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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름 (느 10:2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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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느 10:28-39)            


들어가는 말

초기 한국교회는 목숨 걸고 지키는 것이 있었습니다. 
1901년, 한국 교회가 만든 신앙생활의 7대 기본 강령이란 것이 있습니다. 
신자라면 이것만은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첫째, 예배 출석을 철저히 할 것, 
둘째, 주일을 반드시 지킬 것, 
셋째, 부모에게 효도할 것, 
넷째, 일부일처제를 지킬 것, 
다섯째, 인가귀도 할 것, 
여섯째, 근면 성실할 것, 
일곱째, 금주 금연할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신앙과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당시 교회는 이것을 지키지 않으면 세례를 안 주고, 자꾸 어기면 교회 직분에서 파면까지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느헤미야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 성벽을 건축하고, 뜨거운 예배도 드리고, 깨어짐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해야 할 것이 하나 더 남아있습니다. 
그것은 거룩한 삶에의 결단입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지도자와 백성들에게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다는 결단이 필요했습니다. 
그 결단이 하나님 앞에 자기 이름을 쓰는 서명운동으로 나타났습니다.

느9장 38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이제 견고한 언약을 세워 기록하고 우리의 방백들과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이 다 인봉하나이다 하였느니라.”여기서 ‘견고한 언약을 세웠다’는 것은 결단했다는 말이고, ‘인봉했다’라는 것은 서명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느헤미야 10장에 서명한 명단이 나옵니다. 
1절에서 27절까지 총 84명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들 모두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입니다. 

이들을 종류별로 보면 1절부터 8절까지가 제사장이고, 9절부터 14절까지가 레위인, 그리고 14절에서 27절까지가 백성들의 두령들입니다. 
그중 가장 먼저 나온 이름이 총독 느헤미야입니다.
“그 인봉한 자는 하가랴의 아들 총독 느헤미야와.......”(느 10:1). 
최고 지도자가 가장 먼저 서명했습니다. 
다음이 시드기야, 다음이 2절, 스라야, 아사랴, 예레미야입니다. 

여러분, 지도자가 누구입니까? 
지도자란 많은 권리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많은 책임을 가진 사람입니다. 
프랑스어로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입니다. 
‘귀족(nobility)은 더 많은 의무(obligation)를 가진다.’ 말입니다. 
프랑스에는 ‘칼레의 시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프랑스 북부의 작은 도시 칼레(Calais).
그곳 시청 광장에는 칼레를 구한 지도자 6명을 기리는 오귀스트 로댕의 작품이 있습니다.
이야기는 영국과 프랑스 간 백년전쟁 막바지인 1347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영국군은 칼레시를 포위했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항복조건을 제시했습니다.
“시민 6명이 모자와 신발을 벗고 영국 왕에게 성문 열쇠를 바친 뒤 교수형을 당해야 한다.”
전의를 상실한 칼레 시민들은 6명을 어떻게 선발할지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때 그 도시의 부자, 시장, 귀족 등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자기 목숨을 내놓겠다고 나섰습니다.
이를 전해들은 영국 왕 에드워드 3세의 왕비가 간청해서 사형집행이 취소되었습니다.

해피엔딩이지요. 
이를 기념하여 로댕은 그들의 얼굴을 조각하여 칼레 시청 광장에 세운 것입니다.
목숨까지 기꺼이 내던지려 한 ‘칼레의 시민’ 정신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며칠 전 프랑스 갑부 16명은 재정적자에 휘청거리고 있는 정부에게 “우리에게 세금을 더 부과해 달라.”고 청원했습니다.
지도자는 더 많은 의무를 가집니다.

3.1운동 때의 이야기입니다. 
민족 대표 33인이 기미독립선언을 위해 종로 태화관에 모였습니다. 
선언서에 서명하는 순서에 대하여 격론이 벌어졌습니다. 
좀처럼 결론이 나지 않자 손병희 선생이 나서서 말했습니다. 
“나라의 독립을 이해 이름을 쓰는 순서가 왜 그리 중요합니까? 이름 쓰는 순서가 곧 죽는 순서요. 내가 먼저 쓰겠소.” 

그래서 손병희 선생의 이름이 가장 먼저 올라갔습니다. 
과연 이 이름 때문에 그들은 그 뒤 혹독한 고초를 당했습니다. 
33인 중 세 명을 제외하고 모두 붙잡혀 감옥에 갔습니다. 
상하이로 망명해 체포를 피한 김병조, 나중에 무죄 판결을 받은 길선주, 그리고 체포되어 구금 중에 사망한 양한묵을 제외하고는 30명의 민족 대표들은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는 이유로 엄청난 고난을 당했습니다. 
지도자는 가장 먼저 이름을 쓰는 자요, 이름 쓴 대로 죽는 자입니다. 
이름을 쓰기 싫으면 지도자가 되지 말아야하고, 지도자가 되었으면 이름을 써야 합니다.

그래서 도장을 찍는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특히 고대 근동에서는 인장이 약속의 확실성과 위엄의 표시로 문서를 보증하거나 출입을 확증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한 번 인장을 찍으면 모든 책임과 약속이 보증되었습니다. 
에스더서에서도 나오듯이 페르시아 법은 한 번 인을 치면 왕조차도 취소할 수 없을 만큼 절대적이었습니다. 
사람 앞에서도 그러한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하나님 앞에서 인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것만은 지키겠다고 굳게 약속하고 만일 약속대로 안 되면 책임을 지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서명한 내용은 무엇입니까?

1. 가정을 거룩하게 보존하겠습니다.

30절 “우리의 딸들을 이 땅 백성에게 주지 아니하고 우리의 아들들을 위하여 그들의 딸들을 데려오지 아니하며”
느헤미야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첫 번째로 이름을 건 것은 이방인과 결혼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인간 삶에서 가장 중요한 선택 중의 하나가 결혼입니다. 
결혼으로 사람의 운명이 바뀝니다. 
삼손이 이방 여인 때문에 불행하게 죽은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솔로몬같이 지혜로운 왕이 이방 여인과 결혼하자 곧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아합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실하던 왕도 이세벨과 결혼하자 정신을 잃고 바알 신을 섬겨 이스라엘을 온통 쑥대밭으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왜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방인과의 결혼이 문제가 되었습니까? 
신앙 때문입니다.
사람 자체는 가치중립적입니다.
미국사람은 괜찮고, 방글라데시 사람은 안 되고 그런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가 가지고 있는 신앙입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의 결혼을 위해 간절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자녀들이 아무나하고 결혼하도록 놔둬서는 안 됩니다. 
제아무리 믿음 좋은 사람도 결혼 잘못하면 믿음 팔아먹는 것은 식은 죽 먹기보다 더 쉽습니다. 

쉽게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결혼해서 전도하면 되지” 
그런데 그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제일 어려운 것이 가족의 영혼구원입니다.
여러분이 아셔야 합니다.
‘가정은 선교지가 아니고, 안식처’라는 사실을.
가정은 아내가 평생 남편 구원하려고 이루는 것이 아니고, 남편과 아내가 다른 영혼들을 구원하고 돌아와 쉼을 얻으려고 이루는 것입니다.
불신자와 결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결혼 전에 그를 예수 믿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단해야 합니다. 
젊은이는 ‘나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거룩한 가정을 이루겠다.’, 부모는 ‘나는 자녀를 잘 가르쳐 신앙의 가정을 이루게 하겠다.’ 
그래서 믿음의 명문가문을 이루는 교우들이 되길 축원합니다.

2. 안식일을 지키겠습니다.

다음은 31절입니다. 
“혹시 이 땅 백성이 안식일에 물품이나 온갖 곡물을 가져다가 팔려고 할지라도 우리가 안식일이나 성일에는 그들에게서 사지 않겠고........ ” 
두 번째로 느헤미야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름을 건 것은 주일성수였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순교하는 각오로 안식일을 지킵니다.
구약의 외경 중에 마카비서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 안식일 때문에 순교한 유대인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기원전 167년에 유대 나라에 시리아 사람들이 쳐들어왔습니다. 
시리아 사람들은 이방 종교와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유대에 쳐들어왔는데 마침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날 시리아 사람들은 많은 무기와 군대를 동원하여 예루살렘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시리아 사람들은 안식일에는 유대인들이 싸우지 않는 것을 이용하여 비겁하게 공격해 왔지만 유대인들은 “죽으면 죽으리라”는 마음으로 응전하지 않다가 그날에 죽은 사람만 1천 명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쉬운 일입니까? 
안식일이기 때문에 전쟁도 하지 않다가 1천 명 이상이 죽었으니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그런데 결국 전쟁은 누가 이겼는지 아십니까? 
이스라엘입니다. 

몇 년 동안의 치열한 싸움 끝에 최종 승리는 이스라엘이 취하였습니다.
안식일에 전쟁을 안 할 정도니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그 정도로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도 말합니다. 
“우리가 안식일을 지켰더니 안식일이 우리를 지켜주었다.”

예배를 영어로 ‘워십’(worship)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워스’(worth), '가치‘에서 나왔습니다. 
예배는 신자에게 최고의 가치입니다. 
그런데 예배를 안 드린다는 것은 누가 뭐래도 하나님을 최고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최고로 여긴다면 예배에 빠질 리가 없습니다.
목숨 걸고 예배해야 합니다. 
이름을 걸고 예배해야 합니다. 

정 바쁘면 7시의 1부 예배를 드리거나 오후 2시의 4부 예배라도 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부득이한 사정이 있어 주일예배에 빠져야 한다면 교역자들에게 사전에 말씀드리는 것이 좋습니다. 
예배 시간에 늦지 말아야 합니다. 
음악회에 가려면 적어도 30분 전에는 입장해야 합니다. 
그 후에 가면 입장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대학 입학시험이나 취직 시험 볼 때 면접을 봅니다. 
누구도 면접 시간에 늦지 않습니다. 
면접 시간에 늦으면 그 순간 탈락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면접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을 면접하는 태도가 사람을 면접하는 태도보다 못하면 안 되잖아요? 
하나님을 최고로 인정하여 예배에 이름을 거는 교우들이 되길 축원합니다. 

3. 십일조를 드리겠습니다. 

37절입니다.
“.......또 우리 산물의 십일조를 레위 사람에게 주리라 하였나니 이 레위 사람들은 우리의 모든 성읍에서 산물의 십일조를 받는 자임이며”느헤미야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름을 걸었던 마지막은 십일조를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것을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 했다’고 표현했습니다.
말3:8절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봉헌물이라”
여기에 보면, ‘도둑질’이란 단어가 세 번이나 반복해서 나옵니다.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십일조 헌금을 안 드렸다고 어떻게 도둑이라고 부를까 그건 좀 지나친 것이 아닌가?’
‘착한 사람 되려고 교회 왔더니 오자마자 도둑놈 소리 듣네? 나 참!’
저도 너무 했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제까지 저는 성경에서 ‘돈’에 관한 말씀이 나오면 무슨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것처럼 그 말씀을 의식적으로 외면했습니다. 
그래서 이제껏 목회를 하면서 ‘헌금’에 대한 설교를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기껏해야 ‘청지기 훈련’을 할 때 “물질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을 잘 관리해야 할 청지기일 뿐입니다.”라고 지나가듯이 몇 마디 했을 뿐입니다.
저 나름대로 ‘헌금을 드리는 것은 은혜를 받아야만 할 수 있는 일이다. 은혜만 받아 봐라. 저절로 드리게 되지....... 괜히 헌금에 관한 설교를 해봐야 성도들은 드리지도 못하면서 시험만 든다.”라는 지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해 권오서 감독님의 설교를 듣고 찔림을 받았습니다. 
이 분은 말씀하시길, “설교자가 헌금 설교를 하지 않는 것은 신사적인 것이 아니고 직무유기이다. 설교자가 헌금에 관한 설교를 하지 않는 것은 성도들에게 축복받는 길을 가르치지 않고, 자기 입장의 곤란함을 비켜 가려는 비겁하고 책임감 없는 태도이다.” 
그러면서 “십일조 헌금은 드리면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것이고, 드리지 못하면 도적질하는 것이다”고 잘라 말씀했습니다.
말라기 선지자도 이 도둑질 때문에 받아야 할 축복을 못 받고 저주를 받는다고 담대히 지적하는 것입니다.
말3:9절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십일조 헌금을 드린다는 것은 모든 물질생활을 하나님께 맡긴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내일’이란 단어를 알고 있지만 그 내일에 어떤 삶의 내용이 담길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일 갑자기 일어날 어떤 일을 대비하여 저축을 합니다.
우리는 내일 갑자기 닥치는 어떤 질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보험을 듭니다.
우리는 내일의 자녀 교육을 위하여 교육 보험도 듭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의 내일의 삶을 보장합니까?
그것이 있음으로 내 마음이 평안합니까?
그것을 준비해 놓았다고 큰소리 칠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지요!
하나님이 아니면 그 어떤 것도 우리의 궁극적인 도움이 못 됩니다.
십일조 헌금이란, “어차피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어제도 아무것도 아니었고, 오늘도 아무것도 아니고, 내일도 아무 것도 아닐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고, 보장이 되시고, 반석이 되시고, 산성이 되십니다.”라는 신앙고백입니다.

나가는 말

느헤미야 10장 1절부터 나오는 84명의 명단을 보십니까? 
여러분도 우리 교회의 헌신자 84명의 명단에 들기를 원합니까?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이런 결단이 필요합니다.
록펠러 어머니는 아들 록펠러에게 이렇게 유언으로 당부했습니다.

참고하십시오. 

“첫째, 하나님을 친아버지로 섬겨라. 
둘째, 목사님을 하나님 다음으로 섬겨라. 
셋째, 오른쪽 호주머니는 항상 십일조 주머니로 하라. 
넷째, 교회 안에서 아무도 원수를 만들지 말라. 
다섯째, 예배 시간에는 항상 앞자리에 앉아라. 
여섯째, 주일예배는 반드시 본 교회에서 드려라. 
일곱째, 아침에는 반드시 목표를 정하고 기도하라. 
여덟째, 아침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라. 
아홉째, 남을 도울 수 있을 때 힘껏 도와라. 
열째, 잠자리 들기 전에 반드시 하루를 반성하고 기도하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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