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아름다운 흔적을 남겨라! (창 21:14-19)

첨부 1


아름다운 흔적을 남겨라! (창 21:14-19)

사회학자들에 따르면 시대가 지나가면서 세상의 지배 방식이 바뀐다고 합니다. ➀19세기에는 노동자, 농민과 같은 사람들이 세상을 지배했습니다. 그래서 “블루컬러 시대”였습니다. ➁20세기는 지식인들에 의한 지배 시대였습니다. “화이트컬러 시대”입니다. ➂21세기는 지식을 넘어 감성이 우선인 시대로 “골드컬러 시대”라 합니다. 일명 문화시대로 “한류문화”가 여기에 속합니다. ➃미래학자들은 21세기 중반에는 나눔과 봉사, 그리고 희생적 행동을 하는 사람이 지배하는 시대가 될 것이라 예견합니다. 이 시대를 “다이아몬드컬러 시대”라고 합니다. 

각 시대마다 역사와 인간들은 흔적을 남기고 갔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름다운 흔적, 좋은 흔적을 남겨 하늘의 별같이 오래도록 빛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쁜 흔적을 남기고 추한 모습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기도 했습니다. 

누가 뭐래도 인류 역사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인류의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흔적을 남기고 가신 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그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일평생을 바쳐 헌신봉사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그의 몸에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흔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사탄의 흔적과 카인의 흔적을 남기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형상, 아벨의 흔적,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남기기도 합니다. 


1. 온유의 흔적을 남겨라.

온유(Meekness)란 자기의 존재가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것을 아는 겸허함과 겸손함을 말합니다. 그런 까닭에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고, 사람에게 친절을 베푸는 사람을 일컬어 말합니다. 

온유란 말의 히브리어는 원래 비천한, 억압된 노예 상태에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를 하나님의 비천한 종으로 여기고 하나님의 뜻에 완전하게 순종하며, 그러므로 또한 이웃 사람에 대하여 노하든가, 교만한 생각을 품지 않는 상태를 가리키기 위해 씌어졌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겸손과 거의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민12:3)하고 말씀하므로 모세의 온유를 당시의 이스라엘의 이상(理想)으로 하여, 그 온유함을 예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어떠한 존재인지를 알아, 겸허하고, 그렇다고 유약하거나 비겁한 것이 아니면서, 세찬 인내로서, 사람들에게 동정심 많았던 것을 보여줍니다. 

스가랴선지는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9:9)고 오실 메시야왕도 온유하신 분으로 그 성격을 규정짓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너희를 대면하면 유순하고 떠나 있으면 너희에 대하여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고후10:1)라고 말하면서 온유를 누구보다도 그리스도 자신이 그 사역(일)에 의해 보여주신 “인격적 특질”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온유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이 창조된 인간에게 주어지는 은사로서 성령의 열매 중 하나로 소개합니다(갈5:22). 온유는, 겸허, 관용, 인내, 사랑 등과 함께 이미 당시의 헬레니즘 세계의 덕목이기도 했습니다.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그리스도의 온유의 흔적을 본받아 보다 현실적인 형태로, 언제나 끊임없이 추구해야할 구체적인 생활목표였습니다(엡4:2, 골3:12, 딤전6:11, 딤후2:25, 벧전3:4). 

이처럼 온유는 어떠한 경우에도 모든 사람에 대하여 취해야 할 태도로서 요청될 뿐 아니라(갈6:1, 딛3:2, 벧전3:15, 약3:13, 딤후2:25), 동시에 “그리스도의 말씀을 순전하게 받아들이는 신앙의 태도”로서 요청되었습니다(약1:21). 


2. 베푸는 흔적을 남겨라.

베푸는 것은 남에게 돈을 주거나 일을 도와서 은혜를 입히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각박하다 할지라도 아직도 은혜를 베푸는 자들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아직 절망적이지는 않습니다. 소망이 없지는 않습니다. 

베푸는 연민(憐憫)은 영혼의 항독소(抗毒素)이며 귀먹은 사람도 들을 수 있고, 눈먼 사람도 볼 수 있는 언어라고 합니다. 남에게 베풀었다고 해서 가난해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주님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만왕의 왕으로서 섬김을 받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셨습니다. 하늘의 신령한 것을 세상에 사는 우리 인간들에게 베풀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사탄에게 억눌리는 자들을 구해주시고, 죄악에 찌들어 시들어가는 자들에게 사죄의 은총을 베푸시고, 세파에 시달리는 자들을 건져 소원의 항구로 인도해 주시고, 흑암에 헤매는 자들을 빛으로 끌어내 주시고, 지옥의 형벌을 받을 자들을 자기의 목숨을 대속물로 주셔서 영생복락을 베풀어 주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6:6-7)고 말했습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며, 신앙의 원리입니다. 아름다운 것을 심는 자는 아름다운 것을 거둡니다. 나쁜 것을 심는 자는 나쁜 것을 거둡니다. 

그러나 사람들 중에는 좋은 것은 절대 함께 하지 않고, 나쁜 것만 함께 하려고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않습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반드시 그대로 거두는 것은 자연의 이치요, 하나님의 원리입니다. 

가난한 자들과 물질을 함께 나누고, 우는 자와 눈물을 함께 나누고, 괴로워하는 자들과 괴로움을 함께 나누고, 고민하는 자와 고민을 함께 나누고, 외로운 자와 외로움을 함께 나누고, 고독한 자와 고독을 함께 나누고, 기도를 필요로 하는 자와 기도를 함께 나누고, 은혜를 상실한 자와 은혜를 나누는 자는 분명 아름다운 자취를 남기는 자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롬12:15-17)고 말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좋은 일에는 언제나 중심에 서 있습니다. 좋은 일에는 절대 빠지지 않습니다. 봉사하는 일, 충성하는 일, 남을 도와서 베푸는 일, 화합하는 일, 협력하는 일에 항상 중심에 서있습니다. 이런 이들은 금세와 내세에서 은혜와 평강을 누립니다. 

어떤 이들은 좋지 못한 일에 언제나 중심에 서 있습니다. 나쁜 일에는 빠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원망의 중심에 서있습니다. 불평의 중심에 서있습니다. 시험의 중심에 서있습니다. 분쟁과 다툼의 중심에 서있습니다. 

“흥하는 말씨 망하는 말투”에 보면 “지혜가 있는 사람은 부족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장점에 감동하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나보다 훌륭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약점을 찾아내 올림픽 금메달을 딴 것처럼 흥분하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호간의 관계입니다. ➀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가 잘못되면 하늘 문이 닫힙니다.➁하나님의 종들과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가 잘못되면 은혜와 축복의 문이 닫힙니다. ➂성도들과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가 잘못되면 사랑과 평화의 문이 닫힙니다. ➃이웃과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가 잘못되면 복음과 전도의 문이 닫힙니다. ➄가족들과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가 잘못되면 번영과 번성의 문이 닫힙니다. 관계가 그렇게 중요합니다. 관계 개선의 핵심은 예수님의 베푸는 흔적을 가져야 합니다.


3. 십자가의 흔적입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된 일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자들은 누구든지 자기희생의 상징인 십자가의 흔적을 가지고 따르라는 말씀이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27:46)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흔적은 바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에게 친히 버림을 받으신 흔적”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갈6:17)고 말했습니다. 


끝맺는 말

사람이 머물다 떠난 곳에는 흔적이 남습니다. 결혼식이 끝난 자리에는 꽃가루가 남습니다. 잔칫집에는 음식 부스러기가 남습니다. 

링컨은 다음과 같은 삶의 흔적을 남기고 싶었습니다. “링컨, 그는 잡초를 뽑아내고 그곳에 꽃을 심다 세상을 떠난 사람이다.”라고 말입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교회에서 아름다운 흔적, 즉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남기고 떠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