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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이 살아 있습니까? (약 2: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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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살아 있습니까? (약 2:14-26)
  
이 땅에 처음 기독교 신앙이 소개되었을 때 이 신앙은 이 땅의 희망이었고 등불이었습니다. 교회에 나오지 않는 분들도 신앙인과 교회를 존경했습니다. 교회를 통해 이 땅의 민초들은 민주적인 회의와 정치를 처음으로 배워 민주정치를 실험하게 되었습니다. 교회를 통해 일제의 식민지 억압에서의 해방을 꿈꿀 수 있었습니다.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에 참여한 33인중 절반인 16명이 교회 지도자들이었고 전국 교회들은 만세 운동의 거점들이었습니다. 

당시 기독교인은 전체인구의 2-3에 불과했지만 교회는 민족의 미래였습니다. 교회를 통해서 서구의 발전된 교육과 의료, 음악과 체육, 문화가 소개되었습니다. 교회를 통해서 해방된 나라의 리더십이 제공되었습니다. 초기 제헌국회는 기도로 시작되었습니다. 6,25전쟁 시에도 교회는 민족의 유일한 피난처요 위로이었습니다. 전쟁을 끝낸 후, 교회는 민족 재건의 보루였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김용기 장로님이 운영하던 기독교 복민 운동의 공동체 ‘가나안 농군학교’를 방문하고 거기서 얻은 감동으로 새마을 운동의 횃불을 올리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교회의 폭발적인 부흥과 함께 우리는 선진국의 문턱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 기독교 인구가 20%에 도달한 오늘 이상하게도 교회는 이 땅의 조롱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염려하는 대신 세상이 교회를 염려하는 지경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를 폄하하는 인터넷 용어로 개독교가 등장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거기에는 많은 다양한 요인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가장 결정적인 요인으로 교회내 출입하는 사람들의 숫자는 많아졌지만 진지한 그리스도인들의 숫자는 오히려 줄어든 까닭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소위 ‘명목상의 교인들’(Nominal Christian)이 너무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계3:1에 보면 사데 교회 교인들을 향해 주님은“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죽어있는 교인들을 가르쳐 오늘 본문에서 야고보는 산 믿음이 아닌 죽은 믿음의 소유자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도대체 우리가 가져야 할 살아있는 믿음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첫째, 바른 교리 이상의 믿음이어야 합니다.

바른 교리를 다른 말로 정통(orthodox)이라고 말합니다. 바른 신앙을 위해서는 바른 교리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바른 성경지식에 근거한 바른 교리를 알고 믿게 된 것이 바른 신앙생활을 보증하지는 못합니다. 

오늘 야고보는 바른 교리를 알고 믿으면서도 바른 삶을 살지 못하는 믿음이라면 그런 믿음은 귀신도 갖고 있다고 말합니다. 19절입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 이신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무슨 뜻인가요? 악한 영인 귀신들이 실재한다면(성경은 실재한다고 가르침)그 귀신들은 하나님이 한분 존재 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요? 믿고 있을까요? 예, 알고 믿습니다. 

자 다른 질문입니다. 귀신들은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시고 우리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을 알고 있을까요? 믿고 있을까요? 예, 알고 믿습니다. 그 예수님은 거룩한 신성의 능력으로 자신들 귀신들을 멸할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믿을까요? 예, 오늘 본문에 “믿고 떠느니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귀신은 하나님에 대한 모든 것을 정확하게 알고 믿고 있습니다. 귀신들이 귀신같이 알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귀신들은 정통 신학자들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귀신들은 하나님을 경배하지도 하나님께 순종하지도 헌신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알고만 있을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알고만 있는 신앙, 안다는 차원에서의 믿음은 아직도 죽은 믿음일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 나오면서 일정한 시간이 경과되면 기독교 신앙에 대한 지식이 쌓여 갑니다. 이 지식은 중요한 것입니다. 성경 지식, 교리 지식은 바른 신앙을 위해 필요 불가결한 것입니다. 나는 제발 여러분들이 예배만 나오고 말씀 공부를 등한히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내가 성경 공부반을 이수하고 이제 제법 신앙의 지식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앎을 행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알고는 있지만 행하지 못하는 신앙, 그 신앙은 죽은 것이며 그 신앙은 귀신들도 갖고 있는 신앙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내가 배우고 안 것을 그대로 행함으로 옮기기 시작할 때 그것이 내 믿음이 산 믿음인 것을 증명하는 순간인 것입니다. 살아있는 믿음은 바른 교리 이상의 믿음이어야 합니다.

둘째, 시험에 합격하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믿으면 믿음은 일단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살아있는 참된 믿음으로 자라가려면 그 믿음은 시험을 통과해야 합니다. 학생들이 시험을 통과하며 성숙해 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묻겠습니다. 혹시 과거 학생시절, 시험을 치르게 될 때면 시험을 기다리며 즐거워한 분이 계시나요? 그렇지 않다구요. 그러면 그런 고통스런 시험은 우리의 교육제도에서 영원히 없애야 한다고 믿는 분들 계시나요? 그럴수 없다구요. 

그러면 여러분은 두 가지를 저에게 동의하신 것입니다. 하나는 시험은 아무도 즐거워 할수 없다는 것, 그러나 다음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험은 꼭 필요하다는 것을 동의하신 것입니다. 시험이 왜 필요한가요? 시험을 통해 나의 나된 정체성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믿음의 시험을 그의 자녀들에게도 허용하십니다. 오늘 그 샘플로 야고보는 아브라함의 케이스를 제시합니다. 21-24절까지의 말씀이 그것입니다.

창세기를 읽어보면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처음 의롭다함을 받은 것은 창15:6에서입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자손을 약속하셨지만 그의 나이 100세가 가까웠는데도 기별이 없습니다. 이미 그는 기대를 포기하고 자기 종가운데 똑똑한 한 사람 엘리에셀을 자기 상속자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별이 빛나는 어느날 밤 그를 집 밖으로 나오게 하시고 하늘을 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밤하늘의 별을 세어보라고 하십니다. 너무 많아 셀 수 없다고 하자, 네 자손이 이와 같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때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아브람은 받아드리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을 받아드리고 믿는 믿음을 귀하게 보시고 그를 의롭다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아직 그의 믿음은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시험이었습니다. 그의 믿음이 살았나 죽었나를 시험하는 순간이 찾아 온 것입니다. 

창22:1에 보면 “그 일후에 하나님이 아브람을 시험하시려고~~” 찾아오셔서 100세가 되어 불가능한 가운데 얻은 기적같은 아들 이삭을 내게 바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시험에 순종함으로 마침내 아브람은 자기 믿음의 진정성을 증명한 것입니다.

약2:21의 말씀이 그것입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때에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것이 아니냐” 이것은 창22장의 사건이지만 이 헌신의 순종으로 창15장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을 이번에는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으로 증명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의 이 사건에 대한 결론이 무엇입니까? 22-23절입니다.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23)에에 성경이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느니라” 그러므로 여기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다는 말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것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이 믿음을 증명하는 결과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시험 속에서 우리는 시험이 주는 고통에 집중하기보다 이 시험에서 우리의 믿음이 합격되기를 고민하는 산 믿음의 소유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살아있는 믿음은 시험에 합격하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셋째, 위기를 극복하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야고보는 본문에서 아브람에 이어 살아있는 믿음을 보여준 또 하나의 인물 사례를 제시합니다. 기생 라합의 케이스입니다. 아브람이 남자였다면 라합은 여자입니다. 아브람이 유대인이었다면 라합은 이방인입니다. 아브람이 경건한 삶을 살던 사람이라면 라합은 인생의 바닥을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둘은 똑 같이 산 믿음의 소유자가 될수 있었습니다. 

본문 25절을 읽겠습니다. “또 이와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것이 아니냐” 야고보서만 읽으면 그녀의 의롭다함은 전적으로 행함에 근거한 것으로만 보여집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히11:31과 비교해 읽어보십시오.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여기서 믿음이 그녀를 구원한 것으로 기록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더 자상하게 읽어보면 히브리서와 야고보서의 두 사건사이에는 시간적인 간격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라합이 정탐꾼이 와서 그녀의 집문을 두드릴 때 소극적으로 수동적으로 영접한 사건을 보여 줍니다. 수2:10에 보면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행한 일을 들었음이라”는 그녀의 고백을 기록합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행하심의 말씀을 듣고 믿었던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말씀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아직 그녀의 믿음은 위기를 부딪치지 않고 있었습니다. 

야고보서는 수색대가 라합의 집에 이르러 유대인 정탐꾼을 찾는 위기의 순간의 도래를 알립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 이런 위기가 옵니다. 이때 목숨을 걸고 라합은 정탐꾼을 탈출시키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행위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사자로 보내심을 받은 정탐꾼을 영접함으로 그녀는 최초의 믿음을 보여 주었고 이로서 의롭다함을 받았지만, 이제 이런 이 여인의 믿음은 정찰대가 들이닥쳐 정탐꾼을 찾는 위기의 순간에 모험적인 행동으로 위기를 극복하게 한 것입니다. 이때 그녀의 믿음은 행함으로 그 믿음의 진정성을 드러낸 것입니다. 당신은 위기의 순간에 주저앉는 사람이십니까? 아니면 이 위기의 순간에 주를 담대하게 의지하는 행위로 당신의 믿음을 증명하는 사람이십니까? 

26절은 오늘 본문의 결론입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 이니라” 당신의 믿음-살았습니까? 죽었습니까? (이동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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