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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첫째가 되고자 하면 (막 9:3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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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가 되고자 하면 (막 9:31-37)


전북 김제에 위치한 금산교회를 최초에 세웠던 조덕삼 장로의 이야기는 큰 교훈을 후세에게 줍니다. 이자익은 어릴 적에 부모를 여의고 고향을 떠나 우여곡절 끝에 김제에 도착하여 최고 부자였던 조덕삼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머슴에게도 쌀밥 주는 것을 보고 감동한 그는 머슴으로 일하기로 했습니다. 이자익은 자신보다 15살이 많은 주인 조덕삼의 마부가 되어 성심성의껏 일했습니다. 그러던 중 테이트(L.B.Tate) 선교사를 만나 복음을 듣고 주인과 함께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그 후 교회에서 조덕삼과 이자익은 함께 집사로 임명받아 섬기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부흥하여 장로를 선출하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머슴 이자익이 선출되었습니다. 사실 조덕삼은 지역의 부자일뿐 아니라 금산교회의 설립자요 인격적으로나 신앙적으로 흠이 없고 존경받는 자였으며, 더구나 이자익을 키워준 사람이나 다름없고 나이도 더 많았습니다. 당시 교인들 가운데 여인이나 천민들이 많았기에 머슴 이자익에게 더 표를 주었던 것입니다. 

어쨌든 장로는 교회를 책임질 뿐 아니라 설교도 하는 자였기에, 집사 조덕삼은 장로 이자익에게 함부로 하대할 수가 없고 그의 설교를 들어야 하며 머슴을 도와 교회 일을 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투표결과가 발표되자 교인들은 뒷감당을 어떻게 해야 할까 모두 걱정하며 술렁거렸습니다. 그 때 조덕삼 집사가 일어나 “금산교회 교인들은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저희 집에 일하고 있는 이자익 영수는 저보다 신앙의 열의가 대단합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조덕삼 집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고 오히려 이자익 장로를 섬기겠다고 하였습니다. 낮은 자리에서 자신의 머슴이 먼저 장로가 되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첫째가 되었습니다. 후에 장로가 된 조덕삼은 이자익 장로를 평양으로 보내 목사가 되게 하였고, 1915년 금산교회로 청빙하여 담임목사로 깍듯이 섬겼습니다. 후손들이 계속하여 장로가 되어 그 교회에 충성하고 있습니다. 그이 손자가 바로 국회의원을 지냈던 조세형장로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첫째가 되기를 좋아합니다. 누리는 특권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을 밀쳐내서라도 첫째 자리를 차지하려고 애씁니다. 본문에도 제자들이 첫째가 되려고 서로 다투는 모습이 나옵니다. 가버나움에 도착하였을 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대답하지 못하였습니다. ‘누가 크냐’ 며 서로 논쟁하였기에 부끄러웠던 것입니다. 서열이 정해져 있지 않은 상태에서 누가 첫째가 될 것인가 서열다툼을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꿈꾸는 나라는 첫째가 되어 군림하며 지배하는 나라가 아닙니다. 죽음에서 해방시키는 나라, 사탄의 노예로 있던 인간을 자유케 하는 나라, 사랑으로 지배하여 기쁨이 있는 나라입니다. 그리고 가난한 자나 부한 자나 병든 자나 건강한 자나 함께 지내는 나라입니다. 이러한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해 우리가 부름 받았음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누가 크냐’ 며 서열 다툼이나 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첫째가 될 수 있습니까? 첫째가 되고자 하면,
 
첫째로 고난을 택하여야

초대교부 폴리캅(Polycarp)은 타오르는 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자신을 삼키려고 활활 타오르는 불이었습니다. 로마의 권위자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어떠냐? 이제라도 네가 섬기는 예수를 모른다고 한 번만 부인하면 살아 나갈 수 있다.” 천천히 로마인을 바라보던 폴리캅이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강인하게 말했습니다. “아니오. 나를 저 불 속에 던지시오. 어떻게 내가 그 분을 부인할 수 있겠소. 오늘까지 그 분은 나를 한 번도 외면한 적이 없는데!” 눈을 돌려 다시 불길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는 것을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누구나 주님을 위한 고난을 피하고 싶어 합니다. 고난을 외면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 길은 흥하는 길이 아닙니다. 흥하는 길은 주님을 위한 고난을 택해야 합니다. 

본문 31절입니다.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 예수님은 고난과 십자가가 기다리는 예루살렘을 택하여 발을 내딛었습니다. 고난의 길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은 고난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의 길을 가는 것이라며 실천하였습니다. 

우리는 조그마한 억울함을 당해도 분노를 참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조금만 자존심이 상해도 참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고난이 다가오면 유다처럼 쉽게 배신해 버립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본모습이 드러나는 법입니다. 고난은 성숙의 시작입니다. 골이 깊으면 메아리는 더 크게 울립니다. 첫째가 되고자하면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난을 피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 나라를 이룬 사람들은 고난을 무서워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고난을 택하여 이긴 사람을 하나님께서 첫째가 되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둘째로 섬김을 택하여야 

미국 미시시피강 지역에 살았던 인디언 부족의 이야기입니다. 강가에 살던 부족들은 물살이 빠르고 강해 휩쓸리면 떠내려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느 날 백인들의 습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백인들이 압도적으로 숫자가 많아 인디언 부족은 당해낼 수가 없었습니다. 피할 길이라고는 급류가 흐르는 강을 건너는 것 말고 다른 방도가 없었습니다. 인디언들은 서로 팔을 걸고 뭉쳐 어린 아이와 부녀자와 노약자들을 힘이 센 사람의 어깨에 태웠습니다. 

그리고 강을 건너기 시작했는데 급류를 건너면서 그들 자신들도 깜짝 놀랐습니다. 물살이 강한 강을 건너는데 어깨에 올라탄 사람의 무게로 인해 떠내려가지 않고 강한 물살을 버티게 된 것입니다. 강을 안전하게 건널 수 있었습니다. 남을 섬기는 것이 손해 보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유익하게 됨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섬기는 사람은 섬김으로 인해 더 높은 자리에 이르게 됩니다. 높은 자리에 서려고 해서가 아니라 낮은 자리에서 섬김으로 낮은 자리가 높은 자리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 35절입니다.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첫째가 되는 길은 지배하는 야망을 섬기는 야망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섬김을 받으려고 목숨 걸고 투쟁하는 길은 망하는 길입니다. 그러나 섬기는 길은 흥합니다. 최고의 리더는 섬기는 리더입니다. 교회는 섬김의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는 섬김의 정신을 점점 잃어 가고 있습니다. 

F.B. 마이어(Frederick Brotherton Meyer)는 섬김에 대해 의미 있는 말을 하였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 여러 층의 높은 선반 위에 있는 줄 알았습니다. 키를 높여 잡으면 잡을수록 가질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후에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아래로 내려가면서 여러 층의 선반 위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선물들을 받아 가지려면, 스스로를 높일 것이 아니라, 더욱 더 굽히고 내려가야 합니다.” 

우리는 섬김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서열문화 때문입니다. 누가 어느 자리에 앉느냐에 항상 신경을 써야 합니다. 자신보다 낮으면 그 때부터 아래로 내려 봅니다. 교회에서도 직분을 서열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직분은 섬기라고 주신 것입니다.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직분자들이 섬김을 가지고 일하면 분열되지 않고 세상으로부터 비난받지 않을 것입니다. 섬김의 길을 택하면 교회는 쇠하지 않고 흥하게 될 것입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셋째로 영접을 택하여야 

중국 계림에 가면 정안덕 박사가 운영하는 애심원이 있습니다. 정 박사는 캐나다로 가서 신학공부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중국선교를 할 생각으로 캐나다 시민권을 받은 뒤 북경대학에 유학을 가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북경대학에서 교수로 활동을 하며 중국 기독교 역사를 연구하며 업적을 쌓았습니다. 그는 장래가 촉망되는 교수였습니다. 그런데 북경에 버려진 중국 장애 고아들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아이들을 입양하여 양육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중국의 복지수준이 열악하여 장애아들을 제대로 양육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최적의 환경을 찾아주고자 발 벗고 나섰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계림 지역에 땅을 마련하였으며 중국당국의 도움으로 집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이사하면서 북경대학의 교수직을 사임하고 온전히 장애 아이들의 양육에 남은 생애를 다 바치며 헌신하겠다고 결단하였습니다. 빛도 없이 이름도 없어 보이는 일이지만 모든 것을 쏟아 붓는 모습에서 어린아이를 예수님처럼 영접하는 의미가 어떤 것인지 찾게 됩니다. 작은 자들을 존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치 예수님을 대하듯 소외되고 무시당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영접해야 합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면 지극히 작은 자를 예수처럼 대하는 영접하는 길을 택해야 합니다. 

본문 37절입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어린 아이는 작은 자를 대표하는 존재입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어린아이는 사람 수에도 들지 못했습니다. 사람 이하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무시당하기가 일쑤이고 제대로 대접 받지 못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저들을 예수의 이름으로 따뜻하게 영접하라는 것입니다. 더더욱 저들을 예수 대하듯 대접하라고 하십니다. 작은 자들을 존중하라는 뜻입니다. 크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작은 자들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자기들이 커가는 과정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존중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지극히 작은 자를 대접하는 길이 큰 자요 첫째가 되는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네비게이토(Navigators) 선교회 지도자 론 새니(Lorne Sanny)가 한 젊은이에게 제자훈련을 시켰습니다. 종에 대한 훈련을 받은 젊은이가 말합니다. “선생님, 제가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때 론 세니는 젊은이에게 대답합니다. “지금은 모른다네, 다른 사람이 자네를 종으로 취급할 때 자네가 어떻게 반응하느냐 보면 알 수가 있다네. ‘네가 나를 무시해’ 하며 화를 낸다면 아직 종이 되지 못한 거야. 

그러나 남들이 무시하고 종으로 취급할 때에 자신을 종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 비로소 자네는 진정한 종이 된 것이라네.” 종이 되려면 우월의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월한 자리를 차지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큰 자로 살기를 원한다면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합니다. 이기심을 극복하고 알아주지 않는 다 해도 섬김의 길을 가야만 합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십니까? 그렇다면 고난을 피하기보다 고난의 길을 택하시기 바랍니다. 섬김을 받기보다 섬기는 길을 택하시기 바랍니다. 작은 자를 무시하기보다 귀히 여기며 영접하는 길을 택하시기 바랍니다. 그것만이 첫째가 되는 비결로 깨닫고 이를 실천하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광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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