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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미련한 것 (고전 1:18-25) - 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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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미련한 것 (고전 1:18-25)

2주간의 네팔 선교가 끝났습니다. 참 많은 것을 보고 느낀 선교 여행이었습니다. 선교란 무엇일까요? 선교는 절대로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안타까운 것은 선교가 여름 프로그램으로 끝나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네팔에서 은혜를 받은 한 형제가 떠나기 전에 이런 기도 제목을 나누었습니다. “이곳에서 경험한 은혜를 잊어버리게 될까 두렵습니다. 

한국에서도 변하지 않도록 기도해 주세요.” 선교가 프로그램으로 끝나게 될 것이 두렵습니다. 선교, 즉 복음 증거는 교회의 목적입니다. 교회의 지체된 개인의 삶의 목적도 선교입니다. 선교가 삶이고, 삶이 곧 선교입니다. 예수님의 삶의 목적이 복음 증거였던 것처럼, 우리의 삶의 목적도 복음 증거입니다.

1. 선교란?

선교라는 말의 어원 mission이라는 말은 “보내다”(send)라는 말에서 유래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대마다 선지자들을 보내셨고 그들을 통해서 복음을 제시하셨습니다. 선교의 클라이맥스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성육신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 후 승천하시고 하늘 보좌에 오르신 후에, 성부, 성자 하나님은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지금도 놀랍게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성령은 세상 가운데에서 교회를 부르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된 각 지체들을 세상 속으로 보내십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선교는 교회의 선교로 지속되는 것입니다.

성경의 인물 중에 가장 선교적인 삶을 산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는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유대교에 충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전통적인 사람이었으며, 하나님을 유대인 안에 가두어 두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유대인을 선택했다고 믿는 민족주의자였습니다. 그는 율법을 배우고, 지키는 아주 종교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또한 헬라의 철학을 공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유대인 혈통이 주는 자랑과 헬라인의 지혜가 주는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비록 그리스도인을 박해했지만 그의 삶에는 흠잡을 곳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신비로운 경험을 합니다. 생전에 만나본 적이 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입니다. 그 후에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 사로잡힌 사람이 됩니다. 이 사건 이후에 그는 완전히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의 삶의 목적은 율법을 더 배우고, 지키고, 더 많은 세상의 학문을 익히는 것에서 이 모든 것들을 버리는 삶이 됩니다. 그를 세워주었던 세상의 자랑은 예수를 만난 후에는 모두 초등학문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그는 세상의 학문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일에 “올인”하게 됩니다. 예수를 알기 전까지의 삶이 더욱 쌓는 삶이라고 한다면, 그 이후의 삶은 내려놓는 삶이었습니다. 

고린도에 보내는 편지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그에게 이제는 하나님의 미련한 방법이 최고의 자랑이 됩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미련한 방법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십자가입니다. 신이 인간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셔서, 보혈을 흘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는 미련한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 기쁜 소식을 전해주기 위해서 스스로 선교사가 되신 것입니다. 

바울은 선교사로 이 땅에 오신 예수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선교사로 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는 인간의 지식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미련한 지식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세상의 지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미련한 방법으로 인류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알던 “사람의 최고의 방법”이 아닌, 하나님께서 계시로 보여주신 “하나님의 미련한 방법”에 완전히 매료되었습니다. 

그는 복음이 지혜로운 사람들을 지적으로 설득할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십자가의 도를 그저 선포합니다. 그는 복음을 증거하면서 변화구를 사용하지 않고, 직구를 사용합니다. 정직하게 직선으로 복음을 제시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 1: 18) 

바울은 십자가의 도의 능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 회개가 일어났고, 성령체험이 있었고, 치유가 일어났고, 구원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율법이 아닌 미련해 보이는 십자가의 도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 불러도 능력이 나타난 것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 31) 감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가 간수에게 선포한 복음의 핵심입니다. 이 복음은 빌립보에서 제한된 말씀이 아니라 오늘 이곳에 선포되는 말씀입니다. 

2. 전도의 미련한 것

이전이나 현재나 사람들은 복음에 대해서 논쟁하기를 좋아합니다. 예전에 사람들은 모여서 논쟁을 했다면 현대인들은 인터넷에서 논쟁을 일삼습니다. 이곳에서 자신의 지식을 뽐내고 다른 사람을 비난하지만 허무한 이야기들이 참 많습니다. 복음은 세상의 지혜와 비교해서 하찮게 보일 수 있습니다. 복음은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헬라인들에게 어리석은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복음은 현대인의 과학과 학문보다 세련되지 못해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학문은 사람의 지혜를 자랑하지만 하나님을 보여주는 능력을 결여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21절에서 분명하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사람은 자기 스스로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믿고 살아갑니다. 나의 지혜와 능력으로 살아갑니다. 나의 지혜와 능력이면 세상을 살아가기에 충분할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나의 지혜와 능력으로 세상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나의 지혜와 능력으로 하나님을 알 수는 없습니다. 나의 지혜와 능력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21절 후반부에 바울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전도는 정말 미련한 것처럼 보입니다. 전도는 복잡하지 않습니다. 그저 내가 만난 예수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 만나기 전(before)과 후(after)를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도 그렇게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이 일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명령대로 성령을 기다렸고, 성령을 받은 후에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복음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전도의 미련한 것이 기적을 일으킨 것입니다. 아주 단순하게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23절) 전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능력이 된 것입니다. 그는 고전 5장 20절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능력에 있음이라” 라고 분명히 증언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입담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입니다. 

전 이번 네팔 선교 여행을 통해서 하나님의 미련한 것에 대해서 몸으로 배울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은 지혜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미련하게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혜롭게 사랑하시지 않았습니다. 고상하게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우아하게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주 미련하게 사랑하셨습니다. 자신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것입니다. 아파도, 피를 흘려도, 죽도록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분의 사랑은 Francis Chan이 표현한대로 정말  “crazy love”입니다. 

선교는 그런 사랑의 표현입니다. 선교는 사랑하기 때문에 신이 인간이 되는 사건입니다. 바울은 그런 예수님의 모습을 닮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고전 9장에서 사도바울은 그의 선교적인 모습을 분명히 선언합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고전 9: 19-23)  

네팔이라는 나라는 선교하기가 어려운 나라입니다. 워낙 산이 많아서 산마을을 넘어 다니면서 전도해야 하는 곳입니다. 차가 있어도 험준하고 위험한 산을 넘어서 가야하기 때문에 결코 쉽지 않습니다. 산사태가 나서 저희도 차를 타고 가다가 내려서 목적지까지 걸어가기도 했습니다. 이곳에서 복음을 증거하는 분들은 산 속에 사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는 걸어서 산을 넘는다고 합니다. 

저희는 선교를 했다고 말하기도 부끄러울 정도의 사역을 하고 왔지만 이곳에는 정말로 복음을 들고 산을 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사야의 표현대로 산을 길로 삼아서 전도하는 것입니다.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표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사 52: 7) 

복음은 “내려놓음”을 가르칩니다. 하나님께서는 선교를 위해서 자신을 내려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보좌를 내려놓으셨습니다. 영광의 자리를 내려놓으셨습니다. 생명을 내려놓으셨습니다. 기득권을 포기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사람의 본성은 손해 보기를 싫어합니다. 더 쌓아야지 왜 더 내려놓습니까? 그런데 복음의 정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본성과 반대로 해야 합니다. 내려놓으면 십자가의 도가 미련한 것이 아닌"가장 고상한 지식"이 됩니다. 

사도바울은 이 사실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빌립보서 3: 7-9절을 함께 읽을 것)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내려놓음의 비결은 나를 내려놓으면 내려놓을수록 십자가의 사랑은 더욱 가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의 약함을 자랑하면 자랑할수록 그분의 강함이 더욱 커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미련한 것을 선택하는 삶을 사시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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