자는 희망과 비전까지 제시합니다.

예수님의 예언은 둘 다 포함합니다. 성전이 장사치들의 타락한 소굴로 변했을 때 "성전을 헐라"며 분노를 담은 예언을 내뿜으셨습니다. 동시에 자신의 십자가 희생으로 "새 성전을 짓겠다"는 대안의 예언을 성취하셨습니다. 
  
섬기는 일은 섬기는 일로 하라고 합니다. 내 손이 들어가야 할 곳이 있다고 생각될 때 즉시 행동으로 옮겨 봉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름다운 일입니다. 미국 워싱턴에 있는 알링턴 국립묘지에는 케네디 대통령을 위시한 여러 미국 지도자들의 무덤들을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곳에 무명용사의 무덤이 있는데 이곳에서 방문객들은 반드시 발걸음을 멈춰야 한다합니다. 한 나라를 지켜온 것은 유명한 영웅들만이 아니라 무명용사들의 희생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함이라 합니다. 

한국의 근현대사와 교회사에도 이름이나 빛도 없이 그늘진 곳에서 오직 주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하고 있는 사람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이들이야말로 세상과 하나님의 감동을 전해주는 진정한 영향력 있는 그리스도인들이라 할 것입니까. 우리도 이름 없이 소외된 이웃을 섬기며 하나님의 감동을 전하는 영향력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갑시다.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하라고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 신앙 교육을 이루도록 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 미래의 그리스도인들이 자라게 됩니다. 아인슈타인은 노년에 '나의 부고'라는 짤막한 글을 쓰면서 아버지가 나침반을 처음 보여주었던 때를 회상했다합니다. 어느 쪽으로 돌려도 나침반 바늘이 항상 북쪽을 가리키는 모습이 어린 소년의 눈에는 무척 신기하게 보였다는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적었다합니다. "나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그때 그 경험은 내게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사물의 이면에는 반드시 깊숙이 감춰진 무언가가 있다.“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이로 하라고 합니다. 위로하는 은사는 믿음이 약한 형제를 돌보고 격려하는 사역을 하게 합니다. "위로하라"는 말씀은 세계의 지도자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말씀이라 합니다. 헨델은 '메시아'를 "너희는 위로하라"로 시작했다합니다. 루터는 잘츠부르크 성곽에서 "너희는 위로하라"는 말씀을 곰곰이 되씹고 되씹었다합니다. 

존 브라운은 '하퍼의 페리(Harper's Ferry)' 감옥에서 "너희는 위로하라"는 말씀을 읽었다합니다. 올리버 크롬웰은 폭풍이 몰아칠 때 "너희는 위로하라"는 말씀을 읽었다합니다. 

다니엘 웹스터는 마음이 아프고 꺾일 때마다 "너희는 위로하라"는 말씀을 읽고 또 읽었다합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상한 사람들을 위로의 품으로 안아주십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예수님은 이어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고 말씀하십니다(마 11:29∼30). 

예수님에게 나아가 예수님에게 배우면 배운 만큼 마음의 안식과 위로를 얻습니다. 삶이 고단하여 좌절하고 낙담할 때 힘을 주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감사한 일은 없습니다.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하라고 합니다. 가난한 자나 괴로움을 당하는 자들에게 성실한 마음을 보여야 합니다. 돈이 많다고 성실히 구제하는 것도 아니고 빈곤하다 해서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선한 은사라 하겠습니다. 우리의 소유는 섬김의 도구일 수도 있고, 욕심의 도구일 수도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롯의 종들은 소유가 많으므로 함께 할 수 없었고 삼촌과 조카가 헤어졌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왔던 젊은 관원은 소유가 많으므로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하고 떠났습니다. 소유가 많다고 섬기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자는 있는 것으로 베풉니다. 

요셉이 총리가 되었을 때 애굽에 7년 동안 풍년이 들었습니다. 요셉은 7년 동안 곡식을 잘 비축하였고 흉년이 든 7년 동안 그 곳간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기근에 빠진 사람들에게 곡식을 나눠주었습니다. 애굽 사람이 아닌 야곱의 가족에게도 곳간을 열었습니다. 곳간을 여는 지혜와 용기가 모든 사람을 살렸습니다. 지금은 우리의 곳간을 열 때입니다. 경제가 어렵고 금융이 위기에 빠져 있을 때 우리의 지갑을 열고 곳간을 열어야 합니다. 있는 것으로 베풀면 모든 사람이 함께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하라고 합니다. 교회에서 지도적 위치에 선 사람은 부지런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권세를 부리며 지시하는 것은 바른 섬김의 자세가 될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도 다스리는 자는 국민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하듯, 성도의 영적 필요를 돌보며 생명까지도 희생할 사역을 부지런히 감당해야 합니다. 

옛날에 어머니에게 효성이 아주 지극한 왕이 있었습니다. 나라도 잘 다스렸는데, 백성들이 법을 반드시 지키도록 형벌을 엄하게 했습니다. 법을 어기는 자는 누구든지 잡아다가 40대씩 매를 쳤습니다. 이른바 태형입니다. 그러자 나라의 질서가 제대로 잡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공교롭게도 왕의 어머니가 범죄를 저질러서 왕 앞에 붙들려 왔습니다. 

신하들과 백성들은 저마다 근심스러운 얼굴로 '저 효성이 지극한 왕이 이제 자기 어머니를 어떻게 할 것인가, 만일에 어머니라고 봐준다면 모처럼 세운 이 나라의 공의 와 질서는 와르르 무너져 버릴건데 어찌된 것인고?' 하고 걱정을 했습니다. 재판장 자리에 않은 왕은 깊이 생각에 잠겼다가 한참만에 무겁게 입을 열어 명령을 했습니다. "저 여자를 기둥에 묶으라! 그리고 법대로 40대를 매우 치라!" 

다들 깜짝 놀랐습니다. 어찌할 바를 몰라 벌벌 떨었습니다. 그러나 왕의 명령이니 안칠 수가 없었습니다. 막 치려는 순간, 갑자기 왕아 달려들어 자기 옷을 다 벗고 어머니를 꽉 껴안았습니다. 그렇게 왕은 어머니를 대신하여 40대의 매를 고스란히 다 맞았습니다. 왕의 등에서 피가 줄줄 흘러 내렸습니다. 이렇게 해서 왕이 나라의 공의를 세웠다는 이야기입니다.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라고 합니다. 잘 용서하고 동정을 베푸는 은사입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 같은 이 은사는 남을 돌보는 사역에 기쁨을 느끼며 세상을 따뜻하게 만듭니다. 

어느 날 마더 테레사가 저녁시간 황혼 시간에 영국 런던 거리를 걷고 있다가 어느 골목에 들어섰을 때 거기에 거지가 쭈그리고 앉아있었습니다. 날씨는 추워 오는데. 이때 마더 테레사는 발걸음을 멈추고 그 거지를 품에 한번 안아주고 “당신도 하나님이 사랑합니다. 나도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고 등을 두드려 주었더니 그 사람이 매우 기뻐하고 행복해 하는 것을 보았다는 글이 있기도 합니다.

바로 오늘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다 긍휼에 대해서 목말라 합니다. 그런데 남에게 긍휼을 베풀 수 있는 사람은 돈을 가진 사람이 베풀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권력을 가진 사람이 베풀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학식이 많은 사람이 베풀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정말 긍휼을 베풀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긍휼을 경험한 사람,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만이 긍휼을 베풀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 가운데 늘 살아가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긍휼을 베푸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은 바로 그런 뜻이 됩니다. 베푸는 자 이전에 그가 하나님의 긍휼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 하나님의 긍휼로 먹고 사는 사람, 하나님의 긍휼 때문에 생명을 유지해 가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또 역시 긍휼에 굶주려 있는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풀 수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긍휼이 필요합니다. 병든 사람에게도 긍휼이 필요하고 옥에 갇힌 사람들도 긍휼이 필요하고 그리고 탈북자들에게도 긍휼이 필요합니다. 어떤 면에서 볼 때는 긍휼이 없기 때문에 다 추워하고 있고 외로워하고 있고 또 슬퍼하고 있다고도 볼 수가 있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는 긍휼을 베푸는 사람들이 자꾸 많아져야 되겠습니다. 교회도 긍휼을 베푸는 기관으로 우리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도 다른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풀 줄 아는 그런 사람들로 우리가 설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풀수록 우리는 하나님에게로부터 받은 긍휼을 자꾸 더 많이 충만하게 누릴 수가 있습니다. 그 긍휼은 남에게 베풀어야 그것이 자꾸 깊어지고 충만해 집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 그렇습니다.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긍휼을 받고 경험하고 그것을 나누어 주는 데에서 행복이 있다는 것을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섬기는 자가 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려면 반드시 실행해야 할 항목들을 은사로 내려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여기 있습니다. 전도, 예배, 교제, 신앙 훈련 등 섬김의 사역을 수행하여 새로운 교회로 변화시켜 나가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부여되었습니다.
  
우리는 한 몸이지만 여러 지체를 가졌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우리는 손, 발, 눈, 머리 등의 지체가 됩니다. 나는 어떤 지체가 될 만한 은사를 받았을까요? 손처럼 일하고, 발처럼 행하고, 눈처럼 통찰하고, 머리처럼 지혜로운 은사로써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 성실하게 섬김의 사역을 수행하며 사명 감당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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