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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엇이 진정한 승리입니까? (삼상 2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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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진정한 승리입니까? (삼상 24:1-7)


김부남 사건을 기억합니까? 아홉 살 때 자기를 성폭행한 사람을 30년이 지나서 살해한 사건입니다. 자기가 겁탈 당했다는 수치와 상처로 수많은 세월을 그 고통의 더미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그 30년 동안 첫 번째 결혼에 실패했고 두 번째 결혼생활도 원만치 못했습니다. 자기를 이기지 못해 정신과 치료를 받고 사는 불행한 삶의 연속이었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파멸로 몰아 놓은 그를 평생 잊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를 죽이는 자리까지 이른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도 혹시 마음에 상처나 응어리들이 없으십니까? 사람들에게는 거의 누구에게나 다 자신에게 아픔과 상처와 억울함을 준 대상들이 있습니다. 조금 심하게 이야기하면 원수 같은 사람들이 다 있습니다. 자신을 억울 하게하고 상처를 준 사람들에게 한번 시원하게 응징하고 복수하고 싶은데 체면 때문에, 기회가 없어서, 기회가 있다고 하여도 힘이 없어서 그렇게 하지 못하고 사는 답답함이 우리들에게는 대개 있습니다. 

복수하고 싶은데, 근사하게 원수를 갚고 싶은데, 기회가 없고, 힘이 없어서 그렇게 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만일 근사하게 복수할 기회와 힘이 있는 대도 불구하고 그것을 스스로 억제하고 복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답답해하거나 속상해 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정말 훌륭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는 정말 근사한 사람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다윗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다윗이 아직 어린 소년이었을 때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처 들어 왔습니다. 당시 블레셋의 장군이 그 유명한 골리앗 장군이었습니다. 아무도 그를 대적하여 나서지 못하고 숨어 있을 때 소년 다윗이 물맷돌을 들고 나아가 골리앗을 죽입니다. 그때 다윗이 골리앗에게 한 말은 참으로 유명한 말입니다. “너는 칼과 단창을 가지고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주 여호와의 이름을 가지고 네게 나간다.” 그와 같은 근사한 승리로 말미암아 다윗의 인기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높아집니다. 공공연하게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는 말이 노래처럼 불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사울 왕이 시기하여 나라에 큰 공을 세운 다윗을 죽이려 합니다. 다윗은 사울 왕을 피하여 온 사방을 헤매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얼마나 분하고 억울하고 화가 나는 일이겠습니까? 생명을 걸고 나라에 큰 공을 세운 다윗에게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큰 상을 받아도 시원치 않는 마당에 이처럼 왕에게 쫓겨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되었으니 왜 분이 없고 화가 없었겠습니까? 

우리가 함께 대하는 본문은 다윗이 엔게디라고 하는 황무지 곧 사막에 있을 때였습니다. 다윗의 일행 600여명이 그 사막에 있는 한 굴에 있었습니다. 사울이 거기까지 자기의 군사 3천 명을 이끌고 다윗을 잡겠다고 쫓아 왔습니다. 그런데 3절을 보시면 “길가 양의 우리에 이른즉 굴이 있는지라 사울이 그 발을 가리우러 들어가니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 굴 깊은 곳에 있더니” 사울이 어디로 들어갔습니까? 굴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이 있습니다. 여기 보면 ‘발을 가리우러 들어갔다’고 되어 있는데, 개역개정판 성경에는 ‘뒤를 보러 들어갔다’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뒤를 보러 갔다’는 말은 우리말로 번역하면 ‘대변을 보러 갔다’는 뜻입니다. 사울이 음식을 잘못 먹어 배탈이 났는지, 아니면 다윗을 체포하기 위해 과도하게 신경을 써서 신경성 복통이 일어났는지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사울은 매우 급하게 볼 일을 해결해야 했습니다. 

사울에게 있어 다윗을 추격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지만, 볼 일 보는 것보다는 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3,000명이나 되는 부하들을 다 제쳐두고 혼자서 굴로 뛰어 들어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알고 사울의 행동을 보면 사실 그의 행동은 이상하지 않습니다. 오죽 급했으면 동굴 속으로 뛰어 들어갔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 동굴 안에 사울이 그토록 죽이려고 했던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숨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너무 급한 나머지 동굴 속으로 뛰어든 사울은 동굴 안이 깜깜해서 그 안을 자세히 볼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환한 곳에 있다가 깜깜한 극장 같은 곳에 들어가면 처음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바로 사울의 경우가 그랬습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동굴 안에 들어가자마자 바지춤을 내리고 막 볼 일을 보고 있는 사울을 동굴 안에 있는 다윗 일행이 보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한 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 장면을 상상하다가 얼마나 웃음이 나왔는지 모릅니다. 정말 황당했을 것입니다. 사울을 피해 동굴 안에서 숨죽이고 있는데, 갑자기 자기를 그렇게도 죽이려고 했던 사울이 들어와서 바지춤을 내리고 볼 일을 보고 있는 것을 본 다윗은 정말 황당한 기분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의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부하들은 다윗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기회가 왔습니다. 하나님이 기회를 주셨습니다. 사울왕을 단 칼에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왔습니다.” 그들은 다윗을 설득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사울을 죽이고 그에게 보복할 좋은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신하들은 다윗에게 이것은 하나님이 불의한 사울에게 복수하라고 주신 기회라고 말합니다. 4절에 “다윗의 사람들이 가로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붙이리니 네 소견에 선한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 이니이다.” 다윗의 신하들의 생각과 말은 조금도 틀린 것이 없습니다. 자기 앞에 나타난 그가 어떤 자입니까? 내 삶을, 내 인생을 송두리째 파멸시킨 자가 지금 내 앞에 있는데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마 죽이고도 남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다윗은 달랐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기름 부어 왕으로 삼으신 이를 내가 함부로 손대는 것이 옳지 않다는 유명한 말을 합니다. 6-7절에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다윗이 이 말로 자기 사람들을 금하여 사울을 해하지 못하게 하니라 사울이 일어나 굴에서 나가 자기 길을 가니라” 이건 정말 도통한 사람의 말입니다. 조그만 일에도 흥분하여 멱살잡고 싸우려고 드는 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수준의 삶입니다. 다윗이 훗날 아들 압살롬에게 반역을 당하여 피난을 내려 갈 때 사울의 친척인 시므이라는 사람이 다윗을 길가에서 저주합니다.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하며 저주합니다. 

이때 듣다 듣다 못한 다윗의 신하인 아비새가 시므이를 당장 처 죽이려고 할 때 다윗의 말이 너무 근사하고 훌륭합니다. 삼하 16:10절에 “왕이 가로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아비새를 막습니다. 사울에게도 복수하지 않고, 시므이에게도 복수하지 않는 이유에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때문입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손대려고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 때문이었습니다. 자기를 저주하는 시므이에게도 손대지 않았던 이유는 하나님 때문이었습니다.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나 우리의 고민이 무엇입니까? 나는 용서했는데 상대방이 그 용서의 가치를, 그 용서의 결단을 헌신짝처럼 여길 때 우리에게 분노가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까? 칸느영화제에서 최고 작품상을 받은 밀양이란 영화를 보신 분이 게실 것입니다. 죽은 남편의 고향인 밀양에 자식과 함께 와서 살다가 아들이 유괴범에게 납치되어 싸늘한 시신으로 엄마의 눈앞에 나타나지 않습니까? 이 때 신애라는 이 여인은 그 상처 때문에 얼마나 큰 고통을 받는지 모릅니다. 그러던 중에 전도를 받고 비로서 그는 신앙생활에 전념하게 됩니다. 

신애는 예수님을 믿고 난 다음에 위로를 받고 변화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아들을 죽인 유괴범을 만나 용서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자리까지 서게 됩니다. 드디어 신애가 큰마음을 먹고 유괴범을 용서해주러 교도소로 찾아갑니다. 그리고 유괴범을 만납니다. 수염도 단정하게 깎았습니다. 그 모습을 본 신애가 좀 의아하게 여기면서 "예수님 믿고 난 다음에 당신을 용서하러 왔습니다."라고 말하자, 유괴범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 그러십니까? 사실은 나도 교도소에서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내 죄를 다 용서해주셨습니다." 그러고는 신애 앞에서 화통하게 웃습니다. 이에 덧붙여 유괴범은 "내 마음이 이렇게 평안할 줄 몰랐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런 평안을 진작 누렸어야 하는데, 이런 기쁨이 있다는 것을 과거에 몰랐다는게 억울하다"라는 뜻으로 말한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신애의 마음이 뒤집히기 시작합니다. "세상에 이런 놈이 다 있나! 내 마음에는 아직도 고통이 남아있고, 처절한 피눈물이 남아 있는데! 누가 용서해주었는가? 내가 용서를 안 해주었는데 네가 먼저 용서 받았다는 게 말이 되느냐? 남에게 피해를 입힌 사람이 이렇게 뻔뻔스러운 모습으로 나와서야 되겠느냐?" 거기서부터 신애는 미치기 시작하고 방황하기 시작합니다. 

이 영화는 우리에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꼭 이 유괴범 같다는 것을 시사해줍니다. 우리 대부분은 살아오면서 자신의 잘못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에게 아픔과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죄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나와서는 예수님이 자기를 다 용서해줬다고 합니다. 생글생글 웃고 다니며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예수 믿고 나니 내 마음이 이렇게 평안해질 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유괴범을 보십시오. 아이를 죽일 때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사람이 이제는 회개했다고 합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 평안히 잠을 이룹니다. 살찐 모습이 보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리스도인들이다 이 유괴범과 같은 모습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모습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에게 분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이런 소리를 듣습니까? 죄악 때문에 아파하는 깊은 통곡을 생략해버리니까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적어도 유괴범이라면 어떤 모습을 보여야 하는가? 자기가 예수님으로부터 용서받았다고 할지라도, 자기가 범한 죄악이 얼마나 큰지를 느껴야 하고 그 때문에 고통당한 한 어머니의 갈가리 찢긴 가슴을 상상하면서 자기도 그 아픔에 동참하는 진실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정말 그 상처를 준 사람을 향해 함께 괴로워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십자가의 은혜 앞에 함께 겸손히 세워져야 하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에도 다윗은 용서했지만, 사울은 용서하지 않습니다. 이게 우리의 한계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무엇이라 말씀을 합니까? 로마서 12장에 보면 아무리 원수가 있다고 하여도 원수 갚은 일을 직접 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원수 갚은 일을 하나님께 맡기라고 말씀합니다. 롬 12:19절에 보면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뿐만 아니라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말씀하십니다. (롬 12:17) 그리고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그가 목말라 하거든 마실 것을 주라’고 하십니다.(롬 12:20) 그리고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말씀하십니다.(롬 12:21) 쉽게 말해서 하나님을 믿고 복수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싸우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말은 쉽지만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말씀이지 모릅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정말 믿었습니다. 사울이 굴에 들어 왔을 때 가만히 칼로 그의 목을 베지 않고 그의 옷자락을 베었습니다. 나중에 사울에게 자신의 진심을 알려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그 옷을 벤 것을 가지고 다윗이 마음에 찔려 했다고 하였습니다. 머리 털 하나는 물론이고 옷자락도 손대는 것을 부담스러워 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정말 용서가 무엇인지, 그리고 진정한 승리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로 원수 갚는 일을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원수 갚는 일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12절을 보면, 다윗은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사울의 악행에 대해 친히 보복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울에게 직접 원수를 갚지 않고, 원수 갚는 일을 하나님께 맡겼던 것입니다. 

그런데 한 번만 맡긴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오늘 본문 다음, 다음 장인 26장에 보면 십(Ziph) 황무지에서 일어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충성스런 부하 아비새와 함께 밤에 이스라엘 군사들이 진을 치고 있는 곳으로 접근해서 보니 사울이 보였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추격하느라 피곤했던지, 자기 창을 머리맡에 놓고 자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윗의 위대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다윗이라면 ‘지난번에 살려주었으면 이제는 좀 변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런데 지난번에 분명히 겉옷자락만 베고 살려주었더니 또다시 나를 접으러 와? 이번에는 용서하지 않겠다.’라고 생각하고, 당장 사울을 향해 창을 던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아비새가 잠들어있는 사울을 창으로 찔러 단번에 요절내자고 했지만, 다윗은 그를 막았습니다. 그리고 가만히 사울 머리 곁에 놓여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이처럼 다윗은 자기 원수를 하나님께 맡긴 사람입니다. 한 번만 맡긴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둘째로 하나님께 맡겼으면 잠잠히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시간표를 기다렸습니다. 그는 무려 13년 이상 사울을 피해 다니는 가운데서도 계속해서 인내했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안내했습니다. 다윗은 악한 사람들 때문에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믿음의 사람‘이라는 별명을 붙인다면, 다윗에게는 ’인내의 사람‘이라는 별명을 붙일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사울을 죽이고 왕이 될 수도 있었지만, 그는 하나님이 일하실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이것은 다윗이 자신의 인생을 포기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해 다니는 과정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성군’이라는 별명을 받을 만큼 훌륭한 인격과 탁월한 실력을 갖춘 왕으로 준비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준비가 다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블레셋 군사들에게 쫓기다가 비참한 죽음을 당한 사울에 이어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아주셨습니다. 다윗은 잠잠히 하나님의 때를 기다린 끝에 이스라엘 왕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한 다윗은 악한 자들 때문에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도전합니다. 시37:1,7절에 보면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여러분, 하나님을 신뢰하며 끝까지 안내하시기 바랍니다. 원수 갚는 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다윗처럼 잠잠히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 아침! 묻습니다. 여러분은 용서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주님이 십자가에서 하는 용서는 당신의 희생에 터 위에 이루어지는 거룩한 열매입니다. 값싼 용서가 아닙니다. 당신의 몸을 찢고 피를 터뜨려서 얻어진 그 희생의 열매입니다.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앞에 선 사람들이 바로 이 아침! 우리들입니다. 이젠 용서하며 살아야 합니다. 진정한 용서는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죄인을 의인되게 합니다. 원수를 친구로 만듭니다. 내가 남을 용서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죄악을 용서해 주십니다. 진정한 승리는 용서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세상에 싫은 사람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미운 사람 없는 사람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복수하고 싶은 원수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지금도 여러분에게 상처를 주고, 아픔을 주고, 억울함을 주는 사람이 있지 않으십니까? 기회만 주어진다면, 다윗이 굴속에서 사울을 만난 것과 기회만 주어진다면, 그와 같은 기회를 하나님이 허락해 주신 복수의 기회인 줄 알고 단 칼에 치고 싶은 사람이 여러분에게도 있지 않으십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이 그렇게 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다윗 같아지기를 원하십니다. 용서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용서뿐만 아니라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하십니다. 

심판은 하나님이 하시는데 그 심판은 공의로우셔서 절대로 사람을 억울하게 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을 믿으면 복수의 마음이 없어집니다. 상처를 붙잡고 살지 않고, 은혜를 붙잡고 살면, 십자가를 통하여 사람을 보면 원수가 없어지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이 보입니다. 그 수준에 이르면 정말 우린 근사한 사람입니다. 사울까지도 용서하는 다윗처럼 우리도 모든 사람을 용서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랑하며 사는 근사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원수까지도 용서하고 사랑하며 살 수 있는 근사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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