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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를 깊이 앎으로 (벧후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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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깊이 앎으로 (벧후 1:1-2)


지금 우리네 사회는 한국인의 강점이라 할 수 있는 희생과 헌신적인 정신은 사라지고 서로 목소리를 높이는 집단 이기주의와 일확천금 사상이 팽배해 있습니다. 한때 ‘잘살아보자’고 새마을 노래를 부르며 땀 흘려 고생하면서도 자식들 공부시키는 데는 아낌없이 헌신하면서 꿈을 안고 살아왔던 우리 국민이었습니다. 그 시절에는 비록 넉넉하진 못했어도 서로 나누는 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끼니를 걱정하던 것은 옛 일이 되었고 요즘은 웰빙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과연 잘사는 것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 묻고 싶어집니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고 배가 부른 것이 잘사는 것이라면 한국은 이미 잘사는 나라가 됐습니다. 생활수준만 가지고 생각한다면 이미 우리는 세계 1위의 국가입니다.

그런데 한국 사회는 왜 꿈을 잃어버린 채 방황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아름다운 정체성을 잃어버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실제로 가정의 신성한 서약이 깨지고 있고 사회의 기본 질서와 도덕률이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사회의 윤리, 도덕적 모범이 되고 사회를 진리의 빛으로 인도하는 등대 역할을 감당해야 할 교회가 그 정체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자책감마저 듭니다.

인류 역사를 보면 교회가 올바른 정체성을 갖고 사회의 부패를 방지하는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했을 때는 가정과 사회가 건강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세상과 짝할 때는 반드시 사회가 부패했습니다. 오늘날 정치인이나 기성세대를 탓하기 전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못하고 마음과 뜻대로 살았음을 마음 깊이 회개한다면 이 나라와 사회에 소망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나만 잘살면 된다’는 이기심을 버리고 도덕적 주도권을 회복하여 정직과 성실을 앞장서서 실천한다면 더불어 잘사는 웰빙의 사회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야 합니다.
첫 번째 편지에서 자신을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표현했던 베드로는 두 번째 편지에서는 한 가지 호칭을 덧붙입니다. 그것은 곧 종이라는 말입니다.

어쩌면 철저히 실패자로 끝날 수밖에 없었던 베드로를 부활하신 주님이 다시 찾아주신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신가를 우리들에게 잘 나타내 보여줍니다. 분명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본 베드로입니다. 사실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여인들이 안식 후 첫날 이른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다가 헐레벌떡 뛰어들어와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있다고 전해주었을 때 자기도 모르게 숨어 있던 장소에서 벌떡 일어나 무덤을 향해 달려갔던 베드로였습니다. 

그리고 그 무덤에서 천사를 만나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증언을 듣게 됩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베드로의 마음은 더 무거워집니다. 왜요? 그토록 큰 소리쳤던 자기였건만 보잘 것 없는 계집종 앞에서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씩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고 거기에 모자라 예수를 저주하고 맹세하며 모른다고 부인했던 자신을 생각하면 참 어이없기도 하고 더 이상 살아갈 희망조차 잃어버렸던 자신입니다. 다른 제자들도 다 마찬가지지만 베드로의 충격은 다른 제자들에 비할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합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습니다. 정말 주님이 부활하셨다면 그 부활하신 주님의 얼굴을 어떻게 볼 수가 있을지 참으로 난감합니다. 

그러던 차에 주님이 자기들이 있는 곳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어느 순간인지 모르게 자신들 앞에 서 계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지만 베드로의 마음은 결코 편치를 않습니다. 차라리 욕이라도 실컷 들었다면 그렇게 답답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주님이 다시 살아나신 것은 정말 신이 나는 일입니다. 하지만 같이 신나할 수만도 없는 그 입장을 뭐라고 해야 할까요? 마치 먹은 것이 얹힌 것처럼 가슴이 답답하기만 하고 그렇다고 그 무엇을 가지고 속이 뻥 뚫리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더 죽을 지경입니다. 

그래서 고기나 잡겠다고 갈릴리 바다로 나섰는데 답답하기는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지만 어찌 마음이 편할 수가 있겠느냔 말입니다. 지은 죄가 있거든요. 죽을지언정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겠노라고 큰 소리들은 다 쳤는데 결과는 주님을 버리고 다 도망쳤습니다. 거기다가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눈치만 보고 있는데 주님은 거기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 말씀도 없으십니다. 그러니 속이 터질 지경입니다. 그래서 죄를 짓고는 못 산다는 것입니다. 

어찌 되었든 베드로를 다른 제자들 여섯 명이 따라나서서 밤새 고기를 잡습니다. 하지만 그 답답한 마음을 아는지 그날 밤 단 한 마리의 고기도 걸려들지를 않습니다. 그렇게 날이 새고 있습니다. 동편이 서서히 밝아옵니다. 이제는 그물도 다 접어야 할 시간입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말합니다. “고기들 좀 잡았소?” “아뇨 단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아 그럼 마지막으로 배 오른 편에 그물을 한 번 던져 보시구랴. 그러면 잡을 수 있을 겁니다.” 그래 얼떨결에 던진 그물입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물을 끌어올리려는데 꿈쩍을 안 합니다. 그래서 이게 어쩐 일인가 하여 보았더니, 세상에 밤새도록 한 마리도 잡지 못했던 물고기가 그물 안에 가득한 것이 아닙니까? 순간 같이 있던 요한이 외칩니다. “주님이시다.” 그래 정신없이 물로 뛰어들었던 베드로입니다. 막상 주님 앞에 오기는 했는데 감히 고개를 들어 주님의 얼굴을 볼 수조차 없습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은 자 밥 먹자 하시고는 먹을 것을 주십니다. 숯불에 구운 생선과 빵을 주십니다. 

이윽고 식사가 끝나고 난 다음 잠시 침묵이 흐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 주님”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그 순간 베드로의 정신이 번쩍 듭니다. 왜요? 다른 질문을 하셨다면 몰라도 다른 제자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하는 이 질문에 관해서라면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그래서 대답합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건 주님이 누구보다도 더 잘 아실 것입니다.” “알았다 그럼 내 어린 양을 치도록 하려무나.” 이렇게 해서 세 번 반복해서 사랑하느냐고 물으시고는 그렇다고 하는 베드로의 대답을 들으시면서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내 양을 치라고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신 주님이십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마지막 감람산에서 승천하시면서 또 하나의 약속을 주님이 주셨습니다. 물론 베드로에게 뿐만 아니라 그 자리를 지킨 모든 성도들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과연 약속을 따라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말씀을 함께 나누며 전혀 기도에 힘쓰던 120명의 성도들 위에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령 안에서 새롭게 변화된 베드로는 그날 이후로 담대하게 예루살렘 성전에서 복음을 전하여 하루에도 3000명씩 5000명씩 회개하며 돌아오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났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을 떠난 후에는 로마에 정착하여 이제는 로마에 있는 성도들은 물론 주님의 권능 아래 각지에 흩어져 있는 성도들을 격려하며 권면하는 일을 계속해오고 있습니다. 지금은 로마의 카타콤에 있습니다. 로마에 있는 성도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네로를 통한 핍박의 사슬은 점점 조여오고 있지만 그는 오히려 로마의 성도들 뿐 아니라 박해를 피해 사방으로 흩어진 성도들을 생각하여 그들을 격려하고자 하여 편지를 씁니다. 그것이 베드로 전서요 이제 다시금 두 번째 편지를 그들에게 보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는 자기가 주님의 보내심을 받은 사도라고 첫 번째 편지에서 자신을 소개했지만 이번 두 번째 편지에서는 종이라고 하는 한 마디를 더 덧붙입니다. 자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전에는 누구보다도 자신 만만했던 베드로입니다. 12제자 가운데서도 수제자이기도 했지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주님이 물으실 때 당당하게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고백했던 자신입니다. 그런 자기에게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그랬기에 그가 그토록 큰 소리도 쳤었던 것입니다. 자기는 어떤 어려움이 와도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습니다. 한데 자기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과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그는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순절에 보내주신 성령으로 충만함을 얻고 나서야 비로소 내 힘과 의지로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타내셨던 많은 역사들도 자기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임을 베드로 자신이 이제는 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자신의 생각을 내세우려 하지를 않습니다. 오직 모든 일에 주님의 뜻을 따를 뿐입니다. 그러기에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오히려 당당하게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나의 뜻대로 살지를 않는다. 나는 어디까지나 나의 주인이 되시는 예수님, 그리스도가 되시는 그 예수님의 뜻대로만 산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보혈로 모든 성도들의 죄를 다 씻어주셨습니다. 주님의 용서하심이 있기에 베드로가 다시 주님의 양을 치는 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용서하심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다시 세우셨기에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이후는 나는 자유하지만 그러나 내가 나의 뜻대로 살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십자가의 피 값으로 나를 사신 주님의 종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다시금 깨닫기는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를 통해서 나타나는 모든 것은 내 역사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던 바울의 고백처럼 베드로 역시 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종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인의 명령을 따라 죽음의 길로 서슴지 않고 간다는 것입니다. 어떤 고난이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다고 하더라도 설사 그것이 죽음이라고 해도 종된 자로서 마땅히 그 길을 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향하여는 “나는 주님 앞에 종일 뿐입니다.” 라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백성들을 향하여는 예수님이 보내신 사자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뜻을 따라 성도들을 돌보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이끄심을 따라 이 사역자로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자가 할 일은 오직 자기를 보낸 이의 뜻을 전달하는 것이요 자기를 보내신 이의 뜻을 따라 오직 자기를 보낸 이의 권위와 영광을 드러낼 뿐입니다. 그러니까 백성들의 뜻을 따르는 것이 아니요 백성들만 유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여는 종이요 백성들을 향하여는 사도 즉 주님의 보내심을 받는 대리자요 중보자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지금 주님의 뜻을 따라 백성들이 온전히 세워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이 폭퐁전야와 같은 핍박 세상에서 성도들이 담대하게 주님을 믿는 믿음을 굳게 붙잡고 서서 살아가도록 권면하고자 해서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주님을 향하여는 종입니다. 하지만 백성들을 향하여는 주님의 보냄을 받는 사자입니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의 정체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베드로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사도라고 하는 것처럼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 존재들입니까?
1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폭격의 충격으로 수많은 프랑스 군인이 기억을 잃었습니다. 그들은 여러 자료를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 알려고 했지만 오히려 혼란만 더했습니다. 그때 한 사람이 “이 군인들이 가족들과 만날 수 있도록 파리에서 ‘만남의 광장’을 열자”고 제안했습니다.

이 제안은 즉시 받아들여져서 프랑스 전역에 공고되었습니다. 집회가 열리던 날 파리 광장에는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었습니다. 답답한 군인들은 한 사람씩 높은 단 위에 올라가서 “제발 내가 누구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는 분 안 계십니까?”라고 애타게 부르짖었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이 군인들은 얼마나 애가 타고 답답했겠습니까? 거기에 비하면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그분의 나라를 상속받을 그분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사실은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역시 놀라운 사실입니다.

보십시오. 베드로가 뭐라고 말씀합니까?
우리가 기억할 것은 우리들이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보배로운 믿음을 가진 자라고 하면서 동시에 우리들을 가리켜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이 보배로운 믿음인 까닭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진 보배로운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가지게 된 믿음입니다. 

베드로전서 2:4절에서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산 돌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얼마나 보배로운 분인지를 잘 모릅니다. 그래서 그들은 산 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버렸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값진 존재입니다. 
우리는 다 연약한 질그릇과 같은 존재입니다. 깨지기 쉬고 상처 나기 쉬운 질그릇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몰아닥친 작은 풍파에도 상처가 나고 흠이 생깁니다. 누군가가 말 한마디 한 것 때문에 가슴 저리도록 고통을 당하기도 합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세상을 다 잃은 것처럼 절망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그렇게도 연약한 질그릇과 같은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보화가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화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하신 비유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자기의 전 재산을 다 팔고서라도 반드시 사고 싶은 보화가 있다면 그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보화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값진 보화를 깨지기 쉬운 질그릇 같은 우리 안에 주셨습니다. 고린도후서 4:7절에서 말씀합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보화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귀한 사람들이고, 보화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기에 우리의 믿음이 보배로운 믿음인 것입니다. 믿음을 가진 우리가 귀하기 때문에 보배로운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바라보고 믿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보화이고 우리가 그분을 우리 안에 가졌기 때문에 우리 역시 보배로운 존재가 된 것입니다. 세상에는 헛된 것을 믿음의 대상으로 삼고 헛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이 아닌 것을 신인 것처럼 섬기며 그 우상에게 얽매여 살아가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재물이라는 현대의 신에 노예가 되어 인생을 비참하게 살아가기도 합니다. 쾌락의 신에 노예가 된 사람도 있고, 권력의 노예가 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헛된 것에 인생을 걸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생명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의 주로 받아, 그분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받은 자들이 되었으니 이 얼마나 보배로운 믿음입니까? 

두 번째로 우리의 믿음이 보배로운 믿음인 까닭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구속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믿음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보배로운 피를 흘리사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기 때문에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보배로운 피를 믿는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보배로운 믿음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를 힘입어 지옥 형벌을 이겨낸 믿음입니다. 세상 그 어떤 악한 존재라 하더라도 우리를 넘어뜨릴 수가 없습니다.

세 번째로 우리가 가진 믿음이 보배로운 까닭은 그 믿음 안에는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이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약속한 모든 복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 믿음이라는 통로를 통해서입니다. 아무리 큰 약속이 주어졌다 하더라도 믿음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그 모든 약속이 내게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약속을 주셨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얻은즉 나으리라."누구에게 이런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납니까? 믿는 자들에게 입니다. 보배로운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세상을 이기며 살아가도록 하나님께서 모든 악한 것에서 구해주시고, 능력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이런 약속을 나에게 주신 말씀으로 받습니다. 보배로운 믿음으로 주님의 주신 약속을 다 받아 누리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과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우리에게 더욱 많아지기를 베드로 사도는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가진 보배로운 믿음은 보배로운 존재로 부르심을 받은 형제들과 함께 하는 믿음이기에 더욱 보배로운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받은 자들”이라고 말씀합니다. 나만 보배로운 믿음을 가진 것이 아니라 함께 부르심을 받은 모든 사람이 다 보배로운 믿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동일한 보배로운 믿음을 가진 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들 중 어느 누구도 우리 가운데서 멸시를 받을 수도 없고 외톨이가 되어서도 안됩니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뭔가를 조금 더 가졌다고 어깨를 으쓱일 필요도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같은 믿음을 가졌다는 것 때문에 서로의 짐을 져주고, 서로를 그리스도 사랑으로 감싸 안아 주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동일한 보배로운 믿음 안에서 한 공동체로 부르심을 받아, 서로를 보배로운 자로 존중하며 살아가야 할 책임을 가졌습니다. 

이 믿음이 우리의 힘이 됩니다. 이 믿음이 세상을 이기게 만듭니다. 이 믿음이 기적을 일으킵니다. 이 믿음을 끝까지 붙잡고 보배롭고 값진 인생을 살아가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 믿음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이 믿음을 의지하여 살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의 삶은 초라한 것이 되고 맙니다. 가장 값진 믿음을 가졌음에도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사람처럼 초라한 인생이 되고 맙니다. 

오래 전 영국의 한 악기점에 배고픈 거지가 찾아왔습니다. 그의 손에는 낡은 바이올린이 들려 있었습니다. 거지는 악기점 주인에게 "이 바이올린을 5파운드에 사 달라"고 애원을 했습니다. 너무 배가 고프지만 먹을 것이 없어 바이올린을 팔려고 했던 것입니다. 거지를 불쌍히 여긴 주인은 좋은 일 하는 셈치고 5파운드를 주고 바이올린을 샀습니다. 5파운드를 손에 받아든 거지는 빵을 살 수 있다는 희망에 얼굴에 만연한 미소를 머금고 악기점을 떠나갔습니다. 

악기점 주인은 별 생각 없이 먼지와 때에 절은 낡은 바이올린에 활을 당겨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바이올린에서 이루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아름답고 깊은 소리가 나왔습니다. 깜짝 놀란 주인은 자세히 바이올린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그것은 이탈리아 출생의 세계적인 바이올린 제작자인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가 1704년에 만든 몇 개 안된 바이올린 가운데 하나였던 것입니다. 

스트라디바리가 만든 바이올린은 지금도 바이올린 연주가들이 가장 갖고 싶어 하는 것이고, 지난 1998년 영국 런던의 한 경매장에서 그가 만든 바이올린이 약 20억 원에 팔렸다고 합니다. 그렇게 귀한 것인데도 거지는 그 가치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겨우 빵 몇 조각 살 수 있는 작은 돈과 그 바이올린을 바꾸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보배로운 믿음은 스트라디바리의 바이올린보다 훨씬 더 값지고 귀한 것입니다. 그 귀한 믿음을 가졌음에도 믿음에 거지처럼 사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 이 보배로운 믿음을 가진 자답게 우리의 삶을 세상에서 가장 값진 삶으로 살아가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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