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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위대한 혼 (히 11: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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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혼 (히 11:23-27)


[모세가 태어났을 때에, 믿음으로 그 부모는 석 달 동안 아기를 숨겨두었습니다. 그들은 아기가 잘생긴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왕의 명령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어른이 되었을 때에, 바로 왕의 공주의 아들이라 불리기를 거절하였습니다. 오히려 그는 잠시 죄의 향락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학대받는 길을 택하였습니다. 모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모욕을 이집트의 재물보다 더 값진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는 장차 받을 상을 내다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믿음으로 그는 왕의 분노를 두려워하지 않고 이집트를 떠났습니다. 그는 보이지 않는 분을 마치 보는 듯이 바라보면서 견디어냈습니다.] 

• 고난의 역사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서럽도록 복잡한 세상에서 잘 견디셨습니까? 태풍이 몰려오고 있다고 합니다. 평화의 섬 제주도에는 일촉즉발의 전운이 감돌고, 카다피를 몰아낸 리비아의 정정政情은 불안하기만 합니다. 사람들의 욕망이 분출하면서 또 다른 살육이 계속되지 않을까 염려스럽습니다. 일부 보수적인 기독교 지도자들은 기독 정당을 만든다며 세력을 모으고 있습니다. 하나님도 난감하실 겁니다. 평화를 향한 꿈은 여전히 위태롭습니다. 어려운 시절에 마음이 각박해지지 않으면서도, 지향을 분명히 하고 살기 위해서는 내적으로 튼튼해져야 합니다. 

저는 오늘 출애굽의 영웅인 모세의 삶을 통해 우리가 가야 할 영적인 발전 여정을 톺아보려 합니다. 모세의 삶을 몇 마디 말로 요약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박이약지博而約之라는 말이 있듯이, 두텁게 알되 그것을 간결하게 요약할 줄 알아야 우리는 참으로 안다 할 수 있을 겁니다. 뭔가를 요약하기 위해서는 관점이 필요합니다. 서 말이나 되는 구슬을 하나로 꿰는 실 말입니다. 어떤 이는 온통 돈벌이라는 실로 자기 인생을 뀁니다. 또 어떤 이는 권력 의지로 자기 인생을 뀁니다. 그가 어떤 실을 가지고 자기 인생을 꿰는지를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모세의 삶을 어떻게 요약할까 고민인데,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이라는 실을 가지고 그의 일생을 꿰고 있습니다. 아주 단순합니다. 그 부모는 모세가 태어났을 때 믿음으로 석 달 동안 아이를 숨겨두었습니다. 아기가 잘 생긴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오해 사기 딱 좋은 말입니다. 잘 생기면 살고 못 생기면 죽는다면 이처럼 비인간적인 일은 없을 겁니다. 성형외과 광고에 이 대목이 인용될까 두렵습니다. 아기가 잘 생겨서 차마 포기할 수 없었다는 말은 아이에게서 어떤 범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는 말일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그 다음 대목입니다. 그 부모는 왕의 명령을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이 대목에서 사실상의 출애굽기의 영웅인 여성들이 떠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바로는 산파인 ‘십브라’와 ‘브아’를 불러 히브리 여인이 출산할 때 사내아이를 낳으면 엎어놓아 죽게 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바야흐로 종족 말살(genocide)이 시행되려는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산파들은 죽임의 기계가 되는 일을 거부했습니다. 그것은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리는 일일 수도 있었지만, 생명 탄생의 신비를 잘 알고 있는 여인들이었기에 차마 태어나는 생명을 죽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모세를 낳고도 석 달이나 숨겨 기른 요게벳의 용기도 비상한 것이었고, 갈대상자에 담긴 모세가 나일강물에 두둥실 떠내려갈 때 강둑을 따라 눈물을 훔치며 따라 걷던 미리암도 또한 담대한 용기의 사람입니다. 떠내려 온 아이가 히브리인의 아이인 것을 알면서도 아기를 건져 자기 자식으로 기른 공주도 대단한 사람입니다. 죽임의 기운이 넘치는 세상이었지만, 그곳에서도 인간의 숨결을 지닌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왕의 명령보다는 그들의 내면에 심어주신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 여인들의 이야기가 출애굽기의 서장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 약자에 대한 연민

히브리서 기자는 모세가 공주의 아들이라 불리기를 거절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학대받는 길을 택했다고 말합니다. 물론 그런 선택의 뿌리에는 믿음이 있습니다. 공주의 아들이라 불리기를 거절했다는 것은 단순히 호칭에 관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는 신분이 주는 특권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특권의식이라는 선악과를 따먹은 이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특권의식의 뿌리에는 ‘나는 남과 다르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다르기 때문에 남과 구별되는 대접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공항에서 특별대우를 해주지 않는다고 행패를 부린 정치인들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들려오고, 자기를 몰라보는 공무원의 머리채를 잡은 시의원도 있고, 직권을 남용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모세가 ‘공주의 아들이라 불리기를 거절했다’는 것은 그가 특권의식에 사로잡힌 소인배가 아님을 보여줍니다.

신분 질서라는 사다리의 꼭대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산다 해도 누가 뭐라 하겠습니까? 하지만 그에게는 병이 하나 있었습니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연민이었습니다. 강제노역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보면 왠지 남 같지 않고, 그들이 채찍에 맞는 것을 보면 제 살이 찢기는 것 같은 아픔을 느꼈습니다. 모세는 그들을 마소처럼 무심히 바라볼 수 없었습니다. 

어느 날 모세는 공사 감독관에게 매를 맞는 히브리인을 보면서 자기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 폭력을 행사합니다. 지배자의 편에 서있으면서도 피지배자의 아픔에 감응한다는 것, 그것은 혁명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모세의 그런 선택을 히브리들과 함께 학대받는 길을 택했다는 말로 요약합니다. 또 모세의 그런 선택을 가리켜 ‘그리스도를 위한 희생’이라 일컫습니다. 그가 걸은 길이 그리스도의 길과 오롯이 일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억압과 차별이 일상화된 세상을 뒤엎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홀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억눌린 사람들이 자신들의 처지를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한 세상은 달라질 수 없습니다. 모세는 자신의 진심을 히브리인들이 기쁘게 받아들일 거라고 낙관했습니다. 하지만 오판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히브리인들끼리 싸우는 것을 보고는 그들을 뜯어말립니다. 서로 부추기고 격려해도 살기 어려운 세상인데 동족끼리 싸우면 어떻게 하느냐고 그는 점잖게 충고도 했을 겁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모세는 나이브합니다. 진정을 담아 말하면 알아듣고 따라오리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아주 싸늘한 응답이었습니다. 

“누가 당신을 우리의 지도자와 재판관으로 세웠단 말이오? 당신이 이집트 사람을 죽이더니, 이제는 나도 죽일 작정이오?”(출2:14)

이 싸늘한 말, 자신을 온 몸으로 거부하는 그 말에 모세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집트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이 폭로된 것보다 더 큰 충격은 내 편인 줄 알았던 이들의 차가움이었습니다. 모세는 깊이 상심했을 겁니다. 하지만 자기들이 입는 누더기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화려한 옷을 입고, 노동으로 굳은살이 박힌 자기들의 손과 달리 매끈하기 이를 데 없는 손을 가진 사람의 호의를 사람들이 순순히 받아들여 줄 거라고 믿었다면 모세는 정말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입니다. 

• 광야 학교

모세는 무력감을 안고 광야로 들어갑니다. 새로운 세상을 열겠다는 장한 기상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끈 떨어진 연처럼 어디로 처박힐지 모르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동족은 자기의 진심을 알아주지 않고, 자신은 광야에서 잊혀진 존재가 되어 갑니다. 미디안 제사장의 사위가 되어 양떼를 몰고 오아시스 지대를 오가며 살았지만, 그의 가슴에 드리운 음습한 절망은 사막의 뜨거운 햇살로도 극복되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세상을 열고 싶었던 그가 양떼나 돌보고 있습니다.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는 광야, 그 허허로운 풍경을 앞에 두고 제 속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았을 겁니다. 이따금 눈물도 흘리고, 고함도 질렀을 겁니다. 척박한 광야에서 봄이면 피어나는 풀 한 포기, 언제나 그 자리에 묵묵히 서있는 바위, 어느 것 하나 무심히 지나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목이 말라 허덕이는 양떼를 보면 마치 제 처지인 듯싶어 가슴이 아팠을 것이고, 그 척박한 땅에 태어나는 짐승의 새끼들을 보며 생명의 신비에 깊이 감탄했을 것입니다. 폭염에 지친 짐승들에게 그늘을 찾아주기 위해 애쓰며 뭇 생명과 자신이 깊이 연루되어 있음도 자각했을 겁니다. 그 혹독한 광야에서 살아가기 위해 그는 절망에 맞서야 했습니다. 40년이 흘렀습니다. 머리는 희어졌고, 주름도 늘어났고, 기력은 줄어들었습니다. 그런데 혈기가 줄어든 대신 마음은 한결 고요해졌습니다.

스데반 집사는 모세의 광야생활 사십 년을 한 줄로 요약합니다. “모세는 도망하여,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가 되었습니다. 거기서 그는 아들 둘을 낳았습니다.”(행7:29) 너무 간략합니다. 하지만 한 줄로 압축된 이 광야생활이야말로 모세라는 위대한 혼을 낳은 산실이었음을 간과하면 안 됩니다.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 젊은 날의 의기는 잦아들고, 내가 앞장서면 사람들이 뒤따를 것이라는 생각도 한 여름 밤의 꿈처럼 스러졌을 겁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모세의 광야생활을 “그는 보이지 않는 분을 마치 보는 듯이 바라보면서 견디어냈습니다”(27b)라고 요약합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저는 생뚱맞게도 장자莊子 달생편에 나오는 ‘목계 이야기’를 떠올렸습니다.

주나라 임금인 선왕은 닭싸움을 좋아했습니다. 쓸만한 투계 한 마리를 구하게 되자 왕은 최고의 조련사인 기성자紀渻子를 불러 최고의 싸움닭으로 키워달라고 부탁합니다. 열흘이 지나 어떠냐고 묻자 기성자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교만해서, 제가 최고인 줄 알고 마주 덤비려고 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또 열흘이 지나 선왕이 이제는 어떠냐고 묻자 기성자는 “교만한 건 버렸지만 상대방의 소리나 그림자만 봐도 싸우려 듭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열흘이 또 지나고 왕이 재차 묻자 기성자는 “아직 아닙니다. 상대방을 노려보는 눈초리에 살기가 보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열흘이 또 지난 다음 기성자는 왕 앞에 나아가 말합니다. “이제는 된 것 같습니다. 상대방이 아무리 소리를 지르고 덤벼들어도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마치 나무로 깎아놓은 목계木鷄처럼 보입니다. 이제 마음의 평정을 찾았습니다. 덕이 충만해서 다른 닭들은 그 모습만 봐도 싸우지 않고 도망갈 것입니다.” 

• 탈바꿈 

광야생활 40년을 거쳐 모세는 목계처럼 고요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마침내 때가 이르자 하나님은 떨기나무 불꽃 속에서 모세를 불러 소명을 주셨습니다. 바로에게 나아가 주님의 뜻을 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주저합니다. 자기의 부족함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며 그를 보냅니다. 모세는 히브리인들의 고통을 안타까워하시는 하나님의 아픔을 깊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뿌리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이제 자기 힘과 능력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 보내신 분의 힘으로 일하는 사람입니다. 혁명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이전에는 왕을 피해 달아나는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왕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모세는 태양신의 아들이라 추앙받던 왕 앞에 나갈 때 오직 지팡이 하나만 손에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가슴 속에는 호렙산 떨기나무 불꽃으로부터 옮겨 붙은 신령한 ‘불’이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는 당당합니다. 바로의 위세에 눌리지 않습니다. 히브리인들을 데리고 광야로 나가게 해달라는 청을 번번이 거절당하면서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왕 앞에 나아가 요구하고 또 요구합니다. 출애굽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된 겁니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자랑했던 영국도 5척 단구에 물레를 돌리는 사람 간디를 이길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위대한 혼이 일으키는 역사의 기적입니다. 출애굽을 이끌면서 모세는 수없이 많은 난관을 만났습니다. 

광야의 혹독한 자연 조건 속에서 살아가는 일도 힘겨웠지만, 백성들의 원망과 불평을 듣는 일 또한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이 백성을 내가 낳기라도 했습니까? 왜 내가 책임을 져야 합니까?’ 하고 하나님께 대들었겠습니까? 하지만 모세는 어렵고 난감한 일을 만날 때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하나님은 그때마다 가물거리는 그의 영혼의 심지에 불을 밝혀주시곤 했습니다. 

모세는 엎드림으로 광야를 건넜습니다. 광야를 가볍게 건너 뛴 것이 아니라, 마치 포복을 하듯 기어 건넌 것입니다(匍越).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낀 경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화난다고 그만 둘 수도 없고, 백성들을 강제로 이끌어 갈 수도 없습니다. 비전을 보여주고, 설득하고, 기다려주어야 합니다. 광야생활 40년이 있었기에 모세는 그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민수기 기자는 모세를 이렇게 그리고 있습니다. 

“모세로 말하자면,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겸손한 사람이다.”(민12:3)

누가 온유하고 겸손합니까? 자기를 아는 사람입니다. 자기를 알기에 제 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또한 연약함을 알기에 다른 이들의 허물과 부족함을 너그럽게 품어 안는 사람입니다. 옛 사람은 부드럽고 약한 것이 딱딱하고 강한 것을 이긴다(柔弱勝剛强, 노자 36장)고 말했습니다. 봄이 되어 대지를 뚫고 나오는 새싹을 보십시오. 작고 부드럽고 약한 듯 보여도 그것이 세상을 새롭게 합니다. 모세는 지향이 분명했지만 자기 고집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곧으면서도 뻗대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 뜻을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기신 백성들을 가나안까지 인도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의기만으로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품이 넓어야 합니다. 다름을 품어 안고, 자기에게 대들고 맞서는 사람조차 귀히 여기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힘겹지만 ‘저항’할 줄 아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사실은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그런 의미에서 사람을 아낀 분입니다. 

출애굽의 주동인물인 모세는 왕의 지엄한 명령을 거역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따른 여인들의 헌신과, 광야, 그리고 하나님의 오랜 기다림이 빚은 작품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억압과 차별의 세상을 극복하시기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위대한 혼을 빚기 위해 노력하고 계십니다. 변화된 한 사람, 하나님의 혼에 지핀 한 사람이 세상을 새롭게 합니다. 잊지 마십시오. 부족하지만 우리도 주님의 꿈의 일부입니다. 우리를 새롭게 빚어주시는 주님의 사랑 안에서 믿음으로 살아가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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