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우리가 잡아야 할 작은 여우: 탐욕 (눅 12:13-21)

첨부 1


우리가 잡아야 할 작은 여우: 탐욕 (눅 12:13-21)


한 생애를 살아가면서 불평과 원망이라고 하는 것은 한 가정이든, 한 조직이든, 한 생명이든 암 덩어리와 같은 것입니다.  암 덩어리가 점점 커지면 사람이 죽는 것처럼 불평과 원망이 뿌리를 내리게 되면 가정도 죽고, 조직도 죽고, 개인도 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가정을 위해서나 믿음의 공동체를 위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을 위해서 불평과 원망의 덩어리를 태워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이 땅의 것으로는 불평과 원망의 덩어리를 태울 수가 없습니다.  하늘의 신령한 것이 와야 됩니다.  하늘의 은혜와 능력이 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하늘의 은혜와 능력으로 불평과 원망과 시비의 모든 암 덩어리들을 태워버리시기를 바랍니다.  위로부터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힘입고 일체의 모든 속박으로부터 자유 하는 하나님의 신비함에 생포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우리가 여기에 모인 것은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물론 우리가 좋은 사람이 되고, 도덕군자가 되고, 윤리적인 사람이 되는 것도 중요합니다.  모름지기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그 행위가 세상 사람들과는 뭔가 좀 달라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세상이 줄 수 없는 마음속의 평화입니다.  믿음의 사람들 속에만 임하는 하나님의 큰 평화를 붙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마음속에 성령님이 주시는 평화가 충만하다면 우리는 내게 나타난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가지고 이 삭막한 세상 가운데서도 넉넉함과 당당함으로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는 세상과 맞설 수 있는 영적 힘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의 영혼에 하나님의 신령한 영적 힘이 임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의 생명 속에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빼앗을 수 없는 넉넉한 하늘의 평화가 충만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인간은 관계적 존재입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관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사람들을 보면 이 관계를 아름답고 소중하게 만들어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 관계를 점점 더 악화시켜 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  결국 그 원인은 아주 작고 사소한 것에서부터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아가서에서는 작은 여우라고 했습니다.  이 작은 여우가 아름다운 동산을 파헤치고, 우리의 사랑의 공동체를 무너뜨린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의 관계를 깨뜨리고, 믿음의 공동체가 하나 되게 하지 못하는 작은 여우들의 정체를 살펴보았습니다.  그것들은 교만, 분노, 이단, 게으름, 정욕, 질투들이었습니다.  이제 오늘은 그 마지막으로 또 하나의 작은 여우의 정체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탐욕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이 탐욕이라는 것은 인류의 가장 보편적인 죄악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었던 본문에도 탐욕에 관한 문제가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하늘나라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을 때에 갑자가 젊은이 하나가 벌떡 일어나더니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그것이 본문의 시작입니다.  우리가 본문 13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본문을 보면 아마도 형제가 있었는데 그 형제의 부모님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간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재산이 두 형제에게 나란히 나누어져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아마도 그 형이 동생 몫으로 돌아갈 유산까지도 다 착복해 버린 것 같습니다.  구약의 율법에 의하면 맏아들은 다른 형제들에 비해서 갑절을 가지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3분의 1이 동생에게 가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3분의 1마저도 형이 가로챘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동생은 참으로 억울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앞에 나와서 그 억울함을 호소하게 된 것입니다.
"내 형을 명령해서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열 번, 백 번, 천 번 이해가 되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2000년 전의 그 때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우리들 주변에서도 얼마든지 들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들의 삶 속에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본문 14절에 보면, 이 젊은이의 요청에 대해서 우리 주님께서는 아주 의외의 대답을 하십니다.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우리가 이 말씀을 피상적으로 접근해서 예수님께서는 공정한 분배에 대해 관심이 없으셨다든지, 혹은 정의에 대해서 무관심하셨다고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도 예수님은 보다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해결자로 그들 앞에 다가가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물론 이 형에게 문제가 많습니다.  그러나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자기 것을 달라고 요구하고 있는 동생의 마음속에도 똑같이 자리를 잡고 있는 어떤 문제의 뿌리를 주님께서 보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탐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1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우리는 일반적으로 탐심, 내지는 탐욕의 죄악을 말하게 되면 그것은 흔히 부자들의 죄악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탐욕은 부자들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부자를 비판하고 정죄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에도 똑같이 탐욕이라는 내적인 죄악은 여전히 존재할 수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탐욕에도 여러 가지의 종류가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모든 유형의 탐욕을 물리치라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여기서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생명이라는 단어는 매우 독특한 단어입니다.  그것은 그냥 우리를 존재하게 하는 생물학적인 의미에서의 생명이라는 단어를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생명은 어떤 기쁨과 보람, 삶의 의미와 같은 것들이 어우러진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16절 이하에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유명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탐욕이라는 죄악의 정체를 규명하십니다.  나아가서 우리가 어떻게 이 탐욕의 죄악에서 자유하고 해방될 수가 있는가에 대한 비밀을 말씀하십니다.

사실 한 인간의 탐욕으로 자신의 인격이 무너집니다.  그런가 하면 한 인간의 탐욕 앞에 가족들이 무너집니다.  뿐만 아니라 이 탐욕은 한 개인과 가족의 문제를 넘어서 인간 사회 공동체의 유대관계를 무너뜨리게 만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을 위해서라도 이 탐욕의 작은 여우를 잡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탐욕이라는 죄의 정체에 대해서 올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탐욕이라는 죄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는 본문의 비유를 통해서 탐욕의 정체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첫째로, 탐욕이라는 죄는 우리 인간의 이기심을 살찌우는 정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비유는 이렇게 시작이 됩니다.  본문 16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그리고 17절 이하에 보면 그가 자신에게 독백처럼 말합니다.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이 짤막한 독백 가운데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단어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나'라는 단어입니다.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두리라.  내가 내 영혼에게"

우리말 번역에는 적어도 여섯 번씩이나 '나'라는 단어가 지속적으로 등장합니다.  그러나 원문에는 그보다 훨씬 더 자주 등장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어리석은 부자의 의식 속에 얼마나 철저하게 자기중심의 세계를 가지고 있는가를 볼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분명히 아셔야 하는 것은 사람이 자기를 위한다든지, 혹은 자기의 이익을 추구한다든지, 아니면 자기를 존귀히 여긴다든지 하는 그 자체를 우리가 정죄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누구나 그렇게 살수 밖에 없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자기를 위하는 것은 죄악이 아닙니다.

그러나 문제는 자기만을 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죄악입니다.  이때부터 우리는 탐욕이라는 늪 속에 빠져들어 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탐욕의 지배를 받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일단 우리가 탐욕의 지배를 받게 되면 우리는 치유하기 어려운 병적인 이기주의자가 될 수가 있습니다.  어떤 글에 보니까 병적인 이기주의자의 모습을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에 비유를 했습니다.  컨트롤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는 질주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 많은 것을 자기 손에 쥐기 위해서 계속 달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본문에 나타난 어리석은 부자에게서도 그런 경향을 읽어 볼 수가 있습니다.  18절에 보면, 더 크게 짓고, 더 많은 물건을 쌓아 두리라.  더 많은 물건, 더 많은 곡식, 더, 더, 더...  이것이 바로 병적인 이기주의자의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성경은 지옥을 묘사할 때 이 지옥을 다른 말로 무저갱이라고 말합니다.  무저갱은 바닥이 없다는 뜻입니다.  지옥은 바닥이 없는 욕망의 세계, 그 욕망을 충족하지 못한 사람들이 지옥에 가서도 '더 더' 하고 목마르게 소리치는 곳이 지옥의 정체라고 성경은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들의 소원은 "조금만 더" 갖자는 데 있습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그래서 헤어 나오기 어려운 이 죄악의 정체가 바로 탐욕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이기심을 끝없이 살찌우는 죄악이 바로 탐욕의 정체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이 많이 가졌다고 오래 삽니까?  많이 소유했다고 많이 행복합니까?  넉넉한 소유가 넉넉한 인격을 만듭니까?  많이 가졌다고 그 사람의 인격이 점점 좋아집니까?  많이 가졌다고 그 사람의 영혼이 점점 은혜로워집니까?  지상의 소유가 꼭 그 사람의 행복의 크기를 만듭니까?  여기에 동의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속지 마십시오.  그 사람의 세상의 넉넉함이 꼭 그 사람의 행복의 잣대를 만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이기심을 살찌우는 탐욕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이 탐욕은 극도의 이기심을 잉태하기 때문에 자신의 인격도 무너뜨리지만 결국에는 가정과 공동체도 무너뜨리고야 말 것입니다.

두 번째로, 탐욕은 나로 하여금 이웃을 향해서 문을 닫아버리게 만드는 정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본문에 나타난 부자의 독백을 가만히 살펴보십시오.  이 부자의 독백 가운데서 이웃이 고려된 흔적이 있습니까?  이웃이 언급된 적이 있습니까?  오늘 본문의 독백 가운데 '당신'이라는 말이 나온 적이 있습니까?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가 이 곡식을 어찌할꼬.  내 곡간을 헐고 내 곡식과 내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이 부자의 언어 속에는 '당신'이라는 말이 존재할 여백이 없습니다.  이 부자의 세계, 그것은 네가 없는 나만의 세계였던 것입니다.  유명한 유대교 출신의 철학자 가운데 마틴 부버라는 사람이 쓴 '나와 너'라는 책이 있습니다.  거기서 그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당신이 존재함으로써 비로소 나는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있기 때문에 나는 존재할 의미를 가질 수가 있습니다.  인간은 관계 속에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 어리석은 부자 농부, 그러나 이 부자도 나름대로 어떤 성공을 하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이웃들의 참여와 도움이 있었을까요?  그가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씨앗 가게 주인의 도움을 받아서 씨를 뿌렸을 것입니다.  그가 농사를 짓기 위해서 농기구 제작자들의 도움을 받아서 농사의 기구들을 활용했을 것입니다.  그가 부렸던 소나 말을 정성스럽게 키워 놓은 어떤 가축 사육자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밭을 일구는 작업을 위해서 많은 소작인들인 그의 주변 동료 이웃들의 도움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세계에는 여전히 나밖에 없습니다.  나만 잘 살면 그만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 사람은 이웃에 흉년이 들든 말든, 이웃이 어떻게 되든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도넬라 메도즈'의 '세계가 만일 100명의 마을이라면'이라는 책을 참고로 해서 만든 '세상에 100명의 사람들이 있다면'이라는 동영상이 있습니다.  세상에 100명의 사람들이 있다면, 20명의 사람들은 하루 1,000원 미만의 돈으로 끼니를 이어갑니다.  15명은 너무 많이 먹어서 비만이 되었지만, 25명은 영양실조를 앓고 있습니다.  사망한 5살 미만의 아이들 중 절반은 영양실조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굶어죽지 않기 위해 돈벌이에 나섭니다.  골프 선수인 타이거 우즈는 나이키 모자를 쓰고 하루에 5,500만 원을 받습니다.  하지만 그 모자를 만드는 태국 노동자들의 하루 일당은 4천원, 모자 광고로 타이거 우즈가 하루에 번 5,500만 원을 모으려면 노동자들은 38년 동안 일해야 합니다.

지금 지구의 인구가 70억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70억의 인구 가운데 약 10분의 1인 7억 정도가 매일 채워지지 못한 창자를 붙들고 잠자리에 든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아십니까?  굶어죽는 10세 미만의 아동이 5초에 1명 꼴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전세계 인구 가운데 3분의 1이 비타민A가 부족해서 시각장애인이 되어가고 있다는 이 세상의 현실을 아십니까?  나만 잘 살면 된다구요?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읽어보면 이 세상이 마지막 심판을 받습니다.  그런데 심판을 받는 최후의 모습을 가리켜서 성경은 바벨론이라고 부릅니다.  요한계시록 18장에 보면 이 바벨론이 무너지는 참담한 광경을 묘사합니다.  바벨론이 왜 무너집니까?  성경학자들에 의하면 이 바벨론은 여러 가지로 해석되어 왔습니다.  때로는 로마의 다른 명칭으로서 바벨론을 사용했다고 학자들은 생각합니다.  또 어떤 학자들은 로마 카톨릭이 전성시대를 이룰 때 이 바벨론을 비교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당한 해석은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요한계시록 18장을 읽어보면 이 바벨론의 정체는 다른 것이 아니라 소유 중심의 가치관이 빚어내고 있는 이 세상, 특별히 물질주의와 쾌락주의로 대표되는 이 세상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여집니다.  우리가 요한계시록 18장 15절에 보면 이 바벨론이 멸망하는 마지막 순간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바벨론으로 말미암아 치부한 이 상품의 상인들이 그 고난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울고 애통하여 이르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이여 세마포 옷과 자주 옷과 붉은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민 것인데, 그러한 부가 한 시간에 망하였도다."

쾌락주의와 물질주의로 대표되던 소유중심의 가치관을 벗어내지 못한 이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무너지는 광경을 보여줍니다.  이 광경을 보여주면서 요한계시록 18장에 4절에 보면 이런 경고를 합니다.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성경은 우리가 이 바벨론적 삶의 스타일을 모방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백성아, 내 백성들만이라도 이런 죄에서 나와라."

그러나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물질주의적이고, 쾌락중심의 가치관을 극복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그래서 하나님은 구약에서부터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여러 가지 훈련을 시키십니다.  그 중에 하나가 십일조 훈련입니다.  그런데 구약에 보면 십일조에도 한 가지가 아니라 여러 가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요구되는 십일조 가운데 하나가 회식의 십일조입니다.  회식의 십일조는 가지고 와서 함께 먹는 것입니다.  

나눔의 원리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또 매 삼년마다는 구제의 십일조를 드리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옵션이 아니라 의무였습니다.  주님은 거의 의무로써 나눔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만 살면 됩니까?  그래서 탐욕은 이웃과의 관계를 차단시키는 정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웃을 향해서 창을 닫아버리게 만드는 죄악이 바로 탐욕이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세 번째로, 탐욕은 우리 삶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만드는 정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은 결코 물질의 필요성을 부인하지는 않습니다.  "너희에게 이 모든 것이 있어야 할 줄을 아신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가난이 미덕이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부요함이나 물질을 창출하는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물질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알고 그 주인의 뜻대로 물질을 선용할 줄 아는 분명한 가치관이 우리에게 확립되어 있는가를 묻고 있습니다.  그렇지 못하고 만약 이 탐욕의 노예가 되면 내가 물질을 부리는 자가 아니라, 물질이 나를 부리게 됩니다.  그래서 내가 돈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돈이 나를 소유하게 되면 그 순간부터 우리는 탐욕의 죄악 속에 빠집니다.  그리고 탐욕의 죄를 갖게 되면 우리의 눈이 멀어집니다.  인생의 판단이 흐려지고 무엇보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게 됩니다.

민수기 22장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기록되고 있습니다.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통해서 팔레스타인 지경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영향력이 소위 모압 지방에까지 퍼져나갑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 때문에 모압 사람들이 위협을 받습니다.  모압 왕 가운데 발락이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발락 왕이 위협을 느낀 나머지 안되겠다 싶어서 이스라엘을 망하게 할 방법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선지자 한 사람을 삽니다.  그가 발람이라는 선지자입니다.  발락이 발람을 고용했습니다.  그에게 뇌물을 주어서 그로 하여금 자기 민족인 이스라엘을 저주하라고 합니다.  발람 선지자가 처음에는 주저했지만 뇌물이 들어오니까 눈이 어두워졌습니다.  판단력이 흐려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발람 선지자가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해서 나귀를 타고 길을 떠나갑니다.  발람이 발락 때문에 발딱 뒤집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나귀가 가야할 길을 안 갑니다.  나귀가 낑낑거리면서 그 자리에 서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귀 앞에 하나님의 천사가 길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나귀는 하나님의 천사를 보는데 발람 선지자는 그것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선지자가 나귀를 두들겨 팹니다.  세 번씩 나귀를 두들겨 패니까 왜 패느냐고 나귀가 소리를 지릅니다.  하나님이 안 보이느냐고?  그러니까 발람 선지자가 하나님이 어디 보이느냐고 나귀를 야단칩니다.  그때 하나님이 한 순간 선지자의 눈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천사가 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그러니까 뛰어 내려와서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짐승만도 못한 인간의 시조가 바로 발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이 탐욕에 젖어 버리게 되면 눈이 멀어집니다.  맹목적인 인간이 됩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바르게 판단할 수 있는 모든 기능이 상실됩니다.  그래서 탐욕은 무서운 죄입니다.  나로 하여금 살아 계신 하나님, 내 삶의 주인이 되신 하나님을 못 보게 만드는 죄악이 바로 탐욕의 죄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어떻게 저와 여러분이 이 탐욕이라는 죄에서 자유할 수 있는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을까요?  오늘 아침에 이 두 가지를 꼭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첫째는, 물질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날마다 시간마다 확인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순간 순간마다 물질의 주인을 확인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물질의 주인이 누굽니까?  하나님이십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드디어 하나님이 어리석은 부자에게 등장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본문의 20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그런데 이 장면이 아주 재미있는 장면입니다.  조금 전에 부자의 독백이 무엇이었습니까?  내 물건, 내 곡식을 어찌할꼬.  내가 곡간을 더 크게 짓고, 내 곡간에 내 물건을 가득가득 쌓아두리라.  내가 내 영혼에게,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자기 것이라고 소리칩니다.  내 영혼에게.  그때 하나님이 나타나서 하시는 말씀이 "그래, 다 네 거라고 생각하고, 또 네 영혼이라고 생각하는 그 네 영혼을 내가 가져가리니 그러면 네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지금 이것은 소유권의 문제입니다.  "누구거냐?"  내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가져가겠어.  네 생명은 이제 끝이다.  그러면 누구 것이 되겠느냐?"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 떠날 때 내 것이라고 가지고 가는 사람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유명한 알렉산더 대왕이 남긴 이야기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죽어서 들어간 관에는 양쪽에 구멍을 팠습니다.  그리고 양 손을 관 바깥으로 내밀었다고 합니다.
"나는 빈 손으로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하고 간다."

랑하는 여러분, 세상을 떠나가는 사람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가시는 분을 보셨습니까?  세상에 태어날 때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태어납니다.  욕망을 위한 인생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세상을 떠나가는 날 우리는 두 손을 쭉 펴고 떠나갑니다.  아무 것도 가져가지 못합니다.  세상을 정복하고 더 정복할 땅이 없어서 울었다는 알렉산더도 두 손을 펴고 갔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가는 날 우리는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미리 준비해야 됩니다.  내 것은 없다.  하나님이 잠시 맡긴 것에 불과하다.

그러면 이 모든 소유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어떻게 인정하면서 우리가 그것을 망각하지 않고 날마다 살 수가 있습니까?  저는 이것을 위한 제일 좋은 경건의 훈련이 규칙적 헌금의 습관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그것이 십일조의 가장 중요한 정신이기도 합니다.  십일조의 정신은 주님의 것을 주님에게 바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십분의 일만 주님의 것이 아닙니다.

십일조에 대한 가장 커다란 오해는 십분의 일만 바치면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십분의 일만 주님의 것입니까?  아닙니다.  십분의 십, 전체가 다 주님의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의 주인이 주님이신데 그 중에 구체적으로 십분의 일을 떼어서 바쳐서 하나님의 일에 성별함으로써 내 모든 소유의 주인이 하나님인 것을 인정하겠다는 내 신앙고백적 행위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십분의 일만 바치지 않았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구제의 십일조들을 다 합하면 거의 23%씩 매달 바쳤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규칙적 습관, 규칙적인 헌금의 드림의 습관입니다.  이것은 내 모든 소유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영적 자기 훈련의 작업인 것입니다.  "하나님, 당신이 나의 주인이십니다."  그때 우리는 모든 탐욕으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평안과 자유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우리가 정말 탐욕에서 자유하려면 참된 부요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진짜 부자의 삶이 무엇이겠습니까?  본문 마지막 절인 21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  바꿔 말하면 진짜 부자는 누구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부요한 자가 진짜 부자라는 말입니다.  진짜 부요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배부른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배부릅니다.  하나님의 평안과 하나님의 기쁨으로 배부릅니다.  하나님의 가치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사람이 진짜 부요한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떡보다 재물보다 돈보다 더 귀한 내가 왜 사느냐하는 삶의 의미를 시간마다 깨닫지 못한다고 하면 무너집니다.  사람들이 무너지고 백성이 무너집니다.  나라가 무너지고 도성이 무너집니다.  자고로 모든 것에는 참된 의미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위에 것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위엣 것을 찾으라.  위에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들에 물들지 말아라."

땅에 있는 것은 썩고 냄새가 납니다.  땅에 있는 것은 더러운 것들이며 파리들이 몰려듭니다.  헛된 것입니다.  다 지나갑니다.  다 소멸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배를 땅에 쌓지 말고 하늘에 쌓아라."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이 탐욕으로 가득 차면 옆에 있는 가족들이 힘들어집니다.  탐욕으로 빠져 들어가면 인간관계가 어려워집니다.  내 곳간, 내 창고, 내 돈, 내 재물, 나의 것.  만일 여러분의 남편이 그렇게 한다고 하면 징그럽습니다.  정나미가 떨어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 마음 깊은 곳에 자리를 잡고 있으면서 수시로 꿈틀거리는 탐욕의 불씨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지워버리고 먼저 하나님에 대하여 부요한 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리하면 우리는 날마다 이렇게 고백할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되셨기 때문에, 그분이 나의 전부가 되셨기 때문에 그래서 그분을 전부로 삼은 나는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할 수 있는 그 사람이 진짜 행복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무엇인가 못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꾸만 "조금만 더"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 꽉 차 있으면 더 원하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으로 만족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으로 만족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묻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가 구원이신 것을 믿으십니까?  그리스도가 소망인 것을 믿으십니까?  그리스도가 능력인 것을 믿으십니까?  그리스도가 나의 소망이고, 구원이고, 능력이고, 나의 꿈이고 나의 자랑이고 나의 기업이고, 나의 피난처라고 정말로 믿는다면 뭐가 더 필요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꽉 찬 인생, 성령 충만한 인생, 그래서 정말 그리스도가 나의 기쁨이 되고, 그리스도가 자랑이 되어버린 인생이라면 사랑하는 여러분, 누구나 지금도 이 고백은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목자이십니다.  그러므로 나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이 탐욕에서 참으로 자유한 인생, 이 자유의 삶이 오늘 여러분과 저의 삶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참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면서 멋진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사는 진짜 부요한 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주철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