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형제에게 너그러운 마음으로 (롬 14:1-12)

첨부 1


형제에게 너그러운 마음으로 (롬 14:1-12)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회의 신자들에게 아주 중요한 권면과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그 권면과 가르침은 한 믿음의 공동체가 사랑이 넘치고 평화로우며 행복한 공동체가 되기 위하여 꼭 필요한 것입니다. 

로마 교회 안에 들어온 사람들은 각자의 종교적, 사상적 배경이 다양했을 것입니다. 유대교를 믿던 사람들도 있었고 이교를 따르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갖고 있던 각 종교나 철학사에는은 다양한 형태의 고유한 종교적 의식이나 생활관습이 함께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들은 각각 나름대로의 금욕주의적 관행을 지키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식생활에 관련된 각자의 규율이 있었을 것입니다. 음식에 곤한 한 무엇이든지 가리지 않고 다 먹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동물적 생명을 지닌 음식물은 일체 삼가고 채식만 하는 습관을 가진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유대교에서 온 사람들 가운데는 특히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 먹기를 아주 꺼려하는 경향이 컸을 것입니다. 로마 세계에서는 이교 신전에서 제사가 끝나면 우상에게 바쳐졌던 제물은 그 일부만 태워지고 나머지는 종종 시장에 보내져 팔리곤 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자들은 알지 못한 채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를 살 수가 있었습니다. 또는 믿지 않는 친구의 집에서 그 고기로 만든 음식을 먹을 수도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또 포도주를 마시지 않았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삼일에 하루씩만 식사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것도 빵과 소금과 물만 먹고 마시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음식이 아니라 일 년 중 어떤 날에 관한 관습도 있었습니다. 안식일이나 몇몇 날에다가 특별한 의미나 중요성을 부여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모든 날을 꼭 같이 여기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교인들 중에는 새롭게 받아들인 기독교신앙에도 불구하고 예전의 식생활이나 기타 생활습관을 아무 양심의 거리낌 없이 계속 유지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새로운 신앙에 위배될까봐 과거의 습관을 반복하지 않으려고 극도로 조심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자기의 소신을 자기 자신의 행위에만 적용시키지 않고 다른 사람의 행위를 판단하는 잣대로 삼으려 하는 것 때문에 교회 안에서 신자들 간에 시험들 일이 발생할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우상에 바쳐졌던 고기를 먹는 행위나, 포도주를 마시는 행위나 안식을 지키거나 안 지키는 일 등입니다. 자기 생각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비판하거나 업신여기는 것은 공동체를 위하여 해로우므로 모두가 조심해야 할 일임을 사도 바울은 가르칠 필요를 느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 첫 절에서 “믿음이 연약한 자”라고 부른 사람들은 주로 아무 것이나 자유롭게 먹지 못하는 사람들을 지칭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 15:1에서 “믿음이 강한 우리”라고 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자유로 인해 무엇을 먹고 안 먹고 하는 일에 관한 제약으로부터 해방된 사람들을 가리킨 것이라 보아야 할 것입니다. 

특히 우상에 바쳐졌던 고기를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고 거짓된 것이기 때문에 그 앞에 바쳐졌었던 아니던 아무 상관없이 고기를 먹을 수 있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 자신은 그런 여러 가지 입장 중에서 어느 것이 옳다 그르다 하는 판단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니 속으로 자기의 판단은 있었을 것이지만 공개적으로 그것을 밝힘으로써 믿음이 약한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거나 시험에 들게 할 것을 염려한 것입니다. 어떤 태도가 옳으냐 그르냐 하는 문제를 넘어서서 그는 교회에 덕이 되는 길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먼저 본문 1절에 보면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합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라고 부르면서도 그들의 입장을 거부하지 말고 받으라 하며, 그들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믿음이 연약한 사람을 연약한 대로 인정하고 존중하라는 것입니다. 

2절에서는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합니다. 바울은 여기서도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는 사람과 믿음이 연약하여 채소만 먹는 사람을 대비시켜 말하면서도 그 둘 중에 어느 쪽이 옳다 그르다 하는 가치판단을 표명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직 양쪽의 사람들이 하지 말아야 할 일이 무엇인지만 언급하고 있습니다. 본문 3절입니다: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식생활 문제에 있어서 모든 것을 거리낌 없이 먹을 수 있는 믿음을 가진 이들이 빠지기 쉬운 경향은 신앙생활 잘못하는 것 아닌가 하는 두려움과 지나친 조심성 때문에 채소 외에는 아무 것도 먹지 못하는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반대로 철저하게 신앙생활을 하겠다는 뜻으로 먹는 것도 극도로 가려서 하는 이들이 또한 갖게 되기 쉬운 성향은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다 먹는 사람들을 불신앙적이거나 경건하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비난하는 것입니다. 뭐든지 먹을 수도 있고 철저히 가려서 먹어도 되지만 누구를 자기와 달리 행한다고 해서 업신여기거나 비판하는 것은 공동체를 위해서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이유를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뭐든지 다 먹는 사람이든 채식만 하는 사람이든 하나님께서 믿음의 공동체로 불러주신 사람들이라면 다른 사람이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을 섬기는 종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도 다른 사람의 하인에게 이래라 저래라 함부로 간섭할 수 없다면 하물며 하나님의 종에 대해서 누가 감히 비판을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본문 4절을 봅니다: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무엇을 먹고 마시는 문제에 있어서 뿐 아니라 어떤 날이나 절기를 지키는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임을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 믿기 전의 생활에서 의미 있게 여기며 지키던 날들을 계속 지킬 것인지 아닌지 하는 문제는 그것이 우리의 신앙의 본질에 위배되지 않는 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설날이나 추석같은 우리 민족 고유의 명절을 예수 믿게 된 이후에도 계속해서 지켜야 할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물론 제사를 지내는 일은 우리의 기독교신앙과 조화되지 않기에 폐한다 하드라도 그저 가족들끼리 만나서 어른들에게 인사를 드리고 음식과 정을 나누며 즐겁게 지내는 것은 얼마든지 계속할 수도 있는 일이고 또 주일을 잘 지키는 것 외에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에 속하지 않는 모든 것은 더 이상 중요하게 여기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날을 지키고 안 지키고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일이라는 것이 사도 바울의 의중에 있는 생각입니다. 본문 5절을 봅니다: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한 것은 그런 일은 각자의 자유에 속한 일이므로 각자가 알아서 하면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남이 뭐라고 말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바울은 여기서도 어떤 날을 중요시하든 안 하든, 무슨 음식을 먹든 안 먹든 중요한 것은 그것이 주를 위한 것이고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의 표현인지 아닌지 하는 것입니다. 본문 6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이렇게 그리스도인에게서 언제나 상위의 가치는 무엇을 하고 안 하고 하는 것보다도 하든 안 하든 그것을 주님을 위하여 하는 것입니다. 살거나 죽는 것까지도 그렇습니다. 무릇 그리스도인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살아도 자기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자기를 위하여 죽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도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본문 7-9절에서 사도 바울이 하는 말입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7절의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다”는 것은 모든 신자는 그들의 삶을 하나님 앞에서 결산하듯이 산다는 뜻입니다. 무릇 그리스도인이라면 고기를 먹는 일이나 무슨 날을 지키는 일이나 각자 나름대로 이해하는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사는 사람은 없고 다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여 살고자 한다는 말입니다. 죽음 앞에서도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입니다. 사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고 죽을 때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살든지 죽든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신자가 하나님께 속해있다면 하나님 외의 그 누구도 신앙의 본질과 중심문제에 속하지 않는 다른 사람의 먹고 마시는 문제와 어떤 날들 지키는 일에 관하여 이러쿵 저러쿵 판단할 권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목적이 그가 죽은 자들과 살아 있는 자들 모두의 주가 되시기 위한 것이라는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은 지금 살아있는 사람들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미 죽은 사람들도 모두 그의 권위 아래 속해있습니다. 그럴 만큼 모두가 주님께 속한 자들이라면 믿음이 약한 사람이나 강한 사람이나 누구든 자기와 다른 사람을 비판하거나 업신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인 되신 하나님만이 자기의 사람들을 판단하실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이지 다른 사람의 심판대에 설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심판은 하나님의 특권이기 때문에 남을 심판하는 것은 하나님의 특권을 찬탈하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본문 10-12절에서 사도 바울의 말을 계속 들어봅니다: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사45:23) 하였느니라.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12절에서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한 것은 모든 사람이 각각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모든 말과 행위에 대하여 직접 결산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서 직접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하여 심판하시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심판하실 사람을 다른 그 누구도 심판하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회에는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살아온 환경도 각각 다르고 믿게 된 계기도 다 다르며 윤리관이나 생활방식도 다 다릅니다. 교인들 사이의 그 다양한 차이 때문에 상호간에 오해도 있을 수 있고 의견충돌도 있을 수 있으며 때로는 갈등과 분쟁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 일들을 방지하는 길은 자기의 생각을 절대화하거나 남에게 강요하려 하지 않도록 서로가 조심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믿음과 그 사고를 존중하는 것입니다. 함부로 업신여기거나 비판하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같은 믿음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누구에게서나 같아야 하는 것도 있습니다. 그것은 다 같이 지켜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의 본질에 관한 한 일치를 추구해야 할 것이고, 비본질적인 일에 관해서는 각자의 자유를 존중해야 할 것이며, 모든 일에 있어서 사랑을 앞세워야 할 것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교회 안의 모든 믿음의 형제자매들을 향해 너그러운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자기 나름대로의 신앙생활을 영위하며 이를 위해 자기 자신을 훈련시키는 자세나 방법은 얼마든지 자유롭고 다양할 수 있습니다. 엄격하고 높은 신앙의 기준으로 자기의 말과 행동과 삶을 다스려가는 것은 존경할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엄격한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은 그 엄격한 잣대를 다른 이들에게도 요구하는 것이며 그 기준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경멸하고 무시하고 비난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에게는 엄격해도 다른 이들에게는 너그러운 사랑의 자세가 교회를 더 푸근하게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서로서로 너그러운 마음으로 사랑이 넘치고 평화가 넘치며 행복이 넘치는 교회를 만들어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이수영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