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마음의 등불을 밝혀주시옵소서! (엡 1:15-19)

첨부 1


마음의 등불을 밝혀주시옵소서! (엡 1:15-19)

:15 이로 말미암아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16 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19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지난주일 이후 얼마나 더 기도하셨습니까? 무엇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까?

에베소교회는 이미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이 소문난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감사로 기억되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더욱 하나님을 알아가야 할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그 기도의 내용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17)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서 하나님을 더 분명하게 알아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는 기도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기도에 대하여 배우는 사람이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저 역시 기도에 대하여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이겠습니다. 기도함으로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면 우리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우리가 하나님을 더욱 분명하게 알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안다는 것입니까?  

I. 마음의 눈  

바울은 에베소교회를 위하여 첫 번째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시기를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내용은 무엇입니까?

18절 첫 번째 구절 말씀입니다.
:18a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위하여 두 번째로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의 눈을 밝혀주시기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마음[kardiva/칼디아]’은 우리가 흔히 마음(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음은 영적 생명의 중심 자리이자, 생각, 열정, 욕망, 식욕 등의 원천입니다. 그리고 ‘밝히다[fwtivzw/프호티조]’는 ‘광선을 발하다’, ‘빛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마음을 밝혀달라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눈을 밝혀달라는 것입니다. 마음에 눈이 있다는 것은 비유입니다. 이것은 마음의 눈이 감겨 어둡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1. 마음의 눈을 밝혀주셔야 합니다.

우리말에 ‘몸이 천 냥이면 눈은 구백 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만큼 우리의 몸에서 눈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눈이 좋지 않다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전혀 볼 수 없다면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시력이 약한 사람이나 시각장애를 가진 사람은 생활하는데 많은 불편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어느 날부터 제게도 노안(老顔)이 와서 독서를 하는데 이만저만 불편한 것이 아닙니다. 하물며 전혀 볼 수 없는 시각장애인들은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우리는 사회생활에서 이런 분들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하지만 두 눈을 멀쩡하게 뜨고도 보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정말로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시각장애인을 배려하지 못하는 사람도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인 한 사람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요 9:5)고 말씀하셨습니다.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셨습니다.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진흙을 이겨 눈에 발라 눈을 뜨게 하신 그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이것을 시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라는 것은 전혀 보지 못하였습니다. 또 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이었던 사람이 다시 보게 되었다는 것도 안중에 없었습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진흙을 이겨 눈에 발라 안식을 어겼다는 것만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눈에 바르기 위하여 침을 뱉어 이긴 진흙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한 삽이 되겠습니까? 아니면 한 주먹이 되겠습니까? 그야말로 손톱 만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눈은 침을 뱉어 이긴 진흙은 보면서도 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이었던 사람이 다시 보게 되었다는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더욱이 이런 일을 하신 분이 누구이신지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요 9:39)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눈을 뜨고 본다고 하면서 정작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는 그들을 정죄하셨습니다(요 9:41).

마음의 눈이 어두워지면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합니다. 마음의 눈이 어두워지면 마음이 굳어집니다. 마음의 눈이 어두워지면 마음이 완고해집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있습니다.(엡 4:18) 우리는 자신의 마음의 눈이 어둡지 아니한가를 점검하여야 합니다. 생텍쥐페리(Saint-Expery)는 ‘어린 왕자’라는 책에서 “내 비밀이란 이런 거야. 제대로 보려면 마음으로 봐야 해.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거든”이라고 말합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마음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셰익스피어는 “사랑은 눈으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 본다.”고 하였습니다. 사랑, 우정, 믿음, 소망, 정직, 감사, 은혜 등등. 이 모든 것은 우리의 두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마음의 눈이 밝은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마음의 눈이 어두워지지 않도록 조심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을 따스하게 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으로 가득 채워야 하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으로 충만하게 채워야 더욱 아름다운 세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이 말씀하는 마음의 눈은 어떤 눈일까요? 누가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십니까?

다시 18절 첫 번째 구절 말씀입니다.
:18a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이것은 바울이 에베소교회를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에베소교회 성도들의 마음의 눈을 밝혀주시기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마음의 눈을 밝혀주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떻게 마음의 눈을 밝혀주십니까? 앞에서 바울은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17b)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지혜와 계시의 영과 마음의 눈을 밝히는 것이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이신 성령께서 사람들에 들어오시면 마음이 눈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마음의 눈을 밝혀주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2. 성령께서 밝혀주셔야 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마음의 눈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종교에서 말하는 육안이니 심안이니 영안이니 하는 것의 하나가 아닙니다. 육안(肉眼)은 우리의 몸이 가지고 있는 육체의 눈입니다. 그리고 심안(心眼)은 마음의 눈입니다. 어떤 종교에서는 모든 것이 마음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입장이기 때문에 마음의 눈을 매우 강조합니다. 또 영안(靈眼)은 영적인 것을 보는 눈이라는 뜻에서 신비적인 측면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에서 마음의 눈은 심안이 아닙니다. 이것은 영안도 아닙니다. 이것은 성령님께서 믿는 사람들에게 함께 하심으로 마음으로 보고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영에 들어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에 영향을 끼쳐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하시고 우리의 귀로 들을 수 없는 것을 들을 수 있게 하십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 작용하시면 마음이 어둡지 아니하고 밝아집니다. 비로소 보지 못하던 것을 보고 느끼지 못하던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의 눈을 밝혀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자신의 마음의 눈을 밝혀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지혜와 계시의 영이 우리에게 함께 하셔서 마음의 눈이 밝아지면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을 더욱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하나님을 더욱 분명히 안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어지는 말씀에서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의 눈이 밝혀주시므로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됩니다. 

  
II. 무엇인지  

성령께서 마음의 눈을 밝혀주심으로 알게 되는 그것은 무엇입니까? 18절 후반절에서 19절까지의 말씀에는 ‘무엇이며’라는 말이 세 번 나옵니다. 그것은 모두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는 말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알게 하시기를 구하는 첫 번째 내용입니다.

다시 18절 말씀의 전반절입니다.
:18a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의 눈을 밝혀주셔서 알게 하시기를 구하는 첫 번째 내용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속한 소망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신령한 복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녀 삼으시기 위하여 죄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십자가에서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우리는 죄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값을 치르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귀중하게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이 바라보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참으로 알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1.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삼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의 눈을 밝히심으로 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삶속에서 지속적으로 알아가는 것입니다. 

한 때 유행했던 썰렁한 이야기가 생각이 납니다. 

자신의 꿈이 대통령이 되겠다는 다섯 살짜리 꼬마가 있었습니다. 대통령이 되겠다는 조카에게 삼촌이 물었습니다.

“너 대통령 되면 삼촌 무엇 시켜 줄 거야?”

삼촌에게 무엇을 시켜 줄 것인지 잠시 동안 심각하게 고민하던 조카가 무겁게 입을 열어서 한 말. “자장면!”

다섯 살짜리는 대통령과 삼촌에게 무엇을 시켜준다는 것이 전혀 연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무엇을 시켜준다는 것은 자장면 시켜준다는 정도였습니다. 하기에 조카가 대통령이 되었다고 해서 능력도 안 되는 삼촌에게 이런 저런 자리의 감투를 씌워주면 나라가 큰일입니다. 차라리 자장면 시켜주고 말아야 합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셔서 우리에게 바라보게 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자장면 시켜 먹는 정도가 아닙니다. 보통으로 시켜 먹던 것을 곱대기로 시켜먹게 된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거룩한 교회를 이루시는 소망입니다. 에베소서 5:27은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고 기록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녀로 부르셔서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시기를 소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은 것은 자장면 정도가 아닙니다. 영광스러운 교회로, 거룩하고 흠이 없는 교회로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소망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영광스러운 교회를 소망하여야 합니다. 영광스러운 교회는 우리가 천국에 갔을 때 비로소 완성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 그 영광스러운 교회를 이루어가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교회를 소망하여야 합니다. 이것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마음의 눈이 밝은 자들이 바라보는 것입니다. 비록 어둠이 우리의 주변에 짙게 드리우고 있다고 할지라도 성령께서는 마음의 눈을 밝혀주셔서 영광스러운 교회를 바라보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광스러운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여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의 눈을 밝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소망, 영광스러운 교회를 바라보게 하시기를 강력히 소망합니다.  

성령께서 마음의 눈을 밝혀주심으로 우리에게 알게 하시기를 원하는 두 번째는 무엇입니까? 

18절 후반절 말씀입니다.
:18b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사도는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상속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새번역]고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그 자녀들에게 물려주시는 복이 얼마나 놀랍고 큰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그저 그런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영광스러운 교회로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영광스러운 교회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 자녀들을 하나님께서는 놀랍게 영광스럽게 하십니다.


2.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초라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봅니다. 조롱거리와 비아냥거림의 대상이 되어버린 교회의 모습을 봅니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의 눈이 어두워지면 안 됩니다. 우리는 마음의 눈을 밝혀 교회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보아야 합니다. 초라하고 부끄러운 모습이 이 세상 교회에 있다고 해도 세상에 생명을 주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의 생명을 어두운 세상에 증거 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뿐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을 세상에 알려 주는 곳은 오직 교회뿐입니다. 

우리는 마음의 눈을 밝혀 교회의 영광스러움을 보게 하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교회를 영광스럽게 하십니다.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영광이 아니요 고난일 수 있습니다. 세상의 관점에서 볼 때는 풍성이 아니라 빈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영광을 깨달은 바울은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고 선언하였습니다. 오직 성령께서 마음의 눈을 밝혀주셔야만 볼 수 있습니다.

제정 러시아에 공산 혁명이 일어났을 때,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혁명을 일으키고 교회를 박해하는 한 무리가 열두 명의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다가 며칠 동안을 굶겼습니다. 얼음에 구덩이를 파고 벌거벗겨 집어넣었습니다. 그리고 따뜻한 불을 피우고 맛있는 음식이 차려 놓여 놓고 말했습니다. 

“지금이라도 예수를 부인하고 나오라. 따뜻한 불을 쬐며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

한참 후, 한 사람이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얼음구덩이에서 올라왔습니다. 조롱하던 사람들이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을 놀리던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재빨리 옷을 벗고 얼음 구덩이로 들어갔습니다. 함께 있던 그의 동료들이 자진하여 얼음구덩이 속으로 들어간 사람에게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나는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하늘에서 열 두 개의 면류관을 가지고 내려오던 열 두 천사를 보았다. 한 사람이 얼음구덩이에서 나오자 한 천사가 도로 하늘로 올라가는 광경이 보았다. 이 사람이 버린 예수를 내가 믿겠다.”

스스로 얼음구덩이로 들어간 사람은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고난을 겪는 사람들을 위하여 하늘의 천사들이 들고 있는 면류관을 보았습니다. 그는 하늘의 영광을 보았기에 자진하여 얼음구덩이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하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바울은 놀라운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고백은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8)는 것입니다. 바울은 면류관을 확신하였습니다. 그러나 면류관은 그에게만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 면류관이 예비 되어 있습니다.

자신을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믿는 여러분,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으로 기억합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영광스러운 교회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의 눈이 밝혀 그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도 알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교회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놓치지 않으시기를 기도합니다.  

이제 성령께서 마음의 눈을 밝혀주심으로 우리에게 알게 하시기를 원하는 세 번째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9절 말씀입니다.
:19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사도는 우리 믿는 사람들 속에서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성령께서 우리들에게 알게 하여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믿는 우리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알아야 합니다.


3. 능력의 크심이 어떠한지 알아야 합니다.

영광스러운 교회인 우리가 누릴 영광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능력이 지극히 크고 놀랍기 때문입니다.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은 이어지는 말씀에서 우리는 다시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선 기억할 것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의 영이 우리 믿는 사람들과 함께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능력은 우리를 다시 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롬 8:11). 죽어도 다시 살게 하는 능력보다 더 큰 능력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는 자신의 생활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더 풍성하게 경험하여야 합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셔서 여러분의 마음의 눈을 밝혀주셔서 믿는 사람들 속에서 역사하시는 능력을 보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들은 마음이 어두워지면 이 세상에서 소망을 찾습니다. 이 세상에서 영광을 구합니다. 이 세상의 능력만 바라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마음의 눈을 밝혀주시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소망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것은 영광스러운 교회입니다. 우리는 그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됩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능력의 크심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다시 살게 하신 부활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하여야 합니다. 성령께서 마음의 눈을 밝혀주시기를 기도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를, 영광의 풍성이 무엇인지를, 능력의 크심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마음의 눈이 어두워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망과 영광과 능력을 보지 못한다면 얼마나 답답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까? 성령께서 마음의 눈을 밝혀주심으로 영광스럽고 풍성하고 강력한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의 눈을 밝혀 부르심의 소망과 영광의 풍성과 능력의 크심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시기를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