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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가 잡아야 할 작은 여우: 질투 (삼상 18: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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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잡아야 할 작은 여우: 질투 (삼상 18:6-14)


제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바른생활 시간에 배웠던 '개미와 베짱이'라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옛날에 개미와 베짱이가 살았습니다.  더운 한 여름날에 개미는 열심히 일을 하면서 먹을 것을 나르는데 베짱이는 근처 잎사귀 그늘에서 음악을 연주하며 놀고 있습니다.  나중에 추운 겨울이 되어 먹을 것이 없는 베짱이가 개미네 집에 가서 먹을 것을 구걸하지만 개미는 매정하게 거절했다는 이야기입니다.  한 마디로 베짱이처럼 거지가 되지 않으려면 젊어서 열심히 일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21세기에는 개미형의 인간으로는 성공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우리의 시대는 거미형의 인간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개미형의 인간은 부지런히 일을 하지만 혼자서 합니다.  이런 형의 사람은 주변의 관계가 좋지 않습니다.  그러나 거미형의 인간은 마치 거미가 거미줄을 쳐 놓듯이 곳곳에 자신의 지기와 동지들을 곳곳에 심어 놓는 사람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인간관계를 소중히 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개미처럼 혼자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은 다 가고 맙니다.  이런 사람들은 일에서나 자리에서 물러나면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보면 세월이 흘러서 노년이 되면 주변의 친구들도 없이 혼자서 쓸쓸하게 지내는 사람들이 숱하게 많습니다.  그러나 따뜻한 정과 믿음으로 맺어진 인간관계는 세월이 갈수록 더욱 빛이 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스마트하게 함께 일하십시오.  이 세상은 결코 혼자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어차피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입니다.  서로 의지하고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옛 속담에도 "백짓장도 받들면 낫다"고 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21세기에는 혼자 열심히 일하는 사람보다 함께 스마트하게 일하는 사람들이 팀웍을 이루는 기업들만 살아남을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공동체가 그렇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교회도 예외일 수가 없습니다.  적은 자라도 팀웍을 이루는 교회가 강한 교회입니다.  그런 교회가 시대를 변화시킬 수가 있습니다.  팀웍이 바로 되면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보다 몇 배, 몇 십배의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팀웍을 할 줄을 모릅니다.  모르는 것이 아니라 팀웍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특별히 신앙이 좀 좋다는 사람을 보면 혼자 있습니다.  세상에서도 좀 잘 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보면 팀웍을 거부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창조의 비밀은 어느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아무리 잘난 사람, 아무리 잘난 나라, 아무리 잘났어도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겸손해야 됩니다.  그래서 사람은 온유해야 됩니다.  내가 갖지 못한 것을 남에게서 배울 수 있고, 내가 갖지 못한 것을 남에게서 들을 수 있는 마음을 여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한 사람에게 절대로 모든 것을 다 주지 않았기 때문에 팀웍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함께 해야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른 지도자가 누구입니까?  팀웍을 만드는 꿈을 가진 사람입니다.  공동체 속에서 다른 사람들이 함께 일할 수 있는 팀웍을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자꾸만 흑백논리들을 가지고 팀웍을 깨뜨려 버립니다.  합력하여 하나님의 선을 이끌어내기 보다는 자신의 독선을 앞세우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와 색깔이 맞지 않는다고 해서 마구 두드려 죽여 버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그와 같은 행위는 상대방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결국 자신을 죽이는 것이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강력한 팀웍이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강력한 팀웍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팀 워커입니다.  우리는 팀 워커입니다.  우리는 서로가 함께 일할 때 더 큰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팀웍을 이룰 때 더 큰 역사를 일으킬 수가 있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합해진 믿음이 더 큰 기적을 낳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공동체의 하나됨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런데 어디를 가든지 이 공동체의 하나됨을 허무는 작은 여우들이 있습니다.  이들 작은 여우들 때문에 우리는 알게 모르게 서로 상처를 주고받으면서 힘들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건강하고 아름다워야 할 믿음의 공동체가 시들시들해지면서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작은 여우를 잡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이 작은 여우의 정체를 바로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생각해 보고자 하는 다섯 번째 작은 여우의 정체는 질투입니다.

질투와 관련해서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민담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천사가 한 여자에게 나타납니다.  천사가 그 여인을 축복하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여자만 아니라 그 여자가 지명하는 친구가 있으면 그 친구에게는 똑같은 축복을 배로 주겠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듣자마자 즉각적으로 이 여자는 자기가 질투하고 있었던 라이벌인 한 여자 친구를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천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천사님, 제가 무엇을 원하든지 저에게 주시는 그것을 제 친구에게는 갑절로 주신다는 말씀이지요?"  천사가 맞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여자가 이렇게 요청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제 한 쪽 눈의 시력을 잃어버리게 도와주세요."

아직도 무슨 이야기인지 깨닫지 못 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러면 자기 친구는 어떻게 됩니까?  두 눈이 다 시력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질투라고 하는 것이 이렇게 무서운 감정적인 에너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다윗이 블레셋의 장수였던 골리앗을 넘어뜨리고 개선장군이 되어서 예루살렘 성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본문 7절에 보면, 다윗이 개선장군이 되어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는 길에서 여인들이 환영하는 노래를 부릅니다.  본문 7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여인들이 뛰놀며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보십시오.  이스라엘의 여인들이 전쟁에서 승리한 사실을 놓고 노래합니다.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고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다."  그런데 이것이 비극의 발단이었습니다.  우리들 주위에 보면 가끔 이렇게 속이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왕은 사울입니다.  그러면 왕에 대한 어떤 예우를 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사울에 대해서는 천천이고,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렸습니다.  그 다음절에 보면 사울이 이 말에 대하여 불쾌하여 심히 노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가 더 얻을 것이 나라 말고 무엇이냐?"

그때부터 사울의 일생이 달라집니다.  질투의 일생으로 빠져들어 갑니다.  사울의 전 생애가 왜곡되고 변질되는 비극의 발단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사울의 일생을 좀 추적하면서 이 질투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죄인가를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한 개인의 인격과 공동체를 허물어뜨리는 이 질투의 정체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투라는 것은 어떤 죄이며, 이 질투의 정체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질투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을 제한시키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질투하기 시작하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장점이 더 이상 개발되지 못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좋은 가능성이 모두 사장될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울이라는 사람이 본래 어떤 사람입니까?  사울이 이스라엘 왕의 후보로서 처음 등장할 때의 모습을 보면 그는 아주 괜찮은 사람입니다.  그는 아주 재주도 있고, 나름대로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는 아주 괜찮은 사람입니다.  사무엘상 9장 2절 이하에 보면 이렇게 묘사합니다.  사무엘상 9장 2절을 찾아서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기스에게 아들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사울이요 준수한 소년이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만큼 더 컸더라."
한 마디로 말해서 사울은 아주 훤칠한 키를 가진 멋진 미남이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꽃미남을 넘어선 절세미남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사무엘상 9장에 보면 사울의 아버지가 암나귀 하나를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사울에게 찾아오라고 합니다.  사울이 잃어버린 암나귀를 찾는 그 도상에서 하나님의 사람 선지자를 만납니다.  그리고 사울은 그 선지자 앞에서 아주 깍듯이 예의를 갖추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울은 아주 예의 바른 사람이요,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거기다가 사무엘이 그를 왕의 후보로 선택을 하고 그에게 기름을 부으려고 할 때 사울이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사무엘상 9장 21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사울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 아니니이까 또 나의 가족은 베냐민 지파 모든 가족 중에 가장 미약하지 아니하니이까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말씀하시나이까 하니."
한 마디로 말해서 자신은 도저히 이런 자리를 감당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아주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드디어 그가 왕이 되고 몇 차례에 걸친 전쟁을 벌이는 가운데서 그는 뛰어난 지략을 발휘합니다.  그리고 놀라운 통솔력을 발휘합니다.  사울은 리더쉽이 있었습니다.  지혜가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면에 있어서 그는 갖추어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사울이 다윗을 질투하기 시작하자 그 순간부터 사울이 가졌던 모든 장점이 다 사장되어 버리고 맙니다.  더 이상 그는 리더로서 성숙해 가지 못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사건은 인생의 현장에서 언제든지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유명한 영화 '아마데우스'가 보여주고 있는 메시지도 바로 그런 메시지입니다.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궁중에서 음악장이었던 안토니오 살리에리는 나름대로 음악가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음악성에 대해서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어느 날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젊은 모차르트의 공연을 보고서 그의 속에는 질투의 감정이 끓어오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살리에리의 인생이 무너져 가기 시작합니다.  사실 살리에리도 나름대로 괜찮은 충분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투가 그를 사로잡자 더 이상의 그의 장점과 은사가 개발되지 못하고 그의 인생은 비극적인 퇴락을 시작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질투하기 시작하면 내 속에 있는 무한한 가능성은 없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질투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장점과 무한한 가능성을 사장시킬 수밖에 없는 죄악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질투는 자신의 일상적인 삶을 빼앗아 가버리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를 무너뜨리는 요인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가장 강력한 감정을 동반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질투라고 생각을 합니다.  질투는 우리의 감정이라는 에너지를 집중시킵니다.  그래서 우리를 지배합니다.  일단 질투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그 속에서 헤어 나오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앵거스 윌슨이라는 사람은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여러 죄악들을 우리의 신체의 어떤 부분의 표정과 관련시켜서 이렇게 비유를 했습니다.  정욕이 충혈된 눈동자라면 탐심은 올챙이배와 같다.  교만이 낙타의 코라면 질투는 경련하고 있는 얼굴에 비유할 수 있다.  이 부르르 떨면서 경련하고 있는 얼굴, 그것이 바로 질투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질투는 아주 강력한 감정을 동반하고 있는 죄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질투하기 시작하면 밤낮으로 질투의 대상 밖에는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질투하는 사람만을 주야로 묵상합니다.  밤에 자다가도 그 사람이 생각나서 벌떡 일어납니다.  거기서 헤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질투하고 있는 대상에 대한 시기와 미움과 같은 감정의 늪 속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인생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자신의 일상적인 삶의 태도가 무너져 버리고 맙니다.  자신의 삶이 마비가 됩니다.  행동이 마비가 됩니다.  그래서 내가 날마다 해야 할 일상적인 삶의 의무를 저버리고 맙니다.  내가 마땅히 살아야 할 삶의 모습을 온전히 다 뺏겨 버리고 맙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사울왕이 바로 그런 대표적인 경우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인 사무엘상 18장 9절을 다시 한 번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 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

본문의 말씀을 보다 정확하게 번역하자면 이렇습니다.  "그 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질투하는 눈으로 주목하였더라."  NIV 영어성경에도 보면 그렇게 쓰여져 있습니다.  "사울이란 사람이 다윗을 질투의 눈동자로 주목했다."  질투의 눈동자로 주목했다.  그런데 그때만 주목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날 이후로 계속해서, 아니 평생 동안 그는 그 질투라는 늪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사울 왕의 생애를 살펴보는 가운데 사무엘상 24장에 보면 이스라엘과 블레셋 사이에서 전쟁이 일어납니다.  사울이 왕으로서 이 전쟁에 참여를 합니다.  그런데 블레셋과의 전쟁이 약간 소강상태에 빠졌을 때 참모가 소식을 가지고 옵니다.  그것은 다윗이 지금 전쟁터 가까이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사울왕은 블레셋과 전쟁을 하다 말고 다윗을 잡으러 쫓아갑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나라의 중대한 전쟁을 수행하는 순간에 개인적인 사사로운 일로 전쟁을 중단하고 다윗을 잡으러 쫓아갑니다.

그만큼 질투는 일상적인 자신의 삶을 마비시켜 버리고 맙니다.  질투는 질투의 대상 외에는 나로 하여금 그 어떤 것에도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강력한 감정의 힘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일상적인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하게 됩니다.  아주 무서운 죄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질투에 관련된 무서운 이야기를 우리가 잘 아는 백설공주 이야기에서도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어느 날 새로운 왕비가 백설공주의 계모로 들어옵니다.  그런데 이 왕비는 요술 거울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침마다 이 왕비의 일상사는 이렇게 시작이 됩니다.  그녀는 이 요술 거울을 향해서 질문을 던집니다.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그러면 요술 거울이 대답해 주기를 "왕비님, 왕비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우아하고 가장 고우시고 가장 아름답습니다."  "그렇지. 그렇지."  날마다 이것을 확인하는 것이 그녀의 일상사입니다.

그 이튿날 아침에 일어나면 또 거울을 향해서 묻습니다.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거울은 어김없이 대답해 주기를 "왕비님, 왕비님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우아하고 가장 아름답고 가장 예쁘십니다."  "맞지, 맞아."  그리고 기분 좋게 하루를 출발합니다.

그런데 백설공주가 성장하면서 여인의 성숙한 티와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합니다.  어느 날 왕비가 요술 거울을 향해서 똑같은 질문을 던졌을 때 전에 없었던 대답이 나옵니다.  무슨 대답이 나왔습니까?
"왕비님, 왕비님은 우아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왕비님 보다 더 아름다운 분이 생겼습니다."
"아니, 그가 누구냐?"
"예, 그녀는 백설 공주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듣자마자 왕비가 뒤집힙니다.  그 다음부터는 이 백설공주를 처치하고 제거하기 위해서 자기 일생을 거기에 다 쏟아 붓게 됩니다.  이 왕비의 전 일생이 마비되어 가는 비극적인 모습을 이 동화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질투라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질투는 우리의 평범한 일상적인 삶을 빼앗아 가버립니다.

마지막으로, 질투는 결국 내 자신의 삶을 파괴시키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윗을 그토록 질투했던 사울의 최후가 어떻게 끝이 납니까?  점점 지혜가 없어집니다.  그리고 능력을 상실해 갑니다.  그는 무력한 왕이 되어 갑니다.  그는 전쟁에서 패배하고 마침내 적군에게 포로가 될 그 순간에 자기 옆에 있던 병사의 칼에 엎드려서 스스로 자폭해 버리는 비극적인 죽음으로 자기 일생의 마지막을 끝내고 맙니다.  보십시오.  모차르트를 질투했던 안토니오 살리에리는 나중에 미쳐 버립니다.  살리에리는 신앙도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가서는 하나님을 저주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어째서 모차르트에게는 저런 은사를 주시고 나에게는 안 주셨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질투라고 하는 것은 사실 어떤 심리적인 단순한 감정만을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성경이 질투의 문제를 다룰 때 그 질투의 배후에는 질투의 영이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것이 악령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무엘상 18장 10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 이튿날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힘 있게 내리매 그가 집 안에서 정신없이 떠들어대므로 다윗이 평일과 같이 손으로 수금을 타는데 그 때에 사울의 손에 창이 있는지라."
사울에게 악령이 임했습니다.  그래서 이 악령이 사울을 충동질해서 다윗을 죽이도록 조정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습니다.  성경은 모든 죄악, 그러나 특별히 질투라는 이런 감정의 배후에는 악한 영이 존재하고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약성경에서도 동일하게 그렇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가령, 야고보서 3장 14절에 보면, 마음속에 독한 시기가 있으면 그 대상을 파멸시키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따라서 그 대상을 파멸시키기 위해서는 음모를 꾸미고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러한 지혜, 그러니까 시기하고 질투하는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다."

그렇습니다.  이 질투의 배후에는 악한 영, 사단의 영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결국 사단의 마지막 음모는 질투하는 사람을 파괴시키는 것입니다.  질투하는 사람의 인격을 파괴시키고, 주변의 사람들과의 관계를 파괴시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질투는 나를 파멸시키는 것입니다.  결국 나를 죽이는 것이 질투의 정체입니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사단의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사단의 음모를 구별하지 못하고 자기를 파멸시키는 그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까?  질투는 그렇게 무서운 죄악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질투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겠습니까?  너나 할 것 없이 누구나 다 인생의 길에서 질투를 느끼는 순간들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질투의 유혹을 극복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질투에서 자유한 인생을 살아 갈 수가 있을까요?  이 아침에 저는 두 가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는, 내가 다른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말고 나 자신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질투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질투라는 것은 결국 내가 갖지 못한 것, 그리고 남이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시기가 바로 질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을 남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의미에서 생각하면 남이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을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족하지만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을 가지고 내 인생을 살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장점과 내 은사는 개발시키지 않고 다른 사람의 것을 묵상하면서 비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는 왜 안 주셨을까?  제한테만 저렇게 주셨을까?"  계속 그렇게 비교합니다.  비교하면서 비참해 지고 질투하면서 스스로를 파괴시켜 갑니다.  바로 이 질투라는 것은 비교의식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질투를 극복하려면 창조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 가운데 나 같은 존재는 오직 나 밖에 없다는 생각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여러분 주변을 한 번 돌아보십시오.  지금 여러분 옆에 않아 있는 인간, 앞 뒤에 있는 인간을 한 번 쳐다보십시오.  얼마나 희한하게 생겼습니까?  단 한 사람도 똑 같은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가 다 다릅니다.  나와 같은 존재는 과거에도 없었고 오고 오는 세대에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인생을 살면 됩니다.  내 장점을 개발하고,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어떤 면에서는 모자라지만 또 다른 면에서는 내가 나은 점이 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내 인생을 부지런히 성실하게 살아가면 됩니다.  비교하지 말고 말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가진 독특한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창조하셨습니다.  내가 가진 독특한 은사가 있고 재능이 있습니다.  나는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 안에서 주신 사명을 따라 내 인생을 살면 됩니다.  우리가 굳이 다른 사람을 질투하고 시기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나는 내가 되면 되는 것입니다.  내가 그 사람이 될 수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꼭 탁월한 사람이 되어야만 하나님 나라에서 귀하게 쓰임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탁월하면 좋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2등도 긴요하게 쓰임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때때로 하나님은 우리를 놀라게 하기 위해서 꼴찌도 사용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사를 가지고 내가 쓰임을 받는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만족하고 거기서 행복하면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질투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하나님이 기대한 내 스스로가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이 질투를 극복하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이웃을 축복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안토니오 살리에리에게 격렬한 질투를 받았던 모차르트는 의외로 상당히 담담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모차르트도 드디어 훌륭한 후배 한 사람을 발견합니다.  그가 바로 베토벤입니다.  그 때 모차르트는 질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두고 보라고. 여기에 탁월한 음악가 한 사람이 나타났다."  얼마나 당당합니까?  사실 베토벤과 모차르트의 음악은 다릅니다.  그렇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음악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이지만 오늘 본문에 나타난 사울과 다윗의 관계를 묵상하면서 제 마음속에 계속해서 일어나는 질문 하나가 있습니다.  만일 사울왕이 개선 행렬에서 사람들이 다윗에게 박수를 치면서 다윗의 위대한 용맹과 그의 업적을 칭찬할 때 사울왕이 만일 이렇게 반응했더라면 어떠했을까?
"국민 여러분, 하나님은 드디어 우리나라에 다윗과 같은 놀라운 지도자를 주셨습니다.  다윗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십시다.  다윗은 우리나라의 미래입니다.  다윗 같은 젊은이들이 나오는 한 우리나라는 안심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더 많은 다윗이 나올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만약 사울이 이렇게 반응했더라면 어땠을까요?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 사울왕과 같은 사람이 자신들의 왕이라는 사실에 얼마나 행복해 했을까요?

오늘날 유대인들을 붙들고 당신들이 제일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보면 절대로 사울이라는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오직 다윗만을 기억합니다.  저는 반대로 사울이 다윗을 인정하고 격려하고 축복하고 세울 줄 알았더라면 오늘의 유대인들은 다윗보다도 사울을 더 많이 기억할 것입니다.  그리고 사울을 이스라엘을 건국했던 위대한 기초를 놓은 사람으로 기억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사울은 이웃을 축복하고, 후배를 축복하고 세워 주는 일을 하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먼저 예수를 믿었다는 것은 어떤 기득권을 잡기 위해서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러라고 우리를 먼저 이 자리에로 부르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한 가지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먼저 믿게 하시고 이 자리에 있게 하신 것은 나중에 믿는 사람들이 나를 디딤돌을 삼아서 보다 더 예수를 잘 믿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믿으십니까?  인정하십니까?  그런데 왜 남이 잘 되는 것을 그렇게 질투하십니까?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사울의 그 나머지 인생이 너무나 비극적으로 끝나는 것을 보여주는 내용을 발견하게 됩니다.  본문 12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

보십시오.  여기에는 극적인 두 개의 대조가 나옵니다.  하나님이 사울을 떠났다.  하나님은 질투를 안 좋아하십니다.  그리고 질투하는 자를 떠나가십니다.  하나님은 사울을 버리셨습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극적인 대조를 보십시오.  하나님은 다윗과 함께 하셨다.  본문의 마지막 절인 14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다윗이 그의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니라."

사울은 다윗을 향한 그 질투의 감정을 극복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다윗을 죽이고 파괴하기 위해서 달려갔던 일생이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다윗은 그런 질투를 받으면서도 깎듯이 사울왕을 모십니다.  "나를 죽이려고 시도했던 그런 사울왕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왔어도 나는 그럴 수 없다.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자를 내가 손대지 않겠다."  다윗은 계속해서 깍듯한 예의로 사울왕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런 다윗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얼마나 기특하셨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계시더라."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여기에 우리의 선택이 있습니다.  두 가지의 극적인 대조를 이루는 인물을 볼 수가 있습니다.  많은 가능성과 그리고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질투의 영을 극복하지 못했던 사울,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떠나셨습니다.  그러나 또 한 사람, 핍박과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축복하고 사랑하고 후원하고 기도할 줄 알았던 따뜻한 마음의 다윗, 하나님은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그에게 지혜를 주시고 그에게 비전을 주시고 그에게 용기를 주시고 마침내 그에게 나라를 맡기시던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일생은 누구의 일생을 닮은 모습일까요?  사울일까요, 아니면 다윗일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인간성의 연약함 때문에 우리의 마음속에는 얼마든지 질투의 유혹이 있을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일생을 살다보면 껄끄러운 사람도 만나게 되고, 어쩌면 도저히 품기 어려운 이웃, 사랑하기 어려운 이웃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질투의 유혹을 넘어서서 이웃을 사랑하고, 격려하고, 축복하고, 세울 줄 아는 사람이 되셔야 합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그래서 주님이 너무너무 기뻐서 함께 하기를 즐겨하는 인생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우리들 개개인의 인격은 보다 성숙해질 것이고, 내 가정과 우리의 믿음의 공동체는 아름답고 든든하게 세워져 갈 것입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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