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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혜가 내 삶의 기준입니다 (마 2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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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가 내 삶의 기준입니다 (마 20:1-16)

독일의 시인[괴테]가 쓴<파우스트>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이 작품은<파우스트의 전설>을 모티브로 해서 지은 희곡입니다. 그 전설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주인공인[파우스트]는 늘 자기의 생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세상에서 가질 수 있는 학문과 재주를 다 가지고 살면서도 언제나 만족하지 못하고 불평하며 삽니다. 그런 불만 속에 살아가는[파우스트]에게 악마[메피스토펠레스]가 찾아와서 흥정을 합니다. 세상에 사는 동안 불평과 불만이 전혀 없는 만족한 삶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대신 딱 24년 동안만 온갖 영화와 부귀를 다 누리게 해주고 정확하게 24년 후에는 자기의 생명을 악마에게 넘겨주기로 약속합니다. 

정말 24년을 맘껏 살았습니다. 그리고 약속한 날이 다가왔습니다. 악마는 어김없이 파우스트에게 찾아와 밤 1시에 생명을 가져가겠다고 합니다. 만물이 잠든 밤 1시, [파우스트]의 방에서는 몇 번의 비명 소리가 있었고 그 후 모든 것은 끝나고 맙니다. 파우스트는 24년간의 부귀영화를 위하여 하나님이 주신 영원한 생명을 팔아버린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인간의 어리석음이란 순간적인 쾌락이나 일시적인 기쁨을 위해서 영원한 것을 생각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현실에 대한 불만족, 현재에 대한 불평이 많은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을 견디지 못하게 합니다. 이겨내는 것을 어렵게 합니다.

몇 년 전에 이루어졌던 한 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 직장인들의 72%가 현재의 직장에 불만족하며 다른 직장으로 옮길 생각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70%가 현재 자기가 받고 있는 임금수준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여기에는 다른 사람에 비해서 자신의 가치가 저평가 받고 있다는 생각이 크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길 원하십니까?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이 됐으면 좋겠습니까? 지금이라도 하나님 앞에“하나님, 나를 이런 사람으로 만들어주십시오.” 라고 구할 수 있는 구체적인 내용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불만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고 그 불만이란 상대적인 것입니까? 절대적인 것입니까? 무슨 말이냐 하면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나를 판단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 앞에 서있는 나를 보고 나의 가치를 판단하는 것입니까? 어느 것입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자신에 대한 문제, 그리고 다른 사람에 대한 문제를 비교하는 중에 아주 심각한 그리고 중요한 결론적인 말씀이 있습니다. 

자신에 대한 문제를 보는 것에 있어서 먼저 주님과 자신과의 문제를 보면 언제나 공평합니다. 불만스러운 부분이 없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나를 보게 되면 늘 불공평하게 보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만족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어느 잣대로 세상을 보고 어떤 시각에서 나 자신을 평가하느냐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정리하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 자신과 하나님께 대한 그것이 확실해지고 극대화 되게 될 때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불만은 점점 작아집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과 나와의 관계를 비교하기 시작하면 어느 사이에 나와 주인과의 관계, 즉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마저 잃어버리고 원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중에 깨닫게 되는 하나의 중요한 진리는 바로 기회가 모두에게 평등하게 주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미 일할 수 있는 시간을 잃어버린 자에게 까지도 기회는 공정하게 주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인의 큰 긍휼입니다. 

자, 오늘 이야기의 배경은 포도원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추석이 일찍 오는 올해 과일 값이 굉장히 비싸다고 합니다. 여름 내내 비가 와서 과일이 잘 맺지도 않았거니와 가장 중요한 당도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과일의 생명은 당도에 있습니다. 얼마나 단맛이 들었느냐로 상중하급을 매기지 않습니까? 그런데 당도에 가장 영향을 미치는 것이 바로 햇볕입니다. 특별히 포도는 더 그렇습니다. 

마지막 따기 직전까지 일조량이 얼마나 되느냐가 그 단맛을 내는데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때는 햇볕을 며칠 더 받느냐가 아니라 몇 시간 더 받느냐에 따라서 당도가 좌우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당시 유대 사람들은 될 수만 있으면 햇볕을 많이 받아서 아주 당도가 높아지도록 기다렸다가 수확을 하는데 여기에 또 문제가 있습니다. 

포도를 수확할 즈음에 곧 바로 뒤에 우기가 따라옵니다. 그래서 그 시기를 조금만 놓치면 포도농사는 망치는 겁니다. 일찍 포도를 따자니 당도가 낮아서 안 되겠고 좀 기다렸다가 따자니 비가 오면 다 망치고.... 거기에 고민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적당한 날을 잡아서 포도를 수확한다고 결정할 때는 손이 많이 필요합니다. 최대한 햇볕을 받고 비가오기 직전까지 기다렸다가 얼른 수확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도 보면 주인이 다급하게 거리에 나가서 일꾼을 구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주인이 이른 아침에 나가서 시간 시간마다 만나는 일꾼들을 포도원으로 들여보내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른 아침, 삼시, 육시, 구시, 십일 시.... 아시는 대로 우리 시간으로 바꾸면 새벽, 아침 아홉시, 열두시, 오후 세시, 다섯 시입니다. 그런데 비상식적인 것은 마지막 포도원에 들어간 사람은 1시간 밖에는 일하지 않았습니다. 그걸 알면서도 주인은 그 사람에게도 일하게 합니다. 

말하자면“너도 일하라.”기회는 공평하게 주어집니다. 여기에는 남아 있는 시간이 중요한 게 아니라 현재라고 하는 시간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남아 있는 시간이 많다 할지라도 일하지 않는 자에게는 그 시간이 소용없는 것이요,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일지라도 일하고 있는 자에게는 현재라는 시간이 가장 가치 있는 시간입니다. 

오늘 본문의“일하라!”고 주어진 현재라고 하는 입장에서 기회는 공평한 것입니다. 나이 많은 사람이나 젊은 사람이나, 건강한 사람이나 병든 사람이나, 지식이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모두에게 현재라고 하는 입장에서 똑같은 기회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가 뭡니까? 일이 끝난 다음 품값을 주는데서 이의를 제기합니다. 맨 나중에 와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부터 품값을 줍니다. 그런데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것입니다. 세 시간 일한 사람에게도 한 데나리온을 줍니다. 여섯 시간 일한 사람도 똑 같이 한 데나리온을 받습니다.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새벽부터 나와서 일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 생각에는‘그래도 새벽에 나온 우리들은 더 주겠지!’하고 기대했는데 역시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불평을 합니다. 이게 불공평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에도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드십니까? 

자, 여기서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합니다. 사실 주인과 나와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불평할 것이 없습니다. 2절을 보면“그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그랬습니다. 애당초 약속이 한 데나리온입니다. 다른 사람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오직 나와 주인과의 약속이 한 데나리온입니다. 그러면 한 데나리온만 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주인이 나와의 약속을 파기한 것도 아니요, 나에게만 특별히 불이익을 준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주인과의 관계에서 보면 거저 고마운 것입니다. 놀지 않고 일할 수 있도록 일거리를 주었으니까 감사할 따름이지요. 

그런데 그리 생각하지를 못하고 단지 다른 사람이 나와 똑같은 대우를 받는 것이 못마땅하다 이겁니다. 주인과의 관계에 만족하면 될 것을 괜히 다른 사람과 비교하니까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심리학에서 말하는<교류분석>에 의하면 인간의 모습을 네 가지로 분류합니다. 

첫째는 자신에 대해서는 긍정적이고, 남에게 대해서는 부정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언제나 지나친 자신감에 남을 무시하는 교만이 있는 사람입니다. 

또 하나는 자신에 대해서는 부정적이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항상 남을 부러워하며 남의 처지만 좋아 보입니다. 한 마디로 남의 큰 떡만 보는 사람입니다. 

그 다음 세 번째는 자신에 대해서도 부정적이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염세주의자라고 합니다. 항상 불평과 원망 속에 세상을 온통 비관 적으로 봅니다. 그런가하면 자기에 대해서도 긍정적이고, 남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나 자신도 행복하고 다른 사람의 행복도 기쁘게 봐줍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14절을 보면 결정적인 말씀이 나옵니다.“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여기에서“네 것”이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이 말속에는 이런 뜻이 있습니다.“네가 받은 것이 은혜라고 왜 생각을 못하느냐? 내가 너를 부르지 않았다면 너는 하루 종일 장터에서 놀고 있었을 것 아니냐? 내가 너를 불렀기에 하루 일했고 또 품값도 받는 것 아니냐? 네 것이 많던 적던 내가 본래 너와 약속한 것 아니냐? 이것은 정당하게 받은 것이다. 합당하게 받은 것이요 또 은혜롭게 받은 것이다.”그 말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을 보세요.“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결정하고 베푸는 것은 전적으로 주인의 소관이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우리가 왈가왈부하지 못할 뜻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오늘 그것을“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나의 것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의 것을 볼 것이 아니라 나의 것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내 삶의 기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은혜로 오늘 내가 있습니다.“내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하라!”얼마나 고마운 말씀입니까? 일이 주어진 현재라고 하는 시점에서 기회는 공평합니다. 문제는 오늘 내가 그 은혜를 기회로 깨닫고 얼마나 감사하면서, 어떻게 만족하면서 최선을 다하고 사느냐 입니다.  주신 은혜에 감사하고 내가 사는 이 현시점, 이 현실 이대로가 내게 주신 가장 큰 은혜라는 것을 잠시도 잊지 않고 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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