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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불운에 대한 신앙적 해석 (룻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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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운에 대한 신앙적 해석 (룻 1:1-14)

구약과 신약, 66권의 책 중에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단어가 있는데 그건 바로 ‘운’이라는 단어입니다. 운수, 행운, 불운, 재물운, 애정운, luck, fortune. 이런 단어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믿어지지 않으시면 여러분이 직접 검색을 해보면 됩니다. 

요즘은 컴퓨터 성경이 있기 때문에 어떤 단어가 몇 번 나오는지도 파악을 할 수 있는데 이상하게 운과 관련된 단어는 성경에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또, 성경에 등장하는 어떤 인물도 자신의 삶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운이 좋았다던가, 운이 없었다던가, 행운이라던가, 불운이라던가, 이런 식의 해석을 하는 사람은 한명도 없습니다. 그것이 성경시대에 운이라는 개념이 아직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랬느냐, 운이라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그랬느냐. 천만의 말씀입니다. 운이라는 개념은 원시시대부터 있었던 것입니다. 

로마인들이 믿는 수많은 신 중에 ‘Fortuna’라는 신이 있었습니다. Fortuna는 행운의 여신입니다. 고대인들은 자기가 통제할 수 없고 이유를 알 수 없는 우연히 발생하는 길흉화복을 운, 내지는 운명이란 말로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가장 흔한 예가 도박을 할 때 누구는 돈을 따고 누구는 돈을 잃는 것, 그건 운에 의한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또 불특정 인에게 찾아오는 사고, 예컨대 누가 돌을 던졌는데 누구는 맞고 누구는 맞지 않았다면, 이것도 운에 의한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그런 식으로 생각을 많이 하지요. 달리 설명할 수 없는 길흉화복을 운이 좋았다, 라든가 운이 나빴다,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거기에서 발달한 것이 무엇이냐, 미신이라는 것입니다. 미신은 운을 좋게 해준다고 사람들이 믿는 유사신앙을 일컫는 말입니다. 

미신의 목적은 불운을 피하고 행운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미신에는 이유가 없어요. 왜 돼지꿈이 좋냐,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는 돼지꿈을 꾸면 운이 좋다. 예로부터 미신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많았습니다. 

유명한 테너 가수였던 카루소는 미신이 많기로 유명했는데, 그는 평소에 목걸이에 멸치를 걸어놓고 매고 다녔어요. 왜 그랬느냐, 그게 자기에게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믿었기 때문에. 근거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자신의 경험에 의하면 멸치를 걸고 다니니까 운이 따르더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농구선수 마이클 조던은 자기 유니폼 밑에 과거 처음 데뷔했을 때의 팀 유니폼을 따로 입고 경기를 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남 이야기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미신은 하나 둘씩은 있기 때문에. 미신의 힘은 무섭습니다. 그만큼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설명할 수 없고 예측할 수 없는, 우연히 찾아오는 불운에 대한 두려움, 또 행운에 대한 바람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나오미라는 여성은 세상적인 눈으로 볼 때 정말로 운이 없는 사람입니다. 고향에 흉년이 들어서 외국으로 이민을 간 것도 불행한데, 그 땅에서 남편이 죽고 두 아들마저도 죽었습니다. 그래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가난한 것은 예전이나 다름이 없고, 이제는 남편도 없고 자식도 없고, 빈 몸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오죽하면 자기의 이름마저도 민망하게 생각하겠습니까? ‘나오미’라는 이름은 즐겁다, 라는 뜻인데 그 이름에 대해서 자격지심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나를 ‘나오미’ 라고 부르지 말고 ‘마라’라고 불러달라. ‘마라’라는 말은 ‘쓰다’라는 말입니다. 

우리 보기에도 팔자가 기구한 여성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오미는 한 번도 내가 운이 없어서, 내가 불운해서, 이런 식으로 자기의 입장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내가 팔자가 사납다, 이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나오미가 뭐라고 말하냐면, 오늘 본문 13절에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마음이 아프다’ 라고 말합니다. 한 구절에 불구하지만 아주 소중한 성경구절입니다. 만일 이와 같은 해석이 룻기에만 나온다면 이건 나오미 개인 의견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성경 전반에 거쳐서 모든 사람들이 인간의 길흉화복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운으로 그것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운이 좋아서 잘되었다든가, 운이 나빠서 안됐다고 설명하는 사람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심지어 성경에 등장하는 이방인들조차도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예컨대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뭐라고 말했냐면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다.’ 이방인조차도 하나님이 이삭과 함께 하심으로 이삭이 복을 받는다고 이해했어요. 

또 바로가 요셉에게 뭐라고 말했냐면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이 감동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얻을 수 있으리오.’ 요셉이 바로의 꿈을 해석할 수 있었던 것을 하나님의 신이 감동했기 때문이다, 라고 이해한 것입니다. 또 느부갓네살 왕이 다니엘에게 말하기를 ‘너의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신의 신이요, 주의 주재시로다.’ 이런 식으로.

이 모든 것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인간의 삶은 그가 알 수 없는 어떤 운세라든가 운명이라든가 재수에 좌우되는 게 아니고 오직 한 분,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서 좌우된다는 사실. 하나님이 우주를 다스리시고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다스리시고, 만약에 치는 분이 있다면 하나님이 치시는 것이며 복을 주는 분이 있다면 하나님이 주는 것입니다. 

만복의 근원 하나님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쓸데없는 운세, 운명, 이런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신세타령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하는 것, 그것처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책임지십니다. 할렐루야!

이건 굉장히 단순한 진리지만 사실입니다. 세상에 모든 미신은 부질없습니다. 모든 부적, 쓸데 없습니다. 저희가 11년 전에 예배당을 만들기 위해 여기 처음 찾아왔을 때, 여기는 빈 창고였는데 어둑어둑했습니다. 제가 유심히 살펴보니까 사면에 부적이 붙어있었어요. 잘 보이지가 않았어요. 뭐가 붙어있어서 저는 본능적으로 ‘저건 부적이다.’ 라고 생각하고 보니까 부적이었어요. 그래서 어떻게 했느냐, 손으로 떼어내서 찢어버렸지요. 부적을 붙여가지고 잘 되었으면 여기 계속 있지 왜 나갔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토정비결이든 손금을 읽는 것이든 점자리, 별자리를 읽는 것이든 타로점이든 오늘의 운세든 다 부질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오로지 두려워할 것이 있다면 바로 그 두려움 뿐입니다. 이런 것을 두려워하는 그 두려움이 우리가 염려할 것입니다. 

루즈벨트의 말대로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두려움 뿐이다. 왜냐하면 두려움은 믿음을 무력화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두려워하게 만들어요. 불안하게 만들어요. 믿음을 사용하지 못하게 만들어요.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게 만들어요. 믿음을 위축시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모든 미신적인 생각을 청산하고 하나님을 믿든지 미신을 믿든지, 하나님의 섭리를 믿든지 운명을 믿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데, 누가 우주만물을 지으셨고 누가 우주만물을 다스리시는 것이고, 그리고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행하시는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궁극적인 목적은 세상을 구원하고 우리를 구원하고 당신의 나라를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priority입니다. 주님의 우선순위가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다스리실 때 하나님이 제일 중요하게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것이, 이것이 우리의 신앙과 우리의 영혼과 그리고 세상의 영혼 구원을 위하여 얼마나 유익한가를 우선적으로 생각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설사 우리가 오른손 하나를 잃더라도, 오른손이 없이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몸이 성하여 지옥 가는 것보다 낫다면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재물을 잃어서, 그 재물을 잃었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재물 없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돼서 지옥 가는 것보다 낫다고 판단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에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는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고 세상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이유가 그것입니다.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인간의 역사를 해석한다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기독교적인 관점은 십자가의 관점에서 본다는 얘기요, 하나님이 왜 당신의 독생자를 보내셨는지를 기억하고 그리고 세상을 이해한다는 얘깁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세상을 이해하는 것은 예수님, 하나님의 독생자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지 않고는 이해할 수가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에게 시련을 허락하셔서 우리가 몸은 아프더라도 인생은 괴롭더라도 그것 때문에 영적으로 강건하게 되고 영적으로 깨어나게 되고 하나님을 찾게 되고 회개하게 되고 거듭나게 하고 회심하게 하고 또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게 되고 순종하게 된다면 그건 하나님도 기뻐하시는 것이요, 우리에게도 결국은 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복입니다. 우리가 복을 누리려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려야지요. 하나님이 없는 복, 그건 위험한 것입니다. 그것처럼 위험한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골고다 언덕. ‘골고다’라는 이름 자체가 재수가 없어요. 해골이라는 뜻입니다. 골고다 언덕이 해골처럼 생겼기 때문에 해골이란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곳은 죄수들을 처형하는 무서운 장소입니다. 마치 일제시대에 일본 경찰이 망우리에서 사형을 집행했던 것처럼 골고다는 사형집행 장소였습니다. 무서운 곳입니다. 으시으시한 곳입니다. 엽기적인 장소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거기에서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셨기 때문에 골고다 언덕을 이제는 최고의 성지가 되었어요. 가장 거룩한 장소가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이 선합니다. 믿음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습니다.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룩해진다고 했습니다. 원래부터 재수 없는 것은 없어요. 원래부터 운이 없는 장소나 시간이나 물건이 없어요. 예수님이 골고다에서 돌아가시니까 골고다가 성지가 되는 것이지요. 그와 같은 변화가 골고다에만 일어나는 게 아닙니다. 

거라사인의 무덤가, 거기도 무시무시한 곳입니다. 귀신들린 사람이 거기에서 밤새 울부짖었다고 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거라사인에게 가셔서 그 귀신을 내쫓으시니까 그 사람은 제정신을 찾고 옷을 입고 앉아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제 거라사인은 예수님의 능력이 나타난 장소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일은 이외에도 수없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한 그 장소가 이후에 바티칸 대성당이 들어온 카톨릭의 성지가 됐지요. 우리나라도 합정동에 절두산이라는 데가 있는데 거긴 조선시대 카톨릭 성도들을 순교시킨 곳입니다. 그래서 이름이 절두산이에요. 얼마나 엽기적인 이름입니까. 

그러나 이제는 천주교의 성지가 되었습니다. 원래부터 운이 없는 곳이란 없어요. 설사 과거에 그랬을지라도 예수님이 찾아오시면 그것이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나의 혼인잔치에 찾아오셨더니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더 좋은 포도주를 만들어 주셨던 것처럼. 예수님이 베드로의 집에 찾아오셨더니 그 장모가 열병을 앓고 누워있는데 예수님이 열병을 내쫓으시고 그 장모가 일어나 예수님을 수종들었던 것처럼. 

여러분 이 모든 것에서 우리가 얻어야 될 교훈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왜 불운을 두려워합니까? 설명할 수 없고,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제가 가끔 성도들을 만나서 대화할 때 듣는 얘기가, 인생이 풀리지가 않는다 운이 따라주지를 않는다, 운이 풀리지를 않는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여러분 앞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것처럼 답답하고 사람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 없습니다. 운이 풀리지를 않는다, 운이 따라주지를 않는다, 그런 생각 자체가 하나님이 역사하실 수 있는 기회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운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 운이 풀리지 않는다는 게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그건 그리스도인에게는 합당한 것이 아니고, 이런 저런 것을 생각할 필요 없이 한 가지만 생각하면 됩니다.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처음 찾아와서 보니까 조선시대 사람들이 미신이 너무 많았어요. 섬기는 귀신들이 너무 많았어요. 그래서 선교사들이 뭐라고 전도했냐하면, 그런 모든 귀신들 다 염려하지 말고 야소 귀신 한분만 섬겨라, 그랬어요. 예수님 한분만 섬기라는 얘기입니다. 예수님 한 분만 섬기면 그 이외의 것들은 염려할 것이 없다, 이런 식으로 그 조선시대 사람들의 정서 속에 신앙을 전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여러 가지 생각할 필요 없어요. 여러 가지 염려할 필요 없어요. 운이 좋냐, 나쁘냐, 염려할 필요 없고,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내가 예수님과 바른 관계 속에 들어갔느냐, 내가 하나님 앞에 겸손하냐,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느냐, 하나님이 내게 복을 주실 줄 믿느냐. 그것처럼 중요한 게 없어요. 거기에서 모든 변화가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나오미에게 좋은 것만 주신 것은 아니지 않느냐. 나쁜 것도 주시지 않았느냐, 나오미의 말이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마음이 아프도다’ 라고 하지 않았느냐. 맞습니다. 여호와의 손이 나오미를 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우리에게 귀한 교훈이 됩니다. 왜냐하면 첫 번째로 원인이 분명해졌기 때문입니다. 원인을 분명하게 파악했어요. 하나님이 치셨기 때문에 이렇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러므로 하나님과 승부를 봐야 될 부분이에요. 하나님에게 매달려서 이것이 해결될 부분이에요. 다른 것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얘깁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이 왜 나오미를 치셨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영원히 치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문을 닫으시면 창문을 여신다.’ 라는 말처럼. 지금 이 사건이 룻기 몇 장에 기록되어 있냐면 1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앞으로의 스토리는 나아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한번 하나님이 나오미를 치셨지만,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나오미와 그 가족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을 기록한 것이 룻기의 내용입니다. 

참고로 나오미의 불행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가 룻이라는 며느리를 통해서 온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때로는 한 사람의 아픔이 다른 사람을 통해서 치유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한나의 아픔이 사무엘을 통해서 치유되는 것처럼, 세베대의 가정이 그 아들 요한과 야고보를 통해서 구원을 받는 것처럼, 유니게의 믿음이 그 아들 디모데를 통해서 열매를 거두는 것처럼, 야곱의 가문이 요셉을 통해서 검증을 받는 것처럼, 때로는 하나님의 구원이 옆에 있는 사람이나 가족이나 자식을 통해서 올 때가 있는데 나오미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자부 룻을 통해서 옵니다. 이건 그냥 덤으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나오미의 운명이 바닥을 쳤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바닥에서는 올라갈 길만 남았습니다. 개구리 두 마리가 우유통에 빠졌어요. 그래서 그들이 우유통에서 나오려고 하는데 나올 도리가 없었어요. 그래서 두 마리 중 한 마리는 우유에 빠져죽었어요. 다른 한 마리는 단념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발로 저었어요. 그랬더니 얼마 있으니까 우유가 버터로 변했어요. 그래서 버터를 딛고 뛰어나왔다. 

여러분, 처음부터 우유가 버터가 되는게 아니에요. 젓다 보니까 우유가 버터로 변하고 그것이 바닥이 돼서 거기서 뛰어 나올 수가 있었다는 얘깁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이 끝났다라고 말씀하시기 전에는 끝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끝나지 않았어요. 하나님은 여전히 역사하고 계시고 오히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이제부터 시작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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