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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쉴 새 없는 교회 성장의 동력 (행 2:4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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쉴 새 없는 교회 성장의 동력 (행 2:41-47)

애플사의 최고 경영자 스티븐 잡스가 은퇴를 발표했지요. 건강악화로 더 이상 임무를 수행할 수 없다고 판단해서 후임자를 선정하고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스티븐 잡스가 은퇴를 발표한 후에 애플의 주가는 떨어졌고 그가 없는 애플은 상상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반대로 그가 없더라도 그 밑에 유능한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무난히 지속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 중에 애플이 무슨 과일회사입니까? 라고 물어보는 분이 계시다면 저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아무튼 세계 최고 기업의 최고 경영자가 건강상의 이유로 물러났다는 것만 아시면 됩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에도 사람들은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제 예수는 끝났다. 그의 제자들도 끝났다. 예수가 무엇을 시작했든 간에 이제는 끝이다,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이유도 예수님만 돌아가시면 끝날 줄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오십일 후에 오늘 본문의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끝난 줄로 알았던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모여들기 시작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예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전에는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분류할 방법이 없었는데 이제는 뚜렷한 모습을 갖추게 돼서 이들이 믿는 신앙을 기독교라고 부르게 되고 이 사람들을 크리스찬이라고 부르게 되고 그리고 이들의 모임을 교회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끝난 게 아니고 시작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오순절 사건의 정확한 연대를 파악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신빙성을 보태주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 말은 무슨 말이냐면 만일 본문에 기록된 이 사건이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한참 후, 일 년이든 이년이든 오년, 십년 후에 일어난 것이라면 오히려 납득하기는 쉽지만 기독교에 대한 신빙성은 현저하게 떨어질 것이고 반대로 성경말씀 그대로 이 사건이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오십일 후에 일어난 일이라면 납득하기는 어렵지만 기독교에 상당한 신빙성을 안겨주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오십일 후라는 것을 알 수 있느냐? 오순절이기 때문입니다. 오순절은 유월절로부터 오십일 이후의 명절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육순 ․ 칠순 ․ 팔순 할 때 말하는 것처럼 오순이라는 말은 오십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유월절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오순절이라는 말은 그로부터 오십일 이후라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만일 정말로 오십일 이후에 일어난 사건이라면 납득하기가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너무 이르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큰 충격을 받았어요. 그들이 섬기던 스승이 돌아가셨어요. 처형을 받았어요. 정신적인 지주를 잃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이 떠나가신 후에 제자들은 오합지졸에 불과했습니다. 예수님은 살아계실 때 슈퍼스타였습니다. 예수님 같은 분이 없었습니다. 카리스마라든가 성령의 능력이라든가 믿음의 능력이라든가 사람들의 인기라든가 성품이라든가 예수님 같은 분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임금이 되실 줄 알았어요. 그런데 예수께서 잡혀서 처형을 당하셨습니다. 삽시간에 모든 것이 끝나버렸습니다. 그리고 제자들 중에는 예수님을 대신하여 무엇을 일으킬만한 위인이 없었습니다. 제자들의 심리적인 상태를 추측해 본다면 그들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고 있었을 것입니다. Post-Traumatic Stress-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이건 뭐냐면 사람이 만일 전쟁에서 신체의 일부를 잃어버렸다든가 큰 사고를 당했다든가 큰 충격을 받았을 때 나타나는 정신장애를 말합니다. 

우리가 상을 당한 집을 방문하면 며칠이 지난 후에도 사람들이 조용하지요. 심리적으로 위축돼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래야만 했습니다. 축 늘어지고 우울하고 의욕이 없고 두렵고 용기가 없고. 그러나 오십일 이후에 그들의 모습을 읽어보건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그대로입니다.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이것은 일회적인 사건이 아닌 이후로 지속되는 일이었습니다. 걷잡을 수 없는, 핵분열과 같은 되돌릴 수 없는 현상이었습니다. 제자들이 과거를 돌아본다거나 향수에 빠질 틈이 없는 현재진행적인 굉장히 분주하고 굉장히 바쁘고 굉장히 대단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시사하는 것이 무엇이냐. 예수께서 정말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이런 모든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것도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오십일 밖에 되지 않았는데 이와 같은 놀라운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은 상상을 할 수가 없고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나 저나 예수님이 부활하시는 장면을 목격한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부활하신 예수님 만나보았던 사도들의 증언을 신뢰하는 것뿐입니다. 사도들의 진언이 결정적입니다. 어떤 이들은 내가 어떤 기적을 경험할 수만 있다면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데 그건 아닙니다. 기적은 기적이고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의 부활이에요.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보지 못한 이상 어떤 기적도 그 자체가 예수님의 부활의 역사성을 직접적으로 증명해 주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믿음은 사도들의 증언에 기초하고 사도들의 증언을 글로 기록한 것이 신약성경입니다. 그런데 당시 사도들의 정황을 추측해 보건대 그들의 증언이 믿을만한 가치가 있는 신빙성이 있다는 여러 가지 증거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그 중의 하나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예수님 돌아가신지 오십일밖에 되지 않았는데 오늘 본문의 열기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사도행전 2장의 열기. 열기라는 말을 받아보니까 옛날의 토요일 밤의 열기라는 영화가 생각납니다. 70년대 존 트라볼타를 스타로 만든 토요일 밤의 열기. 그런데 오늘 이 사도행전 2장에 일어난 일도 열기라는 말 이외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열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추모하기 위한 열기가 아니었어요. 우리는 존경하던 분이 세상을 떠나면 추모를 합니다. 고인을 그리워하고 고인의 업적을 기리고 기억하고 사진을 걸어놓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열기는 그런 것이 아니고 과거지향적인 것이 아니고 지극히 현재진행적인 현상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게 아니고 살아나셨고 이들과 함께 하시고 이들을 통해 역사하시는 것을 그들은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돌아가신 분을 믿는 게 아니고 살아계시고 이들과 함께 하시는 분을 믿은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47절에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여기에서 ‘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떠나가신 게 아니고, 잊혀진 게 아니고, 과거의 인물로 끝난 게 아닌, 성령으로 이들과 함께 하셔서 ‘구원받는 사람들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구원받는 사람들을 더하게 한 것은 사도들의 설교도 아니고 교회의 프로그램도 아니고 어떤 마케팅 전략도 아닌 예수님이 구원 받는 사람들을 날마다 더하게 주신 것입니다. 

어제 한 일간 신문의 북 섹션을 보니까 ‘만들어진 위인’이라는 책이 있어서, 위인들은 이후에 만들어졌다는 논리를 펴면서 예수 그리스도도 만들어진 위인이라는 논리를 펴던데 그런 주장은 이미 많이 들어본 익숙한 주장입니다. 그러나 그런 주장을 펴는 사람들은 사도행전을 읽고 사도행전을 설명해 주어야 됩니다. 

사도행전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를 담은 책이 아니고 그 당시의 초대교회에 일어났던 역사적인 사건을 기록한 책입니다. 당시 사도들이 무슨 담합을 한다든가 입을 맞춘다든가 예수님에 대한 교리를 만들어 낼만한 상황도 아니고 그럴만한 필요도 없고 그럴 수도 없었어요. 뭣 하러 그렇게 하겠습니까. 무슨 수로 그렇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냉철하게 생각해 보면 불교에서 석가모니가 부활했다고 주장하지 않지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런 주장이 없어도 얼마든지 석가모니를 기리고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이슬람에서 선지자 모하멧이 부활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럴 필요 없지요. 왜냐하면 그런 주장 없이도 얼마든지 모하멧의 가르침을 따르고 믿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예수님 제자들의 의도가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하고 사람들이 예수 믿고 따르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뭣 하러 귀찮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정말 증명하기 어려운 주장을 하겠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주장이 없었을지라도 얼마든지 예수님을 그리워하고 존경하고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은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정말 변증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쉽게 공격할만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주장을 제자들이 한 이유는 정말로 예수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 이외에는 교회가 그런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메시지를 가장 중요한 믿음의 고백으로 했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프리마 크레도. 가장 우선적인 신앙고백이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저 여러 교리 중의 하나가 아닌, 우선적인 교리.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돌아가신지 오십일 밖에 되지 않았는데 이런 놀라운 변화를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심리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또 어떤 방법으로도. 이러한 변화를 가능하게 한 것은 예수님이 정말로 부활하시고 예수님이 성령을 부어주시고 그리하여 어떠한 시련을 무릅쓰고도 만민에게 전할 만한 기쁜 소식이라는 확신이 없이는 결코 이런 일이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진리를 실존적으로 우리 삶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과거에 전화 응답기라는 게 있었지요. 그때가 좋았습니다. 그때는 전화를 받기 싫으면 응답기를 켜놓기만 하면 됩니다. ‘지금은 외출중입니다. 용건을 남겨 주세요. 삐~’ 그러면 끝입니다. 요즘에는 응답기 있는 사람이 없어요. 왜냐하면 저마다 핸드폰을 들고 다니기 때문에. 화장실에도 들고 가고 잘 때도 옆에 놓고. 그래서 전화를 안 받을 수가 없습니다. 전화를 안 받는다는 말은 일부러 안 받는다는 말이에요. 게다가 전화 건 사람의 이름이 뜨기 때문에 너 나인줄 알고 일부러 안 받았지! 이렇게 돼 버리는 것입니다. 

옛날이 좋았어요. 살다보면 외로움이 전화를 겁니다. 또 두려움이 문을 두드립니다. 시험이 놀자고 찾아옵니다. 우리가 한가한 줄로 생각하기 때문에. available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찾아오는 거예요. 연락을 하는 거예요. 그럴 때 우리는 전화응답기처럼 대답해야 됩니다. ‘제가 지금 바쁩니다. I''m busy at the moment. 지금 외출중입니다. 지금 바쁩니다. 나중에 오시지요. 용건을 남겨놓고 가시지요. 제가 지금 문을 열 수가 없습니다. 제가 지금 전화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계속해서 찾아오고 계속해서 문을 두드립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오순절에 그야말로 축 늘어져서 우울해하고 침울해 할 줄로 알았는데 그들을 찾아가보니까 그들처럼 바쁜 사람들이 없었어요. 이제 그들의 삶은 과거 지향적이 아닌 현재진행형이에요. 얼마나 바쁜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얼마나 중요한 의무를 갖고 있는지 이들은 이날 이후로 결코 과거를 돌아보지 않았고 순교할 때까지 늘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어요. 그들은 결코 신세타령을 한다거나 옛날이 좋았다거나 이런 여유가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통해서 행하시는 일들이 하도 차고 넘치기 때문에 그것이 그들의 삶이요 신앙이 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과거를 그리워한다거나 슬픔에 잠겨 있다거나 자기를 가엽게 생각한다거나 이런 시간이 없는 사람이에요. 행복이라는 것은 우리가 목적을 향해 바쁘게 뛰어가는 도중에 얻는 부산물입니다. 우리가 목적을 향해 바쁘게 뛰어가다가 보면 행복이라는 것을 부산물로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에요. 그렇기 때문에 우울함이든 슬픔이든 고독함이든 시험이든 비켜라! 비켜! 비켜줄래?! 내가 바쁘거든!!

어제 볼트 선수가 200미터 우승을 한 후에 보니까 일단 키가 엄청나게 크고요, 카메라맨 수십 명이 사진을 찍기 위해서 주위에 모여들었는데 볼트 선수가 일부러 왔다 갔다 하니까 벌떼들처럼 카메라맨들이 따라다녀요. 여러분 세상에는 그렇게 우리에게 달라붙는 것들이 많아요. 괴로움, 자기연민, 슬픔, 우울함.

그럴 때 우리가 ‘비켜줄래? I''m busy! 난 지금 할 일이 많고 나는 주님과 약속이 있다. 나는 나의 사명과 선약이 있기 때문에 너와 지금 만날 수 없다!'' 이런 식으로 그리스도인은 젊은 사람이든 나이든 사람이든 우리가 천성에 갈 때까지는 주님이 우리의 삶을 통해서 하시는 일들이 끊이지를 않습니다. 우리가 그런 식으로 가다보면 질병도 우리를 못 쫓아오고 환란도 우리를 못 쫓아옵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과 우리의 성장과 교회의 성장에 쉴 새 없는 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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