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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만 말씀으로만 (마 8: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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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말씀으로만 (마 8:5-13)  

  
오늘 본문에는 한 백부장이 출현합니다. 그는 로마 군인이었고 이방인이며 지배자였습니다. 그런데도 이 백부장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예수님이 그를 만나시고 감격해 하시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성경에는 백부장이 여러 명 나옵니다. 마태복음 27장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는 모습을 지켜본 백부장이 “그는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고넬료라는 백부장은 기도하는 사람이었고 선행자였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 어느 날 하나님의 계시가 임하는 축복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백부장이 있습니다. 그는 하인이 중풍 병에 걸리자 예수님을 찾아가 하인을 고쳐달라고 매달렸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러면 네 집으로 가자”고 하셨지만 그는 “수고하실 필요 없습니다. 여기서 말씀만 하시면 나을 줄 믿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종은 마침내 고침을 받았고 예수님은 그 과정에서 그의 믿음에 감탄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백부장은 전인적인 성숙한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는 하인이 중풍 병에 걸려 꼼짝 못하고 누워 죽어가고 있을 때 예수님을 찾아가 하인을 고쳐달라고 간구하였습니다. 참 아름답고 인간애가 있는 이야기 입니다. 예수님도 이 모습에 감동하셨습니다. 당시는 오늘같이 인권을 말하고 노동자를 배려하는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하인은 말하는 농기구처럼 말없이 일이나 하는 그런 시대였습니다. 더구나 백부장이면 로마 관리이고 지배자요 군인인데 하인의 존재감이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종이 병들거나 죽으면 버리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이 백부장은 그 종을 위하여 예수께 직접 찾아가 고쳐 달라고 호소를 합니다. 로마의 군인 장교가 체면불구하고 하던 일을 중단하고 친히 가서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살아있는 믿음을 보게 됩니다. 진정한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은 열심히도 있고 뜨거움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믿음에는 이같이 섬기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이 백부장처럼 말입니다. 

믿음은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도록 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내가 예수 안에 깊이 들어갈 때 가능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를 받았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내가 주님의 참 제자가 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자연인인 나는 불가능합니다. 나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나는 내 이익을 위해 남에게 한 치 양보도 못하는 이기적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 따로 행동 따로 일 때가 많습니다. 말은 쉽게 하는데 행동은 따라가기가 어렵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한계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주님의 제자가 될 때 가능해집니다. 나는 감히 그런 일을 할 수 없고 무능하지만 내가 주 안에 있을 때 내 안의 믿음의 힘이 나로 하여금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만듭니다. 이렇게 이 백부장은 자기 하인을 위해서 인류애를 발휘하였습니다. 이 백부장은 동정심만 가지고 그런 일을 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는 진정 하나님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진정한 믿음을 보게 됩니다. 

주님 사랑 

이 백부장은 주님도 사랑했습니다. 이 백부장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표현이 아주 극적입니다. 백부장이 주님을 찾아가 “내 종을 고쳐 주십시오.”하고 간구를 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그럼 네 집으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그때 백부장이 대답합니다. “주님 그렇게까지 수고하실 필요 없습니다, 여기서 말씀만 하셔도 내 종이 고침 받을 줄 믿습니다.” 이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최고의 믿음이고 신뢰이고 표현이고 고백입니다. 그 고백 속에는 “당신은 메시야이며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고백이 들어 있습니다. 얼마나 찡한 고백이고 뜨거운 표현입니까? 

그러자 예수님이 감격하시고 놀라시고 기이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사랑은 표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젊은이들은 이 사랑의 표현을 참 잘합니다. 어떤 때 보면 너무 헤플 정도입니다. 길거리에서도 껴안고 입 맞추고 아무 거리낌 없는 모습에 어른 세대들이 당황하기도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른 세대들은 사랑 표현에 아주 서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생각해 보니 좀 마음의 고여 있는 생각을 표현하며 살아가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됩니다. 

이것은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도 표현하며 고백하는 삶이 좋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사랑도 표현하며 고백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는 “주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것이 신앙고백이고 사랑의 고백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얼마나 좋아하셨습니까! 사도바울은 “나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 “이제부터 나는 주님만 알기로 작정하였노라.”고 표현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얼마나 분명하고 확신 있는 신앙의 표현이고 고백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백부장의 고백과 표현에 예수님이 아주 만족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중심 메시지 

이 본문말씀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3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메시야이심을 선포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3년 공생애 초기에 들어섰습니다. 사람들이 예수가 누군지 모르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을 보면 처음에는 태어나고 자라고 제자를 선택하신 후 산상수훈을 통해서 제자들을 훈련하십니다. 그런 후에는 열심히 다니시며 각종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8장만 보아도 1절에서 나병환자를 고치시고 5절에서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십니다. 

23절에서 바다의 바람을 잔잔하게 하시고 28절에서 귀신들린 자를 고치시며 9장 1절에서 중풍병자를 고치시고 18절에서 혈루병자를 고치시며 27절에서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십니다. 이 병자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원초적인 병들 즉 신적 권능이 없이는 고칠 수 없는 병들이라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병자들을 모두 깨끗이 고치셨습니다. 가는 곳마다 병자들이 눈을 뜨고 일어나고 깨끗케 되며 귀신이 쫓겨났습니다. 

그 말은 “예수는 메시아다. 하나님의 아들이다”라는 말입니다. 복음서에서 많은 병자들을 고치신 것은 예수님이 병자들을 고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메시아다.”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보여주신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내가 예수를 만나 병을 고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병을 고침은 내가 예수를 만나면 부수적으로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복음은 내가 예수를 알고 그 예수를 믿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메시아이시고 나의 구원자 되심을 알고 믿고 고백하는 삶이 복음의 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많은 병자들을 고치시고 많은 기적을 행하신 이유는 기적을 위함이 아니고 그것은 예수님 자신이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이유 때문입니다. 그 결과 예수님은 원초적인 질병 자들 즉 나면서부터 눈먼 자, 앉은뱅이, 나병환자들을 고치신 것입니다. 그 시대는 그런 원초적 질병 자들을 고치는 사람은 메시아뿐이라고 믿었던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본문이 우리에게 주시는 첫 번째 메시지입니다. 

두 번째 메시지는 “먼저 된 자를 향한 경고”입니다. 당시 바리새인들, 제사장들, 서기관들은 그 시대의 기득권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먼저 믿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끊임없이 기득권을 주장했습니다. “우리만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하나님은 우리만의 하나님이다.”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기득권의식 때문에 남을 인정하지 않았고 이방인을 우습게 여기고 교만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대목에서 로마의 백부장을 등장시켜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동안 “우리는 믿음이 있습니다.” 하고 공개적으로 과시하며 살아가던 바리새인과 제사장들에게 진정한 믿음이 뭔가를 보여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너희들이 평소 믿음이 있다고 큰소리 쳤지만 과연 너희 중에 이만한 믿음이 있는 사람이 있느냐”하며 꾸짖으신 것입니다. 이사야 29장 13절에도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으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다.”고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여기서 먼저 믿은 사람들의 형식적인 믿음을 신랄하게 고발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은 또한 오늘날 오래 믿었다고 스스로 자부하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믿음생활을 오래할 때 발생하는 한 가지 폐단이 바로 이 믿음의 형식화입니다. 이것은 참 무서운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그토록 신랄하게 책망하신 것도 이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먼저 믿은 사람들의 형식적인 믿음을 고발하십니다. 

세 번째 주시는 메시지는 “구원의 개방성”입니다. 그때까지 구원은 선민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며 아브라함의 자손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으로 인식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교만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서 구원은 온 인류에게 적용되는 것이라는 점을 공개적으로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에게도 “오늘 구원이 이집에 이르렀도다. 너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은 자기들만 선민이고 구원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던 바리새인들이 들을 때는 엄청난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즉 구원받을 자격이 있는 아브라함의 자손은 우리들뿐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착각하지 말라.”고 일타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도다. 이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에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그리고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천국에 가서 두 가지에 놀랐다고 합니다. 하나는 천국에 올 줄 굳게 믿었던 사람이 오지 않은 것이고 또 하나는 천국에 오리라고 생각도 하지 못했던 사람이 천국에 와 있어서 놀랐다는 것입니다. 이다음에 누가 천국에 갈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오래 믿었다고 반드시 천국에 간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백부장의 믿음을 보게 됩니다. 이렇게 좋은 믿음을 유지하려면 몇 가지 법칙이 있습니다. 

하나는 “바라봄”입니다. 사람마다 바라보는 목표가 있습니다. 그 목표를 바라보면 내안에 상이 그려지게 됩니다. 그러면 닮아가게 되고 나아가게 되고 도달하게 되고 이루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그것을 비전이라고 하고 미션이라고도 말합니다. 믿음도 목표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삶과 믿음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마침내는 십자가를 지셨고 끝내는 부활하셨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기준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그대로 믿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때 그 모습이 나에게서 만들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2장 2절을 보면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목표가 있는 사람만이 늘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두 번째 법칙은 “의존”입니다. 주님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여기 백부장은 하인을 고치는 다른 방법도 있을 수 있습니다. 부대에 군의관도 있었을 것이고 다른 민간요법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그 하인의 치료를 부하에게 맡겨둘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백부장은 다른 방법을 다 거부하고 예수께로 자신이 직접 찾아갔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100% 의존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 가면 반드시 하인이 고침 받을 줄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백부장은 마침내 뜻을 이루고 기적을 맛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자기 힘으로 살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야곱이 그랬습니다. 자기 힘으로 살아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래서 빼앗기도 하고 속이기도 하며 욕심을 냈습니다. 마침내 부자가 되었지만 원하던 평화는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속이고 뺏고 원수 맺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나중에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밤새도록 천사와 혈투를 벌리게 되었고 야곱은 그때 모든 것을 다 내려놓게 됩니다. 이를테면 두손을 들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신을 비우고 내려놓으니까 형과 화해가 이루어졌고 비로소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내 인생은 내가 사는 것 같지만 엄밀히 보면 내 인생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내 인생을 살면 너무 힘들고 고달프고 어렵습니다. 야곱처럼 얻어도 기쁨이 없습니다. 결국 내 인생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니 내가 살아가는 것이라는 점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나의 나 됨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평화는 언제 찾아오는가 하면 하나님 앞에 다 내려놓을 때 찾아옵니다. 그렇게 내려놓을 때 내안의 나는 하나님을 의존하게 되고 그로 인해 상상하지도 못한 평화가 내안에 스며들게 되는 것입니다. 좋은 신앙은 나는 축소되고 나를 비우며 다 내려놓는 삶을 말합니다. 그렇게 되면 내가 비우고 내려놓은 만큼 나는 하나님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게 되는 것입니다. 

또 “믿음”입니다. 저는 아무 준비 없이 신학교에 갔습니다. 기도를 왜 해야 하는지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기도가 힘들었고 피곤했고 그 시간이 지루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고 미래에 대해 아주 부정적이고 암담하게 느껴지게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현실이 너무 힘들어졌습니다. 미래를 잃고 목적을 찾지 못한 가운데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삶입니다. 그래서 어느 날 심각하게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마음으로는 이 길을 계속 갈 자신이 없었습니다. 

몸부림치며 심각하게 금식기도를 했습니다. 살아가다가 모든 일이 술술 잘 풀리면 이렇게 금식기도 하고 밤새워 기도하는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살아가다가 이렇게 금식기도도 해 보고 몸부림도 쳐 보는 이런 경험을 해 보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저는 그렇게 몸부림치며 기도할 때 기도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때부터 내 신앙관, 인생관, 삶의 목적이 변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때부터 앞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뜨인 눈으로 살아가는 삶이 믿음의 삶입니다. 그것이 믿음의 길이고 믿음의 방법인 것입니다. 

신앙은 평소에는 별로 중요함을 모릅니다. 그래서 신앙인에게 평안한 생활이 오래 지속되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 때는 하나님도 잊어버리고 믿음도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평안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신앙의 법은 날마다 하나님을 찾아가는 생활입니다. 그 삶이 일생동안 지속되는 삶 그것이 신앙의 법입니다. 그 삶속에서 내 삶이 익어가고 성숙해 가고 여물어 가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고백다운 고백이 나오고 진정한 사랑이 표현되는 것입니다. 

여기 백부장이 그런 사람입니다. 그는 하인이 병들었을 때 주저하지 않고 주님을 찾아갔습니다. “내 하인이 죽게 되었으니 고쳐 주십시오.” “그럼 네 집으로 가자.” “아닙니다. 우리 집까지 가시는 수고하실 필요 없습니다. 여기서 말씀만 하셔도 내 종이 고침 받을 줄로 믿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보지 못했노라(10절)”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은 “우리는 선민이니 당연히 천국에 간다.”고 믿고 장담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천만의 말씀, 어림도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주님은 형식적인 신앙을 경고하십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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